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5·18 재판 판결 해부 1탄: 윤상원의 수류탄 자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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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공청년투사 작성일12-05-06 09:44 조회3,9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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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윤상원이 사망한 원인은 그의 수류탄이 폭발하였기 때문이다. 5월 21일 무장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한 이래 윤상원은 시민군에 수휴탄 투척 훈련을 시켰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이 수류탄 투척 훈련용으로 연막탄 투척 연습을 하다가 자기 몸 가까이서 폭발하는사고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고가 윤상원 본인에게 있었다. 5월 27일 새벽 윤상원이 계엄군을 향해 선제사격함과 동시에 계엄군에도 그 날 새벽의 최규하 대통령의 군 자위권 발동 사전 재가에 따라 자위방어권이 자동적으로 발동되었다. 이제는 시민군이 총 쏘면 계엄군도 맞쏠 수 있게 되었다.
윤상원의 사망과 더불어 무장봉기로서의 광주사태는 끝났다. 만약 광주민중항쟁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만약 5·18 재판 판결 논리대로5·18 사건은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국민의 결집이었다면 윤상원의 죽음으로 광주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 안에 있는 총기들을 강제 회수하였다고 해서 시위가 중단되는가? 어차피 시위하는데 총은 필요하지 않다. 광주에서는 꼭 총이 있어야만 시위할 수 있는가? 아니다. 광주에서는 꼭 총이 있어야만 민중항쟁을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만약 광주민중항쟁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도청에 쌓아둔 총들을 회수당했다고 해서 시위가 중단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광주 인구는 80만명이었다. 만약 광주민중항쟁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80만 광주시민의 항쟁이었다면 윤상원 한 명이 없다고 해서 시위가 중단되는가? 윤상원을 잃은 봉기지도부는 금방 항복을 선택하였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광주는 금방 평상시 상태로 되돌아갔다. 계엄군이 있어서 더 이상 시위를 할 수 없었는가? 아니다. 시민군 총기 회수와 더불어 계엄군은 거리 청소를 해주고 시민들에게 쌀 배급을 한 후 그 날 아침으로 즉시 모두 철수하였다.
만약 민중항쟁을 할 이유라는 것이 있었다면 윤상원이란 청년 한 명이 없다고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윤상원이 죽자 시민들은 더 이상 시위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광주시민들이 김대중을 위해서 봉기를 일으켰는가? 광주운동권은 그런 주장에 펄쩍 뛴다. 김대중 주장대로 광주시민들이 김대중을 위해서 광주사태를 일으켰던 것이 아니다. 만약 80만 광주시민들이 김대중을 위해서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라면 윤상원이 없다고 해서 그 봉기가 중단되는가? 김대중 주장대로 광주시민들이 김대중을 위해서 예비군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을 위한 광주민중항쟁이란 것은 없었다. 김대중을 위해 살고 김대중을 위해 죽고저 시민군이 된 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시민군 버스에도 시우대 피켓에도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그런 구호만 보고는 광주시민들이 김대중을 위해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장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위해 무기고 습격하는 시민이 있는가? 시위선동용 구호와 실제 이유는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은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 때문에 구속되었다. 김대중이 구속되었기에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김대중은 단 며칠간만 연행되어 있을 예정이었는데 광주사태로 인해 광주사태가 끝나자 연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김대중이 단지 연행되어 있었을 때는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목이 메어 외치던 시민들이 그가 실제로 구속되었을 때는 무관심하였는가? 에초에 80만 광주시민이 김대중을 위해 결집한 적이 없었다.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는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의 구호였지 80만 광주시민의 구호가 아니었다.
여러 외국인 관찰자들이 김대중이 위대하기 때문에 김대중의 위대함을 흠모하는 광주시민들이 광주시태를 일으키게 된 것이였다는 주장을 해왔으며 그런 주장이 김대중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 후보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너무 지나치게 과장된 주장이다. 실제로는 당시만 해도 김대중이 광주에서 그리 인기있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윤상원의 사망과 더불어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도 자취를 감추었다. 누가 광주민중인가? 윤상원 한 명만 광주민중인가? 먄약 80만 광주시민이 광주민중이라면 윤상원 한 명이 없다고 해서 항쟁이 중단될 리가 없다. 윤상원 한 명이 없다고 해서 중단된 시위는 광주민중항쟁도 광주민주화운동도 아니었다.
광주사태는 아무 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윤상원 같은 인물이 있어야 일어날 수 있다. 윤상원은 80만 광주시민들 중에서도 한 한 명뿐인 인물이었다. 물론 꼬뮌주의자들은 윤상원 말고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무기를 반납하느리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꼬뮌주의자는 윤상원 한 명이었다. 그는 야심적 혁명가였다. 그는 광주의 떠오른 샛별이었다. 그런데 27일 새벽에 왜 그가 사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7일 새벽 도청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시민군 17명이 전사하였다. 17명 모두 계엄군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시민군 수류탄 폭발에 의한 사망자가 있었다. 5·18측에서는 윤상원도 총에 맞았다는 주장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윤상원이 선제 사격을 하고 그 총에 맞은 군인 한 명이 죽자 옆에 있던 군인이 자위방어를 위해 맞사격을 하자 그 총탄이 윤상원 옆구리에 맞자 그가 휘청거렸다. 들불야학 동지인 김영철이 그를 자리에 눕히고 이불로 덮어주었으나 윤상원의 수류탄이 터져 이불과 커튼에 불이 붙어 불길에 휩싸인 채 그는 사망하였다.[1]
소설 ‘화려한 휴가’의 작가 윤재걸 기자의 기록에 따르면 시민군 수류탄이 폭발할 때 여러 명이 사망하였다. 윤기자의 기록이 정확하든 정확하지 않든간에 27일 새벽의 교전으로 인한 시민군 사망자 17명 중에는 시민군 수류탄 폭발로 인한 사망자도 최소한 한 명 끼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명이 윤개원(尹開源)인 윤상원의 사망원인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일치하는 증언은 그의 사인은 총상이 아니라 그의 수류탄 폭발로 인한 화상이었다. 그런데 화상을 입기 전 총상도 입었었는지는 수수께끼이다. 김영택 기자가 확인한 바로는 “그의 검시서에는 자상과 화상, 그리고 탈장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그의 시신 또한 검게 그을려져 있었다” (김영택 1996, 217). 이렇듯 김기자는 총상은 없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윤상원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수류탄 폭발로 인해 죽은 것이다. 우발적 실수였을까? 자폭이었을 가능성이 김기자의 그 전 날 상황 기록에 있다: “이들은 계엄군이 진주할 경우 보유하고 있는 수류탄 1천 발과 시내의 절반 이상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TNT로 자폭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필사적인 항쟁의 다짐이었다” (김영택 1996, 216).
여기서 김기자가 ‘이들’이라고 호칭하는 그룹은 ‘학생시민투쟁위원회’란 명칭의 꼬뮌 권력기구이다. 그리고 수류탄으로 자폭하자는 결의를 모두가 자발적으로 원해서 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윤상원의 리더십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폭 결의는 백프로 헛말이 아니었다. 만약 단 한 명도 수류탄으로 자폭하지 않았더라면 그 결의는 백프로 헛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명이, 그 결의의 장본인인 윤상원이, 자기 수류탄 폭발에 의해 사망하였다.
윤상원은 실제로 TNT를 사용하려 하였었다. 단지 계엄군 문관이 TNT 뇌관을 전부 분리해 놓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TNT를 자폭 무기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의 수류탄이 터졌다. 우발적 실수였다고만 볼 수 없는 이유는 그 전날 밤 그는 수류탄으로 자폭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윤상원의 이런 과격한 선택은 그를 추종하던 그의 동지들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누가 “무기를 반납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였는가? 5월 27일 새벽 전투가 발생한 이유는 학살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기를 반납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국민의 결집이었다는 5·18 재판 판결 논리가 성립하려면 그것이 전 국민의 선택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 국민의 선택은커녕 전 광주시민의 선택도 아니었다. 전 광주시민의 선택이기는커녕 전 시민군의 선택도 아니었다. 전 시민군의 선택이기는커녕 전 봉기 지도부의 선택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 한 명 윤상원의 선택이었다. 그는 봉기 지도부 중 항복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바로 이 점이 윤상원의 전기를 쓰는 그의 후배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점이었다. 그가 왜 그랬을까? 그는 그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으며 그래서5·18에 대한 동정적 국민 정서가 형성되었다. 윤상원 없는 5·18은 없다. 그것은 김영택 기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 전남대 학생회자이었던 박관현(朴寬賢)이5·18 광주민중항쟁의 불을 당기는 씨를 뿌렸다면, 윤상원은 전 항쟁 기간 동안 광주항쟁을 이끌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영택 1996, 217). 그래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도 박관현이 강진우로 윤상원이 강민우로 등장한다. 영화도 강민우로 시작해서 강민우로 끝나며 광주사태의 주역도 윤상원이었다. 5·18이 국민의 결집이었는가? 아니다. 윤상원이란 인물이 아니었다면 광주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불굴의 신념은 계속 미화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결코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신념이 아니었다. 그는 꼬뮌주의자였으며 꼬뮌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1871년의 파리꼬뮌을 모방한 광주꼬뮌의 실현이 그의 삶의 목표였으며, 그런 목표를 포기한 삶은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기를 반납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여기 신념을 위해 살고 신념을 위해 죽은 젊은이가 있었다. 신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적은 시대에 그의 불굴의 신념의 이야기는 미화되고 칭송된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옳은 신념이었는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꼬뮌주의는 옳은 신념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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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새 5·18 연구도서 『역사 해석을 위한 5·18 기록과 증언』 "제9장 시민군 및 민간인 사상자 발생 원인"에 실릴 글들 중 일부입니다.
[1] 어떤 이들은 김영철씨가 이불 삼아 윤상원을 덮어준 것은 커튼이었다고 한다
작성: Daniel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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