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안철수의 우상화는 중대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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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반도 작성일12-11-12 15:10 조회3,3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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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안철수의 우상화는 중대범죄
임직원 1,000명 남짓의 안랩연구소 창업자 안철수가 50년간 수백만 명의 생계와 복지를 책임져온 삼성, LG를 삼성동물원, LG동물원이라며 막말을 서슴지 않더니 달랑 논문 다섯 편으로 ‘세계적 석학’을 자처하며 국민을 우롱하고, 정치경험이 전무한 이공계 인사가 정치개혁의 주체를 자임하는 희대의 정치코메디가 대선정국을 강타하고 있다.
안철수는 더 이상 까불지 말고 대한민국의 경제영웅들 앞에 무릎꿇는 겸손함으로부터 정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김일성이 60여전 전에 이미 써먹은 낡은 수법을 되풀이 하는 것이 새정치는 아니다. 21세기 개인우상화는 그 자체로 중대범죄라는 것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1. 자칭 ‘불세출의 항일영웅’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북한이 김일성의 대표적 항일무장투쟁으로 찬양하는 전투이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김일성이 1937.6.4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를 인솔하고 일제의 전략상 요충지인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 (현재 양강도 보천군)를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전투를 말한다. 북한에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 중 가장 큰 업적으로 여기고 있다.
보천보 전투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937년 5월 하순 주력부대에서 선발된 우수한 대원들로 원정대를 편성하여 김일성이 직접 백두산지구 비밀근거지의 곰산 밀영에 와 보천보일대를 정찰하고 국내진공작전 준비를 완료했으며 1937년 6월 4일 밤10시 주력부대에서 선발된 1백50여명의 원정대를 김일성이 지휘하여 전투를 시작했다. 이 전투로 일제의 경찰관주재소, 면사무소, 산림보호구, 농사시험장 등 일제의 모든 기관들이 불타고, 일본인들은 처형당했다.
북한은 정권수립후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1955년 8월 7일 보천보에 「보천보혁명박물관」의 문을 연후 1963년 새건물로 단장하였고, 1967년 6월 량강도 혜산시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세우며, 김일성의 우상화에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당시 백두산 일대 조선과 중국 간의 국경지역인 장백을 중심으로 항일투쟁활동을 벌이던 동북 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에 침투하였다. 그들은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조선민중에게 알린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물자를 노획하였다.
이때 일경 7명이 죽었으며 여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전해지나 일각에서는 일본인 요리사와 유탄에 맞은 갓난 아이가 사망했을 뿐 그 피해가 적었다고 전해지는 등 구체적인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일제탄압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동아일보》에서 두번이나 호외를 발행하여 보도하였으며, 조선인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공격부대가 김일성의 부대가 아니라 또 다른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이끈 부대였다 는 설, 보천보가 인구 1,300여 명의 작은 마을이고 무장병력은 주재소 순사 5명뿐이었으며 이들을 상대로 한 물자보급투쟁이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을 볼 때, 북한에서 역사적인 항일 승리전투라고 하는 것은 과대평가이다.
2. 명품 항일영웅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이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ㆍ최진동(崔振東 : 일명 명록(明錄))부대의 1개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 전과 대안(對岸)의 활발한 독립군 활동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 (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해왔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에 매복시키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은 잠복해 있는 독립군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으며, 이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격하였는데, 독립군은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이화일(李化日)소대장의 교묘한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보명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郞)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켰다. 홍범도ㆍ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득책이라 판단하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安山) 촌락 후방고지에서 수세를 취하였다. 6월 7일 새벽 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 빈 안산촌락 으로 돌입할 때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 부대는 니히미(新美) 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하였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 부대는 야마자키(山崎) 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 부대가 고려령(高麗嶺) 서방에 도착하였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은 일본군은 소수의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밀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 되었다. 봉오동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사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 십리를 뻗은 계곡지대이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민가는 상촌(북촌), 중촌(남촌), 하촌 등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독립군은 6월 7일 아침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부대를 새로 재편성하였다. 1ㆍ2ㆍ3ㆍ4 중대의 각 책임자로 이천오(李千五), 강상모(姜相模),강시범(姜時範), 조권식(曹權植)을 정하였으며 별개로 2개 중대를 두었다. 안무(安武)는 사령부부관으로, 이원(李圓)은 연대부장교로,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였으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홍범도장군이었다. 작전진행은 다음과 같다.
제1중대는 상촌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쪽고지에, 제3중대는 북쪽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남단 밀림 속에 매복하고,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하여, 일본군 주력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 중에 들어설 즈음에 일제히 사격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장군의 명령에 따라 동ㆍ서ㆍ북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하니 일본군은 갈팡질팡하면서 쓰러졌다. 오후 3시 소좌 야스카와는 가미야(神谷) 중대와 나카니시(中西) 소대를 지휘하여 동쪽고지에 매복한 강상모 중대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강상모 중대는 이를 격퇴하여 100여명을 사살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온성 유원진(柔遠鎮)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아군은 장교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내었을 뿐이었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이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 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3. 명품 항일영웅 김좌진, 이범석의 청산리전투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ㆍ나중소(羅仲昭)ㆍ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하여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일대에서 10여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이미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온 의병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는 한편,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여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 3ㆍ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徐一)ㆍ김좌진ㆍ이장녕(李章寧)ㆍ김규식(金奎植)ㆍ최해(崔海)ㆍ정훈(鄭勳)ㆍ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국경에 가까운 밀림지대인 길림성 왕청현(吉林省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한편, 1919년 8월 이후에는 의병장출신인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및 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도 독립군의 침공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그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였다. 이처럼 활발한 독립군의 활동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일본은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소탕할 방법을 찾기 위하여 고심하던 중 1920년 10월의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이를 구실로 간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군의 간도출병에 앞서 중국군 측으로부터 독립군 ‘토벌’ 방침을 통고 받은 독립군부대들은 봉천성(奉天省)의 경계지역인 화룡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ㆍ삼도구(三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함께 북로군정서도 일단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하여 서로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였다. 연길현(延吉縣)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자, 부근의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더불어 일본군의 간도출병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하여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白雲评) 바로 위쪽의 고개마투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다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人馬)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安川)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의 매복지점으로 들어서자,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하여 일거에 그들을 전멸시켰다. 뒤이어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독립군의 정확한 조준사격에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였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김좌진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홍범도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와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공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오후 늦게 시작되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한 부대 400여명이 전멸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립군과 일본군은 군복의 색깔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자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 하였던 것이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ㆍ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어랑촌(漁郞村)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東正彦)부대의 일부였다. 곧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이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어랑촌일대의 치열한 접전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약화시키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날이 저물자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추격하는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 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하여 신속히 대피 하였다가 곧 전열을 정비,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에 대하여 역습을 감행하였다. 독립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攻守)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로 퇴각하였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가서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 두고 안도현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같이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00여명을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 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 정서군의 병력은 그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하여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4. 독립영웅 이범석 장군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에는 제2지대장으로서 미국군과 합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에는 광복군의 참모장(중장)이 되었다. 1945년 8월 18일에는 광복군 정진대(挺進隊)의 일원으로 정준하(張俊河)·노능서(魯能瑞) 등과 함께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의 협력 거부로 다음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일도 있었으며, 1946년 6월 정식으로 환국하였다. 1946년 10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 비정치·비군사를 내걸고 국가지상·민족지상의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주위로부터의 국수주의적 극우단체라는 비난도 받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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