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의 상세상황. 파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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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루아 작성일12-12-24 12:36 조회3,442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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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시,
시위대들은 시내 곳곳에서 무차별적으로 발포를 했고, 전남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LMG 2정을 설치하고 헬기, 도청 및 시가지를 향해 무차별로 발포를 했다. 시위대는 지프차에 수류탄 1상자와 LMG 1정을 설치하고 도청 점거를 시도했고, 국민은행 앞에 다이너마이트 1차량 분을 놓고 도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카빈총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5거리에서 도청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이동했고, 광주은행 본점에 도착한 트럭이 시위대에 30여 정의 카빈총을 분배했다. 호남전기에서 카빈 180정 및 실탄 900발을 탈취했다. 영암경찰서에서 카빈42정, M-1 14정, LMG 3정, BAR 3정, 권총 10정을 탈취했다. 광주연초제조찬에서 카빈 101정을 탈취했다. 전남방직회사에서 카빈 188정 및 실탄 60발을 탈취했다. 해남계속지서에서 수류탄 47발을 탈취했다. 시내에서 민간버스 111대 및 경찰 지프차 1대를 탈취했다. 시위대는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 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여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때 진종채 2군사령관은“광주외곽봉쇄작전”을 성안했다. 작전내용은 계엄군을 광주시로부터 외곽지대로 전면 철수시켜 충돌을 막는 동시에 사태가 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광주시민에 의해 사태를 수습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점개념에 따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17시경,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외곽 이동을 명령했고, 윤흥정 사령관은 같은 시각에 이 명령대로 계엄군에게 즉시 외곽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6:30분,
전남도청상황실이 완전 폐쇄됐고, 3공수여단이 전남대에서 철수, 교도소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연행해 놓았던 수십 명의 극렬 시위자들을 천막을 씌운 트럭으로 수송했다. 이 수송과정에서 일부 공수대원들은 전날, 광주역과 전남대 등에서 시위대에 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천막 안에 최루탄과 가스를 투입하고 진압봉으로 가격하거나 군화발로 구타하였고, 그 결과 여러 명이 사망했다.
16:50분,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청을 지키던 계엄군에 철수를 명했고, 이에 11공수 3개 대대 및 7공수 35대대 1,200명의 병력은 17:00시에 장갑차를 선도로 하여 전남도청을 출발, 공포를 쏘면서 전남대로 철수한 후, 7공수 33대대를 합쳐 총 5개 대대를 차량제대와 도보 제대로 나누어 시 외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주시는 시민군에 의해 완전 탈취되었고,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른바 해방구가 된 것이다.
17:00시,
총기를 소지한 시위대들은 조를 편성하여 정찰활동, 도청감시, 외곽도로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했고, 이로부터 소위‘무장시위대’가 본격적으로 시위를 주도하는 국면이 전개됐다. 도청이 완전 점거 당했고, 광주 전 지역에 행정이 마비됐다. 이들은 총을 들고 탈취한 차량으로 전남 전 지역을 질주하면서 시민참여를 독려했다. 장갑차 및 9대의 차량으로 총기를 난사하면서 광주 교도소를 습격했다. 조선대학교에 있는 계엄군에 난사하고 탈취한 총기를 시민에게 분배했다. 나주 반남지서에서 카빈 38정 및 실탄 270발을 탈취했다. 해남 옥천지서에서 M-1 555정, 칼빈 61정, AR 소총 1정, LMG 1정을 탈취했다. 장성 황동지서에서 M-1 13정을 탈취했다. 장성 진원지서에서 카빈 47정, M-1 1정, LMG 1정, AR 1정을 탈취했다. 화순광업소 예비군 대대, 광주 대한통운, 광주고교, 강진 성진 지서 등 무기고를 급습하여 수량 미상의 무기를 탈취했다. 한국낙농(김복용 대표)을 급습하여 매일 우유 900상자, 100만원 상당의 요구르트를 탈취했다. 삼립식빵에서 식빵 676상자, 열일식품에서 식빵 86상자 및 592개를 탈취했다. 대청섬유, 농성주유소 등에서 휘발유 6,240리터, 경유 9,046리터를 탈취했다.
17:15분,
전남도경 상황실이 완전 폐쇄되고 지휘부가 광주공항으로 피란함에 따라 경찰병력도 운동복으로 위장하여 광주공항으로 철수했다.
17:20분,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여 광주교도소 및 광주에서 담양으로 빠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한 배치를 시작했다. 3공수 15대대가 31사단 병력과 임무를 교대하고 있을 때, 시위대가 카빈총을 가지고 고속버스 2대에 분승하여 돌진해오면서 기습사격을 가했다. 이에 공수부대원 1명이 중상을 입었다. 공수단은 시위대로부터 고속버스 2대와 트럭4대를 빼앗았고, 카빈, M-1 등 4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18:50분,
외곽도로 봉쇄 명령에 따라 20사단 61연대는 광주에서 전주로 나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송암동 및 광주톨게이트에 배치됐고, 62연대는 통합병원 입구, 송정리 비행장, 전교사에 배치되었다.
19:30분,
교도소를 방어하는 3공수 병력과 무장 시위대 사이에 여러 차례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담양에 거주하는 시민 4명이 픽업 차량을 타고 가다가 시위대의 카빈총에 맞아 그중 2명(35,37세)이 사망했다. 이 때 광주 지역에 있는 주유소는 휘발유를 달라는 대로 주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드럼통 단위로 휘발유를 집으로 날라 갔다. 네 번째 휘발유를 운반하다가 교도소 앞에서 총을 맞아 부상당한 민간인이 훗날 유공자가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도청을 지키던 11공수와 7공수 35대대가 차량제대와 도보 제대로 나누어 주남마을로 후퇴하던 도중 차량 제대가 전남대 병원, 남광주시장, 숭의길고 부근을 지나면서 시위대로부터 차량돌진 공격과 사격을 받아 군차량 3대가 전복되고 장교 1명과 사병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20:00시,
전남도청은 시민군에 완전 접수되었다.
21:00시,
육군본부의 1개 연대 추가투입 지시에 따라 20사단 60연대 제2,제3대대 및 포병연대 병력 88/1,514명이 성남비행장을 출발했다.
22:10분,
효천역 부근에서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61연대 제5 및 제6중대와 무장시위대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지프차의 선도 하에 트럭 버스 등 6-7대의 차량을 타고 목포 쪽으로부터 오다가 61연대와 교전이 벌어져 시위대 버스 2대가 전복됐다. 이 교전상황을 보고 받은 연대장은 5월 22일, 00:15분경에 제1중대와 수색중대를 증원시켜놓고 있었다.
01:00경,
시위대는 광주 쪽에서 버스 5-6대에 분승하여 다시 쳐들어 와 교전을 했고, 위 두 교전과정에서 시위대 10여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공수대원 2명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대로부터 총기 16정과 실탄 500여발을 노획했다.
이날 시민군이 탈취한 차량 수는 1개 사단 규모에 해당하며, 무기는 2개 연대 분에 해당한다. 시위대의 무기가 차량돌진, 돌, 화염병 등에서 소총, 기관총, 수류탄, 다이너마이트로 바뀐 것이다. 이들은 복면을 쓰고, 전남의대 11층 옥상 및 수많은 고층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계엄군을 향해 난사했고. 도청, 도경, 검찰청, 법원을 점령했다. 3공수 상황병이었던 김치년씨와 한동석씨의 차분한 수기에서 나타났듯이 이들은 5월 21일 새벽 5시경에 이미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공중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1일부터 광주시내에 국한돼 있던 소요가 목포, 영암, 나주, 광산, 담양, 장성, 고흥, 해남 등 17개 도시로 확산됐다.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군 병력은 20사단 308/4,778명, 3여단 265/1,216, 7여단 82/604, 11여단 163/1,056, 31사단 14/461, 전교사 107/2,144, 계 939/11,198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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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32년의 세월속에 모든 정보는 다나왔다
조갑제씨는 민 주화운동이라고
지 선생님은 북한군을 개입시키려하나
탈북자들의 의견을 개입시킬일은 아니다
5.18은 어디까지나 호남인들의 잘못인식으로
군인과학생끼리 싸웠으면 간단히 끝났을것을
시민들을 합세시켜 그큰 비극을자아냈다
민주화시대란 지금도 그런행동하면 당장 구속된다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인간이란 그시대 법에 따라 살아야하는법
훗날 법을바꿔 따진다는것은 파렴치한
어리석은 자들의 행동이다
진보[좌파]들은 국민과 역사앞에 사과하고 반성하며
그들 스스로 5.18을 제조명해 마무리하고
역사뒤짚는데 한몫 한 자들은
제 갈길 가는것이 현명한 방법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