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1-06-15 (종합) 기획.연재 04면 45판 1099자 *北선박에 “검색하게 해달라” 거꾸로 사정
북한 상선들과의 교신록 전문이 밝혀졌다. 두드러진 것은 6월 2일 오후 12시45분부터 6월 3일 오전 9시30분까지 무려 21시간에 걸쳐 이뤄진 청진2호와 우리 해군 수원함과의 교신 내용이다. 이 교신 내용엔 현재 우리 군이 처해있는 처지와 심리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담함 그 자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해군함정은 상부에 보고하기 전에 무조건 경고·정선·검색한 후 경우에 따라 나포해야 한다.
이는 연합사 자동 교전규칙이자, 우리 해군의 권한이다. 그러나 교신록에서 나타난 한국 해군 장교들의 말은 너무나 위축돼 있었다. 북한 함정에 바짝 접근해야 할 해군함이 오히려 5회에 걸쳐 북 선박에 “우리 함정과 너무 가까이 붙어 항해하고 있으니 2km이상 떨어져 항해해 주십시오. 위험합니다”라는 부탁을 했다. “홍도해협은 우리 영해이니 제주남방으로 돌아가시오”를 무려 23회에 걸쳐 간구했다. 이에 대해 북 선박은 “김정일 장군이 지켜보고 계시다”, “6·15 때 결정됐고, 공화국이 그어준 항로라서 변경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랐다.
물론 우리 해군도 상부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겠지만, 북 선박과 교신하는 어투가 주눅이 들어있다. “…하시길 권고합니다” “안전에 문제가 있습니다” “협조 바랍니다” “…지켜주시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됩니다” “귀선의 입장은 알겠습니다”는 등. 마치 주객(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심지어 북 선박이 우리 해군·해경함에 “도발하지 말라”고 나오는데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해경함이 북 대홍단호에 대해 “검색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것은 희극에 가깝다.
“남측의 검색 의사를 (북측) 본사에 연락해 허락을 받아달라”고 두 번이나 사정하다 거절당하자 “(북 선박) 선장님 권한으로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통사정하고 있다. NLL, 흑산도해협, 제주해협을 잇는 그 넓은 영해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 북한선박은 큰소리 떵떵치고, 우리 해군 함정들은 농락당하면서 저들을 안내했다. 이번에 우리 군이 보여준 사정하고 매달리는 모습은 1999년 6월 연평사태와는 너무도 딴판이어서 놀라울 정도다. 이번 교신록은 군이 본분을 잊고 눈치집단화 했다는 한 증거가 될 것 같다.
지만원/ 군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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