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의 상세상황. 파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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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루아 작성일12-12-24 10:11 조회4,957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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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의 상세상황
5월 21일은 수요일 (맑음) 20일에서 21간의 밤은‘철야시위’의 연속이었다.
5월 21일 0시부터 새벽 4시경까지 3천여 명의 시위대는 대형차량을 앞세우고 11공수여단 주둔지인 조선대에 몰려와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01:45분,
전교사는 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습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31사단장에게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31사 96연대 13/444(장교/여타 계급)명이 02:45분에 광주교도소에 배치됐다.
02:00시,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세무서에 난입하여 방화했으며 세무서는 전소됐다. 세무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카빈소총 17정을 탈취했다. 이 때 광주시외의 모든 전화통화가 두절됐다.
03:00시,
도청, 광주역, 광주세무서, 가톨릭센터. 공단입구 등에서 4만여 명의 시위대가 구호와 ‘전우가’를 제창하며 철야 시위를 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을 해제하라. 시민은 도청 앞에 모이자.>
이 날의 유언비어는 다음과 같다.
<고교생 중심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화염병을 투척, 군장갑차를 공격하고 있다. 우리들의 항쟁으로 신 총리 이하 전 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도청건물 3개동과 차량 12대를 불태웠고, 광주역, 월산동사무소를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의 피해사항= 군인사망 2명, 군인부상 5명, 경찰중상 6명, 경찰경상 7명, 민간인 사망 2명.
04:00시,
기차를 타고 온 20사단 61연대(82/14,13)가 송정리에 내려 전교사에 도착했다.
04:30분,
계엄사령관(이희성)이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계엄군을 외곽으로 빼내고, 1개 연대를 추가 투입하며 ‘폭도소탕작전’은 5월 23일 이후 의명 실시하고 군에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결심했다.
05:20분,
역전파출소, KBS가 연소 중에 있었고, 전남대에서 시위대에 포위된 3공수여단에서 9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06:00시,
시위대는 노태동, 금남로, 광주교도소, 서부 변전소 등에서 가정을 방문, 합세를 호소했고, 버스25대, 트럭 4대를 탈취했다. 06:25분, 가스 살포용 헬기 5대가 전교사에 도착했고 08:00시를 기해 전교사 지역에 비상경계령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08:00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가 20사단 지휘부(당시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지휘용 지프차 14대와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사병 1명 실종후 복귀, 병사 2명 부상).
시위대는 그레이하운드 1대, 트럭 2대를 몰고 송정리로 이동하면서 “시민이여 동참하라”며 마이크로 선동했으며, 가톨릭센터와 한일은행 앞에서 5,000여명이 버스 1대, 용달차 1대, 군용 지프차 1대를 탈취했다.
한편 새벽 4시에 상무대에 도착한 61연대는 전교사 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광주교육대학으로 이동했지만 돌고개 지역에서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혀 전교사로 회군했다. 공수대는 시위대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틈을 내서 도로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11공수의 61, 62대대는 도청 앞과 금남로 앞에, 63대대는 노동청 방면에, 7공수 35대대는 광주천 방면에서 전남도청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를 완료했다. 이후 8시가 되자 도청 앞에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시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했다.
08:30분,
25세가량의 여자가 광광호텔 앞에서 “전두환의 동생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인계하라. 보내지 않으면 불을 놓겠다” 며 소리를 질렀다. 이에 계엄군이 호텔을 차단했다.
도청 앞에서는 민간시체 2구를 가져와 도지사더러 인수해 가라고 주장했다. 제일은행 앞에서는 학생들이 각목, 삽 등 흉기를 들고 버스 2대, 군 지프차 2대를 탈취했고,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08:50분,
20사단 사령부 및 61연대(114/1,555명)가 상무대에 도착했다. 이날 총으로 완전 무장한 시위대는 광주교도소(사상범 170명을 포함한 2,700여명 수용중)를 6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공격했다.
08:58분,
시위대 400여명이 버스 2대와 트럭1대에 나눠 타고 교도소로 접근한다음 돌아갔다.
이후10:22분경: 150여 명의 시위대가 버스 1대, 트럭 3대를 타고 교도소 앞을 2-3회 선회한 후 광주 쪽으로 갔다.
11:02분, 시위대 50여명이 장갑차 1대, 트럭 1대, 군용 지프차 1대를 타고 교도소에 접근했다가 돌아갔다.
11:38분, 경찰 기동순찰차 등 20여 대로 교도소에 접근했다가 돌아갔다. 이는 교도소 공격 작전계획을 세우기 위한 사전 정찰행위였던 것으로 판단됐다.
11:46분, 교도소를 지키는 31사 경계 병력에 실탄이 공수됐다. 무장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쌍방 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09:00시,
탈취한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명으로 600여명의 시위대가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계엄사 376쪽)를 탈취했다.(검찰 조사로는 56대, 5.18관련사건수사결과 98쪽).
시위대는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 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아침 10시,
시위군중 5만여 명이 경찰가스차, 소방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전남대에 주둔 중인 3공수여단을 공격하러 왔다. 시민군 측 김해범(조선법대1년) 및 전옥주(조선대 무용과 중퇴) 등이 차량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시민의 참여를 선동하고 다녔다. 시위대는 10만으로 늘어나 광주 시가지 전역 및 나주 등 인근 지방으로 확산돼 가고 있었다.
이 때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시민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시위대는 <금성센터 매점>에 난입하여 “경상도 출신이니 한번 당해 봐라”며 상가에 방화했다. 또한 대창석유, 동아석유, 나주 대중 주유소 등의 주유소에서 휘발유 23,484리터, 경유 20,701리터를 탈취했다.
10:00시,
31사단장(정웅)은 <시위대의 주장이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수습보다는 정치적인 수습이 강구돼야 할 것>이라는 건의를 전교사에 했고, 전교사 사령관(윤흥정)은 2군 사령관(진종채)에 이를 보고했다.
광주사건에 대한 보도를 통제해오던 계엄사는 이날 오전 시간에 처음으로 사태의 진전 상태를 보도했다.
“광주 소요사태는 5월 18일에 시작됐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들이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하여 사태가 악화됐다. 21일 오전7시 현재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 조속히 평온을 찾도록 대책을 강구하겠다.”
국민의 동요를 의식하여 사태를 축소 보도했던 것이다.
도청 앞에서는 시위대 대표 4명이 7공수 35대대장의 안내로 도지사(장형태)를 만났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즉각 철수>, <연행자 석방>, <과잉진압 사과>, <계염사령관과의 면담주선> 등을 요구했다. 도지사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후 도청 앞에 마이크를 설치하는 중 광주시장(구용상)이 시위대에게 다가가 진정하기를 설득하려 하자 시위대는 각목과 화염병을 던져 연설을 중단시켰다.
이에 도지사(장형태)는 연설을 포기하고 헬기를 타고 다니며 <공수부대를 철수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들은 자제하고 생업에 복귀하여 달라>는 방송을 했지만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무조건 12시까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이 갑자기 체신부 장관으로 내정되어 소준열 장군(당시 종합행정학교 학교장)이 전교사 사령관에 임명되어 전교사에 도착했다. (이취임식은 다음날인 5월 22일 10:00시에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서리(전두환)에게 ‘체신부장관을 군에서 추천해주었으면 한다’ 는 뜻을 전달했고, 이에 전두환은 곧바로 계엄사령관(이희성)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으며, 계엄사령관(이희성)은 곧바로 그와 친분이 있는 동기생 윤흥정(육사8기)을 추천했던 것이다.
11:00시,
도청 앞에는 총을 든 격렬 시위자들이 포함된 수 만명의 시위대가 장갑차 버스 트럭 등 수십대의 차량으로 공수부대를 향해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11공수 61대대장은 여단본부에 긴급 대책을 강구해 달라 SOS를 쳤지만 여단 참모장은 <선무활동으로 시위대를 해산하고 도청을 사수하라>는 엉뚱한 지시만 반복했다. 견디다 못해 63대대장은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헐어 개인당 10발씩 나누어주면서 위급할 때 명령에 의해서만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11:15분,
성남비행장을 출발한 61항공단의 수송용 헬기(UH-1H) 10대가 13:10분에 전교사에 도착했다
추천 4
댓글목록
초보자님의 댓글
초보자 작성일
증언록을 보면
20사단의 차량 탈취 사건의 증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세아 자동차 탈취 증언자들은 있는데, 유독 20 사단의 차량 탈취 사건에 참여한 사람의 증언기록이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혹시 보신분이 있나요?
그리고 전남대에선가 공수부대 증언을 보면 21일 새벽녘에 시민군들이 발포한 사실이 나옵니다.
21일 도청앞 발포전에 이미 시민군들은 무장을 했죠.
하루아님의 댓글
하루아 작성일이런.. 12시에서 짤렸네요.. 뒷부분 이어서 다시 올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