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최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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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3-08 18:25 조회15,49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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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7월 20일 중앙정보부는 목포 앞 임자도(荏子島)를 거점으로 하여 활동해 온 북괴간첩단을 적발, 118명 중 간첩 27명을 구속하여 검찰로 보냈다고 발표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지하당 전남도책(全南道責)인 정태홍(鄭泰洪, 정태묵이라고도 한다) 등 간첩단은 1962~1967년 사이 북한을 오가며 1,845만원의 공작금을 받아 지하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정태홍은 45세로서 전남 목포 출생으로 김대중의 목포상고 1년 선배가 된다.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6․25 전쟁으로 탈옥하였다. 정태홍은 북한에 4회 왕복하며 노동당에 입당하였고 공작금 800만원 수령, 지하당 포섭 활동 등을 벌였다. 정태홍 이외에 최영길(崔永吉), 김종태(金鍾泰), 윤상수(尹相秀) 등이 주요 간첩단 조직원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간첩단 일원의 가까운 친척이 신고하여 수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최영길(崔永吉)은 김대중의 선거 참모였으므로, 김대중은 큰 위기에 몰렸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대중을 세종 호텔로 불러 직접 만난 후에 무혐의 처리했다.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이른 점심을 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열한시경 사무실을 나섰다. 몇분 안에 세종호텔에 도착하여「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중앙정보부가 특별조사를 위해 확보하고 있던 특수방 앞에 서서 방 번호를 확인하고 노크를 했다. 거기에는 이미 김대중이 와 있었다. 우리는 간단히 그리고 사무적으로 악수를 교환하였다.
『나, 김대중 의원과 단독으로 얘기 할 것이 있으니까 자네들은 나가 있도록.』
나는 옆에 배석하고 있던 조사관들에게 명령하였다. 김대중은 매우 긴장해 있었다. 그는 내가 왜 그에게 점심식사를 같이하자고 초대했는지를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사실은 오늘 초대한 것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영길에 대한 것을 몇 가지 다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서입니다. 괜스리 중앙정보부로 호출을 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고 김의원의 정치적 장래에 본의 아닌 흠도 생길 것 같아서.』
『그 점, 고맙게 생각합니다. 김부장님.』
『최영길로부터 무슨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적은 없었습니까? 무슨 특별한 부탁이나 반정부 발언을 하도록 종용받았다거나.』
『김부장께서 잘 아시다시피 반정부발언이라면 이 김대중이가 대한민국에서 두번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구태여 최영길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말입니다. 나도 정치가로서 대망을 가진 사나이요. 최영길이가 그따위 조직에 가담했다는 걸 사전에 알았다면 내가 그를 중용했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일이겠읍니까.』
『그건 내가 아오. 그러길래 나도 김의원을 다른 정치인과 달리 취급하고 있오. 하나 이번 문제가 된 임자도 사건은 북한이 한국 내 야당을 선동하려는 공작을 그 중심목표의 하나로 하고 있오. 더구나 김의원과 같이 인기있는 진보적 야당 중진은 그들에게 매력적인 목표물이라는 것은 아셔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논법대로 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야당하는 사람은 죄다 그 사람들의 마수에 걸려둘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결과적으로 보아 내가 최영길을 선거 참모로 썼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김부장께서 나까지 한사코 연루시키려 든다면 고생 좀 하게 되리라고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내가 김의원을 연루시킬 것 같소?』
『그거야 김부장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최영길이가 그런 지하당 조직에 관계됐다는 걸 내가 알았다면 그가 아무리 수완이 좋고 조직능력이 있다손치더라도 나는 그를 선거참모로 쓰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대공사찰망이 어떻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감히 김부장의 어마어마한 정보망을 속이려 들겠오이까?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입니다.』
『허허, 나를 은근히 비행기 태우시는군. 아무튼 나는 개인적으로 이 나라에 김의원같은 야당 정치인도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야당정치인에게 이만한 일로 결정적인 상처를 안겨주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
『감사합니다. 그 말씀.』
『그러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앞으로 사람을 쓰실 때는 각별히 조심을 하셔야 할 것이오. 김의원의 대성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 말씀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형욱 정보부장으로부터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럼 나는 떠나겠오. 곧 우리 조사관들이 간단한 질문을 할터이니 최영길의 배후에 대해서는 방금 나에게 말씀하신대로 그저 모른다고만 진술하시오. 그 사람들이 별 트집을 잡거나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내 얘기해 두고 가리다.』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부장님. 중앙정보부 최고사령탑 안에 나를 개인적으로 이해해 주는 분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나는 11시 40분 경 거기를 떠났다.
(『김형욱 회고록』제 3권 전주: 아침 출판사, 1985, P245~246)
1980년 5월 20일 김대중이 군 검찰에서 작성한 진술서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임자도 간첩 사건의 주범 정태묵(鄭泰黙)은 본인의 목포상업학교 1년 선배이며 선거 기간에도 2~3차례 만나서 본인의 선거에 협력하는 태도를 표시한 바 있음. 그는 광복 직후의 좌익 활동을 청산하고 가업(家業)인 염전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 줄 몰랐음. 그는 매일 시내의 다방에 나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서 일반 시민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음. 同 사건이 나자 하루는 당시 정보부의 김형욱 부장의 보좌관이 와서 출두를 요청하므로 시청 앞 뉴 코리아 호텔에서 김 부장을 만났음. 김 부장은 “임자도 사건의 주범 정태묵을 조사 중 김 선생의 이름이 나왔는데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일단 이름이 거명된 이상 서류 정리상 조서를 안 받을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참고인 조서에 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 그리하여 선거 기간 중 타인과 동석으로 2~3차례 만났으며 선거 후도 서울서 1차 만난 것을 사실대로 진술해 주었음. 이것은 후일에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이나 정태묵은 정보부에서 취조받던 중 진술하기를 “선거 기간 중의 김대중의 연설을 들으니 반공정신이 투철하여 전혀 다른 말을 꺼낼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아예 공작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었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음.
김대중은 박 정권이 교통사고를 위장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1967년 선거 유세에서 떠들었다. 그토록 악랄한 박 정권이 왜 임자도 간첩단 사건에 김대중을 연좌시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1969년 김대중은 경희대 대학원 졸업논문으로「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 - 한국경제의 구조개혁을 위한 서설」을 제출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는 민족경제론을 주창하던 박현채가 대필한 것이었다. 박현채는 필화사건을 우려하여 유력 정치인인 김대중이 쓴 형식으로라도 자신의 이론을 세상에 내놓고 싶어서 대필하였다. 2년 후인 1971년에 나온 김대중의 저서『대중경제론 - 100문 100답』도 박현채, 정윤형, 임동규, 김경광(김대중 비서)이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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