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주역 남조선민족해방전선과 북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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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공청년투사 작성일12-03-31 21:22 조회9,39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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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광주시민들이 아닌 낫 든 괴한 50 여명이 갑자기 출현하여 20사 인솔대로부터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즉시 광주시민이 아닌 시민군 600 명이 9시부터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하여 군용트럭과 장갑차와 버스 등 80 여대를 탈취한 즉시 10시부터 한 무리는 전라도 38개 무기고로 무기를 탈취하러 떠나고 한 무리는 광주외곽의 시민들을 계속 금남로로 실어날랐다. 왜 외지의 불순세력이 광주로 와서 수십 대의 차량을 탈취하여 계속 시민들을 도청광장으로 수송하였는가?
외지에서 온 불순세력이 무기탈취하러 떠나고 광주외곽 시민들을 금남로로 수송해 오는 동안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조직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기탈취가 외지에서 온 불순세력의 역할이었다면 삐라 살포는 남민전 산하 조직 민주구국학생연맹(이하, 민학련)의 몫이었다. 오전 8시의 지프차 탈취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정은 사전에 정해져 있었다. 11시경 금남로에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모이자 미리 삐라를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던 민학련이 엄청난 양의 무장봉기 선동 삐라를 뿌렸는데, 그 제목이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궐기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지 않는 장면에 역사의 진실이 있음을 보아야 한다. 20일의 차량 징발 때문에 21일 버스 운행이 중단되었음에도 엄청난 인파가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불순세력이 오전 9시부터 10시 사이에 80 여대의 차량을 탈취하여 수송 차량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인봉이 황금동 아가씨 농담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학련이 살벌한 무장봉기 선동을 하는 빠라를 살포하였다.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를 유신잔당 놈이라고 부르는 북한말씨가 여러 번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무장봉기 선언문 작성자는 광주시민이 아니었다. 대통령과 총리를 유신잔당 놈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 죽이자고 한다: “흉악한 국민의 배반자 유신잔당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피 토하며 죽어간 우리 아들 딸들의 한을 풀어주자!” (민주청년민주구국총학생연맹 1980) 대통령과 총리를 갈기갈기 찢어죽이자는 말은 남한 말도 광주 말도 아니다.
자, 이 성명서는 작년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성명서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통령과 총리를 갈기갈기 찢어죽이자는 것이다. 재판 없이 대통령과 총리를 갈기갈기 찢어죽이자는 표현이 그토록 민주적인 표현인가? 그리고 대통령과 총리를 갈기갈기 찢어죽이면 헌법이 수호되는가? 5·18 재판 원심 판결에서 이런 삐라들을 살포한 세력을 헌법수호기관으로 규정한 것은 실로 황당하지 아니한가!
명의상으로는 성명서 작성자가 민학련이지만 학생이 작성한 성명서가 아니다. 아직 아무도 죽은 학생이 없었을 때에 이 성명서는 “피 토하며 죽어간 우리 아들 딸들의 한을 풀어주자”고 한다. 나이 갓 스무살의 전남대 학생에게 나이 스무살 난 아들 딸들이 있을 수학적 확률은 몇 프로인가? 설령 그런 기상천외의 일이 광주에서는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전남대 학생 중에 시위하다 죽은 아들 딸을 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학생운동권 명의의 성명서이지만 결코 학생이 쓴 문장이 아니다.
아직 아무도 죽은 학생이 없었을 때 이 유인물은 이런 단락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젊은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배를 갈라 죽였으며 처녀들의 귀를 자르고 부녀자들을 발가벗겨 배를 갈라 거리에 널었으며 심지어는 어린애들을 개머리판으로 골통을 부셔 죽였다” (민주청년민주구국총학생연맹 1980). 그리고 이런 표현은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북한발 유언비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째서 평양방송이 전파로 퍼뜨리던 유언비어가 이 성명서에 그대로 박혀 있는가?
이렇게 북한발 유언비어로 시민들의 눈과 귀를 속이고 마음을 현혹케 한 다음 이 삐라는 이런 말로 무장봉기를 선동한다:
일어서라! 일어서라! 일어서라! 우리에겐 분노와 원한과 구국 민주 일념 뿐이다. 애국 시민이여! 손에는 돌, 몽둥이면 몽둥이를 들고 일어서라!
애국 근로자여! 손에 닥치는대로 공구를 들고 일어서라!
애국 농민이여! 손에는 삽과 괭이를 들고 일어서라!
삼천만 애국 동포여! 모두 일어나라. 그리하여 이 땅위에 이제는 포기할 수 없는 이제는 다시 빼앗길 수 없는 찬란한 민족의 꽃을 피우자!
승리의 그날까지 전 도민은 무기를 들고 매일 정오를 기하여 전남 도청앞 광장, 공원, 금남로, 광주 신역으로 모이자 (민주청년민주구국총학생연맹 1980).
이 성명서는 무장봉기 선언문이었다. 이 성명서 전단이 살포되던 바로 그 순간 불순세력은 사전에 준비된 무기고 배치도를 갖고 전라도 38개 무기고를 향해 출발하였다. 계엄 하에서 불법 집회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전남대 운동권은 16일 안병하 전남 도경국장에게 그 날이 도청광장에서 마지막 불법집회를 하는 날이라고 굳게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한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전 도민은 매일 정오를 기하여 전남 도청앞 광장에 모이라고 전단을 살포하였다. 그런데 그냥 모이라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들고 모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시민군 발대식이었다. 이 전단이 살포되고 푸짐한 점심식사를 마칠 무렵 무기 분배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지 않는 광주사태의 진실, 5월 21일 오전 11시 이후 도청광장에서 전개된 상황이었다. 인봉이 황금동 아가씨 농담을 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살벌한 유언비어어와 무장봉기 선동을 담은 전단이 살포되었으며, 그 전단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민전 조직이 무장봉기 선언 전단을 살포하였을 때 그 목적은5·18 재판 원심 판결에서처럼 헌법을 수호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남민전이 말하는 민주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민주주의였으며, 5·18 재판에서처럼 이 점이 혼동되어서는 아니되겠기에 5·18의 한 주역이었던 남민전과 북한과의 관계 에 대하 알아보도록 하자.
광주사태 당시 강원도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던 전 러시아 벌목공은5월 21일 북한군 전 부대가 완전무장 상태로 비상대기에 들어간다는 명령이 군단참모부로부터 불시에 내려온 사유를 이렇게 서술한다:
사연인즉 남조선의 전라도 전 지역(남한에 와서 확인한데 의하면 당시 광주시내만 시민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고 했다)이 시민군들에 의해서 장악되었고 조만간에 남조선의 전반지역으로 무장폭동이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남조선 봉기군 측에서 북한에 무력지원을 요청하여 오면 인민군 각 부대들은 일시에 군사분계선을 뚫고 밀고 내려가서 최전선지역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봉기군과 합세해서 남조선의 전 지역을 해방한다는 계획이었다 (전 러시아 벌목공 2009, 281).
이 증언의 요지는 시민군이 북한에 무력지원을 요청하여 오면 시민군과 합세해서 남조선을 해방시킬 계획이 북한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군이 북한에 무력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현실화될 수 있었를까?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은 시민군을 누가 조직하였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시민군이 1980년 5월 21일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시민군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1979년대 후반에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에 의해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광주사태 주동세력이 민주구국학생연맹 등 남민전 산하 세력들이었다.
1975년 4월 월남이 공산화되자 남한도 월남처럼 적화통일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일단의 좌익들이 1976년 2월 남민전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남민전은 남한 정부를 전복한 뒤 북한에 동조하는 인민정부를 세울 목표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이들은 이른바 통일전선방식으로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린 후 북한군 지원요청을 하려 하였으며, 혁명이 성공하면 중앙청에 게양할 대형 전선기(戰線旗)까지 만들어 놓았었다. 전선기의 상부는 적색으로 해방된 지역인 북한을, 하부는 청색으로 미(未)해방지역인 남한을 상징하며, 중앙의 붉은 별은 사회주의 혁명의 희망을 의미했다. 이 깃발은 도예종 등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인의 내복을 염색한 천으로 만들어졌다. 적화혁명이 성공할 경우 중앙청에 게양할 가로1.5m 세로1.1m의 이 대형 남민전 전선기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된 인혁당 당원 도예종 등 8명이 입던 옷을 이 사건으로 복역중인 무기수 전창일의 처 임인영이 수집, 전수진, 이문희 등이 염색, 봉합해서 북한 인공기와 월남 베트콩 기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남민전 전사들과 북한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예가 1980년 3월 23일. 서부전선 9사단 지역 한강하구로 침투하던 공비들이 소지하고 있던 암호문이다. 문제의 암호문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전사답게, 돌격대답게 싸워라”라는 격려의 문구가 들어 있었다.
남민전 '전사 생활규범 10조' 중 제1조에 '주체사상을 확립하자'는 문구가 명기되어 있다 (안병용 1990, 273). 남민전 용어들 중 북한 용어들이 종종 사용되었다. 남민전은 인민민주주의라는 의미로 민주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기에 남한말 ‘국민’ 대신 북한말 ‘인민’을 사용하였는데, 남조선 민족해방전선(남민전) 강령 제7조에 “국가와 인민을 보위하는 군대를 건설한다”고 한 것이 그 예이다.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규약 제2조에서도 “본회는 남조선 인민 내부에 모든 정경과 신앙, 성별과 연령, 직업과 계층의 차이를 초월, 민족세력을 총망라하는 반제 민족단일전선의 결성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조희연은 1960년대의 통혁당으로부터 1970년대의 남민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하당들이 북한과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이렇게 요약한다:
통혁당의 경우에는 지도부 모두가 월북경험을 갖고 있으며 북한의 지원・지도를 적즉적으로 수용하려고 하였다. 인혁당의 경우에도 관련 멤버인 김배영이 월북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조선해방전략당'의 경우에도 일본의 조총련으로부터 혹은 조총련을 매개로 북한의 자금지원을 받으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또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경우 북한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하였다 (조희연 1990, 131).
인민혁명당(인혁당), 통일혁명당(통혁당),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관련자로서 2002년 현재 민족화합운동연합 고문이었던 김병권은 남조선해방전략당과 통혁당이 통합하려 하였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밝힌다: “우리의 조직구성 원칙에서 중요한 점은 현장 노동자를 기본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통혁당과 통합을 결의한 한가지 이유가 됩니다. 통혁당은 인텔리 중심이었으며 우리는 노동자 중심이었기 때문이죠 (김지형 2002, 134-35).
1960년대에 통혁당을 통해 북한의 공작금을 받아 남조선해방전략당 활동을 하던 김병권과 이재문 그리고 통혁당계 인물 신향식이1976년 2월 29일 청계천 3가 태성장이라는 중국요리집에서 남민전 준비위 결성식을 거행했다. 그 다음달 남민전의 강령 및 규약을 소지하고 있다가 검거되어 3년 감옥살이를 했던 김병권은 1979년에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향을 거부하였다 (김지형 2002, 136).
1978년 5월 남민전 중앙위원에 피선된 이해경 역시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인물이었다. 1979년에 중앙위원에 참여한 황금수 역시 해방 이후 '조선민주청년동맹'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던 인물이다 (조희연 1991). 안재구는 가족적 배경에서 구(舊) 남로당 영향력을 받은 바 있으며, 4·19 직후에는 교원노조운동에 관여한 바 있는데, 후일 김영삼 정부 시절 구국전위 사건으로 간첩이었음이 드러났던 인물이다.
조희연(1991)은 “남민전은 기존의 지하당[통혁당] 전통을 계승하고, 전후의 자생적인 운동세력의 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 조직”이라고 성격 규정한다. 김정래는 남민전의 원조인 인혁당과 통혁당이 북한으로부터 직접 지도받는 운동권 조직이었다는 사실을 이런 말로 표현한다:
인혁당과 통혁당의 조직사건은 후배 활동가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엄혹한 현실에서 조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합활동가들 사이에는 조직의 수위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북한과의 관계 설정에는 대단히 신중한 자세를 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북한의 직접지도는 북과 연계된 조직사건으로 표면화되면서 남한의 활동가들을 위축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김정래 2011, 177).
남민전은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내며 지령을 받고 있었다. 남민전 중앙위원 이재문은 1977년 7월1일 모처에서 “남민전은 투쟁목표를 현 정권 타도 남북연방제, 사회주의 통일에 두고 있으므로 북한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내란상태를 야기 시켜야 한다”며 “가장 시급한 북한과의 연계문제 해결을 위해 조직원 1명을 일본으로 보낼 계획이다. 일본만 가면 조총련을 비롯한 많은 연계선이 닿을 수 있다”고 조직원들에게 설명했다. 이에 임준열(임헌영)은 “누가 일본에 가면 내가 잘 아는 교포시인인 김 모라는 사람에게 소개장을 써줄 수 있다”고 말했고, 결국 같은 해 11월 소개장을 작성해 줘 안용웅과 김 모씨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좌익사건실록에 따르면, 안용웅은 도일 후 재일 대남공작원과 접선하는데 성공했고, 북한으로부터 3억원의 소위 혁명자금 지원에 합의했다. 문제의 대남공작원은 안용웅에게 남민전 조직이 활동 중이라는 것을 입증키 위해 78년 1월초 서울시내 삐라살포를 지령했고, 실제 같은 달 6일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민전 조직원들은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명의의 반정부 삐라를 살포했다.
“남민전의 특이한 점이라면 학생과 지식인들이 점조직 방식으로 구성된 지하 비밀 투쟁 조직이었다는 것이지요.”라는 조준희 변호사의 말에 긍정하면서 홍성우 변호사는 1964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이자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배후조종자였던 이재문이 1978년 2월 28일 안용웅 편으로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를 자신이 직접 읽어 보았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예, 소위 사회주의 투쟁 지하 조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참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 이 친구들이 물증을 보따리로 가지고 있었어요. 치안본부에서는 노다지를 캔 것과 다름 없었지요. 이재문이 자신들의 조직 활동을 전부 문서로 남겨놓았던 겁니다. 예를 들자면 선서한 내용, 참가자 명단, 김일성이한테 보낸 편지 사본, 그 밖에 서류들이었죠. 그러니깐 치안본부에서는 고문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 서류만 압수하면 되니까요. 그때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운동권 방계였는데 전부 들어갔어요. 그때 변호사들 수십 명이 나누어서 맡았습니다. 1심엔 제가 맡았지요. 그런데 피고인 이재문 기록을 보니 제가 포섭 대상에 올라 있더라구요. 제가 참 난처했는데요 (이돈명, 조준희, 홍성우 1993, 699).
이재문이 김일성에게 보낸 장문의 사업보고 편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은바, 남민전 이념은 공산주의 이념이요, 종북사상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경애하는 주석 金日成동지!
오늘 우리는 한없이 자애로우신 어버이 수령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분단 30년이 가져온 5천만 겨레의 고통과 전 남조선 인민들의 절절한 염원과 조국통일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열화 같은 신념을 담아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이름으로 삼가 보고의 말씀을 드립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30여 성상 강산이 바뀌어도 세 번이나 거듭한 기나긴 세월 분단 32년의 결과는 조선의 북과 남을 인류의 낙원(樂園)과 인민의 지옥(地獄)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위대한 수령 金日成 원수님의 품에 굳게 뭉친 조선노동당의 영도 하에 북조선은 일제 식민지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건설 사회주의적 개조와 사회주의의 건설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강력한 사회주의의 대 공업국으로 전변하였습니다.
착취계급이 타도되고 근로대중의 물질적 생활수준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며 세계 최초로 11년제 의무교육이 실시되는 조선의 북반부는 지구상에서 세금이 없어진 유일한 나라로 되었습니다.
국제공산주의의 운동사에서 金日成 원수님께서 독창적으로 창시하신 主體思想으로 사상, 기술, 문화 3대혁명을 거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5천만 조선민족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조국이요 아세아동방의 사회주의의 강력한 전진기지이며 블록 불 가담 나라 반제투쟁의 영향력 있는 지도국으로 그 위광은 날이 갈수록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은 패망한 일본제국주의의 자리를 빼앗아 미군이 상륙한 날로부터 미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에게는 지상천국으로 되었으나 모든 남조선인민들에게 그네들의 착취와 억압에 신음하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되어 있습니다.
점령 미군의 직접 군정이 허수아비를 내세우는 간접통치로 지배양식이 바뀌고 신식민지 괴뢰정권이 이승만 괴뢰에서 장면으로 다시 박정희 군사팟쇼로 교체되었으나 사회적 구성체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배계급의 착취와 압박은 강화되고 민생고는 가중되고 있습니다...
피로 물들인 투쟁 속에서 자라온 남조선 혁명가들은 평양으로부터 울려오는 주체사상(主體思想) 강의에서 혁명이론을 배우고 각계각층 대중과 손을 잡고 싸우는 마당에 대중공작과 지도의 실천을 익히고 있습니다...
6월3일 항쟁때의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동백림사건, 통일혁명당사건, 4월3일 민청학련과 2차 인민혁명당사건 등 각종 혁명조직사건과 잇달아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건 속에서 혁명적 교훈을 배우는 것은 남조선혁명가들에게 필수적인 학습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원한에 사무친 4월3일 8열사와 통혁당의 김종태, 정태묵 동지 전략당사건의 권택혁동지 및 그밖의 모든 혁명열사와 옥중에서 고생하는 수만의 동지들을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남조선혁명가들은 도탄에 빠진 남조선인민들을 하루빨리 해방해야 하는 우리들의 혁명과업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골수에 사무치게 알고 있습니다...
투쟁의 국면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대중투쟁을 지도해 온 남조선 혁명가들은 나라 안팎에서 조성된 모든 주, 객관적 정세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1976년 2월29일 마침내 역사적인 남조선 민족해방애국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남조선혁명은 남조선인민의 힘으로라는 金日成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어 용약 결집된 남조선민족 해방애국전선 준비위원회에는 혁명가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소시민, 교수와 언론인, 문인, 군인, 여성 등 각계각층 대표가 참가하고 있습니다.
항일 빨치산 투쟁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기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전사들은 불굴의 투지와 결의 규율 인민대중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으로 남조선에서 외래제국주의자와 그들의 앞잡이를 쓸어버리고 남조선 인민들을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하고 강산을 뒤흔드는 만세의 함성과 함께 경애하는 수령 金日成 원수님께옵서 인도하는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품 안으로 안기는 영광스러운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 투쟁에 대하여 조국통일민족전선을 비롯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반부 형제들과 해외동포 및 전세계 진보적 인민들이 한결같이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지지와 성원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하며 고무되고 있습니다.
이제 해방전선 준비위원회는 즉 개별 무장(武裝)시위투쟁의 실효성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 속에서 투쟁의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새로운 형태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확실히 쌓아가고 있습니다...
5천만 조선민족의 어버이시며 경애하는 우리 공화국의 주석이신 金日成 동지의 적의 탄압과 폭압 속에서 결사 투쟁하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수령님의 무한한 사랑과 교시 그리고 적극적인 지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끝으로 어버이 수령님의 만수무강과 조선로동당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무궁한 발전과 북조선 전체인민의 건강과 행복을 빌면서 저희들의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 金日成 원수님 만세!
조선노동당 만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남조선민족 해방전선승리 만세!
조국통일 만세! (大檢察廳 1981, 12: 77).
이재문이 김일성에게 보낸 위의 서신 원문은 10 여 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이었는데, 그 초안 작성자는 임헌영이었다. 남민전은 1978년 1월11일 金日成에게 바치는 음성보고문을 녹음했는데, 월북한 안용웅이 녹음하였다는 녹음테이프 신년인사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보다 큰 승리와 영광으로 빛날 새해 1978년을 맞이하면서 민족의 태양이시며 우리 5천만 민족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우리 공화국 주석이신 김일성 동지께 삼가 최대의 영예와 새해 인사의 축하를 드립니다...해방 후 30여 년간 미제와 그 주구들의 포악한 반인간적인 정책으로 말미암아 남조선인민들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적들의 팟쇼적 만행으로 인하여 수많은 혁명동지들이 희생되었으며 오늘 이 시각에도 투사들과 애국자들이 감방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 남조선 혁명가들은 주체사상의 기치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이론과 방법으로 자신을 튼튼히 무장하여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하루빨리 앞당길 결의에 가득차 있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로서 모든 것을 다 바쳐 조국과 인민에게 멸사봉공할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들은 지난 해 사업을 총화하고 새해 1978년의 혁명과업을 더욱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더욱더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우리의 조직을 더욱 확대 강화하는 것이며 반팟쇼 민주투쟁의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천지를 뒤흔드는 주체의 사상은 세상이 주체의 숨결로 넘쳐흐르는 이 시대에 우리 남조선 혁명도 철저히 주체사상으로 무장함으로써만 승리할 수 있다는 혁명적 신념에 부풀어 있습니다...주체사상으로 더욱 알차게 무장하여 새해에는 혁명적 대전진의 전환점을 가져올 충분한 역량으로 키워갈 작정입니다. 경애하는 수령님이시여. 조국의 북반부가 사회주의 나라들의 최고의 모범국으로 빛나게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주체사상의 우월성과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입증해 주고 있으며 특히 남조선 인민들에게 주는 혁명적 신심은 날로 달로 심화 확대되어가고 있습니다. 남조선혁명의 기지는 조국의 북반부이며 북조선 인민들의 피땀 어린 사회주의 조국의 휘황찬란한 건설은 남조선 혁명의 모범적 교훈으로 되고 있습니다 (『左翼事件實錄』12권).
남민전이 밀파한 안용웅이 일본 조총련계의 도움을 받아 월북하였을 때 임동규가 자신의 숙부인 조총련 간부 임한묘에게 전할 편지를 써 주었다 (임동규 2005). 당시 38세의 안용웅은 1977년11월10일부터 15일까지 조총련 동경도 야다찌지부 상공회 부회장 임한묘 및 조총련계 시인 김윤 등의 주선으로 재일북괴공작원과 접선, 김일성에게 보내는 1978년도 신년인사문과 함께 사업보고서를 전달하고 공작금 3억원을 지원 요청했으며 북괴공작원이 이를 수락, 자금은 안의 소속회사인 크라운물산을 통해 신용장(L/C) 개설형식으로 송금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는 공작원에게서 『78년 1월초 서울시내에 남민전명의의 삐라를 살포하면 그 조직력을 인정, 즉시 대남방송을 통해 김일성에게 보낸 인사문을 그대로 방송, 남민전의 조직과 활동을 인정하겠다』는 지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이재문 등은 78년 1월초 서울시내 도뀨호텔앞과, 을지로 세운상강 앞 등에 『정권을 타도하자』는 등의 불온전단 5백장을 살포했고 그 후 이들은 1월5일부터 13일 사이에 3회에 걸쳐 남조선해방전사들이 보낸 인사문을 발표하는 북괴방송을 청취했다.
그 당시에는 월북하려면 조총련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1974년 8월 일본 자민당 우쓰노미야 도꾸마 의원이 방북하였을 때도 조총련과 김일성 사이에 연락을 취한 후에 김일성의 대일공작선 만경봉호를 타고 나고다 항에서 원산으로 바로 갔었다 (박갑동 2005, 88-90). 안용웅은 일본에 가서 조총련의 도움으로 재일북괴공작원과 접선하여 김일성에게 남민전 사업보고서와 충성서신을 제출하였다는 사실은 이처럼 대남방송이 남민전 충성서신을 그대로 방송함으로 확인됐다. 단, 그 이후의 안용웅의 행방은 이제껏 묘연하다.
북한이 남한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에 착수한 시점은 남민전 전사 안용웅이 북한군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월북한 1978년경부터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어째서 광주사태 때 무장시민군이 그토록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습격하였었는지 파악하게 하여주는 하나의 단서이다.
광주사태 때 여러 명의 희생자가 생기게 한 사건이 바로 시민군이 무리하게 수 차례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시민군이 그토록 교도소 습격에 집착하였던 것일까? 그 교도소에는 북한에서 혁명투사라고 부르는 남민전 전사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살인범, 폭력배, 사기범, 파렴치범, 기타 잡범 등 3천5백 여명 이외에도 미전향간첩 20 여명, 남조선해방전선(남민전) 사건 관련 사범 10 여명, 국내 국가보안법위반자 및 재일교포 간첩, 반체제 공안사범 등 150 여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 중 미전향 좌익수들과 재일교포 간첩들 등도 남민전 전사들의 동지들이었다. “혁명적인 투사들을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북한군 안창식 대위 일행도 참가했었다”고 한 탈북여성이 증언하였을 때 그 혁명투사들이란 바로 남민전 전사들을가리킨다 (전 함경남도 고등중학교 교원 2009. 76).
북한에 지원을 요청하며 인민군을북한군 지원요청을 하려 하였으며, 혁명이 성공하면 중앙청에 게양할 대형 전선기(戰線旗)까지 만들어 놓았었던 남민전이 대한민국 헌법수호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는 논리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런 논리가 가능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남민전이 헌법 수호를 목적으로 무장봉기를 주도하고 시민군을 조직한 것이었다는 논리 또한 가능할 수 없다. 그럴진대, 무장봉기파 혹은 시민군을 헌법수호기관으로 규정한 5·18 재판 원심 판결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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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새 5·18 연구도서 『5·18 재판 법리의 인식론적 모순』 "제4장 자유민주주의 부정하여 헌법수호한다고?"에 실릴 글들 중 일부입니다.
남민전은 무장봉기 준비에 착수하면서 김일성에게 보내는 충성맹세서에서 인민군 지원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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