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반란사건에 대한 독후감-3 (임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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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3-02-17 13:33 조회5,406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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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은 해방직후에서부터 1957년 4월 2일까지 만 11년 8개월 동안 벌인 무장폭동, 반란사건이다. 소련군 스티코프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이 다시 지령을 내려 일으킨 사건이며 5.10 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목적에서 벌어졌다. 주동자는 김달삼이다.
1. 해방 전후의 한반도
해방 전에는 해외유학파들이 공산주의를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이들은 조선, 동아를 필두로 각종 언론기관에 침투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서울-고향을 오가며 공산주의를 확산시켰다. 당시에는 공산주의를 선전할 수 있어야 잘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요즘에도 ‘진보’를 자처해야 멋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 야체이카(러시아어:세포)가 되었다. 이들은 공산단체를 설립했으나 번번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여러 번 설립-와해의 과정을 거쳤다. 이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야학 등을 위장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제주도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관용을 베푸는 바람에 지하로 숨어들던 공산주의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덕분에 남한사회는 각종 혼란사태에 빠져들었다. 일본이 피배할 기미가 보이자 소련은 재빨리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고 평양에 진주했다. 그라고 김일성을 내세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 사실상 정부였고, 남한보다 먼저 정부를 수립했다. 이는 스티코프 비망록과 스탈린의 지령문이 증명한다. 남북 분단 고착화의 원인은 북한인 것이다. 김구는 김일성이 먼저 세운 정부에는 눈을 감고 이승만만 걸고 넘어졌다. 그리고 평양에 방문해 김일성에 아부성 발언을 했다.
남한에서 발생한 각종 폭동 사건은 소련의 영향아래 있었다. 소련은 9월 파업과 대구폭동에 일화를 지불하고 투쟁방법까지 하달했다. 박헌영이 스티코프에 질문하고,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물어 지시했다. 1946년 5월 정판사 사건이 일어났다. 위조단은 약 1,200만원 상당의 위폐를 인쇄-유포했다. 미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6년 9월 총파업이 일어났다. 박헌영이 전평에 지시했다. 당시 남한국민은 미군으로부터 식량을 배급받았으나 배급량이 부족했다. 공산당은 미국 탓으로 선동했다. 대구폭동에는 시체작전이 동원됐다. 주동자는 콜레라로 죽은 시체를 동원해 유언비어를 퍼트려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분개한 시민들이 경찰서로 몰려갔고 시위대는 경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경찰의 무장이 해제되자 시위대는 대구를 광폭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광주사태 때에도 시체작전이 동원됐다. 패턴이 동일하다. 대구폭동은 경북-경남-전남지역으로 확산됐다.
2. 4.3폭동
제주도는 해방 후 인구의 276,000명 중에 80%가 좌경화되어 있었다. 1945년 초 일본은 이 섬을 전진기지로 사용할 목적으로 군사를 배치했고, 이로 인해 미군의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해방 직전까지 “오노”도사가 다스리고 있었고, 해방 후 전남으로부터 독립되어 제주도로 승격됐다. 해방 후 주민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인구 중에는 군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한라산 무장대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고,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지식인들이 주민들을 좌경화 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은 건준 - 인민위원회 -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 -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차례대로 결성했고, “3.1절기념 제주도 위원회”를 결성하여 투쟁체제로 전환했다. 민민전 제주도 위원회를 결성한 후 사실상 좌익 세력이 제주도를 통치하고 있었다. 민전 제주도위원회는 결성시 명예의장에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 등을 추대함으로써 제주도 민전이 소련-북한-남로당의 지휘선상에 있다는 것을 공표했다. 김달삼이 인민유격대 총사련관으로 임명되면서 500명 정도의 유격대가 형성되어 무장을 갖추고 훈련을 시작했다.
1947년 2월 초 남로당 중앙당은 스티코프의 지령을 받아 전국에 “3.1절 기념투쟁에 관한 지령”을 하달했고 제주도당은 이 지령문을 2월 16일에 받았다. 그리고 3.1 사건을 일으킨다. 3월 1일이 되자 제주민전은 3만 여명을 동원했다. 제주도 남로당은 군중을 선동하여 흥분시켰다. 군중들은 경찰서를 향해 행진했다. 경찰은 기마경찰대를 내보냈다. 이때 시위대는 대나무로 순경이 탄 말의 항문을 찌르고 때렸다. 말이 흥분하면서 날뛰자 어린아이가 상처를 입었다. 시위대는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고 선동했다. 경찰관들은 자위수단으로 총을 발사했고 이로 인해 6명이 사망했다. 이 날 발생한 시체는 선동하기 위한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3.10 총파업과 4.3사건으로 비화됐다.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 불가피론을 제창하고 미국으로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만나 한국의 정부수립을 도와야 한다고 설득했다.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 UN의 권위를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UN총회는 한국에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했고 UN한국 임시위원단을 구성했다. 소련은 UN 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했다. UN 임시위원단은 남한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UN에 건의했고 5월 10일에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됐다.
남로당은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남로당의 공격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차원에서 벌어졌다. 1948년 4월 2일 오전 2시, 김달삼은 훈련된 무장병들과 각 부락에 심어놓은 인원을 동원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5.10 선거가 파탄나자 미군정은 병력을 투입했다. 제주도만 국회의원을 2명씩이나 뽑지 못했다. 투표소를 기습하여 사람을 죽이고, 선거명부를 탈취하고 불태우고, 공무원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공비들은 온갖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다.
3. 군경의 토벌작전
4월 3일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제주도 빨치산을 견제하는 세력은 경찰뿐이었다. 9연대는 오합지졸이었고, 남로당 첩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4월 20일, 국방경비대 총사령부는 5연대 제2대대를 제주도로 보내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의 통제하에 두었다. 바로 이 제2대대장 오일균 소령이 남로당이었다. 오일균은 후에 정체가 탄로나 총살된다.
9연대에는 김달삼과 내통해 있는 남로당 조직책이 3명 있었다. 오일균, 문상길, 이윤락이었다. 문상길과 오일균, 김달삼은 모의하여 5월 20일, 9연대 사병 41명을 탈영시켰다. 탈영병은 경찰서를 습격하고 살해하고 트럭을 빌려 입산했다.
9연대장인 김익렬은 남로당에 넘어갔다. 사전정보가 누설되고 김익렬과 김달삼 사이에 비밀회담이 있었다는 사실이 누설됐다. 김익렬은 5월 5일부로 파면되었고 5월 6일부터 박진경 중령이 부임했다.
11연대 작전(1948. 5.15-7.23)
5월 4일, 경비대사령부는 11연대를 창설했다. 박진경이 11연대 연대장이 되었다. 미군정은 박진경의 토벌의지를 높이 평가하고 그를 대령으로 진급시켰다. 박진경이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펼치자 김달삼은 문상길 중위에게 박진경을 살해하도록 했다. 암살조는 잠에 든 박진경을 살해했다. 6월 21일, 박진경 대령의 뒤를 이어 최경록 중령이 11연대장에 부임했다. 부연대장은 송요찬이었다. 최중령은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했고 공비 가족에 사상계몽을 실시하면서 갱생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런 조치들로 공비들은 고립되어 산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최경록은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독일산 셰퍼드를 잠자리 옆에 두었다.
9연대 작전(1948.7.23-12.29)
국방경비대사령부는 9연대를 재편성했다. 11연대장에 송요찬 중령을, 부연대장에 서종철 대위를 보임했다. 제주도 상태가 소강국면에 들어섰다. 이 기간에 8월 21-25일에 해주에서 인민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남조선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이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되어있었다. 이를 위해 전국각지에서 ‘지하선거’가 실시됐다. 김달삼은 해주연설로 극찬을 받았다.
여-순반란사건
남로당은 5여단 예하 14연대 중1개 대대가 제주도로 증원된다는 기밀을 탐지했다. 남로당은 14연대를 이용해 역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여순 반란군들은 대구 - 제주도에서처럼 경찰, 군인, 기물을 파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부는 10월 21일 반군토벌 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제2연대 작전(1948.12.29-1949.2.28)
대전에 있던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가 제주도로 투입됐다. 제주도 공비는 암암리에 조직을 확대하고 있었다. 제2연대장은 항공기와 함정의 지원을 받아 토벌작전을 펼쳤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대장은 선무작전을 통해 민심을 수습했다. 주민, 무장공비들이 줄이어 하산했고 주민들의 제보로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작전(1949.3.2-5.15)
제 2연대의 작전의 효과에도 무장공비의 반란은 시들지 않았다. 꾸준히 청년들을 납치해 훈련하고 세력을 양성했다. 1948년 9월 5일 국방경비대가 육군본부로 바뀌었다. 육본은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고 참모장은 함병선 대령이었다. 선무작전은 그대로 수용했다. 귀순자들은 늘어났다. 그리고 혼성부대를 만들어 꾸준히 공비를 소탕했다. 육본은 공비의 세력이 소탕되었다 판단하고 제주지주전투사령부를 해체했다. 1949년 7월 7일에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한라산 정상에 평정비를 건립했다. 고건, 박원순 등의 좌익들은 함병선을 부정적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독립제1유격대대 작전(1949.8.13-12.28)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되자 제2연대는 8월 13일, 제주도 경비 임무를 독립제1유격대대에 인계하고 인천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공비는 매우 끈질겼다. 꾸준히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 양민을 살해하고 방화를 계속했다. 이에 정부는 4개월간 공비 소탕작전을 펴고 있던 해병대 사령부를 보냈다.
해병대 사령부 작전(1949.12.28.-50.6.25)
해병대도 민심작전을 우선시했다. 해병대는 1950년 2~5월까지, 한라산 공비토벌작전을 과감하게 전개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사령부의 1개대대가 군산-장항지구에 투입됐다. 축소된 해병대 사령부는 제주도에서 신병 3,000명을 훈련시켜 증편한 다음, 인런상륙작전에 참가했다.
6.25 발발 이후의 제주도 공비토벌
전쟁기간 중에는 공비들이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1년 8월 31일까지 마을을 습격하고 경찰, 군인, 민간인을 살해하고 부상을 입히고, 가옥에 불을 질렀다. 이들은 제주도방송국과 서귀포 발전소를 습겨했다. 좌파들은 4.3 사건이 미군과 대한민국이 제주도 주민을 괴롭힌데 대한 저항권의 행사라고 주장하지만, 제주도 공비들은 남과북이 전쟁하는 사이에도 만행을 계속 저질렀다. 제주도 공비가 또 기승을 부리자 정부는 전투경찰대를 편성하여 공비토벌을 다시 시작했고 한라산 공비를 완전 소탕하게 되었다.
3. 좌익세력의 역사왜곡
좌익들은 4.3사건을 민중항쟁, 통일운동, 민주화 운동으로 뒤집었다. 제주시에는 ‘4.3평화공원’이 있고 ‘4.3평화기념관‘이 있다. 진실화해위는 4.3사건을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폭동”이라고 정의했고, 김대중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누명을 밝혀줘야 한다.”고 했다. 좌익들은 “제주 4.3은 공산당의 폭동”이라는 부분을 떼어내고 선동했다.
김대중의 발언이 있은 후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4.3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좌익들을 위주로 4.3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진상조사위는 9개월 동안의 접수기간에 희생자를 접수했는데 마구잡이식이었고 여기에는 희한한 사람들이 희생자로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조사한 숫자는 2003년 4월 29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정부보고서)’에 그대로 반영됐다.
노무현이 집권하자 발행된 정부보고서는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이 작성했다. 단장은 박원순이었다. 박원순-강만길-김삼웅 등 좌익들이 작성한 정부보고서가 4.3위원회에 회부됐다. 심사를 하면서 문제점을 느낀 사람들과 여러차례 마찰을 빚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무시당했다. 좌익들은 끝내 역사를 뒤집었다.
정부보고서는 북한의 논문, 책과 같은 목소리를 낸다. ‘4.28 협상’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김익렬의 유고에도 없으며, 북한 논문에도 없다. 좌익들은 ‘4.28 협상’을 가공했다. 미국의 잘못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북촌리 사건, 오라리 사건도 왜곡되었다. 정부보고서는 유격대의 만행을 누락했다.
후기
혹여라도 중요한 내용이 요약되지 않았거나 잘못 전달된 부분이 있으면 나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도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한두 번 일어나면 우연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면 의도적으로 벌인 공작이다. 이 역사 책을 읽고나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잘할 수 있을까를 느꼈다. 한국의 좌익사관은 싸이코패스 사관임에 틀림없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모두 동일한 패턴으로 발생했다. 우선 지휘부가 등장해 지하를 다스리고 세상에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그리고 시체를 동원한다. 무기를 탈취하고 경찰서와 교도소를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쑥대밭으로 만든다. 대구폭동, 4.3 폭동, 광주폭동은 패턴이 모두 동일하다. 여기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대구 사람들은 대구폭동을 민주화 운동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대구 사람들은 대구 폭동이라고 한다고 지역의 명예가 실추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광주 사람들과 제주 사람들은 민중항쟁이라고 주장을 하는가? 폭동을 인정한다고 지역의 명예가 실추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부정한 사건을 왜곡하는 게 지역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거라 생각한다. 부디 광주와 제주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
라인홀드 니버는 말했다. “현대 사회는 도덕적인 개인도 비도덕적인 사업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다.” 현 좌익의 역사사업은 비도덕적인 사이코패스 사업이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좌익사관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좌익들이 외치는 ‘민중’과 ‘평등’의 구호는 겉으로는 매우 달콤하게 들리지만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없다면 좌익 수뇌부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오길남 박사가 그러했다. 제대로 된 판단력과 통찰력이 없으면 제대로 된 애국을 할 수 없다.
끝으로 배움의 기회를 주신 지만원 박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박사님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현산님의 댓글
현산 작성일
참 잘 정리하셨네요!
4.3논쟁이 벌어지는 판에 이대로 내어놓아도 군계일학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읽기에 글이 좀 길다는 불평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방대한 사건을 이 정도의 길이도 아니고는 전달할 방법이 없겠지요. 수고 하셨습니다. 이 글이 젊은이들에게 많이 퍼졌으면 합니다. 단 지만원박사님 책에 근거했음만 밝히시고.
송석참숱님의 댓글
송석참숱 작성일이 독후감 훌륭합니다. 일베등 널리폈으면 좋겠습니다.
장학포님의 댓글
장학포 작성일
훌륭한 독후감을 주신 임진수님의 글에 찬사를 드립니다.
일목요연하게 작성된 보고서같은 글은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하셨습니다.
독후감의 글로 끝이지 않고 홍보자료로 거듭 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