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성리학으로 옭아매서 망하게 한 만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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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고아제 작성일14-07-04 00:08 조회1,793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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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만동묘가 충북 괴산군에 있다. 바로 옆 화양구곡에 화양서원도 있는데 대원군이 서원철폐 할 때 맨 먼저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철폐했다. 조선왕의 묘호에는 신종이나 의종이 없는데 그것은 명나라 황제의 묘호를 사용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역사관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한국경제 정규재 논설실장께서 만동묘를 꺼냈다. 정규재 실장은 내가 알지 못했든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만동묘를 오르는 길을 아주 가파르게 해 놨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감히 명나라 황제의 사당을 오르면서 감히 두발로 걸어올라 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동묘를 오르는 사람들은 사진에서처럼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서 개구멍 같은 구멍으로 기어서 들어오게 했다. 물론 관광객들은 잘 닦여진 다른 길로 올라 갈 것이다.
내가 만동묘의 존재를 안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구입한 5권 중 하나인 김도환 교수가 쓴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라는 책에서였다. 이 책은 장차 임금(정조)이 될 세자를 가르치는 서연에서 나눈 대화를 기록 한 책으로서 홍대용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계방일기를 해설한 책이다. 우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든 만동묘이기에 우암을 아주 존경하는 정조는 만동묘에 대해 홍대용에게 여러 가지를 묻는 내용이 나온다.
송시열이 만동묘를 짓게 한 것은 후대에도 계속 명을 섬기게 함이고 또한 자기에 대한 비판을 못하게 하고 청을 따르는 북학파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였다.
숙종때 문인인 민정중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최후의 왕인 의종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글자를 얻어 와서 송시열에게 주었고 화양리 석벽에 새긴 뒤 원본은 운한각을 지어 보관해 오고 있다. 이 외에 송시열의 글씨인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도 바위에 새겼다. 비례부동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명에 대해 예를 지켜 라는 뜻이고 대명천지: 조선의 하늘과 땅이 명의 것이고 숭정일월: 조선의 해와 달이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것이라는 뜻이다.
만동묘의 만동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것인데 선조의 어필이다. 만절필동
은 황하가 남과 북으로 꺾여도 중국의 지형이 서고동저인 까닭에 끝내는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결국 뜻대로 된다거나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를 때 사용 되는 것으로 순자의 유좌편에 나오는 것이라는데 이것은 선조의 명에 대한 충절을 강조 하는 글이다.
위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조선이 성리학이라는 학문에만 심취하여 백성의 삶의 향상에는 소홀했다는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보듯이 청나라는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서 백성들의 생활이 풍요로웠다. 조선의 북학파인 박제가,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은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높이자고 했으나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반대 했다. 결국 이러한 쇄국 정책으로 정조 이후 3대에 걸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로 대변되는 민비 일가와 고종의 무능함으로 조선이 망하게 된다.
지금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도 중국 즉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문이다. 물론 청나라도 나중에는 일본한테 망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을 때 청의 문물을 받아 들였다면 일제 강점기도 없었을 것이고 남북이 갈라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 마침 중국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방문한 것을 보고서는 만동묘 생각이 나는 것은 나만의 쓸데없는 망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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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hm9163님의 댓글
enhm9163 작성일좋은 글 잘 일고 퍼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