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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Y의 신화 만든 아키오모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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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2 19:43 조회3,8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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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Y의 신화 만든 아키오모리타

2000년 5월 초, 소니사의 제2대 회장이었던 모리타 이키오씨가 타계했다. 그는 전쟁의 잿더미 위에 오늘날의 소니사를 건설한 전설적인 기업인인이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기업인으로서만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라 일본이 자랑할 수 있는 세계적인 인물이요 일본인 모두로부터 숭앙받는 국민적 교사였다.

그는 물리 학도로 태평양 전쟁 때 일본 해군이 추진하고 있던 열추적 유도탄 연구에 동원됐고, 거기에서 그의 연배인 이부카 마사루 씨를 만났다. 그의 집안은 수백명의 하인을 거느리는 대부호였고,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야 할 맞아들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와 이부카씨는 헤어지기 싫었다. 두 사람은 그의 부친을 찾아갔다. 예상과는 달리 부친은 선뜻 자식이 하고싶어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두 사람은 그 모임을 "미지의 개척자"라고 명명했다.

폭격으로 페허화된 건물에 책상 하나를 갖다놓고 생전 보지도 못한 녹음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들은 가느다란 철사에 음을 녹음시키는 데까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녹음된 것을 편집하려면 철사를 잘라내고 때워야 하는데 그 때우는 부위에서 음이 파괴됐다.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바로 그때 맥아더 사령부에서 확성기 음이 퍼져나왔다. 그는 그것이 분명 녹음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사령부로 달려갔다. 창을 통해 녹음기를 생전 처음 보게 되었다. 그는 미군 장교를 졸라 그 녹음기를 몇 시간 빌릴 수 있었다. 철사가 아니라 테이프에 녹음이 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그 테이프를 질긴 종이라고 불렀다.

질긴 종이를 만드는 회사를 수소문해 봤지만 일본에서 그런 테이프를 만드는 공장이 없었다. 두꺼운 곽대기를 길게 오려서 거기에 자석가루를 칠했다. 녹음기는 만들어졌지만 덩치가 크고 조잡하여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참으로 미련한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모한 노력은 기술에 대한 소화력과 노하우를 길러주었다.

그들의 두번째 목표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드는 일이었다. 라디오를 가장 먼저 만든 회사는 미국 TI사였다. TI사가 만들어낸 라디오는 진공관식 라디오로, 넓은 응접실 한 모퉁이를 장식하는 커다란 가구로 취급되고 있었다. 라디오는 가구라는 생각에 젖어온 미국 기업들은 트랜지스터를 먼저 만들어 내고도 그것으로 소형 라디오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트랜지스터는 1948년에 미국 벨 연구소에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여 소형 라디오를 만든 이는 모리타 씨였다. 1955년이었다.

그는 이 라디오를 팔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세계적인 새로운 제품은 대부분 미국에서 발명되었고 생산되었기 때분에 미국인들은 미국 밖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매우 경시했다. 소니사의 라디오 역시 미국의 유통망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 문제 있는 곳엔 반드시 해결책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3일만에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유통망을 통하지 않고도 고객에게 상품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것이 신문광고의 효시였다.

부로바사가 20만개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주문해 왔다. 라디오에 브로바 이름을 새겨달라는 조건이었다. 이 20만개의 주문은 소니사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요 엄청난 횡재였다. 모리다씨는 본사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본사에서는 즉시 주문을 수락하라고 했다.

그러나 모리타씨는 하루밤을 꼬박 새워 이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눈이 둥그레진 브로바사 중역이 말했다. '브로바사는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소니사 제품에 브로바 로고를 넣는 것이 얼마나 횡재인지 아십니까?' 모리다씨가 당당히 말했다. '브로바사도 50년전에는 우리 소니사와 같은 처지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브로바사가 50년만에 오늘과 같은 기업을 일으켰다면 앞으로 50년후에 우리 소니사도 브로바사 만큼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소니사 제품은 소니의 이름으로만 팔릴 것입니다.' 결국 모리타씨는 장래의 이미지를 위해 엄청난 액수의 단기 이익을 포기했다. 그후 40년이 지난 지금 이 두개 회사의 프로필은 완전히 역전되어 있다.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릎쓰고 워크맨을 만들었다. 만들자 마자 30만개가 팔려나갔다. 새로운 상품에 대해서도 남다른 혜안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영과 마케팅에도 귀재였다. 그는 언제나 정당한 것만 추구했고 편법을 배척했다. 그는 그의 일생의 파트너인 이부카 회장을 깍듯이 존중해주었고, 제3대 회장 자리는 "오가"라는 프리마돈나급 음악가 출신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오가라는 젊은 음악학도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소니
사로 데려온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다.

당시 학생이었던 오가는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의 음질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모리타씨는 그 학생의 예리한 직관을 높히 샀다. 그를 소니사로 데려오려 했지만 오가는 끄덕도 하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모리타씨는 빈에까지 그 청년을 몇번씩이나 찾아가 인간적인 신뢰를 쌓았다. 오가씨는 귀국하여 무대위에서 프리마돈나로 활동했다. 그런 그를 모리타씨는 끈질기게 설득시켜 마침내 소니사로 데려왔다.

그 청년은 소니사 창설이래 가장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바로 그가 지금의 3대째 회장이다. 그런데 오가 역시 "데이"라는 타인을 차기 회장감으로 기르고 있다. 소니사는 대대로 가족에게 넘겨지는 그런 회사가 아니다. 남의 제품을 복사해서 비싼 가격으로 팔고 은행돈을 떼어먹고 그 재산을 자식에게 편법으로 물려주는 한국의 재벌들이 왜 그렇게 초라해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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