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영광군 대학살자, 2만1,225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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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碧波郞 작성일13-02-14 09:12 조회4,289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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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빨치산들은 이렇게 잔혹합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禽獸입니다.
그 빨치산을 미화한 문화·예술 작품을 만든 사람들은 모두 돌아이들입니다.
그 돌아이들이 만든 작품 모두 쓰레기들입니다.
무기가 없으니까 죽창이나 칼로 죽였다
6·25 전쟁 당시 열세 살로 빨치산 소년단으로 활동했던 김모씨의 증언.
당시 김씨는 백수면 대전리에서 살았다.
“인민군이 패퇴한 후 빨치산들에게는 무기가 별로 없었어요. 갓봉에 있는 빨치산 본부에도 따발총하고 소련제 장총 몇 자루 그게 전부였어요. 정확히 몇 명인지 기억은 못 하지만 잔존 빨치산의 숫자도 별로 안 됐어요. 경찰이 우리가 있던 갓봉을 공격해 오면 우리 소년단들이 돌을 굴려서 못 올라오게 하는 역할도 했죠. 처음에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는 형식적이었지만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을 했어요. 나중에는 막무가내로 죽였어요. 주로 군경 가족들이 희생됐죠.
빨치산들은 보복을 막으려면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일가친척들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죽였어요. 나도 네댓 번 우익쪽 사람들을 죽이는 곳에 있었는데 무기가 없으니까 죽창이나 칼로 죽였어요. 학살 후 구덩이에 묻기도 했지만 개울에 버린 시체도 많았어요.
갓난애들은 자루에 담아서 그냥 던져버렸구요. 빨치산들에 의해 처형 명령이 내려진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개울가로 데려가다 보면 이미 80%쯤은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요. 공포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그 때는 무덤덤하게 죽이라면 죽였어요.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는데, 백수면에서 우익 인사를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최모라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칼을 사용했어요. 한 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서 우익쪽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그 날도 최모씨는 칼을 사용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사람들 앞에서 칼에 묻은 피를 빨아먹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죽음을 봤기 때문에 죽음에 무감각했던 우리들도 전율을 느낄 정도의 섬뜩한 광경이었어요. 빨치산에서 도망을 칠 수도 없었어요. 내가 도망치면 우리 식구가 몽땅 죽을 테니까요.”(後略)
9·28 수복 후 더 많이 죽어
김씨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당시 백 전무는 세 살이었고, 형 종인씨는 일곱 살이었다. 백전무의 아버지(백덕기)는 6·25 전쟁 당시 백수면 부면장으로 있었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던 백전무의 아버지는 비밀리에 우익 단체인 영광지역 대한청년단을 관리했다.
사단은 9·28 서울 수복 후에 벌어졌다. 후퇴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영광읍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전무의 아버지는 청년단원들과 함께 몰래 태극기를 만들면서 유엔군과 국군을 맞을 준비를 해 왔다. 1950년 9월29일, 소문대로 지프를 탄 미군 소속 흑인병사들과 국군이 영광에 들어왔다.
백전무의 아버지와 청년단원들, 공산치하에서 숨죽이고 있던 영광군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에 나섰다. 흑인 병사들과 국군은 영광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中略)
유엔군과 국군이 잠깐 스쳐지나간 영광은 비록 인민군은 떠났지만 여전히 빨치산이 지배하는 인민공화국 치하였다. 좌익 세력에 의한 우익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과 학살이 시작됐다. 유엔군 환영에 나섰던 우익쪽 민간인들이 좌익들에게 완전히 노출된 것이다.
기자와 만난 대부분의 증언자들은 이 유엔군 환영식으로 인해 영광지역의 피살자 수가 크게 늘었다고 말하고 있다. ‘6·25 사변 피살자 명부’에도 9·28 서울 수복 이후의 피살자 수가 이전의 피살자 수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빨치산 소년단 출신 김모씨의 증언을 통해서도 그같은 사실은 입증이 된다.
“유엔군 환영식이 있은 다음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빨치산들은 유엔군이 온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앞잡이들에게 주민들의 행동거지를 잘 살펴보도록 지시해 놓고 있었어요. 그 때부터 더 많이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참혹한 광경에 눈이 멀어버리다
백전무의 가족 전체는 유엔군 환영대회 직후 좌익들에게 끌려갔다.
손위 형 종인씨는 마침 가족들이 끌려갈 때 밖으로 놀라갔다가 禍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웃집에서 “집으로 가면 큰 일 난다”며 숨겨 주었다고 한다. 이웃집에 숨었다는 사실을 안 빨치산들은 죽창을 들고 와 종인씨를 찾았다. 김모씨의 표현을 빌면 “씨를 말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변기통에 몸을 숨겼던 종인씨는 그 곳을 무사히 탈출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백전무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이웃 아주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백전무는 가족이 좌익들에게 끌려갈 때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었다.
감옥으로 개조한 면사무소의 창고에 종인씨를 제외한 가족들이 전부 갇히게 되었는데, 백전무가 심하게 울었다고 한다. 마침 그곳에는 좌익활동을 하던 백전무의 외가 쪽 먼 친척이 있었다. 백전무가 심하게 울자 그 친척은 할머니에게 백전무를 데리고 나가 있으라고 했다.
백전무를 업고 창고 감옥에서 나온 할머니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백전무를 맡겼다. 백전무가 창고에서 나온 직후 좌익들은 백전무의 가족들을 처형했다. 좌익들은 백전무의 할머니를 찾아와 백전무를 내놓으라고 했다. 백전무의 할머니는 백전무가 하도 심하게 울어서 속이 상해 집에 오는 길에 버렸다고 했다. “내 자식이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손주가 뭐 그리 대수냐”며.
좌익들이 돌아간 후 할머니는 그 길로 친정으로 피했다. 나중에 백전무의 할머니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백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좌익들이 그 아주머니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 아주머니는 이미 백전무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 놓고 있었다. 좌익들은 백전무 대신 그 아주머니를 살해했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희생으로 백전무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좌익들은 백전무의 가족을 학살한 후 백전무의 고모 부부 등 친척들까지 찾아내 학살을 했다. 그렇게 해서 백전무의 4촌 이내 친척 26명이 살해된 것이다. 백전무의 가족들이 학살된 곳은 현재의 백수 초등학교 옆에 있는 대절산 기슭이다. 백전무의 가족들이 학살된 날은 음력 8월20일이다. 양력으로는 10월 1일이다. 9·28 수복 직후인 것이다.
백전무의 가족이 학살됐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먼 친척 할아버지가 몰래 백전무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백수면을 찾았다. 그 할아버지는 몇몇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대절산 기슭에 버려진 백전무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곳에는 백전무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친척 할아버지는 우선 어른 시신 13구만 찾아서 소달구지에 싣고 백전무의 집이 있는 백수면 논산리로 돌아왔다. 논산리로 돌아온 그 할아버지는 눈이 멀고 말았다. 참혹한 학살 현장을 본 충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백전무가 아버지의 시신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 끝난 지 8년여가 지나서였다. 1961년에 아버지의 묘소를 이장할 때였다. 백전무는 그때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가슴 속으로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아버지 두개골이 깨져 있었습니다. 몽둥이로 두들겨서 죽인 것이 분명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당시 어린 나이였던 형님이나 누님들이 맞아서 죽을 때의 고통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습니다.”
댓글목록
강유님의 댓글
강유 작성일
625때 인민군이 전라도인을 유독 많이 죽인 이유 :
아따 전라도인들의 뒤통수랑께...
인민군 앞잡이해서 동네사람 죽여부렇당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