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뒤흔든 간첩 성시백(조선 20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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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2-21 23:45 조회13,90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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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국회프락치사건과 국군 2개 대대 월북 주도
전쟁 직전에 많은 정보 보내 간첩 연루자 112명에 달해
1950년 6월 11일 발령됐던 군부대 비상경계령이 6·25 하루 전인 24일 0시 갑자기 해제됐다. 이에 따라 전 장병의 절반이 휴가와 외박을 갔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댄스파티를 즐겼다.당시 38선 경비를 맡았던 경기경찰국은 인민군 사단들이 전선 인근인 경기 연천·전곡 등에 집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수원·개성·양주에서 서장 회의를 열고 경계강화를 지시했던 때였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는 왜 북한의 남침을 몰랐을까? 군번 1번인 이형근 육군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6·25 전후 사정을 종합해보면 군 내외에서 좌익분자들이 긴밀하게 합작, 국군의 작전을 오도했다"고 썼다.
그렇다면 적과 내통한 사람은 누구일까. 북한은 13년 전인 1997년 5월 26일자 노동신문<사진>에 그 미스터리를 풀 단초를 공개했다. '민족의 령수(김일성)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란 제목의 한 지하공작원 이야기였다.
북한이 밝힌 '그'는 성시백이다.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겉으로는 장개석 정부에서 일했지만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지하활동을 했다. 당시 그는 '정향백'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성시백은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과 관계를 맺고 해방 후 김일성 직속으로 대남 사업에 파견됐다. 그는 남한에서 10여개 신문사를 경영하며 선전공작에 이용했다고 한다.
그는 1950년 5월 15일 붙잡혀 서울 함락 하루 전인 6월 27일 간첩죄로 처형됐다. "성시백이 남한 전체를 쥐고 흔들었는데 박헌영패가 밀고했다. (사형당한) 그의 시체라도 평양 근처에 묻어주려 했는데…"라는 김일성의 말도 기사에 있다.
노동신문이 성시백의 공적으로 꼽은 것은 국회 공작과 적군 와해공작, 정보공작이었다. 국회공작은 1949년 국회의원들이 미군 철수를 요구하다가 붙잡힌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이는 운동권에서 이승만 정권의 고문·조작이라고 평가하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배후에서 포섭한 것은 바로 성시백이었던 것이다.
성은 남한의 정치·경제·군사 정보들을 모아 북으로 보냈다. 1949년 8월 이승만과 장개석 사이의 진해 비밀회담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는 장개석과 회담에서 통역을 맡았던 중국대사관의 김석민을 통해 빼낸 정보였다. 성은 미국대사관 직원이던 김우식을 통해 워싱턴 미 정부의 훈령과 기밀문서를 빼내 북에 보냈다.
오제도 검사는 성시백을 붙잡고 그의 집에서 찾아낸 비밀문서를 통해 국군 2사단 정보참모 김모 소령을 체포했다. 해군 진해통제부사령관도 그와 관련된 사실이 밝혀졌다. 1949년 춘천지역의 국군 2개대대가 월북한 사건도 그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성이 군부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광복군과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신문은 "성시백은 적들이 북침을 개시하면 우리 인민군대가 즉시 반격으로 남진(南進)의 길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하여 적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적구(적의 관할지역)공작에도 힘을 넣었다"고 기록했다.
북한은 그런 그에게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주고, 평양의 혁명열사릉에 그의 가묘를 만들었다. 1990년대 초반 '붉은 단풍잎'이란 7부작 영화도 만들었다. 성시백을 통해 6·25 때 미제의 침략을 분쇄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성시백 사건은 112명이나 연루자가 있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수사는 6·25 발발로 중도에 끝났고 연루자들도 대부분 재판을 받지 않은 채 탈옥, 월북해 구체적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성시백의 가족은 월북했다. 막내아들 성자립은 2004년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총장이 됐다. 이들의 일가가 2005년 8월 금강산호텔의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6·25 전에 남한의 군사·정치 정보를 북에 보내고 6·25 직후 처형된 성시백. 하지만 성시백이 쳐놓은 '적구(敵區) 공작'그물 속에 어떤 인물들이 포함되었고 국군 와해공작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광덕 예비역육군소장은 "성시백의 망령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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