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대중은 김정일에 충성하는 골수 좌익입니다
(1980. 5월, 김대중 자필 진술조서)
김대중은 80년 5월 17일 체포되어 수사 받는 과정에서 5월 20일과 5월 25일 2차례에 걸쳐 자술서를 썼습니다.
1. 1945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1945년 9월경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했음.
3..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 좌익 백남운)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았음.
4. 해방 당시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형편이었으므로, 좌익분자와 도 같이 일하게 되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
5. 1949년 친구의 형이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었음.
6. 6.25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박동련이라는 선장집에 숨어있다가 2 일 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7. 정치보위부에서는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느냐?", "이 새끼가 아직도 반성못했다",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는 등 배신자라고 협박했으나 그 이상의 조사 없이 8 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 갔음.
8. 본인은 신병치료차 1972년 10월 11일 일본 도쿄(東京)에 갔다 거기서 유신선포를 맞이 했음.
9. 그 후 미.일 양국을 왕래하면서 기자회견, 강연, 양국 정치인의 접촉, 한민통의 결성 하고, 유신반대와 민주회복 활동을 전개하다 1973년 8월 8일의 납치사건으로 귀국하게 되었음.
10. 1973년 6월부터 해외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좀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미국 에 한민통 임시 총본부를 두고 그 산하에 미국지부, 일본지부, 캐나다지부를 두고자 모색했 으며, 총본부의장에는 본인이 앉고 미국지부 의장은 안병국 목사, 일본지부 의장에는 김재 화, 캐나다지부 의장에는 이상 목사를 내심 지목하고 있었음.
(1980. 7, 국가보안법 위반행위 및 내란음모죄: 사형)
1980. 7. 31일, 검찰은 김대중의 성장 환경, 해방 후의 좌익활동, 한민통의 조직 및 좌익 활동, 폭력시위, 광주사태 선동 및 배후조정에 관해 단죄했습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한민 통을 결성하여 북한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가면서 좌익활동을 했습니다. 한민통은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약자입니다. 지금의 민주당도 "국민회의"였습니다.
"한민통"은 좌익들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고 사살한 문세광이가 한민 통 조직의 일원입니다. 그 직후에 들어왔다가 간첩으로 체포된 김정사도 한민통 조직의 일 원입니다. 이로 인해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을 했습니다"(988년 11월 18일 국회 광주 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신경식 의원)
조총련이 한민통에 매월 1000만 엔 내지 2000만 엔씩 자금을 공급했습니다, 한민통은 좌익 인 광동희가 발행하는 "민족시보"를 기관지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공산당 선전지였습니다.
김대중에 적용된 법조문은 1)형법 제90조 제1항, 제2항, 제 87조 2)계엄법 제15조, 제 13조, 계엄포고령 제1조 제1항 3)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4)반공법 제5조 제1항 5)외국환 관리법 제35조, 제17조 제1항 6)형법 제37조, 제 38조였습니다.
그의 좌익행각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1. 8·15해방후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활동의 중추적 분자였다. 이 당시 김대중은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광분했다.
2. 6·25가 발발,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3. 특히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 로 전남도경에 검거됐다.
4. 김대중이 의장인 국민연합이 1980. 5월 22일 개최하기로 예정한 민주화 촉진 집회에서 시 위를 선동하여 폭력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려 했다. (핵심죄목 1: 내란음모죄: 15년)
5.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정치적 망명을 가장하여 한국을 비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고, "한민통"을 결성하여 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 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위반에 해당하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저지른 것이다(사형).
6, 동년 8월 귀국,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하면서 10·26 사태로 인 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 비를 뿌리며 반정부 조직을 강화했다.
7.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 프, 녹음 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 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다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유발시 켰다. (핵심죄목 2: 반국가단체 구성죄, 국가보안법 제1조제1호: 1980년 9월 11일 사형구형)
8.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이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바로 이날 전두환은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월 3일 징 역 20년형으로 또 감형했습니다
(1988년 11월 30일 국회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 1. "해방 후 1946년까지는 좌익활동을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김대중의 말).
2. 1945년 8월 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 (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3.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의 혐 의로 구속되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4.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 실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5. 1950년 9월 7일 "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 청원서에 1946년 6월 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이 나열돼 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동맹 목포 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 "는 대목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북에서 받은 돈) 1, 일본에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좌익인물들로부터 산만하게 수십-수백만엥씩 받았다는 수 사기록은 있으나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사자간에 주고받는 돈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2. 1997년, 평양에서 김병식 부주석이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김대중이 1971년 20만달러를 김병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3. 1999년 김정일 발언록에는 "DJ가 김일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총애를 받았다" 요지의 글 이 있습니다(일본 문예춘추 12월호).
4. 일반에게 노출된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입니다. 이것 말고도 김대중은 61억엔을 받았다 는 설을 포함해 많은 말들이 돌고 있지만 아직은 이를 수사할 조직이 없습니다. 이는 앞으 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이 상식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북한에 퍼다주는 것은 이 빚을 10배 이상으로 갚으라는 김정일의 요구라고들 하지만 이 역시 심증만 가지 확증은 없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그 개연성이 있는 한 공론화돼야 한다는 것이 2002년도의 대법원 판결입니다. 첫째, 김대중은 일본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 자금도 사용했을 것입니다. 많은 신세도 졌을 것입니다. 그 중에 북한 돈이 없었다고는 누구 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그가 북한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20만 달러라면 지금의 수백억원에 해당합니다.
셋째,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빚을 졌고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정 일로부터 노출됐습니다. 넷째, 그는 쫓기는 사람처럼 북한에 퍼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 산 관광객이 가거나 안 가거니 무조건 1년에 50만 명이 간 것으로 하고 1인당 300달러씩 정 산해주는 것은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몰래 준 돈도 수십억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미 국이 공식적으로 밝혀 준 것은 아직 4억 달러에 불과합니다. 이 네 가지는 그를 의심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김일성과 좌익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자금을 받았는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 다. 문제는 그가 좌익으로 정치 일생을 출발했고, 좌익들과 조직을 만들었으며, 좌익들과 꾸 준히 연대해왔고, 지금도 좌익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적장인 김정일 찬양)
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라고 평가했습니다. (2000년)
1)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 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2)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2. 2000년, 제3차 ASSEM회의를 김정일 외교장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통령의 직분을 망각하 고 김정일 영업부장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유럽국가들을 상대로 북한과 수교하라고 종용했 습니다.
3. 많은 돈을 뿌리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으면 로버트 김을 석방해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김정일 식견있는 지도자입니다. 국제금융을 동원하여 북한을 도와줍시 다"하다가 THIS MAN의 경멸적인 호칭을 얻고 힘이 빠져 돌아왔습니다.
(적장과의 내통행위)
1. 김대중은 김정일로부터 동지적 사랑도 받고 깊은 은혜도 입었다 합니다.
일본잡지 문예춘추 2000년 12월호에 실린 김정일의 육성녹음입니다. 중요한 것만 발췌합니 다.
"지금 정권을 쥐고있는 김대중은 야당 시절을 아득히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미제의 등에 업혀 반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있다".
"김일성 수령님은 김대중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 씀에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 오늘의 김대중은 배신으로 대답하 고 있다".
"김대중은 야당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신뢰와 의리를 버리고 반 사회주의·반통일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
"김대중을 두목으로 하는 남조선 당국자는 동포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태양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혼란시키려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1999.2월).
"그도 한때는 민족자주와 미군철수를 주장,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했으나 민족의 존엄과 양심 을 저버리고 악랄한 친미·친일의 사대매국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1999.11월).
2. 김정일의 추가적인 폭로가 무서워서인지 김대중은 200.3월에 베를린 선언을 기획하여 김 정일에 접선해 줄 것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2000년 6.13 및 6.15일 90분 간의 단 둘이 차 속에서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일생동안 색깔로 의심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대북 관계에서 만이라도 투명해야 했습니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과 단 둘이 갈 때 에 40분 올 때에 50분간 일행을 이탈해 따로 밀담을 갖는 것은 의심받아야 마땅합니다. 남 북한 관계의 특성과 그의 색깔론에 비추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 국민과 국회의 동의도 없이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안에 합의 서명했습니다. 초법행위요 국가보안법 위반입니다.
3. "김정일이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없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었습니다.
4. 북한의 사상 최대의 전력증강과 훈련 사실을 국민에게 속이려 했습니다. "2000년의 전력 증강은 과거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해의 훈련은 10년이래 최대 규모였다"는 연합사령관 의 보고내용은 쉬쉬하고 감췄습니다. 한국군의 군사훈련을 모두 축소 생략했습니다. 2001년 에 대대적으로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준비한 6.25행사도 못하게 했습니다.
5. 북한의 적화통일 행사에 많은 이적단체들을 여러 차례 보내 김정일에 충성을 보였고, 저 들의 적화통일에 동조한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6. 2001. 2월, 미국방문 전, DJ는 평화선언을 획책했다가 부시에게 저지당했습니다. 1973년 월맹의 레둑토와 키신저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맞고 노벨상을 탔습니다. 2년후인 1975년 월맹은 순식간에 월남을 삼켜버렸습니다. 800 - 1,200 만이 재교육 캠프에서 이슬로 사라졌 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7. 지난 2월 김정일 방문이 임박하다며 갑자기 중령급 이상 20%를 삭감시키라고 했습니다. 반 DJ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반공전선 와해)
1. 국가통수권자로 전쟁은 없다고 선포한 것은 군.민의 안보정신을 허무는 이적행위였습니 다.
2. 적을 의심해야할 위치에 있는 군 최고 통수권자가 적을 의심하지 않으면 내통자로 의심 받아야 합니다.
3.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 감싸야 할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 스스로 주한미군 지위변경, 보안법 개정 또는 철폐를 주장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던 좌익들 에게 면죄부를 주어 공공연히 활동하도록 격려했습니다.
5. 임동원, 한완상, 이태복 등을 포함한 좌익용공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있습니다.
6. 46개 언론사 사장단을 북에 보내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홀리도록 하고 그 언론사 사장 들이 국내에서 김정일 찬양론을 펴게 했습니다.
7. 국정원으로하여금 사회단체를 초청해 김정일 초호화판 생일잔치 비디오를 보여주고 김정 일이 식견있는 지도자이며 매우 합리적인 지도자라고 선전하게 했습니다.
8. 국정원으로 하여금 언론 및 사회단체 간부를 데려다가 전쟁은 없다고 교육했습니다. "110 만 대군은 남침용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서 붙들어 둔 것이다". "서부전선에 콘크리트 장 애물과 지뢰를 설치한 것은 옛날 장군이 바보였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와 철로는 방어하는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는 식의 교육을 했습니다. 모두를 뒤집어서 교육했습니다. 많은 언론 사 간부들이 교육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9. 초등학교 교과서에 김정일 사진을 실었습니다. 학생의대부분, 초등학생의 90% 이상이 김 정일을 멋있는 장군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0. 전교조의 좌익 용공 교육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남침 통로 열기)
1. 2000년12월까지 지뢰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열흘 묵던 나그네 하루가 급한 식으로 제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타당성 분석과정 없이 경의선을 환상의 실크로드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남침용으로 사용 될 수 있는 남측 길만 열어주었습니다. 북으로 가는 통로는 지금도 막혀 있습니다.
3. 2001.6월, 북한에 제주해협 통항권을 주자고 있고, NLL도 개방하며, NLL일부를 북한에 떼어내 줄 것을 시사했습니다.
4. 연천의 제5땅굴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천연동굴"이라고 못박았습니다.
(한국군의 손발 묶기)
1. 현장지휘관에게 부여된 "UNC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먼저 쏘지 마라", "청와대에 먼 저 보고하라"며 군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적장에 군자금 대주기)
1. 러시아에서 받은 돈 14억7천만 달러를 안 받을 테니 그 대신 러시아가 북한에서 받을 돈 50억 달러를 받지 말라는 거래를 했습니다.
2. 알게 준 돈은 5조 규모입니다.
3. 모르게 준 돈은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미국이 그 일부를 폭로해 주었습니다. 2000년도 한 해에 4억 달러를 김정일에게 비밀로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미의회 조사국(CRS)은 2002. 2. 25, 의회에 한.미 관계 보고서’에서 미CIA와 주한미군 사령부가 파악하고 있는 내용을 밝혔습니다. "정부는 1999년과 2000년 어느 날까지 현대를 통해 "비밀리"에 4억달러를 북한 에 주었다. 관광대금 4억 달러도 주었다. 총 8억 달러가 갔다. 그 중 4억 달러를 무기 구입 에 사용했다"는 요지였습니다. CIA는 2001년1월 이 내용을 한국정부에 경고했지만 한국정부 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러주기를 강행했다 합니다. 여기에 더해 김대중 정부는 미국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2002. 3. 27 일간지들)
4. 업체들에게 북한 투자 및 지원을 강요하고, 대북지원에 나서는 업체에 세무조사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5. 2년전에 환했던 평양시내가 지금은 깜깜하답니다. 전기가 무기제조 및 땅굴 굴착에 사용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은 북한에 경수로 용량과 맞먹는 50만 KW의 전기를 공급 하려다 미국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6.. 금강산 사업으로 퍼준 돈, 비밀리에 상납한 돈, 앞으로 임동원이 북한에 약속할 돈 이외 에도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에 지원한 돈은 쌀, 비료, 투자비 등이 2조 4천억입니다. 필자의 조사로는 현 정부에 들어 이제까지 북한에 퍼 준 돈이 다음과 같이 집계됐습니다.
1) 2000.9.28: 60만 톤(3,120억원) 2) 6회에 걸쳐 104만톤(4,660억원) 3)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 1조864억원 4) 1999년 한해 동안 대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 업체 당 평균 745억 원. 이는 기업들이 부담한 국세의 1.2배이며 지방세의 20배 규모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5) 99년10월6일 현대가 20인치 칼라 TV 3만대를 북송(445만 달러: 58억원) 6) 99년8월16일 대한제당이 연간 2만톤(60만 달러)씩 북한에 제공(31억원) 7) 99년11월27일 삼성이 172만 달러를 투자(22억원) 8) 2000년 1월 25일 현대아산이 190만 달러 상당의 기와공장 설비 반출(25억원) 9) 2000년2월 8,863평 짜리 평양실내 체육관 준공(450억원) 10) 평화자동차 공장에 금강산 국제그룹이 3억 달러 투입(4,000억원) 11) 2000년 3월7일 삼성전자가 평양체육관용 전광판 시스템에 400만 달러를 투자(52억원). 12)2000년3월22일 삼성이 조선컴퓨터 소프트웨어 지원에 73만 달러를 부담(10억원) 13) 내복 1,000만벌(600억원) 14) 2000년 3월6일 축협에서 계란 1천만 개, 새마을운동에서 곡물 1,660톤을 보냈다. 15) 2000년 4.12일 평화의 숲에서 묘목 20만 그루. 총계 2조3,892억 원이다.
7. 앞으로 더 가는 돈:
1) 5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DMZ) 내 경의선 공사를 시작해 10월 이전에 연결을 완료하 고, 5월 중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임시도로 연결 공사에 착수한다 합니다. 군사분계선-개 성 12㎞ 구간 공사에 필요한 레일, 침목 등 기자재를 북측에 지원하겠다 합니다(2002,4.23 한국일보).
2) 군사분계선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127km) 공사를 올해 안에 시작해 2009 년께 완공한다 합니다(한겨레, 문화일보 2002. 4. 22).
3) 4월말에 비료 20만 톤을 보낸다 합니다(한겨레 2002.04.12)
4) 6월부터 3개월에 걸쳐 북에 쌀 50만톤을 수송한다 합니다(세계일보 2002.4.24).
(반공 역사 말살하기)
1. 2000년10월1일, 이어서 6.25를 "실패한 통일 노력"으로 정의했습니다.
2. 어이없게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베트남 대통령에게 한국군 파병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본 것입니다. 2001. 8. 23일, DJ가 천득렁 베트남 주석 환영만찬 에서 “우리가 불행한 베트남전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 고통을 준 점을 미 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를 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망발이 아니라 한겨레 21의 "아! 몸서리 처지는 주월한국군의 양민학살"론과 맥을 같이 하는 색깔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한 겨레 21. 강정구, 한홍구 같은 사람들은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고, 월맹군을 민족 해방군, 미군/한국군을 반역군으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 김대중이 가세한 것입니다.
3. 여수-순천, 4.3 반란사건을 일으켜 방화 살인한 좌익들을 통일의 역군으로 둔갑시켰습니 다.
4. 13년전, 7명의 경관을 죽이고 11명의 전경에게 주상을 입힌 동의대 좌익 데모학생을 민주 화투사로 명예회복시켰습니다.
5. 13년전, 과격한 불법노동운동으로 실형을 받은 전교조 교사 1,139명에을 민주화투사로 둔 갑시켰습니다.
6. 좌익 대모를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켜 최고 2억까지 보상합니다. 반면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고엽제 환자들과 전상자들은 약값조차 제대로 대주지 않고 있습니다.
6. 법원이 반국가단체로 판결한 한총련에까지 명예회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7. 과거의 사법부 재판의 권위를 몇 명의 수상한 무명인물들이 "민주화명예회복 및 보상위 원회"를 만들어 짓밟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법부가 현재의 "민간심의위원회"보다 못한 것입 니다. 과거의 정통성을 모조리 부정하고 공산주의 통일정권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9. 애써 잡은 63명 간첩은 영웅 취급해서 보내주고, 국군포로, 강제 납북자는 쥐어박고 입을 막습니다.
10.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극진히 대접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115명의 유족은 홀대하 고 학대합니다.
11. 국군 포로를 이산가족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12. 좌경 데모는 보호하고, 보수 데모는 차단합니다.
13. 국정원, 기무사, 경찰의 간첩 잡는 활동을 은밀히 차단합니다.
(언론의 입막기)
1. 46개 언론사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의 명예를 손상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합의케 했습니 다
2. 언론사들에게 "햇볕정책"에 악영향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합의케 했습니다.
3. 언론사 죽이기를 자행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가장 싫어하는 조선과 동아를 죽이려 했습 니다. 국세청 800명 인력의 半인 400명을 풀어 60-90일간 세무조사를 폈습니다. 서울방송에 51명, 조선일보에 50명, 동아일보에 35명, 중앙일보에 24명이었습니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 회도 가담했습니다. 한마디로 쑥대밭을 만들어 언론을 잠재우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국가가 도둑을 맞아도 짖는 개가 한 마리도 없게 만들려 한 것입니다.
(기막힌 거짓말)
1)"이 김대중은 돈을 돌보듯 합니다"(1967)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 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1967년 6월 4일 오후 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행한 DJ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
2)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1997)
"저희는 이번에도 저희자식들 재산까지 다 공개했는데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자식뿐 아니 라형제의 재산까지도 공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정말 무소유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내 자식 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돈은 먹고 살 만큼 만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 영등포의 땅과 경기도 수원의 땅은 장애인을 위해 내놓았고요 저 희 집 현재 살고 있는 것도 가족회의에서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3) "국민 여러분, 이 김대중은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 가족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2002.6)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국민 여러 분의 성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저는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 도록 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드렸으나 결국 저는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습 니다”. (2002.6.21 일간지 일동)
4) 2002.07.10, “국민 여러분께 한없는 죄송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2002.7)
김대중씨가 박선숙 대변인을 통해 차남 홍업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알선수재, 조세 포탈 및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고 홍업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가 발 표된데 대해 한 말입니다.
검찰은 홍업씨가 기업들로부터 48억을 받았다고 공소했습니다. 현대에서 16억, 삼성에서도 5억을 받았고, 이 2개 업체들로부터 매달 5천만원을 받았다 합니다. 임동원한테서도 때때로 2,500만원, 신건 한테서도 1,000만원씩의 상납을 받았다 합니다(2002.7.11 조선, 중앙).
홍업씨는 10억원을 아파트 베란다 창고 안에 숨겨 놓고 그 앞에 가구를 쌓아 놓고 지냈다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닮아 "부정한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왔습 니다.
이런 사실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홍업이가 검찰에 숨긴 사실, 검찰이 또 점수 따려고 감싸 준 사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더구나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서서 송정호 법무장관에게 수 사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는데도 이 정도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6.11일 오전, 국무회의 가 끝난 직후 이한동 총리가 법무장관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합니다.
"어른이 매우 섭섭해하십니다. 어떻게 한 집안에서 두 자식을 구속할 수 있느냐고 하시더 군요. 불구속 수사는 도저히 안 되는 건가요?"
5) "이 김대중은 일생동안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적 없습니다"(1997).
"저는 일생에 거짓말한 일이 없습니다.(청중들 폭소)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 하고는 다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6)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가 국정을 농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 니다"(1997).
"하나 첨부하면 제가 집권하게 되면 청와대 비서실을 대폭 축소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비 서실로 만들고 모든 국정은 국무위원들과 협의해서 하겠습니다. 지금 보면 이 나라에서는 청와대 비서관 회의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국무회의라는 것은 있으나마나 해요. 청와대에 서 국민이나 누구에 대해서도 책임을 안지는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장관에게 전화 한 통 하 면 쩔쩔매고 그대로 따라가야 해요. 이건 이 나라 헌법 질서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도 앞으로 시정할 것이기 때문에 비서들 자신들이 정치를 농단하는 일은 저희 집권 하에서는 없을 것이다, 이것도 말씀드리겠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7) "이 김대중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상금을 국가에 내놓겠습니다"(2000),
"노벨평화상은 한국국민 모두의 업적으로 받은 상이니 만큼 저는 상금(11억2,222만원)을 노벨상 취지에 맞게 사용하겠습니다". (중앙일보 2000.12.11)
8) "노벨평화상 상금은 이 김대중의 것입니다"(2001)
"노벨 평화상 상금은 아태재단에 넣어두었다". (2001. 12.10 조선일보).
9) "노벨평화상금을 김정일에 바치려 합니다"(2002).
"노벨상금과 그 이자를 평양과학기술대학에 기탁할 것이다. 그들은 6.15 기념관을 지을 것 이다". (2002.5.20 중알일보, 세계일보, 신동아 2002.6월호)
10) "김정일은 나쁜 놈입니다"(1997).
"저는 김정일을 대단히 위험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호전적인 사 람, 어렸을 때부터 안하무인으로 컸고 71년부터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 왔고 그래서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위험한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정말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저는 김정일에 대해서 조금도 방심하 지 않습니다". (1997.10.8 관훈클럽)
1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입니다"(2000년)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 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12) "김정일과 담판하여 노동당 규약을 개정시키겠습니다"(1997).
"저는 집권하면 북한에 대해서 분명히 따질 것 따지고 짚을 것 짚고 그래가지고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하겠습니다. 그 가장 전제조건이 노동당 규약을 개정해서 그러한 자세를 우리가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노동당 규약은 북한에 있어서 헌법 이상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13) "김정일에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2002).
그는 김정일에 알게 모르게 현금과 쌀로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 5조원 규모입니다. 그는 일 본에 있을 때부터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김정일이 입을 열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일은 그가 물러나기 전에 그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것입니 다. 노벨상을 받으면서도 그는 김정일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김정일과 함께 상을 받지 못해 죄를 지은 기분이리고 말했습니다.
14) 1980.3.26일 김대중의 YWCA 초청 연설문입니다. 그의 사기성이 잘 나타나 있는 연설문입니다.
나는 내 일생의 교훈으로써,「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배반하지 말고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 도 국민의 편에 서라」는 것, 이것이 내 인생과 정치의 신조입니다.
우리 집 가훈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중 첫째가「하느님과 국민에게 충실하라」입니다. 둘째 는「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야 된다」이며, 셋째는「절대로 부자가 되지 마라」는 것입 니다(박수, 옳소! 환호).
나는 내 자식들에게 말하기를「돈과 하느님은 같이 섬길 수가 없고, 돈과 양심을 같이 섬 길 수가 없다. 돈은 먹고사는 데 부족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부를 가지게 되면 부의 노예가 되고,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국민으로부터 격리되고, 그리고 교만해지고 타락 한다. 따라서 만일 너희들이 경제계에 나가서 사장이 되고 회장이 되는 등등 경영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만일 부자가 되면 아버지와 너희들과는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나는 얘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정치인으로서의 최대의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 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둘째, 셋째입니다. 나 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내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 다. 내 양심에 충실하다가 기회가 있어서 대통령을 맡게 되면 봉사할 것입니다(박수, 환호).
그러나 국민과 양심을 버리고「무슨 수단을 쓰든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이것은 내가 죽으면 죽었지 추구할 수 없는 길입니다.(옳소! 박수)
여러분에게 솔직히 얘기한다면, 나는 다음 정권, 그렇게 대단한 매력이 없습니다. 왜? 첫째, 경제만 보더라도 박정희씨가 아주 망쳐 놓았습니다(박수. 옳소! 환호).
이것을 맡아 놓고 수습한다는 것은 마치 다 파먹은 김칫 독에다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마 찬가지입니다(옳소! 박수).
4년 동안 뒷치닥거리나 하고 나면, 그것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뒷치닥거리를 하고 나면 4년은 끝나는 것입니다(웃음, 박수).
남북문제, 노동문제, 청년·학생문제, 군대를 통솔하는 문제 등등 다음 대통령의 짐이 여간 무겁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생각을 하면,「누가 한 4년쯤 해서 실컷 고생하고 난 뒤 그때쯤 내가 맡는 게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박수, 환호)
여러분! 나는 아직도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여기서 공개할 수 없는, 그 동안 많은 치욕과 고 통과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나를 바닷 속에 상어밥이 되게 던지려고 할 때도,「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국민은 나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법정에 섰을 때도 판사를 향해, 검사를 향해,『당신들이 나를 지금 재판하지만 역사와 국민은 내 편』이라는 것을 얘기했습니다(옳소! 박수).
누구에게 천대를 받건, 누구에게 멸시를 받건, 누구에게 박해를 받건, 아니 오늘 생명을 잃 건, 내 국민만 나를 버리지 않고, 내 국민만 나와 같이 있고, 내가 내 국민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한은, 김대중에겐 불행이 없고 김대중에겐 슬픔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 립니다(박수, 옳소!)
따라서, 나는 지금 게딱지같은 국민주택에 살고 있지만(웃음), 국민을 배반하면서 부를 얻 는 것보다는 하느님과 우리 국민을 택했습니다. 국민을 배반하면서 안전을 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 신념은 내가 죽는 그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박수).
여러분!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는 내 스승입니다. 나는 하 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형님입니다. 나는 그의 제자이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 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나의 스승 예수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자유와 권 리와 행복을 위해 싸운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 씀드립니다(박수).
북한은 한쪽으로는 대화를 하면서도 간첩선을 내려보냅니다. 폭력과 무력을 통해서 남한을 뒤집어엎겠다는 소위「남조선 해방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국가의 안보와 반공 의 태세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강조합니다(박수, 옳소!).
나는 반공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넘치는 자유와 정의와 안정을 줌으로써 국민들이 이 땅에 정을 붙이고,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이 나라를 지키 려고 하는, 공산당 침투의 여지가 없는 반공과 안보를 주장하는 것이 나의 정책이요 박정희 씨와 다른 점인 것입니다(박수).
국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이 있는 곳에, 김대중이가 있습니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데 김대 중이는 있습니다. 김대중이는 천 번 죽어도 국민을 떠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필요로 하면, 우리 민족의 혼이 내게 명령하면, 나는 다시 열 번 납치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백 번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천 번 연금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할 것 을 다짐합니다!(옳소! 환호, 박수) (연설 끝)
(경향신문이 보도한 김대중)
1980.5.18일자 경향신문도 이날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 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란 제목을 단 특집기사로 김대중 을 비난했다. 아래는 경향신문 기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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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이력서)
1959년 6월 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 덕였다. 이때 김대중의 전처 차용수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져 음독 자살했다.
김대중은 그후 62년 10월 현재의 부인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 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1945년 8·15해방 후 근무하던 일본인 해운회사를 인수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해방 당시 일본인 소유의 회사, 토지, 주택 등 여러 형태의 재산은 적산(敵産)이라 하여 미 군정청이 인수했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국유재산이 되었다. 이른바 '적산불하' 로 출발 한 한국의 기업은 많았다.
김대중이 어떠한 과정으로 일본인 기업을 인수했고 정계에 입문하면서 처분했는지, 김대중 은 1980년 계엄사에 제출한 자술서에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자료집 참조).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김대중을 집중적으로 취재한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柴田穗) 기자 는 김대중의 회사 처분에 대해 위 경향신문의 기사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래는 시바 다 미노루,『김대중의 좌절』산께이 신문(1982) 기사다.
"김대중씨가 급히 강원도로 피신을 하게 된 것은 해운회사의 부사장 나상수가 김대중씨를 횡령으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는 급거 강원도로 몸을 숨긴 것이다. 당시, 군통제지역에서 행 정지구로 막 편입됐을 뿐인 강원도 인제 지구는 김대중씨가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 다. 김대중씨가 59년 선거직전이 아니라 56년에 강원도로 옮긴 사실과, 56년까지의 사이에 횡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꼭 맞아떨어진다".
"김대중씨가 민주당에 입당한 것, 그 직후에 카톨릭 세례를 받은 것,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모두 56년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하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도, 횡령도 태연하게 한다는, 김대중씨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술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59년 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제 지구에 출마, 낙선한 직후 새로운 횡령사건이 발각된 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했다. 민주당 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조의금을 보내게 되었다".
"당 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해 버렸다. 이 사실 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 손으로 고발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난 듯하다"
"61년 7월부터 김대중씨는 민주당의 대변인이 된다. 그런데 선전부장 시절에도 횡령 사건이 있었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천 7백만원 중 7백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대중의 모략행위)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 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는 7명의 후보가 난립,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렇게 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었다.
드디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씨는 김대중에게 사퇴를 약속했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어 전 씨의 당선은 보장됐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61 년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이밖에 김대중이 각종선거전에서 저지른 폭력 및 흑색선거운동을 보면-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으 며
▲목포시 만호동 상가주택을 철거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자기선거운동원을 측량기사로 위장, 주민의 불안감과 반감을 유발케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 러일으켰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했다.
1971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그는 단순한 자동차사고를 여당 측의 암살음모라고 떠들 어대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운전사의 운전부주의로 김대중이 탄 승용차가 전복된 것이 조사결과 밝혀져 자동차 사고의 암살음모 주장은 결국 김대중이 조작한 혐의가 짙다는 것으로 끝났다.
*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한 세칭 폭발물 자해사건도 발생했다. 이는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의 집 앞에 폭발물을 장치,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조사결과 이 폭발물은 어린이들의 장난감용 딱총 화약을 은박종이에 싸서 배터리 전지로 폭발할 수 있게 만든 조잡한 것이었다.
김대중 암살용 폭발물이었다면 이같이 조잡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결국 김대중이 조카를 시 켜 저지른 조작극으로 밝혀졌었다.
(김대중의 사기 행위)
김대중은 현재(1980)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 4억원, 동 산 1억원 등 5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월 29일(1980) 복권 후에는 자신이 집권할 경우 경제적 이권, 정부 요직 등을 미끼로 각계인사로부터 무려 12억 원 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자금을 조달한 것은 대부분 파렴치한 수법에 의한 것들이었다.
▲우선 1959년 6월 인제 지구 재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그의 선거참관인 중 문수룡이 참관도 중 급사하자 민주당에서 조위금으로 보내온 30만원 중 18만원을 횡령 착복했고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 경영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 도주했 다.
▲또 60년 4월~61년 4월까지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원공작구실로 조달한 3천7백 만원중 7백70만원을 횡령,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원, 김세종 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다.
그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1972년 10월 김대중이 일본에 머물고 있을 때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 산됐다. 그러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 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 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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