김인기 前 공군참모총장의 별세와 방공자동화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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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머털도사 작성일13-03-04 23:51 조회3,358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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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문기사를 보니 5공시절의 공군참모총장이던
김인기 장군이 별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공군방공자동화사업을 마치 김인기 참모총장의 공적인 양 약력을 소개하는 신문기사를 보니 참 화가 났습니다.
조선일보의 기사 전문을 인용합니다.
고인은 1985년 참모총장 재임 때 중앙방공통제소(MCRC)를 전력화해 우리 군의 자동화 방공작전 시대를 열었다. 이를 통해 각 지역별 관할구역에서 수행하던 수동 방공작전이 중앙집권적 자동화 방공체계로 진일보했다.
다음은 중앙일보 기사 전문을 인용합니다.
총장 재임 시절이던 85년 중앙방공통제소(MCRC)를, 86년엔 F-16 전투기를 최초 도입해 전력화했다. MCRC에는 각 지역별 방공작전 정보가 실시간 모인다. 자동화 방공체계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F-16 전투기는 현재 우리 공군의 주력기다. 이 공로로 보국훈장 천수장·국선장·통일장, 수교훈장 광화장, 프랑스 국가훈장 등을 받았다
방공자동화사업은 222사업으로 명명된 2억5천만 달러짜리 초대형 프로젝트였으나 그 것은 아무 가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지만원 대령은 전두환 대통령의 명에 의하여 율곡사업 10년을 평가하면서 방공자동화사업이 엄청난 돈 낭비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이기백 국방장관, 김인기 공군 참모총장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엄청난 질책을 받았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국방차관, 황관영 기획실장이 지만원 대령을 연구소에서 내보내려 했습니다. 황관영 기획실장은 연구소장으로 부임된 이후 2년만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벌 받았죠.)
1979년부터 1985년 7월 1일까지 공군은 방공자동화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사업만 완료되면 대한민국 상공의 새 한 마리도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으로 호언장담하며 1985년 7월 1일부터 가동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으로부터 항공기가 날아왔으나 전혀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은 매우 신경질을 내었습니다. 당시 국방비의 8%에 해당되는 큰 돈이었기에 대통령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죠.
지만원 대령은 무려 8개월의 연구를 통하여 그 장비의 소프트웨어 로직을 분석했는데, 결론은 “그 로직을 가지고 공중 표적을 분석하면 그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였습니다. 유지비와 정비비가 과다하며 인력은 이중으로 늘어났으나 이를 믿으면 공중전은 백전백패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지만원 대령은 본 방공자동화사업 담당한 오퍼상을 컨텍하여 휴즈사 책임자 3명과 면담을 했습니다. 지만원 대령은 “본 장비에 하자가 있고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라고 하자 “휴즈사는 세계 최고이니 우리가 못 하는 일은 어느 회사도 할 수 없다.”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지만원 대령은 통계학의 에러의 기준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으나, 휴즈사는 이에 대하여 답변을 못 했습니다. 적반하장 격으로 “A/S 1년이 지났습니다.”라며 책임회피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지만원 대령은 “나는 미군해군대학원 석박사 과정 친구들에게 당신이 엉터리 시스템을 설치했다는 것을 편지로 알리겠다.”라고 강력히 대응했습니다.
이에 휴즈사 일행은 “시정하겠습니다. 당신(지만원 대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라면서 승복을 했습니다.
역시 카리스마 지만원
하지만 얼마 뒤 휴즈사로부터 받은 편지는 지만원 대령을 더욱 경악하게 했습니다.
“저희 휴즈사는 당신을 만난 후 공군을 만났는데, 공군에서는 이상 없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문의와 요구는 공군을 통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이를 통하여 지만원 대령은 공군을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즉 공군은 면책을 위하여 애국을 던져버렸으니 격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합참 작전본부에서 조사팀을 개설하고 공개토론을 했습니다. 토의가 진전될수록 공군은 지만원 대령의 논리에 밀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사팀의 장군들이 공군 편을 들었습니다. 이 때 지만원 대령은 공군이 로비를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산 공군작전사령부, 대구 팔공산 레이더기지에서 테스트가 있었으나, 정작 반론을 제시한 당사자인 지만원 대령을 테스트 장소에 출입금지 시켰습니다.
(과연 그게 공정한 게임인가요?)
나중에 지만원 대령이 알아보니 헬리콥터가 비행을 했으나 헬리콥터를 잡지 못하고 반대방향에 비행체가 있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공군은 이를 숨겼습니다. 주한미군이 있으면 전쟁으 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보 불감증과 책임 회피 때문이었죠.
미국의 4C라는 회사가 50억원에 해당하는 장비를 납품했으나 불량품이었습니다. 공군은 이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어야 했지만 (책임 회피할 목적으로)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지만원 대령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공군참모총장 김인기 대장을 필두로 많은 공군 장교들이 로비와 압력행사에 나셨습니다. 첨에는 하나회 출신의 국방차관과, 합참 작전차장이 바로잡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어느순간 갑자기 공군편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더 웃긴 것은 기무사에서 ‘지만원 대령은 아군의 기밀을 누설했다’라면서 시말서를 쓰라고 위헙을 했습니다.
그리고 공군과 합참은 “방공자동화사업 이상 무”라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허위 보고를 했으며, 대한민국 국군의 보배요 미래의 국방부 장관 감인 지만원 대령은 예편을 했습니다.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차관은 너무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즉 국가의 안보 보다는 사리사욕을 중시하는 인간들이네요.
사기업이라면 불량품을 납품받고 그 것을 숨길까요? 사장에게 보고하여 손해배상 청구를 할 것입니다.
오늘 신문을 보면서 김인기 참모총장 별세, 공군방공자동화사업에 관련된 신문기사가 나와서 화가 나서 몇 자 적었습니다.
F-16의 도입에 대하여는 김인기 참모총장이 어떻게 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공군방공자동화 사업은 김인기 참모총장의 공이 아닌 과인데 말이죠.
대통령에게 허위보고하고 훈장까지.
공군방공자동화 사업으로 그렇게 혈세를 날려먹은 장군을 무슨 공군장으로 영결식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지만원 대령께서 국방부장관을 하셨다면 대한민국은 작지만 강한군대, 효율적으로 예산을 사용하는 군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잘못된 군사장비를 도입하여 국민의 혈세를 날리는 장군은 훈장을 타고
본 잘못을 지적한 대령을 강제예편시키는군요
그런 것을 보고 군의 사기가 어찌 되겠습니까?
댓글목록
송석참숱님의 댓글
송석참숱 작성일
인생 한세상 어떤인생 유향백년 또 어떤인생 유취백년!!
더럽게 사는인생 대장이면 뭐하누..
명부에 계신 박정희 대통령 눈에 띠기만 해봐라
쪼인트 깨이고 죽었다 복창이 계속될거....
머털도사님 수고하셨습니다.
碧波郞님의 댓글
碧波郞 작성일
여기다 쓰지 마시고 한 번 조선일보에 반론메일 한 번 보내보세요.
이런 건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전화를 걸어 항의하시던가 메일로 보내 따져야 합니다.
머털도사님의 댓글
머털도사 작성일
참고로 본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유용원 기자 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하는 군사전문기자요
지만원님의 댓글
지만원 작성일
나는 내가 세월이라는 캔버스에 그린 기나 긴 파노라마의 그림을 사랑한다. 예술적 재능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나의 영혼으로 그린 그림이기에 소중한 것이고, 소중하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느냐?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코스모플리탄으로서의 자유인으로, NOBODY로서의 자유인으로, 이 세상을 아무런 한도 원도 없이 유쾌하게 살고 갔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미국 Monterrey에 가서 수학을 사랑했던 나의 교수들이자 친구였던 이 세상에서 가장 순진무구했던 그 얼굴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할 것이다. 수학을 사랑했던 그들과 나는 한 식구들이었다. 그들도 수학의 정리를 만들어 냈고, 나도 그들의 지도를 받아 수학공식과 정리들을 만들었다. 서로 격려할 일은 있어도 싸울 일은 없었다. 모두가 자기의 의자가 따로 있었고, 그 의자들에는 고유번호가 있었다. 수학은 그들의 고향이고 나의 고향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나의 친구였다. 그들을 만난지 20년이 흘렀다. 앞으로 100년이 흘러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국적이 다른 그들 수학자들일 것이다.
나는 1974년 6월에 생전 처음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방학 없이 1년 반 만에 마치는 경영학 석사 과정에 입학한 것이다. 미군의 군사원조 중에서 끊이지 않고 가장 오래 지속됐던 것은 교육원조였다. 나는 한국정부의 배려에 의해 유학을 한 게 아니라 미국 정부의 배려에 의해 유학을 간 것이다. 미 해군 대학원은 미 육해.공군 장교를 위한 학교였지만, 학교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연합군 육.해.공군 장교들도 일부 수용했다. 그 대신 교육비는 이웃 스탠포드나 버클리와 같은 명문 대학에 비해 약 3배 정도 비쌌다. 심지어는 교수와 1대 1로 공부하는 제도도 있었다. 나도 1:1식의 교육을 여러 차례 받은 적이 있다. 민간 대학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귀족학교였다.
내가 입학했을 때 한국군의 육.해.공군 장교는 11명이었고, 그 중 육군이 6명이었다. 높게는 8년, 낮게는 2년 선배들 틈에 끼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4점 만점에 3.65 학점 이상을 받으면 명예롭게 학교 게시판에 부착되는 ‘Dean's List’에 올랐다. 내 이름도 거의 빠짐없이 올랐다. 이에 대해 선배들은 내가 한국 장교단의 명예를 올려주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못 마땅해했다. “경영학 과정은 쉬운 과정이야. 우리 시스템 공학과정에서 낙제된 장교들이 가는 데가 바로 경영학과야”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컴퓨터과학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기상학과, 원자물리학과, 수학과, 시스템공학과, 경영학과들이 있었다. 이들 과에 등록된 학생들은 다른 과에서 제공하는 과목들을 선택하여 학문의 인프라를 넓게 쌓았다. 나는 화가 나서 시스템공학과에서 제공하는 stochastic modeling이라는 확률수학 과목을 택하여 선배들과 경쟁했다. 선배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심산이었다.
박사과정, 같은 학교에서 선배들은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후배가 박사과정을 공부하는데 대해 속상해 하는 2년 선배가 있었다. “지소령은 한국 장교들은 안중에도 없고 교수들만 상대한다.”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냐.” “박사 자격시험에서 떨어질 거다” 등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말들을 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뛰면서도 예수를 생각했다. 예수같이 훌륭한 성인도 남에게 조롱 받고, 모함 받고, 가시면류관까지 썼는데 내가 얼마나 잘났다고 그런 비아냥거림에 속상해 하는가.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후배가 박사학위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그는 내게 1년 이상 엄청난 괴로움을 주었다.
나는 40대의 대부분을 국책 연구소에서 보냈다. 1980년대 초에 내가 처음으로 연구소에 보직돼 갔을 때, 그 연구소는 육사를 나온 3인의 호남인들이 휘어잡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경제, 경영, 정치 분야 박사들이었지만 모두가 육사 출신 현역장교들이었다. 그 연구소에는 많은 육사 출신들이 있었지만 이들 3인에게 ‘육사 선후배’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이들은 선배들을 그들 방으로 불러 따지고 지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텃세는 정도를 지나쳤다. 연구소에 먼저 들어와 높은 호봉을 향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중령 박사가 대령 박사보다 높은 보직을 차지했고, 대령 박사를 중령 박사 사무실로 오라 가라 불러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브리핑까지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내가 연구소에 부임하자 3총사는 나를 자기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 했다. 자기대령 시절 말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가 내게 욕을 하고 멱살을 잡아 몸싸움까지 벌인 적이 있었다. 싸웠다는 이유로 예비역 2성 장군인 연구소장이 나를 불러 국방대학원으로 보내 줄 터이니 연구소를 나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에서부터 나는 투사가 되지 않고서는 이 연구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양 손에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연구소에 왔습니다. 소장님은 이 연구소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저는 연구소에 할 일이 있어서 왔고, 연구소장님은 그냥 발령만 받아 오셨습니다. 이 연구소는 국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저는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있는 사람이고, 연구소장 자리는 아무나 와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중에 연구소를 나가야 한다면 누가 나가야 하겠습니까? 나이 어린 학자들이 싸울 수도 있습니다. 싸웠으면 자초지종을 따져 주시든지 화해를 시키셔야지, 어째서 소장님은 3총사 세력만 감싸십니까? 저는 그렇게 호락호락 나갈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소장님께서는 3총사를 싸고도시기 때문에 연구소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계십니다. 제가 나가면 소장님도 함께 나가야 합니다. 같이 나가시지요”
언제부터 내게 이렇듯 대담한 기운이 담겨져 있었을까! 만만히 보였던 나로부터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얼굴은 일거에 백지장이 됐고, 손과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연구소장실에서 고성이 오갔다. 소문이 일시에 퍼졌다. “지박사가 삼총사 수장 아무개 박사와 붙었대.” “연구소장하고도 붙었대” 소문이 퍼진 것만큼 그들의 체신도 떨어졌다. 그 후부터 연구소장과 3총사가 한편이 되어 틈만 있으면 나를 왕따 시키려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연구소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나를 응원했다. 남들은 편하게 사는데 어째서 나만 괴롭게 세상을 사는가. 혹시 내 운명에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괴로웠던 어느 날 새벽, 나는 평창동에 용하다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실타래처럼 얽긴 일을 풀 사람은 임자뿐이야. 누구도 이 문제를 풀어줄 수가 없어. 다행이 임자에게는 총명함이 있으니 가서 풀어 봐요. 수학문제처럼 말이야” 아! 저렇게 연로하신 할머니가 어떻게 이렇듯 과학적일 수 있을까! 역시 내 운명은 내가 헤쳐 나가야 했다. 그 할머니는 내게 이 엄청난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할머니가 참으로 고마웠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나는 목포 출신인 윤성민 국방장관에게 달려가 그들의 파행을 호소했다.
“장관님, 저들이 장관님과 동향임을 내세워 힘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장도 저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대령입니다. 아무개는 중령입니다. 연구소이기 때문에 대령도 장군도 중령 밑에 있어야 한다면 군 인사규정에 그런 예외조항을 넣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인사규정을 복사해 가지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면서, 대령이 중령 밑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제게 달아주신 이 대령 계급장은 명예스러운 게 아니라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장관님, 제게 대령을 달아 주셨으니, 이제 대령을 떼어가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장관님은 노기를 숨기며 말씀하셨다. “이런지 얼마나 됐니?”, “1년쯤 됐습니다” “왜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의 고생이 컸겠니. 그래, 알았다. 이후부터는 내가 나서마”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나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전군에 예산개혁을 주도하고 있어서 나를 보배라고 공언하며 총애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앞으로 비서실은 지박사가 장관을 만나려고 하면 2일 이내에 계획하라. 하루에 8시간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나를 아꼈다. 내가 1년간의 고통을 참아 온 것은 불미스러운 일을 가지고 장관님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허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장관님을 그런 일로 써먹으면 아무래도 장관님과 나 사이가 이전처럼 부드러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에 들으니, 국방장관님은 장관보좌관을 불러들여 화를 냈는데,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국방장관은 3총사 모두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연구소장을 파면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3총사들은 교묘하게 비호세력을 이용해 미국의 연구소 등으로 피신을 했다. 연구소장은 1주일 내내 매일같이 국방장관실로 출근했다. 겨울 새벽 7시부터 국방장관실 문 앞에 꿇어 앉아 장관의 출근을 기다려 용서를 빌은 것이다. 3총사가 해체되고 난 후부터 연구소장은 연구소 일을 나에게 의논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나를 신임했고 좋아했다.
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명에 의해 율곡 10년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는 일종의 핵폭탄이었다. 그 핵폭탄 중의 하나가 222사업이라고 명명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이었다. 당시 2억 5천만 달러에 구입한 공군방공자동화사업에 대해 나는 단돈 25달러 가치도 없는 폐품이라고 발표했다. 군 전체가 뒤집히듯 요란했다. 이기백 당시 국방장관과 김인기 공군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엄청난 질책을 받았다. 이에 앙심을 먹고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국방차관, 황관영 기획실장 등이 주축이 되어 나를 연구소에서 내보내려고 했다. 불과 3개월 후, 그 10년 선배인 황관영 당시 기획관리실장이 연구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나를 무조건 나가라고 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낸다 해도 중간에 비서관들이 장난질을 칠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 나는 내 발로 연구소를 나갔다. “선배님, 오래 사십시오” 배참으로 던진 이 한마디가 저주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1987년 봄, 내가 정처 없이 미국으로 떠난 지 불과 2년이 지나 누가 봐도 건강해 보였던 연구소장은 유명을 달리했다.
율곡 사업은 1974년부터 태동됐다. 1985년과 1986년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율곡 사업의 문제점들에 대해 신경질적일 만큼 관심을 보였다. 1986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74년부터 1986년까지 13년간의 모든 율곡사업 성과를 낱낱이 재평가하라는 명령을 이기백 장관에게 내렸고, 결국 그 어마어마한 과제는 모두가 회피했다. 그러한 명령은 지금까지 오직 전두환 대통령만이 내렸고, 율곡사업을 총체적으로 평가해 본 사람은 아직까지 나와 나의 연구원들밖에 없다. 전두환 대통령이 초미의 관심을 가졌던 사업은 공군의 방공 자동화 사업이었다. 1979년부터 1985년 7월1일까지 공군은 그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방공 자동화 사업’을 추진했다. 그 사업만 완료되면 대한민국 상공을 나는 새 한 마리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잡을 수 있다고 호언했다. 이렇게 구매된 방공 자동화 장비는 1985년 7월1일부터 가동됐다. 중국으로부터 항공기가 세 번씩이나 날아왔다. 민항기가 춘천에 불시착했고, IL-28기가 이리 지역 상공을 40분이나 헤매다가 연료부족으로 추락했다. MIG-21기도 날아왔다. 참새까지도 잡겠다던 방공 자동화 시스템은 어찌된 일인지 이 세 대의 항공기 중에서 단 한 대도 잡지 못했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 사업은 당시 국방비의 8퍼센트에 해당하는 2억 5천만 달러, 미증유의 최대 규모 사업이었다.
나는 8개월간의 연구를 통해 그 장비의 소프트웨어 로직을 분석했다. 그 컴퓨터 로직을 가지고 공중 표적을 포착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2억5천만 달러의 사업이 불과 25달러 가치도 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 자동화 장비는 없는 편이 백번 낫기 때문이었다. 유지비와 정비비가 엄청나고 인력은 이중으로 늘어났지만 그것을 믿다간 공중전은 백발백중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 자동화사업을 담당했던 오파상을 접촉하여 휴즈사 책임자 3명을 연구원으로 불렀다. 책임자는 대머리가 벗어지고 뚱뚱했다. 그는 내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위엄을 잡았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제공한 시스템에 하자가 있으며, 이는 대통령에까지 보고가 돼서 대책을 찾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을 꺼냈다. 이에 대해 그는 거만한 자세로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는 세계 최고의 회사입니다. 휴즈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휴즈사가 할 수 없는 일은 어느 회사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공군으로부터 수없이 듣던 말이었다. 결국 공군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휴즈사에 코치를 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렇게 기 싸움을 했다. "당신은 통계학에서 Type-I 에러와 Type-II 에러를 아느냐? 에러를 걸러내는 Thresh-hold(문지방:기준)를 몇 %롷 잡았는지 알려 달라" 통계학에서는 잡상(Noise)을 실체로, 실체를 잡상으로 오인하는 에러가 있다. 기준(문지방)을 높이면 실상을 잡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문지방을 낮추면 잡상을 실체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전자를 Type-I 에러라 부르고, 후자를 Type-II 에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친구는 이런 기본도 몰랐고 그래서 얼굴이 빨개졌다.
이에 약점을 잡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휴즈사는 세계 최고의 회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은 세계 최고가 아니다. 방공자동화는 휴즈사가 설치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한 게 아니냐" 이에 책임자는 이렇게 응수했다. "A/S 의무기간 1년이 이미 지났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미해군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다. 나의 동창생들이 매우 많다. 그들은 아시아 각국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 나는 지금 즉시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당신이 Type-I 에러와 Type-II 에러도 모르면서 엉터리 시스템을 한국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리겠다." 그제야 휴즈사 일행이 확실하게 무릎을 꿇었다. "다시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할 때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나는 물론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굳게 약속한 후 그들과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후 그들은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우리는 당신을 만난 후 공군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말과는 달리 공군은 방공자동화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공군은 시스템의 주인이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당사자입니다. 앞으로 혼돈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문의와 요구는 공군을 통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부터 공군을 더욱 멸시했다. 장비는 분명히 잘못돼 있고, 휴즈사는 이를 고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공군은 그들의 면책을 위해 애국을 던지고 해국을 선택한 것이다. 연구소 건물의 내 방은 일요일 도 없이 밤 1시가 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경비원들은 내가 가족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다 했다. 내가 맡은 과제만을 수행했다면 나도 얼마든지 여유 있게 생활을 엔조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들을 찾아 정리하고 이를 장군들에게 알려주는 일에 몰두했다. 수구 저항세력에 대해서는 의례 그럴 수 있다 쳤지만, 공군의 이런 자세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합참 작전본부에 설치된 조사팀은 이틀간의 공개토론 끝에 현장으로 나갔다. 토의가 진전될수록 공군은 눈에 뜨이게 내 이론에 밀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조사팀에 있던 장군들이 갑자기 눈초리가 달라지면서 공군 편을 들기 시작했다. 토의는 그만하고 현장으로 나가자며 서둘렀다. 처음엔 그렇게 사명감으로 분칠을 하며 철저하게 조사를 하겠다더니! 공군의 로비가 막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 후 수경사령관까지 했고 김영삼 시대에 하나회로 숙청이 됐다. 첫날은 오산 공군작전사령부로 갔고, 다음 날에는 대구 팔공산 레이더 기자로 갔다. 나만 쏙 빼놓고 간 것이다. 내가 오산으로 갔지만 공군 헌병중령이 정문을 통과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야말로 막가는 세상이었다. 후에 연구소 동료의 말을 들었더니 결과는 이러했다. 4대의 헬리콥터를 서쪽으로 띄워 놓고 자동화 장비가 이것을 어떻게 잡아내는지를 관찰했다 한다. 자동화 장비의 화면에 무엇이 나타났을까. 실제로 서쪽에 떠 있는 4대의 헬리콥터는 잡히지 않고, 떠 있지도 않은 비행체 84대가 동쪽에 나타난 것으로 보여 졌다 했다. 4대의 진짜 비행기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84대의 허상만 보여주는 기막힌 장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군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주한 미군이 있는 한 전쟁은 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전투력 약화보다는 책임추궁을 더 무서워해서 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업비들이 많이 지출됐다. 예를 들면 호크라는 방공포는 이동 장비다. 전쟁이 나면 진지를 이동할 수 있도록 작전 개념이 정립돼 있고, 모든 장비가 이동 체제로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300억원에 해당하는 마이크로웨이브 통신 장비가 붙박이식으로 설치됐다. 이동식 유도탄에 붙박이식 통신 장비를 건설하는 것은 코미디였다. 미국의 4C라는 회사가 50억원에 해당하는 장비를 납품했지만 이는 모두가 겉만 흉내 낸 불량품이었다. 공군은 이 회사를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해야 했다. 그러나 공군은 이를 숨기는 데 급급했다. 나의 문제 제기에 대해 공군 참모 총장을 선두로 수많은 공군 장교들이 로비와 압력행사에 나섰다. 이 문제가 대통령에 의해 제기되자 처음엔 하나회 국방 차관과 하나회 합참 작전 차장이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호언하며 나섰다.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공중 앞에서 다짐해 줄 때는 그들의 온 몸이 사명감이라는 금물로 화려하게 도금돼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공군 편을 들기 시작했다. 나의 신변을 보호하겠다던 기무사 간부들이 갑자기 나를 보안 위규자라고 위협하면서 시말서를 쓰라 했다. 우군의 약점을 공개했다는 것이다. 장관과 차관은 나를 ‘트러블 메이커’라고 불렀다. 그들은 내가 군에서 나가 주기를 바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군을 나와 도미했다. 내가 떠나자 공군과 합동 참모 본부는 대통령에게 ‘방공 자동화사업 이상 없음’이라 보고했다 한다.
1987년2월28자로 나는 예편을 했다. 내가 예편원서를 내자 이기백 국방장관, 황인수 차관의 입이 벌어졌다고 했다. 연구소에 있는 동안 미 국방성에서 온 장군 급 민간간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니 스미스라는 여성 보스였다. 그녀는 비용분석 기법에 대한 토의에서 내 발표를 들은 후 나를 매우 높이 평가해 주었다. 내가 연구소를 나갔다는 소식을 알고 그녀는 한국에 있는 미군 대령을 나에게 보냈다. “지박사 같은 사람을 한국이 안 쓰면 미국이 쓰고 싶다”며 미국으로 오라 했다. 미국으로 가자 그녀는 즉각 20만 달러의 과제비를 만들어 내가 다니던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으로 내려 보냈고, 해군대학원은 내게 교수직을 부여했다. 과제는 한국과 미국의 방위산업을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제 수행과정 중 나는 펜타곤에서 상당한 시간을 그녀의 사무실에서 보냈다. 한마디로 주위를 휘어잡는 여장부였다. 펜타곤에 있는 동안 미국 고위 관리들의 사고방식에 접할 수 있었고, 수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내 일생의 전화위복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어려울 때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어려움을 극복시켜준 두 여인이 있었다. 한 분은 “지금부터 나는 네 누나야” 하던 천사였고, 그 다음에는 공식석상에서 딱 한 번 만난 이후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면서 미국으로 불러준 바니 스미스라는 미 국방성 여걸이었다. 1987년 4월, 나는 또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갔다. 홀트양자회에서 어린 입양아 3명을 데려가는 조건으로 비행기 표를 여러 장 주었다.
남들이라면 평탄하게 살았을 인생을 나는 참으로 어렵고도 거칠게 살았다. 만일 절대자께서 내게 어린 시절로 되돌려 줄 테니 다시 한 번 인생을 살아보겠느냐고 제의하신다면 나는 즉석에서 거절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꾼 나에 만족한다. 그 만족감을 얻으려면 나는 내가 지나왔던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하지만 다시 반복해 걷기에는 그 길은 너무나 험했고, 불확실했고, 아팠다.
1990년 나는 미국에서 돌아와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처녀작을 냈고 이어서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라는 경영학 책을 냈다. 이로 인해 나는 한 10년 동안 군사평론가, 경영학 초빙강연, 기업체 경영진단, 기고 등 바쁘고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대북정책이 도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모든 역사를 좌익사관으로 바꾸고 학생들에게 역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고 가르치고 국가생존에 절대적 존재인 한미안보시스템마저 파괴하는 등 반-국가행위를 자행하는데 위기를 느껴 이들의 국가파괴 행위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민을 계몽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등 투쟁의 길을 걸어왔다. 이로 인해 나의 적이 돼 버린 좌익들은 나에게 ‘극우’와 ‘수구꼴통’이라는 딱지를 붙여 확산시켰고, 멋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수구 꼴통인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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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의 모교 미해군대학원
( Naval Postgraduate School)
(교양과정님의 글)
Monterey California에 위치
다소의 이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교육의 질과 국력을 비례관계로 본다면, 미국은 세계 최강의 대학군을 거느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국가는 아낌없는 지원으로 준재들을 길러내고, 그 준재들이 다시 국가를 살찌운다. 이러한 선순환의 메커니즘이 계속 작동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건실한 교육환경과 합리적인 신입생 선발 시스템에 있다 할 것이다.
대체로 미국 명문대학의 입학 난이도별 등급(college admission selector)은 1. most competitive, 2. highly competitive, 3. very competitive, 4. competitive, 5. less competitive, 6. non competitive 이상 6 등급으로 나눔이 보통인데, 최상위 most competitive 급에는 대략 30 여 개의 대학이 포함된다.
최상위 30 개 대학의 수준은 우리나라의 서울대가 400 위 정도로 평가받은 전력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그 교육의 질과 학생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최상위의 30 개 대학은 어떤 대학들이 포진해 있을까? 저 유명한 예일과 하바드, 프린스턴과 스텐포드 그리고 그 이름도 생소한 라이스(Rice)나 스미스(Smith) 등등, 총 등록 학생 수가 불과 2~3천명 안팎의 소규모 귀족명문 대학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다소 놀라운 것은, 최상위의 30 개 대학 중에 무려 6개의 군사관련 대학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군사관련 대학은 신입생 선발 조건에 있어서 일반 명문대학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격하다.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학교성적과 봉사활동 경력뿐 아니라, 리더십, 체력, 기타 국가의 동량이 될 자질과 자세를 고루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거주지역 상원의원의 추천도 필수다. 가장 고난도의 입학 요건을 요구하는 학교들이 바로 군사관련 대학인 것이다. 이들 군사관련 6개교를 나열해 보면,
1. United States Air Force Academy........................... [ 공군 사관학교 ]
2.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 육군 사관학교 ]
3. United States Naval Academy................................... [ 해군 사관학교 ]
4. United States Coast Guard Academy........................ [ 연안경비 사관학교 ]
5. United States Merchant Marine Academy................. [ 상선 사관학교 ]
6. Webb Institute of Naval Architecture........................ [ 웹 해군 조선공과 대학 ]
인데,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6개 군사학교 중에서 4개가 해군관련 학교라는 사실이다. 총 6개의 군사학교 중에서 해군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67%에 이른다. 이는 전체 미국 대학의 상위 1% 중에서 군사학교가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고, 또 그 군사학교 중에서는 해군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니, 대학만 두고 보더라도, 과연 "미국은 해군의 나라"라 불릴만하다.
물론, 미 국방예산의 소모 퍼센티지를 보더라도 해군예산이 압도적이니 당연한 현상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미국 정부와 전체 미국민의 정신에 자리한 해군의 위상은 참으로 대단하다. 미국의 가시적인 힘은 항공모함 전단으로 그 위용을 드러내지만, 보이지 않는 실질적인 힘은 미해군 천문대에 의해 행사된다. 매해 신년, 세계 각국은 미해군 천문대에세 제공되는 자료로 새해 책력을 작성하게 되는데, 바로 이 점이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할 것이다.[중세의 '그레고리우스 력, 율리우스 력 등을 생각해 보라. 책력의 반포와 시행은 칭제(稱帝)와 같은 수준의 힘과 의미를 지닌다.]
우주와 항공기술도 공군을 능가하며, 의료설비와 기술 수준도 최강이다.[미 대통령의 건강검진과 의료처치는 주로 베네쓰다 해군 병원에서 이루어진다.]
미 제 7 함대 항모전단
사관학교 졸업생의 경우, 대다수는 일선의 초급장교로 근무하게 되지만,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소수의 장교들은 MIT등 미국 유수의 전문연구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요원이 되거나 교수요원의 길을 걷는다. 이런 MIT 같은 전문연구대학원 중의 하나가 바로 미해군대학원NPS이다.
전문연구대학원의 교과과정은 실무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난이도와 철저함은 수재들에게 조차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예전, MIT 유학기를 읽다 가슴 아팠던 대목이 있다. 성실하고 총명한 학생이었지만, 결국 중도 탈락되어 눈물을 뿌리며 짐을 꾸리는 장면이었다. 문과계통은 열심히 노력하면 못 따라 갈 일이 없는 '의지의 문제'이지만, 이과계통은 노력 만으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재능의 문제'이기에 이과 탈락생은 "하는 수 없이 하바드에 가서 경영학 석사 과정 MBA나 이수해야겠다고 했다. MIT 석사과정에서 중도탈락한 사람들이 눈물을 뿌리면서 차선으로 택하는 곳이 하바드 경영대학원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하바드 MBA가 우습다는 것이 아니라, MIT의 수준이 그만큼 높다는 말이다.
NPS는 위에 열거한 군사학교 출신 장교를 포함한 고급장교를 대상으로 하는 엘리트 군사교육 기관이다. 미국군 뿐 아니라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전 세계에서 선발된 영관급(대개 소,중령급)장교를 그 교육 대상으로 한다. 미 정부의 예산으로, 강도 높은 교육으로 미래 자유세계를 지켜낼 엘리트를 배출하는 곳이 바로 미 해군대학원인 것이다. 대충 이정도면 미국의 군사관련 교육기관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지만원 박사의 모교가 바로 이 Naval Postgraduate School 이다. 1980년 그가 졸업하던 해, 그는 NPS가 그 해 배출한 유일한 이학박사였다. 3년의 짧은 수학 기간 중, 문과 석사에서 이과박사로 과정 변경하여 박사를 단 한 번에 따낸, 미해군대학원 사상 유례 없는 최우수 생도였다. "지만원!" 그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임을 동문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군문 출신임에도 지박사를 인신공격하여 그 명예를 훼손시킴은 독해력이 부족해서 일까? 아니면 품성의 천박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시스템클럽 자유게시판 곳곳에 참으로 저질스러운 몇 몇 지박사에 대한 인신공격성 글이 보이기에, 지박사님을 대신하여 변명 아닌 변명을 해 보았다. 아무튼, NPS는 전세계 최고, 최상위의 교육기관 중의 하나이다.
http://www.nps.navy.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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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hort History of the Naval Postgraduate School
The idea for a graduate education program for naval officers first emerged in the late 19th century but, initially, the concept found few advocates. With Marconi's invention of the "wireless" in 1901, the Wright brothers' flight in 1903, and the global trek of the steam-powered White Fleet from 1907 to 1909, belief that advanced education for U.S naval officers could be intrinsically valuable to the Navy gained support.
On June 9, 1909, less than four months after the completion of the record-setting world cruise of the Great White Fleet, Secretary of the Navy George von L. Meyer signed General Order No. 27, Establishing a school of marine engineering at Annapolis.
This small program, consisting of 10 officer students and two Navy instructors, would later become today's Naval Postgraduate School. The Navy Secretary's order placed the fledgling school under the direction of the Naval Academy superintendent, who was charged with "securing ample use of the educational plant of the Naval Academy to students and instructors of the school without interfering with the instruction of midshipmen." This translated into two attic rooms being set aside for classroom and laboratory space for the school.
Within three years, Meyer agreed to a proposal to change the school. On October 31, 1912, he signed Navy General Order No. 233, which renamed the school the Postgraduate Department of the Naval Academy. The order established courses of study in ordnance and gunnery, electrical engineering radio telegraphy, naval construction, and civil engineering as well as continuing the original program in marine engineering. With the additional curricula, enrollment increased to 25. Officers who attended the school finished their academic programs at civilian institutions such as Yale, Harvard, the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and Johns Hopkins and Columbia universities.
During World War II, Fleet Admiral Ernest King, chief of naval operations and commander-in-chief of both the Atlantic and Pacific fleets, established a commission to review the role of graduate education in the Navy. The recommendations from this group, the Pye Commission, were regarded highly within the Navy and Congress. In 1945, Congress passed legislation to make the school a fully-accredited, degree-granting graduate institution. Two years later, Congress adopted legislation authorizing the purchase of an independent campus for the school.
A post-war review team, which had examined 25 sites nationwide, had recommended the old Hotel Del Monte as a new home for the Postgraduate School. The Navy had come to Monterey during World War II, leasing the Hotel Del Monte in early 1943 for a preflight training school, and subsequently using the facility for other training programs. Negotiations with the Del Monte Properties Company led to the purchase of the hotel and 627 acres of surrounding land for $2.13 million.
In December 1951, in a move virtually unparalleled in the history of academe, the Postgraduate School moved lock, stock and wind tunnel across the nation, establishing its current campus in Monterey. The coast-to-coast move involved 500 students, about 100 faculty and staff and thousands of pounds of books and research equipment. Rear Adm. Ernest Edward Herrmann supervised the move that pumped new vitality into the Navy's efforts to advance naval science and technology.
Since that time, the student population at the Postgraduate School has grown to 1,800, with students coming from all service branches of the U.S. defense community, as well as from the Coast Guard, the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and the services of more than 25 allied nations. Today, the school provides more than 40 programs of study, ranging from the traditional engineering and physical sciences to the rapidly evolving space science programs.
http://www.nps.edu/Aboutnps/Navigation/FactFig.html
지만원의 미니 이력서
■ 1947년, 내가 여섯 살 나던 해였다.
어느 겨울날 아침상에는 노란 좁쌀밥과 짠김치, 물김치 그리고 구수한 숭늉이 올라 있었다. 문풍지 사이로 뽀얀 햇살이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피오오르는 좁살밥 위를 평화롭게 비추었다. 촌 겨울 의 아침상은 통상 10시경에 차려졌다. 아침겸 점심이었다.
형들은 한참 먹을 나이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밥을 해치우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군둥이에 손을 대고 입으로 방귀 소리를 낸 후 거무튀튀하고 투박한 손을 내 밥그릇 위에 갖다 덮었다. 나는 숱가락을 내팽개치고 발버둥을 치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형들에게 눈을 흘기며 매 성미를 잘 알면서 그런다며 나를 달랬다. 내가 그치지 않자 어머니는 내 밥그릇을 가지고 부엌으로 나갔다가 다시 가져와서는 밥을 바꾸어 왔으니 어서 먹으라고 했다. 나는 밥을 검사해보고는 나를 속였다며 신경질을 더 부렸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풀기 없이 부서지는 조밥을 커다란 바가지에 넣고 내가 보는 앞에서 씻어주었다. 김치쪽을 물에 헹궈서 밥숟갈에 올려주면 그제서야 몇 술 먹고는 말았다. 오돌오돌한 조밥이 어린 나에게 맛이 있을 리 없었다.
■ 육사에서는 학과공부보다는 위인전과 고전 명작들을 읽는데 50% 이상의 자습시간을 사용했다.
좋은 책을 빌려다 놓으면 주말이 무척 기다려졌다. 매 10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저자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 했는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다시 10페이지를 읽고 나면 한없는 상상력이 나래를 폈다. 읽는 시간보다 상상하고 요약하는 시간이 길었다.
이러한 훈련은 훗날 복잡한 사회현상에서 줄거리를 찾아내고 나의 전공인 응용수학을 깊이있게 음미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훌륭한 교사가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분명 훌륭한 교사가 있었다.
그 교사는 바로 책 속에 들어 있었다.
나의 육사 시절, 사관학교 화장실 소변기 밑에는 언제나 소변방울이 떨어져 냄새가 났다.
금요일마다 염산으로 청소를 하려면 위험하기도 했지만 독한 염산 냄새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화장실 사용에 대해 주의를 준다는 것은 좀스런 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사관학교 창설이래 화장실의 고통은 계속돼왔다.
어느 날 나는 교실로 향하기 위해 집합해있는 하급생들에게 엎드려! 일어서!라는 얼차려를 반복시켰다. 머리끝까지 긴장한 채 용수철 처럼 기합을 받던 하급생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상상만 분주했다. "귀관들!" 나는 천천히 입을 열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생도들을 좌우로 둘러보았다. "무슨 심각한 지시가 떨어질까 아니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생도들의 눈망울이 나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화장실에 가거든 한발짝 더 앞으로 전진하라. 그리고 최후의 한방울까지 철저히 관리하라". 겁을 잔뜩 먹고 있던 하급생들의 입이 한참 후에야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화장실의 고통은 사라졌고 "최후의 한방울론"은 두고두고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 월남전에서 나는 중위를 달자마자 포병 대대 상황실에서 포병화력을 지휘하는 사격지휘 장교가 됐다.
각종 정보 부대에서 전파돼오는 첩보내용이 날마다 수십 쪽의 상황일지를 채웠다. 다른 장교들은 상황일지를 한번 쭉 훑어보는 것으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나는 기록병들로 하여금 모든 상황을 지도위에 점으로 표시하게 했다. 초저녁 상황은 초저녁 상황판에, 밤중 상황은 밤중 상황판에 표시하도록 했다. 이렇게 표시된 점들이 모이자 각 시간대 마다 베트콩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포병사격을 퍼부었다.
나중에 수집한 베트콩 포로 문서에는 "한국군 포에는 눈이 달렸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중위 때, 나는 월남에서 포병화력을 지휘하는 사격통제 장교였다. 한국에서 고문관을 지냈다는 미군 소령이 내게 복종을 강요했다. 한국에서는 장군들도 자기에게 꼼작 못했는데 중위가 왜 말을 안듣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내 병사들의 자존심을 자극해 그 친구 발뒷꿈치 모래 사장에 집중사격을 시켰다. 내게 큰 소리를 치던 그는 체면도 내던지고 삼쌀개 처럼 달아났다. 병사들은 달아나는 그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나의 상관은 내게 큰일을 저질렀다고 겁을 잔뜩 주었다. 미군이면 꿈벅 죽는 그런 선배 장교들이 정말 못나 보였다. 그 다음날 미군 중령이 내게 찾아왔다. 겁을 잔득 먹고 있는 나의 상관 앞에서 그 미군 중령은 오히려 내게 정중히 사과를 표시했다.
■ 30살 때, 나는 임시 대위로 월남에서 포대장을 했다.
어느 날 오후 늦게 내 병사가 헌병초소에서 C-레이숀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헌병에게서 뺨을 맞고 들어왔다. 내가 분을 참지 못해 할 때, 상사와 중위들이 나를 위로했다. "포대장님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쫄병들은 원래 다니면서 헌병에게 얻어 밪고 다니게 돼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더욱 더 화가 났다. 덩치가 좋은 병사 열명을 뽑아 완전 무장을 시킨 후 트럭에 태우고 어두 컴컴한 길을 40분간 달려 갔다. 중간에 베트콩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내 병사를 때린 헌병을 끌어내 내 병사에게 용서를 빌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가 빼앗으려 했던 것보다 더 많은 C-레이숀을 주었다.
"앞으로 C-레이숀이 필요하면 내게 전화하라, 만일 내 병사에게 손을 또 한번 대면 그 때엔 주먹과 무력으로 다스릴 것이다". 전쟁터에서 존중돼야 할 전투병들이 옷이나 깨긋히 다려입고 지내는 헌병 따위에게 뺨을 맞고 다닌 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까불던 헌병들이 그날 전투병들의 맛을 톡톡히 본 것이다. 그후 그 초소를 지나는 내 부대 차량들은 언제나 기분좋게 프리패스됐다.
초급 지휘관은 매월 1회씩 병사들 한사람 한사람을 불러 신상면담을 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나는 일에 바쁜 병사들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병사들이 보내는 편지를 읽기로 했다. 병사 개인별로 신상기록 파일을 만들어 놓고 그들이 보내는 편지를 요약해 놓았다. 그들의 편지는 지휘관이 직접 읽도록 규정돼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그 일을 주임상사 등에게 맡겼다.
병사들에게 오는 편지는 보낸이의 주소와 이름만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의 한 개 한 개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쌓여지면 신상면담이라는 형식적인 방법으로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깊은 내용들이 시의적절하게 파악될 수 있었다. 병사들의 고민도 즉시 즉시 파악됐다.
어느 한 운전병이 면허증 갱신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포착됐다.
옛날의 면허증은 지금처럼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닌데다 갱신기간을 넘기면 면허증이 송두리 채 날아가 버렸다. 그 병사의 면허증은 파월기간중에 갱신기간이 걸려 있었다. 나는 경남 도지사에게 앙청하는 편지를 썼다. 도지사로부터 약속장이 담겨진 편지가 날아왔다. 귀국해서 도지사의 편지를 교통운수과에 제출하면 문제 없이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번병을 시켜 그 편지를 병사에게 전달했다. 내가 직접 전달한다는 건 매우 쑥스런 일이었다.
나는 병사들의 어려움을 뒤에서 생색내지 않고 여러 건 처리해 주었다. 내가 그들에게 생색내지 않듯이 그들도 생색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병사들은 나를 귀신이라고 불렀다. 포대장이 비록 그들을 감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어디에선가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취임시에 내개 들어내 놓고 반항하던 간부들이 불과 2-3개월이 지나자 과분하리 만큼 내게 충성을 다했다. 내가 내 사무실을 나가는 바로 그 순간 나를 본 병사들이 봉화 전달 식으로 주임상사에게 나의 거동을 알렸고 포대 귀퉁이에서 병사들과 함께 했던 나이 50이 넘은 상사는 땀을 있는대로 흘리면서 먼 거리를 달려와 차려 자세로 거수 경례를 했다. 나는 인구 150명의 조그만 부대에서 일종의 카리스마가 돼 있었다.
■ 나는 한국 나이 37세에 박사과정을 치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시스템 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시작해서 박사 논문까지 끝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첫학기부터 중압감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이는 나의 위장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반팔로 1년을 지낼 수 있는 지중해성 기후였는데도 무릎과 발이 시리고 쩌릿해서 차라리 다리가 없는 편을 선택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뒷골이 무거워 지고 나른해서 잠만 쏟아졌다. 몇 차레 한국 교포로부터 침을 맞긴 했지만 부담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 차례에 20달러씩 지불하는 것도 커다란 부담이었지만 가는 데 20분, 오는데 20분, 침맞는데 20분이라는 시간은 더욱 더 감수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침술사에게 사람하나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가 싸준 침뭉치를 가지고 그가 가르쳐 준 요령에 따라 배, 손 그리고 발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배에 꽂는 실침의 수는 30개 내외였다. 침을 맞으면 체력이 소모됐다. 가누지 못할 만큼 몸이 까부러졌다.
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2층 계단을 내려와서는 비틀거려지는 몸을 가누며 뛰기 시작했다. 3년을 하루 같이 뛰었다. 뛰고 나면 지쳤던 몸에 생기기 돌았다. 박사과정이 끝난 시점에서의 내 건강은 그때까지의 내 일생 중에서 가장 건강했다.
비가 와도 뛰었고, 새벽 두시가 돼도 뛰었다. 매일 같이 뛴다는 것은 체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만 나태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하루를 거르면 열흘을 걸르게 된다. 열흘을 거르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를 거르지 않아야 했다.
뛸 때에는 반드시 생각할 거리를 미리 준비했다.
뛰면서 수많은 수학 이론을 터득했다. 뛰면서 수학문제 푸는 과정을 칠판에 표시한다면 칠판 한 두 개쯤은 수학기호들로 빼곡히 들어찼을 것이다.
이러한 훈련은 상상력과 논리력을 훈련시키는 데 있어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러는 동안 생각하는 습관이 길러졌다.
■ 새로운 이론을 공부할 때마다 나는 3~5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같은 이론이라 해도 이를 다루는 석학들에 따라 시각을 달리 하고 다루는 요령 및 기법을 달리 한다는 것은 학문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이 희열은 주말 공부를 위한 충분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남들은 교과서 하나도 다 소화할 시간이 없는데 그렇게 많은 책을 언제 다 보느냐고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학문이 주는 희열을 알지 못한 채 성적과 학위만 딸 뿐이다.
처음부터 큰집으로 시작하면 큰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공부 방법은 수학에 대한 해석력을 낭만적이라 할만큼 매우 풍부하고 화려하게 길러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내가 만든 수학공식, 세 개의 정리, 알고리즘은 각기 나의 성을 따서
[Jee's Formula], [Jee's Theorem], [Jee's Algorithm] 으로 인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