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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반란을 되풀이안하는 근본해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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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력통치 작성일12-07-01 08:08 조회4,420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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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봄 광주 운동권은 청년·학생운동을 기본역량으로 해서 사회인권운동, 문화운동(다분히 사회주의 사실주의 문학 예술운동의 모방)이 왕성했으며 노동운동이 점차 달아오르고 여기에 교수, 문인, 정당인, 법조인 등 재야 원로 그룹이 지원하고 감싼다.

청년 학생운동은 '민청학련세대'(1·2차 '인혁당' 사건과 직·간접으로 연계된)와 이들이 배출한 전남대·조선대 후배 학생들이 '하나의 끈'처럼 연결돼 조직력이 확보된 상황이었다.

 

김일성 사상으로 세뇌된 학생들

그 결과 5·18비극을 더욱 참혹하게 치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광주의 적지않은 청년 학생들(남총련 등)을 북한의 김일성 주의적 사상이념으로 세뇌하고 의식화 해놓고 있다.

그것은 현지의 대학에서 총장 지도하에 출간하고 있는 교지 몇 쪽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문제의 교지(5·18이후 출간)의 글들을 일별하면 '광주5·18'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전남 광주의 '조선대학' 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총장 이돈명. 89년 3월 편집위원 이철규. 전자공학과3년)의 한 기고문(장문)가운데 일단이다.

◇한국역사를 미제침략 백년사로 씨부려댄 총장

"…반미투쟁의 기치를 더욱 높이 치켜세우는데 있어 남한을 45년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있는 미제의 침략과정에 대한 고찰은 반미투쟁의 구체성을 담보해 가열찬 반미투쟁을 벌이는 데 있어 기본적인 요건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흉악하고 파렴치한 침략자, 약탈자이며 세계자본주의의 우두머리로서 식민지, 반식민지를 비롯한 세계의 모든 진보적 국민들의 첫째가는 공동의 원수인 미제가 남한을 군사적으로 강점한지도 어언 45년이 흘렀다. 남한이 미제의 식민지가 된지 45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그의 예속과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주성을 유린당한 채 미제 침략의 역사, 냉혹한 시련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로 미화된 폭동과 반란

또한 여기서는 '제주도 4·3폭동', '여수·순천 군반란사건 등을 최상의 애국 행위로 다음과 같이 미화하고 있다.

"1948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제주도 민중의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그 끈질긴 저항을 잠재우려고 이승만 도당은 계속적으로 군병력을 증파하였다. 그러나 철저히 실패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0월 중순경 여수의 제14연대의 항전으로 이어진다. 국군통수권을 쥐고 있는 군정장관 딘소장의 출동명령에 불복하여 [제주도 출동 결사반대], [미국군은 즉시 철수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3천 여명의 군인들이 애국적 항거에 떨쳐 나섰다…" 그런가하면 한 학생은 '빨치산의 깃발' 이라는 기고문에서 북한의 주장을 교조적으로 수용 지금도 6·25전쟁을 '북침'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빨치산의 깃발

"…8·15 해방 후 북한은 민중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튼튼한 민주기지로 장성해 미국의 한반도 지배에 최대의 타격이 되고 있었으며 그 힘을 지원하는 사회주의 정치권이 그 주위에 강력하게 형성되었고, 이에 놀란 미국은 한국 땅을 사회주의 최후의 저지선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정치·군사·경제 등 모든 방면에서 지휘통치권이 다 준비된 상태에서 미국은 한국의 완전한 노예화를 위한 무력침공을 개시한 것이 한국전쟁이다…"

◇미군점령사

또한 위에 적은 '미군점령사'라는 기고문에서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1949년 6월 하순 미국 대사 무쵸는 주한미군사고문단장, 한국 국방장관, 내무장관 등을 모아놓고 '우리는 7월 아니면 8월에 북한을 토벌할 것을 결정하였다' 고 발언, 그 이후 1950년 2월 이승만이 일본에 있던 맥아더에게서 받아온 '북벌에 관한 밀계'에서 ①이승만의 군대는 일체 맥아더의 지휘하에 둘 것…⑤이승만의 군대는 내란 도발의 역할을…⑩맥아더는 전쟁 전후를 통하여 이승만의 지위를 보장할 것 등을 밝힘."

1950년 6월 20일 미대통령의 특사 덜레스는 주한 미군 및 한국군 고위급과의 회의에서 "내가 트루먼의 특사로 한국에 오게된 이유는 북벌준비 상태의 검토와 만일 부족한 점이 없다면 지체없이 북벌을 개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이제는 우리의 수확기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매우 흥분되어있다. 준비가 다 된 이상 북벌은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전쟁도발 직전에 미군 장교 가족들과 그 밖의 미국인들의 철수를 돕기 위해 공군과 해군을 동원, 수송작전을 폈다…" (같은책 170쪽)

 

'민중반란'의 지향은 無産혁명

이것이 오늘날 이른바 '5·18비극'을 80년대 초에 치른 지방의 한 대학교지에서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6·25전쟁에 대한 해석이다.

역사적 진실의 왜곡과 戱畵化의 정도에 있어서 북한의 그것을 오히려 능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5·18 광주민중반란'(이하 '광주민중반란')의 진수에 대해 총체적으로 재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요즘 나라의 정치상황과 사회기강은 더 말할 것 없고 나라의 기본적 지향인 國是마저 실종 상태로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 혼돈으로 국가 민족이 6·25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반란자들을 파묻은 망월동 묘지를 국립묘지로 만든 반역정부와 반역국회가 공존하고 있다.

'광주민중반란'의 총체적 지향은 한마디로 이른바 대사변의 기회를 포착한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플로레타리아혁명' 그것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이 반역발광질은 북괴공산군의 지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광주반란 당시 공산북괴 하수인들의 중추세력은 무뢰한, 노동자, 빈민, 무직자, 깡패, 양아치 등이다.

 

 

우리나라 빨갱이들이 우러러 받들던 金南柱(김남주. 94년 폐암으로 병사)는 '5월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이렇게 썼다.

 

◇5월 그날이 오면

 

여러분 일어나 주십시오.

광주교도소 삼사하에 계신 여러분

일어나 잠시 철창가에 서주십시오.

오늘은 그날입니다. 3년전

1980년 5월 그날입니다

그날이 오면 5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는 날입니다.

우리 주먹에 증오의 힘 모아지는

날입니다.

‥‥‥ 중략‥‥‥

여러분 이제 앉아 주십시오.

앉아서 잠시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5월 그날 누가 가장 잘

싸웠습니까.

…중략…

누가 과연 최후까지 싸웠습니까.

가장 잘 배운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소리쳐 주십시오.

가장 많이 가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소리쳐 주십시오.

5월 그날

착취와 압제와의 싸움에서

무기를 들고 최후의 그날까지

승리 아니면 죽음을 외치며 싸운

사람들은 가장 잘 싸운 사람들은

여러분처럼 배운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아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처럼 가진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받는

공장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가장 힘든 일하고 일년 삼백예순날

쉬는 날 하루도 없는 들녘의

농민들이었습니다.

가장 험악한 일하고 매일처럼

가장 천하게 일하고 매일처럼

천길 굴속에서 빠져 죽는

광부들이었습니다.

만길 하늘에서 떨어져 죽는 현장

인부들이었습니다.

배운것이라고는 여러분처럼 담밖에

넘을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

(도둑놈·강도 등 인용자 註)

이었습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여러분처럼

니기미 씨팔! 좇같은 세상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여러분처럼

손 달리고 발 달린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몸팔아 상품으로 팔아

쾌락의 도구로 팔아

배운자들 아는자들 가진자들

좋은 일 시켜주고

하루 세끼 겨우 빌어먹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최후까지 싸우게 했습니까.

선생들은 학생들은 책가방을 던지고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기는 했지만

목사들은 신부들은

십자가를 던지고

주먹을 불끈 쥐고 한길에

나서기는 했지만

무기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종이 비행기들 밖에는

날릴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가슴에 십자가 밖에는

그을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대지에 무릎을 꿇을 줄 밖에는

몰랐습니다. 그들은

 

여러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가진 것 없는 노동자 농민들로 하여금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들로 하여금

아는 것 없는 무식쟁이들로 하여금

아는 것 없는 부랑아들로 하여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최후까지

싸우게 했습니까.

그들에게는 선생이나 학생들처럼

뒤돌아 봐야

은행에 부어놓고 온 적금 따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목사나 신부들처럼

뒤돌아 봐야

그림같은 집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화이트 칼라

신사들처럼 뒤돌아 봐야

느긋하게 발뻗고 쉴 수 있는 방같은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죽기아니면 살기로 앞으로

전진해야 싸워야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 무기를

들고 최후까지 싸워야

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가진자들만이 배운자들만이 아는

자들만이

독점으로 누릴 수 있었던 것

자유, 밥, 평화, 행복

그따위 것들을

그들도 한번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처럼 그들도

뒤를 돌아봐야

잃어서 아까울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잃을 것은 압박과 가난의 쇠고랑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 실천문학사 88년 8월 중에서. 김남주는 이미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당시 대전, 광주 교도소 등에서 복역 중이었다.)

 

교도소 습격한 '무장반란잡떼들'

80년 광주 반란때 붉은 폭도화한 이른바 일부 '무장반란잡떼들'은 무려 3∼4회에 걸쳐 광주 교도소를 개방하려고 집요하게 습격했다.

80년 5월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살인범, 폭력배, 사기범, 파렴치범, 기타 잡범 등 3천5백 여명이외에 반국가 정치사상범인 북에서 남파된 미전향간첩 20여명, 남조선해방전선(남민전)관련 사범 10여명, 국내 국가보안법위반자 및 재일교포 간첩, 반체제 공안사범 시국관련 대학생(반미운동 징병 기피자 등) 150명 정도가 수감돼 있었다.

만약 당시 '민주화 운동을 빙자한 무장 반란잡떼들'을 가장한 붉은 폭도들에게 교도소가 점거되어 파옥됐다면 보다 엄청난 일(예컨대 도청광장이나 광주공원, 광주천변 등에서 경찰과 군인들에 대한 인민재판 등)이 전개됐을 것이다.

최초로 광주세무서를 불태운 반란잡떼들은 이어서 문화방송, KBS, CBS 등에 불을 질렀다.

세무서는 '인민의 혈세를 갈취한 복마전'이기 때문이며 방송국들에 대한 방화의 속셈은 광주 시민의 귀를 외부세계로부터 일단 차단하기 위한 일환책으로 볼 수 있다

광주 경찰서, 전남도경 등을 점거하고 시내의 전경찰관 파출소, 주재소 등을 완전 폐허화한 반란잡떼들은 마침내 기동장비(장갑차, 대형 소방차 등)를 동원, 약 50여명의 정예 무장대원이 여기에 탑승 집중사격을 퍼부으며 광주교도소를 정면 공격해 왔다.

교도소를 지키고 있던 국군 제3공수여단 1개대대(약 2백명)가 이에 응전, 일단 반란잡떼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반란잡떼들의 광주교도소 탈취작전은 매우 집요했다. 그후에도 6회나 공격을 계속, 이곳에서만도 28명의 희생(공수여단의 방어 총격에 피살)을 내고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폭도들에게도 보상금

반란잡떼들의 무장 경위를 보면 더욱 어이가 없다. 요컨대 악마집단이 국군 공수특전부대를 격퇴하여 광주를 영원히 대한민국내의 해방구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장투쟁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광주 반역자들의 주동세력은 대한민국의 적화통일을 하여 김일성 치하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광주의 한떼의 청장년(극소수의 대학생 및 고등학생, 깡패, 무직자, 양아치, 대중식당 종업원, 자동차 정비공, 철공소, 기타 대·소공장의 노동자, 건축공사장, 도로공사장의 일용 노동자 등)들은 온갖 흉기를 들고 광주시내 각 경찰서를 비롯 경찰관 파출소들을 모조리 습격, 일단 상당량의 무기, 탄약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공포에 질린 전남도지사 張모씨와 전남경찰국장 安모경무관 등은 근무지를 이탈, 도피해 버렸다.

한편 상당량의 무장을 갖춘 반란잡떼들은 대한민국의 방위산업업체인 광주교외의 '아세아자동차공장'을 습격, 전투용 장갑차 7대를 비롯 군용 지프, 소형 군용 트럭, 대형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총 80여대를 강탈하여 광주시내를 산지사방으로 질주하면서 아무데나 총격을 해댔다.

이때 아세아 자동차회사 향토예비군 몇 명이 오히려 반란잡떼들과 합세했다. 각종 차량 운전수는 거의가 시내차량정비공장의 10대 조수나 견습공들이었다.

그들은 운전 미숙으로 가로수나 전신주, 길가의 가옥들을 들이받고 전복, 상당한 인원이 사망 또는 부상을 입었다.(그러나 이들에게도 후일 정부에서 어김없이 민주화투쟁자 보상금이 수천 만원에서 1억원 이상씩 지급됐다.)

반란잡떼들은 장차의 결전(공수특전단 등 대한민국 군경부대와 정면대결)을 위하여 보다 많은 무기의 확보와 이른바 '해방구'의 전도적(전라남도 전지역)확대를 위하여 노획한 기동장비를 최대한으로 활용, 반란잡떼들 소조들을 각 군으로 파견했다.

이들을 맞은 목포, 영암, 강진, 영광, 나주, 강진, 함평, 해남, 완도, 무안, 보성, 벌교, 화순, 담양, 승주 등지는 환희로 들끓었다.

 

기고만장한 무장소조들

무장 소조들은 기고만장했다. 각 지역 군수, 경찰서장, 그 밖의 기관장들을 꿇어 엎드리게 하고 각 경찰서 무기고, 향토예비군 무기고의 무기 탄약을 전부 압수했다.

또한 자신들에 대한 식사, 음주, 잠자리 등 서비스 제공에 있어 약간만이라도 소홀히 하는 기색이 엿보이면 적군의 내통자라면서 사정없이 족쳐댔다.

대개가 무식한, 무뢰한 집단인 반란잡떼들 소조원들에게서 이를테면 다소라도 혁명군의 겸허와 예의를 바란다는 것은 애시당초 무리였다.

 

보상금 받아 평양으로 튄 빨갱이

당시 반란잡떼들 소조들이 각지방에서 강탈, 광주로 실어 나른 무기는 다음과 같다

Ml소총, AR자동소총, 경기관총(LMG)등을 비롯 모두 4천9백 여정 실탄 13만발, 수류탄 2백70여발, 폭약(TNT) 10상자 등이었다('정사 5·18'-5·18광주민중반란. 서울사회와 평론. 95년 11월 298쪽)

한편 '광주5·18반란' 전기간에 대한민국 군경이 이른바 '광주반란잡떼들'에게 피탈당한 무기현황은 다음과 같다.

중·경기관총, 자동소총 M16, 소총 Ml, 소총, 카빈소총, 권총 등 총계 5천5백1정. 소총탄 28만9천5백43발, 수류탄 5백52발. TNT 3천6백 상자. (이중에서 무기 약 80%, 탄약류 약 70% 회수. 80년 5월 30일 현재. 관계당국 발표).

여기서 우리는 북한이 지난 6·25남침 때부터 가장 집요하게 노렸던 대한민국의 깊숙한 후방지역이자 침투가 용이한 해안선인 전라남도가 거의 한달 동안이나 병력(향토예비군)도 무기도 없는, 그리고 행정체계 마비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 수부인 광주에선 대한민국 수도권 일대의 최정예부대들이 거의 집결,  '광주반란잡떼들'과 교전을 벌이느라 휴전선 부근에는 국군의 대적준비가 헤이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5·18 부상자' 가운데 정부가 지급한 광주반란질에 대한 보상금 2억 여원을 수령하자마자 곧바로 평양으로 밀입북, 돈을 당에 헌납하고 악의적인 대남심리전 방송에 종사하고 있는 악질 빨갱이가 있다.

 

열사가 된 월북 빨갱이

지난 91년 3월 4일 북한 평양방송은 "[광주 5·18 반란] 부상자인 윤기권(29세. 전남 광주 두암동)이 위대한 수령님과 참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해왔다.…"고 첫 방송을 내보냈다.



'

망월동에 묻힌 골수공산당원

 수년 전에 질병으로 죽은 전라남도의 공산주의 원로 尹寄南(윤기남 미전향 좌익수 1925년 전남 해남 출생. 46년 남로당 입당, 순천, 장흥, 보성군당 위원장. 6 25전후시기 보성유격대 사령관 역임. 체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 징역형, 출소후 70년대 초 호남지역 '통혁당'재건 공작 참가. 재차 체포되어 2년 징역형. 73년 6월 미전향으로 출옥)을 이른바 국민연합과 '남총련'에서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었다.

 

 

1980년 5월 광주·해주 그리고 평양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당시 조선일보 주일 특파원>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아침 이른 시간(6시쯤으로 기억한다). 동경T신문의 S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李특파원댁이지요? 아, 직접 나오셨군요. 토요일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긴급히 확인할 일이 있어 무릅쓰고 주말아침 일찍 전화드렸습니다. 혹시 미7함대가 한반도 근해로 긴급출동했다는 소식 못들으셨는지요?"

S기자는 숨가쁜듯 빠른 어조로 묻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모두 다 금시초문이었다.

이런 류의 전화는 가끔 받지만, 그때마다 제보자가 같은 기자일 경우 특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그런 엄청난 정보(첩보)를 어디서 용케도 빼내는구나, 하는 부러움과 함께 그런 정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데 대한 자괴심이 겹쳐 내심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명색이 기자면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

1979년 10월 27일 새벽, 10·26 소식을 처음 전해들은 이래 6개월 여만에 또 다시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10·26당시는 그래도 제보자가 같은 기자는 아니어서 다행(?)이랄까, 자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업자였다. 그것도 같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었다.

전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러나 더 자세한 것은 되묻기에 앞서 스스로 취재를 해서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주말 아침에 취재할 대상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특히 토요휴무가 거의 정착돼 있는 상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다 못해 염치 불구하고 방위청의 Y장군을 깨웠다. 그는 날보고 "그런 얘기는 전화로 보다 직접 와서 얘기하자"고 했다. 당연한 말이었다.

 

북위38도, 동경126도에 병력10만

나는 8시 반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집을 나서 20분 거리인 일본 방위청내 통합참모회의 XX부장실을 노크했다. 9시 정각. Y장군은 나와 있었다.

나는 아침의 제보내용을 설명한 뒤 그 사실여부의 확인을 요구했다. Y장군은 나를 앉혀 놓은 채 해군보좌관을 불렀다.

나를 간단히 소개한 뒤 가능한대로 내가 제보한 첩보 내용을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약 10분이 지났을까. 해군보좌관이 들어와 보고를 한다.

"실장께서 지시하신 내용 확인됐습니다. 확인된 내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요코스카의 미7함대 사령부 작전처 00대령에 따르면 항모 미드웨이와 기함블루릿지 등이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 17일 04시 요코스카를 출항했다고 합니다.

이 태스크 포스는 이날 중 사세보(佐世保)항에 있는 또 하나의 특수부대와 합류, 일본해(동해)를 북북서로 항진(航進)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특수임무부대의 출동목적은 무엇이라고 하던가?"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북위 38도, 동경 126도(해주)부근에 병력 10만이 집결해 있으며 지원포와 탱크 등의 배치상태로 미루어 대남공격이 임박했음을 징표하는 것이라 합니다. 미7함대의 출동은 이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만 함대사령부 측은 곧 우리 통합막료회의에 정식 통보할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체내의 피가 온통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Y장군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곧 특파원 사무실로 달려갔다.

이력저력 10시가 넘었는데도 서울 편집국에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지금 같으면 FAX로 쳐놓으면 그만이지만 1980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조간신문은 새벽 4시쯤엔 일을 끝내고 다들 퇴근하게 마련이며, 빨라야 10시, 부에 따라서는 오전 중엔 아예 출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선일보 외신부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점심은 김성진 전문화공보부장관이 미국 다녀오는 길에 동경에 들러 특파원들과 아카사카(赤坂)의 중국집에서 만나기로 약속돼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활용해야겠다. 미7함대 사령부에 전화를 했다. PAO (Public Affairs Oface=공보처)가 유일한 창구였는데, 전화통에 나온 해군 대위는 내가 말하는 첩보들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겠다"는 간단한 말만 되풀이했다.

정보는 다각적으로 크로스 체크할 필요가 있다. 세계 4대통신 중 가장 신용도가 높은 것으로 판단되는 A통신 동경지국에 마침 친구가 있었다.

A씨와 H씨 그리고 I씨가 그들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각각 나의 첩보를 알려주고 확인을 당부했다.

 

국가적 위기상황에 관심없는 기자들

한반도 군사전문가인 A씨에게는 해주 부근의 북괴군 집결 여부를, 동북아 안보문제를 주로 다루는 H씨에게는 7함대 출동과 그 행선지, 목적 등을, 그리고 미국의 안보전략에 밝은 I씨에게는 미국의 전략적 대응을 각각 부탁했다.

약속장소인 로가이르에 가니 김전장관을 비롯, 여럿이 와 있었다. 동아, 한국, 중앙, 신아일보 특파원들이 金전장관과 한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모두들 약간 늦은 날 쳐다보고 무슨 특종했느냐고 농반진반으로 묻는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반드시 특정신문의 특종거리라고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시치미를 떼고 딴전을 부릴만도 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대충 이야기 해 주었다.

물론 소스(취재원)보호를 위해 누구에게 확인했다든가 하는 것만은 밝히지 않고, ①해주 근처에 북괴군 10만 명이 집결했다는 첩보와 ②이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7함대의 한반도 해역으로의 출동에 관한 정보만은 그대로 말해주었다.

빅뉴스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도 나만큼 흥분하지 않는 것이었다. 질문도 별로 하지들 않는다. 나 혼자만이 대단히 흥분돼 있었다.

'국가적 위기상황에 관심들이 없는 것인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에 명멸했다.

 

춤추는 각의·빠진 기사

6·25당시 징집→행군→강훈련→전투참가 등의 경험이 있는 나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의 도끼만행사건 때도 담당(軍출입)이 아니면서 '김일성의 사과서한'과 '유엔군의 작전개황'등으로 세계적, 세기적 특종을 연거푸 한 바가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휴가 중이던 나는 6·25 당시 북괴군 야크기의 공습과 피난하는 꿈을 꾸고 신문사에 나갔더니 대단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기독교도식으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주의 병력집결과 7함대 출동에 대해서도 나만큼 흥분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대한민국에 대한 국가관이랄까, 안보의식이 나와 같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나는 점심이 끝나자 사무실로 돌아가 작성한 원고를 보냈다. 데스크를 보던 C기자는 흥분했다. 대어를 낚았다는 것이다.

나는 신바람이 났다. 다른 사람들이 다 관심이 없어도 우리 데스크만 알아주고(지면에) 반영해주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데스크 C씨는 얼마 후 동경으로 전화를 걸어 "아마도 그 기사는 못들어 갈 것 같다"고 알려왔다.

계엄령하 사전검열을 받던 시대였다.

인쇄직전 1면 머리에 대문짝같이 크게 뽑힌 북괴군 10만 해주부근에 집결·美7함대 출동 이 검열에서 통과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검열은 그 후 몇 차례나 엎치락뒤치락했다. "괜찮다. 실어라", "안된다"가 자그마치 7차례나 되풀이 된 것이다. 그 배경은 이러했다. 조선일보의 5월18일자(1980년) 동경특파원발 기사는 한국군당국과 국내 각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와 일치되었다.

5월 17일 오후 늦게 당시 신현확(申鉉碻)총리 주재하에 긴급각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 기사는 열띤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申총리를 비롯, 김종환내무, 주영복 국방, 박동진외무 그리고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등, 안보관련 각료들은 조선일보의 동경 발신(이도형 특파원발신)기사가 정보당국의 정보와 일치하며 정확하며,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게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한빈 경제기획원장관, 정재석 상공장관 등 경제관련 각료들은 일제히 안보각료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가뜩이나 민심은 흉흉하고 수출이 위축되고 경제지표는 하락일로인데 아무리 사실이라도 그처럼 위기감을 더해주는 기사가 보도되면 격앙된 민심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이 보도불가의 이유였다. 그러느라고 각의는 춤을 추었고, 검열당국은 그때마다 결심을 뒤집곤 하는 것이었다.

 

폭동진압으로 제2남침기도 좌절

조선일보의 특종은 자연히 다른 신문에게도 불이 튀었다. 검열용 조선일보 대장을 본 타지 기자들이 편집국에 보고, 편집국장들은 각기 동경특파원들에게 '로켓'(타지의 특종을 감지하고 자사특파원에게 경위설명을 요청하는 것)을 쏘아댔다.

토요일 밤 급작스런 로켓탄을 맞은 동경특파원들은 당황했다 확인할 곳도, 할 수도 없었다.

급한김에 C지의 K특파원은 조선일보의 기사내용을 서울서 전해 듣고 일단 '사실'임을 '확인'하고 그 소스를 '내각조사실' 이라고 했다.

또 H지의 S특파원은 자신도 일본 방위청에서 확인했다며 급한 불을 끄려 했다. 모두 다 급한 김에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내각조사실'이니 '방위청'이니 마구 소스를 대서는 안되는 법. 소스가 노출되면 취재원이나 취재자는 함께 신용이 땅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어쨌든 그 기사는 불발되고 말았다. 안보각료에 대해 경제각료들이 이긴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북괴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각종 첩보와 정보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위기를 되도록 축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수출감소를 비롯한 각종 경제지표의 하락과 확대되는 학생데모 등 더욱 확산될 것을 두려워 한 정부는 80년 5월 17일 밤의 비상각의에서 전국대학에 휴교령을 내릴 것을 의결하는 한편 군 당국으로 하여금 위기상황을 최소한으로 축소 보고토록 각료들간에 비공식으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체는 달랐다. 당시 북한은 1980년 5월초 전시사령부를 구성,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전시사령부는 남조선의 데모가 확대되고 광주사태가 다른 도시들로 확산될 경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원병의 기능을 담당할 참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 무력부' 직할 '전시사령부'는 특수게릴라 훈련을 받은 강력한 124군부대 등 10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주력부대가 휴전선과 수도서울에 근접한 황해남도 해주와 개성 부근에 집결했던 것이다.

주한미군 정보기관은 바로 이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 잡은 것이다. 일본 요꼬스카에 있던 미7함대 항모 미드웨이를 주축으로 한 태스크 포스(함재 폭격기와 함포 및 상륙부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부대)가 구성되어 한반도 해역으로 급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엄령하의 한국군은 1980년 5월 20일 특명을 받은 제20사단 (사단장 박준병소장)이 광주에 특파됨으로써 그때까지 폭도들에 의해 점거했던 전라남도 도청 등 주요 정부기관 탈환작전에 나서 5월 27일에 완전진압에 성공했다.

북괴당국은 한발 늦어버렸다. 그들의 제2의 남침기도는 좌절되고 만 것이다

2012년 6월30일 현재, 휴전선에 근접배치된 중장거리포,핵무기,화생방무기,생화학무기,사이버전 전사들과 함께 '명령만 내리면 즉각 행동하겠다'는 '조선인민군'의 적화통일 의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위기를 한국의 언론은 아예 묵살하고 있다.

조국은 가까운 장래에 북괴공산당의 남침을 받게된다.

이에 대비하여 국군이 해야할 일을 미국의 한국주둔군이 하고 있다.

한미연합사해체합의는 즉시 무효화 해야하며, 한미일 연합 사령부로 증강하여

즉시 북진정벌 통일하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휴전선 이북의 국민들이 북진통일 자유해방을 고대하고 있다.

더 이상 그 염원을 지체해선 안된다.

 

2천만명의 전사자가 있더라도 가야할 길이다.

위대한 전쟁의 과업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국민이 참전해야 하고, 모든 국민 공히 피난은 일체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강력통치님의 댓글

강력통치 작성일

휴전선 너머 이북의 백성들이 김정은 공포독재정치에 신음하는 것을 방치해선 안된다.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권리가 있다.

북진정벌전쟁으로 해방시켜 그들에게 우리 대한민국 영토의 일원으로 살게 해야 한다.

통찰력님의 댓글

통찰력 작성일

2천만명의 전사자가 있더라도 가야할 길이다. <---------이게 제정신으로 할 생각인가

통찰력님의 댓글

통찰력 작성일

강력통치 자네는 전쟁나면 최선두에서 돌격해서 순국(?)할 생각은 있나? ㅋㅋㅋㅋㅋ

proview님의 댓글

proview 댓글의 댓글 작성일

통찰력님,,,이것은 깡통의 생각은 아니구요 어디서 ㅍ ㅓ온글을 자신의 생각인양 말하는 것입니다.

통찰력님의 댓글

통찰력 댓글의 댓글 작성일

아닙니다. 2012년 6월30일 현재, 휴전선에 근접배치된 중장거리포,핵무기,화생방무기,생화학무기,사이버전 전사들과 함께 '명령만 내리면 즉각 행동하겠다'는 '조선인민군'의 적화통일 의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까지는 퍼옴글이고 그후에 말미는 깽통이 첨언한것으로 보입니다.

강력통치님의 댓글

강력통치 댓글의 댓글 작성일

프리뷰ㅡ똥찬 년 두새끼가 병신삽질하누만.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댓글의 댓글 작성일

예전, 박정희 대통령 당시나,
전두환 대통령 당시라면,
당연히 순국할 생각이 있지요!!!!
허지만,
내 아들 딸이 한달에 12만원 받는 꼴은 못 보겠으니,
귀하도 그런 식으로 비비꼬지는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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