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의 용공서클과 간첩 서경원- 글번호 1343 한명숙 518 연계하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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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반데니소비치 작성일12-03-23 04:36 조회7,062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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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의 용공서클과 간첩 서경원
1980년 광주사태 당시 3공수여단 12대대 소속이었던 金治年씨는 5월 20일 아침에 전남대에 도착하였다. 그의 증언록 "광주사태 체험 공수 부대원의 수기"에서 그는 대학 교정 곳곳에 붉은 글씨로「농민수탈금지」라고 씌어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며, 난생 처음 보는 붉은 색 구호에 충격받은 부대원들은 용공분자의 활동으로 여겼었음을 회고한다. 혹자는 아마 그의 증언의 이 대목에서 반신반의하였을 것이다. 광주는 농촌이 아닌데 어떻게 광주사태「농민수탈금지」란 구호가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붉은 색 구호였다는 것만으로 용공분자의 소행이라고 의심할 만한 한가? 분명 광주사태와 「농민수탈금지」라는 구호는 어울려 보이지 않으므로 김치년씨의 증언은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증언은 사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남대 교정에 「농민수탈금지」라고 붉은 글씨로 쓴 카톨릭농민회가 무기탈취 특공대 중 남한측 주동세력이었다.
카톨릭농민회는 사실상 광주운동권이었다. 그래서 그 사무실이 광주 카톨릭센터 안에 있었으며, 금남로를 사이에 두고 녹두서점과 더불어 카톨릭센터가 광주사태의 진원지였던 것이다. 카톨릭센터 안에 있던 카톨릭농민회 사무실은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총사령탑 중 하나였다. 당시 전남대 운동권이면서 황석영의 극단 광대 단원이었던 김윤기가 1980년 5월 18일 오전 8시에 카톨릭농민회 총무 노금노와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이 광주사태의 발단이었다. 노금노는 19일로 예정된 무장봉기 거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18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노금노와 김윤기의 대화 직후 카톨릭농민회와 광대 단원들과 전남대운동권이 즉시 시위대를 조직하고 시위를 선동하여 시위대가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카톨릭농민회가 무기 탈취를 주도하는 광주사태 주동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피려면 한명숙(韓明淑)이 연루된 1970년대 후반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을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한다. 몇년전 한명숙이 노무현 정부 총리지명자였을 때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은 유신체제 말기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용공서클 사건이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용공서클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실들을 살펴볼 때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분명 용공서클이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출신 서경원이 1989년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서 월북하여 하사금조의 공작금을 받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양성한 인물이 간첩이 되었다. 만약 간첩 양성소가 용공서클이 아니라면 무엇이 용공서클이란 말인가?
사실 1978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이 터지자 검찰은 상당히 관대한 의견을 내놓았었다. 검찰은 이우재와 한명숙 등 그 사건 연루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은 아니고, 다만 그 서클에 용공성이 있어 보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때 한명숙에게 2년 징역의 중형을 요구하였던 것은 여러 용공 이념서적들을 읽고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켰으며,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 목소리방송 등 북한방송을 청취한 행위 들에 대해 한명숙 등이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70年代 民主化運動 IV p. 1536-1551). 북한이 대남공작원들과 운동권을 시켜 통혁당을 재건하며, 남민전을 조직하던 때에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통혁당 및 남민전 도서들을 학습교재로 사용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크리스찬아카데미라고도 표기되는 이 단체는 강원용 목사가 여성, 노동, 농민, 학생, 종교의 다섯 분야에서 중간집단을 한다며 세웠다. 중간집단이란 운동권을 일컫는다. 여성 분야의 한명숙, 노동 분야의 신인령, 농민 분야의 이우재, 장상환, 황민영, 황한식, 권영근 등이 주도했고, 농민 분야는 총 23기에 걸쳐 1000여명의 운동권을 양성하였다. 광주사태 당시 무기탈취 특공대 조직의 주역이었던 서경원과 노금노도 농민운동하다가 국회의원이 된 강기갑도 모두 이 크리스챤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도대체 이 단체에서는 어떻게 농민들을 의식화시켰기에 1980년 5월 폭력시위의 주역들도, 훗날 간첩이었음이 드러난 서경원도, 그리고 심지어 국회의사당 건물 안에서도 공중으로 붕붕 뛰며 발치기로 폭력을 휘두르는 강기갑같은 과격한 인물들도 모두 이 단체 출신들이었는가?
이 단체는 농민들에게 경제학, 정치학, 사회사상, 사회운동사, 민족주의론, 조직론, 선전론 등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직업적 데모꾼들이 되는 기술을 가르쳤을 뿐이었다. 도시산업선교회 간사들도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거쳐 간 인물들이었으며, YH노조지부장 최순영도 이곳 출신이었다. 1979년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재판 때 한명숙에 대한 공소사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골자 중 하나가 여공 등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화 교육’이었다.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순진한 여공들을 대상으로 의식화시켰다는 사실은 최순영이 1979년 8월 YH 여공들로 하여금 신민당사에서 농성케 하였을 때 투신자살조와 할복조를 조직케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신애의 실존인물이 전옥주였는데, 그 윗선이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중퇴인 차명숙이었다. 차명숙은 자신이 전남대 영문과 2학년에 재학중이라고 하여 광주시민들이 모두 속았는데, "혜성처럼 나타난 여자 선동가"라는 제목의 그녀의 증언록에서 전옥주는 자기가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차명숙이 부마사태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남민전 투사들 중에 가정부가 끼어있었으며, 차명숙이 가정부였다는 사실, 광주사태 기간 동안의 그녀의 몇가지 수상한 행동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중퇴자가 부마사태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마사태 현장에도 그녀가 있었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광주항쟁이란 잘못된 용어, 잘못된 명칭이다.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주동한 가톨릭농민회 회원 대부분은 광주 거주자들이 아니라 외지인들이었다. 그런데, 가톨릭농민회가 무기 탈취를 주도하는 광주사태 주동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피려면 한명숙(韓明淑)이 연루된 1970년대 후반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을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한다. 몇년전 한명숙이 노무현 정부 총리지명자였을 때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은 유신체제 말기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용공서클 사건이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용공서클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무엇이 객관적인 사실이었는가? 또 한 명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출신 서경원이 훗날 간첩으로 활동했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크리스챤아카데미 등 도시산업선교단체들이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킨 것 중에서 만약 종교적인 것이 하나 있다면, 분실 자살한 전태일은 한국 예수이며, 한국인이 데모하느라 고난받으면 메시야가 된다는 민중신학이었다. 그런데, 그런 거짓된 가르침이 종교적 가르침일지는 몰라도 기독교의 가르침은 아니었다. 지난달 3월 26일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탈북자들은 인간어뢰라 불리는 자살특공대 소행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북한은 김정일이 자살을 전투 무기로 삼으라고 군대에 명령할 수 있는 전체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1979년 8월의 YH사건 때도 자살을 투쟁무기로 삼으려던 여공들이 있었다.
YH무역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케 보게 한다. 1965년 미국이 무상원조를 전면 중단하였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외화벌이 방법으로서 가발수출을 생각해 내셨다. 바로 이 무렵 재미교포 장용호가 1966년 10 여명의 종업원으로 시작하여 YH무역주식회사라는 가발제조회사를 설립하여 불과 4년만에 종업원 3천 여명의 대기업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가발수출이 한창 호경이었던 1970년대초에 박정희 대통령은 10년 후에는 가발 수출로 국민을 먹여살릴 수 없게 될 것을 내다보고 그 대안으로 중화학공업육성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 200년 걸리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단 10년만에 가능케 하는 방법이 1973년부터 시작된 유신체제였다.
바로 그때 윤한봉과 김상윤 등 운동권은 가발 수출로 충분한데 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 하느냐며 산업화 방해를 하였는데, 바로 그 사건이 1974년의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었으며, 민청학련 주동자들이 2년 후인 1976년부터 남민전을 결성하였고, 운동권의 끈질긴 반대가 마침내 1979년에 부마사태로 폭발되고, 그 이듬해인 1980년 5월에 광주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1979년 10월 부마사태의 도화선은 그 해 8월의 YH 사건이었다. 십년 앞을 내다보신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대로 가발수출 호경기는 1979년에 그 막을 내렸다.
가발수출은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던 산업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동남아 등에서도 가발 수출산업에 뛰어들 때 한국은 가격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산업을 육성하시려 하였던 것인데, 크리스챤 아카데미와 도시산업선교회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경제 이론을 거꾸로 가르쳤다. 가발수출 시장이 계속 좁아지고 있었을 때 YH여공들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시키는대로 임금 인상을 위해 계속 투쟁하였다. 엄청난 은행빚에 허덕이던 YH무역회사는 1979년 3월 29일 마침내 정문에 폐업공고를 나붙였다. 500여명의 여성근로자들의 눈앞이 캄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판단대로 이미 가발수출로 국민을 먹여살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가발을 제조할 수록 은행빚이 늘어나는 회사가 영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여공 농성을 선동하던 김영삼씨는 1997년 한보 등 몇몇 대기업이 부도났을 때 묘책을 찾지 못해 IMF 환난이 닥치게 하였다. 김영삼씨와 운동권이 시키는대로 투쟁만 하면 되는 줄로 여겼던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 4층강당에서 농성하던 중 8월 10일 밤 11시에 투신자살조와 할복조를 조직하였다. 여공들이 4층 창살에 매달려 울부짖었으며, 그 중 몇명이 실신하였다. 언제 추락사가 생길지 모르는 위험한 순간이 온 8월 11일 새벽 2시경 마침내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여기저기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그물을 쳐놓고 사복경찰관들이 4층 비상구 문을 부수고 뛰어들어 창문을 닫고 사방의 창가쪽을 막아섰으나, 한 명의 자살은 막지 못하였다. 한발 늦어 이미 투신자살팀장 김경숙은 자살한 후였던 것이다.
가발수출의 시대가 지나갔으나,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의 선견지명으로 중화학공업 육성이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으며, 새로운 공장들과 새로운 일자리들이 마련되고 있었다. 만약 크리스챤아카데미가 진실로 노동자들을 위했다면 노동집약적 산업구조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산업구조로 이동하는 시기를 위하여 노동자들을 준비시키고 새 일자라를 얻도록 도와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가발수출로 충분한데 왜 중화학공업 육성을 하냐며 방해하던 운동권은 YH 여성근로자들이 그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투쟁하도록 선동하였다. 따라서 도시산업선교회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들은 산업선교를 빙자하며, 그 사건을 보다 큰 시위 선동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한명숙이 여성부 간사였던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의식화된 영향으로 1979년 8월 투신자살팀을 조직한 여성근로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1980년 5월에는 서경원처럼 전라도 여러 지역의 무기탈취조를 조직한 농민도 있었다. 전라도 함평 농민이었던 그가 어떻게 1988년에 김대중의 평민당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는가? ‘크리스챤 아카데미’ 에서 의식화된 대로 행동하여 운동권 거물로 컸던 것이다. 서경원은 1978년 4월 22일에도 시위구호를 붉은 글씨로 쓴 적이 있었음을 『正史 5·18』 44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전국농민대회를 마친 농민들이 오후 4시께 스크럼을 짜고 붉은 글씨로 '고구마 피해 보상하라'고 쓴 띠를 머리에 동여맨 채 농협지도회로 향한다." 그런 그가 순수한 농민이라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월북하였는가? 그의 간첩활동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용공성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은 농민수탈이 아니었다. 만약 새마을운동이 농민수탈이었다면 오늘날 전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이 새마을운동을 배우러 한국에 오겠는가? 1970년대는 한국 농가 소득이 급격히 상승하던 때였다. 수탈이란 용어는 그 당시에는 남파 공작원들과 남민전 등 운동권이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반정부 의식화시킬 목적으로 사용하던 용어였다. 「농민수탈금지」라는 구호가 광주사태를 열었듯이, 부마사태를 여는 시위 또한 수탈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한 탈북여성은 부마사태 때 교란작전을 수행하였던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사태 때도 동원되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p. 73-74).
부마사태에도 광주사태에도 친북세력의 공통분모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위 증언을 뒷받침하는 남한 자료 중에 부마사태도 광주사태도 그 주동세력이 남민전이었다는 사실이 있다. 운동권 모두가 남민전 전사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남민전 전사들을 동지로 여기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양자의 경우 모두 수탈이란 표현이 지나치게 강조된다. 1979년 10월 15일 오전 9시 30분 경에 남민전 진영 운동권이 부산대학교 민주학생 일동 명의를 도용하여 "민주투쟁선언문"이란 제목의 유인물을 부산대 교정 곳곳에 뿌렸다. 그런데 이 유인물은 "한민족 반만년 역사 위에 이토록 민중을 무자비하고 처절하게 탄압하고 수탈한 역사적 지배집단이 있었단 말인가?"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부마사태는 시작되었다. 이듬해 5월 18일 아침 전남대 교정 곳곳에도 수탈이란 단어를 사용한 「농민수탈금지」란 구호가 붉은 색으로 씌어져 있었고, 그 구호와 더불어 광주사태는 시작되었다.
5.18측이 주장하는 광주사태 스토리 메뉴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5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도 운동권 학생들이 전남대 제1학생회관에서에서 철야작업하다가 18일 새벽 불시의 예비검속에 걸렸다는 것이다. 17일은 토요일이요, 그 다음날 1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 주간 내내 시위만 했었기에 수업도 없었는데 토요일 늦은 밤에 학생들이 학교에 있어야 했을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집에 있어야 할 학생들이 도대체 무슨 일로 학교 사무실에 불켜놓고 야간 작업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농민무장봉기 거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대규모 시위에 대하여 광주운동권끼리도 명칭이 혼동되고 있다. 어떤 때는 전국농민대회라 부르고 어떤 때는 전남농민대회라고 부른다. 광주에서는 광주사태 이전에는 서경원과 광주운동권이 공동으로 주최한 전국농민대회가 종종 있었는데, 실제로는 전라도 운동권만 참여하기에 전남농민대회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광주에서 전국농민대회가 개최될 때마다 해남. 함평, 무안, 강진, 신안, 영광, 구례, 고흥 등에서 수백 명의 운동권이 광주로 몰려들었는데 (『正史 5·18 p. 44, 57), 광주사태 당시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가 피탈된 지역들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전국농민대회라는 명분으로 종종 광주로 모여들어 대규모 시위를 하던 이 운동권이 바로 무기탈취의 남한측 주범들이었다. 윤한봉과 김상윤 등 광주운동권과 서경원과 노금도 등 카톨릭농민회 간부들은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들이었으며, 그들 중에 이강같은 남민전 관련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김남주 등 남민전 전사들을 동지로 여기고 있었으며 남민전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렇듯 카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는 용공단체로 알려져 있었는데, 바로 이 단체가 광주운동권과 손잡고 14일 관제농협 해체, 재벌 등 비농민소유 토지회수, 생산비 보장 및 추곡수매가격 예시, 강제농정 중단 등 7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광주 전역에 뿌렸다 (正史 5·18 p. 124). 이어 그 다음날 15일에 동신실업전문대학 학생회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명의로 제2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당시 북한의 국화로 알려졌던 진달래와 북한의 적색 국기를 연상시키는 "핏빛 진달래"라는 상징적 표현을 쓴 "우리가 흘린 이 젊은 피가 통일 민주조국으로 가는 노정에 핏빛 진달래로 피어오르길 바란다!"는 문구가 나오고 바로 다음에 엉뚱하게 농민수탈이 언급된다:
△농촌문제
민족경제의 근간인 농촌경제의 파탄은 더이상 우리가 좌시할 수 없는 바, 이의 개혁을 위한 투쟁을 선언한다. 농촌과 도시의 격차 심화와 농업 채산성의 악화로 급격히 증가되는 이농 등의 농업 기피 현상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강령 1. 농촌 기생지주제와 그에 따른 소작형태의 방지를 위해 혁신적인 농지개혁이 실시되어야 한다. 특히 도시 주변의 농지를 재벌이 집중 매입하는 바, 이는 즉각 환수, 재분배되어야 한다.
강령 2. 이중곡가제 등으로 위장된 노동자·농민에 대한 구조적 수탈정책은 철회되어야 하며, 생산물 중간착취의 근본적 배제를 위한 농산물 유통질서는 새로이 확립되어야 한다.
강령 3. 독점자본의 농민수탈의 통로 역할을 한 강제영농의 하수인이던 농협은 즉각 해체, 직선에 의한 새로운 농촌민의 기구가 창립되어야 한다. 아울러 가농·기농 등 자생적 농민단체는 보호, 육성되어야 한다.
강령 4. 농민의 경제적 지위향상을 위해선 정치적 지위향상이 필수 불가결한 바, 자생적 농민단체의 정치참여는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위의 강령 3에서 가농은 '카톨릭농민회'의, 기농은 '기독교농민회'의 약칭이다. 그리고 강령 2와 3에서 수탈정책이니 농민수탈이니 하는 단어들이 반복되는바, 이렇듯 3공수여단 12연대 소속 김치년이 전남대 교정에서 보았다는 붉은 색 구호「농민수탈금지」는 사실이었다. 당시 전남대 농과대학 학생회장이었던 원순석도 그의 증언록 "전남대 농대 학생으로 맞은 5·18"에서 카톨릭농민회가 농대 등 전남대 단과대학 학생회실에 쌓아놓은 유인물이 무려 한 트럭분이었음을 증언한다. 원순석이 17일 밤 10시 전남대 정문에서 본 운동권 학생수가 300여 명이라고 했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그 학교 운동권을 총동원하여 19일의 농민봉기 거사를 위한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 색 구호「농민수탈금지」를 교정 여기저기 써놓은 것도 그 준비 중 하나였다. 그리고 20일 아침에 도착한 김치년의 부대원들이 그 구호는 용공분자들이 쓴 구호라는 느낌을 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대중의 측근이자 전남대 복학생이었던 김상윤은 5월 17일 밤에는 총학생회 간부들과 이병철(당시 카톨릭농민회 전국본부), 노금노 등과 함께 19일 북동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가톨릭농민회 전국대회 준비 최종점검을 하려 하였다 (正史 5·18 p. 125). 윤한봉도 그의 저서 "운동화와 똥가방" 57쪽에서 현대문화연구소 간부들 등 김대중의 핵심세력이 5월 17일 밤에도 5월 19일에 계획된 광주에서의 대규모 농민시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음을 서술한다. 그것을 정용화는 "윤한봉의 밀항을 돕다"란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5월 19일은 북동성당에서 70년대말 종교적 보호막을 입고 급격히 성장한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하는 행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가톨릭농민회가 그 준비를 전남대 총학생회에 의뢰했는데 전청협도 전남대 총학생회와 17일 오후 7, 8시경까지 그 행사를 준비하였다. 한봉이 형은 그때도 국민연합 결성관계로 일을 해오고 있었다."
광주매일『正史 5·18』은 한상석 등이 작성한 전남대 총학생회 기획실의 5월 9일자 문건 기록을 이렇게 인용한다: "농촌 파급효과를 위해 공용 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죽창과 바테리를 준비하며 방송국, 공공건물, 예비군 무기고 접수를 고려한다" (pp. 118-125). 『正史 5·18』에 실린 위의 5월 9일자의 5.18 비밀문건은 광주운동권이 "자유노트"라고 부르는 문건 13쪽의 폭동계획서를 인용한 것이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전남대 학생회 총무 양강섭과 기획실 간부 송선태와 문승훈 등이 그 문건 기록 현장 목격자였던 바, 그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러하다: "농촌 파급효과를 위해 공용 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14시부터 18시 사이에 [카농]조직을 이용하여 죽창 [밧데리]등을 준비해서 폭동을 일으킨 후 방송국과 공공건물 및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한다." 여기서 [카농]이란 카톨릭농민회(혹은 가톨릭농민회)의 약칭이다. 그리고 그 카톨릭농민회 회장이 한명숙이 그 간사 중 한명이었던 크리스챤아카데미 출신이며, 훗날 김일성에게서 만 불 단위의 하사금을 받아 김대중에게 전해주었던 서경원이었다.
사진설명] 1970년대 후반에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한명숙이 여성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의식화시키는 장면.
http://cafe.daum.net/gae9ra/J1qh/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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