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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운동 사건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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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9 18:03 조회15,3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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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운동 사건들-1


이 글은 주로 konas 정경웅씨가 쓴 글을 간단히 요약하고 여기에 다른 정보를 보탠 것이다. 대한민국을 붉게 만든 학생운동 계보에 대해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정경웅씨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霧林 사건: 1980년 12월 11일 서울大 '반파쇼학우투쟁선언' 배포 사건)

서울大 교내 학생식당과 도서관 계단에「반파쇼 학우 투쟁」,「반파쇼 투쟁」등의 구호가 적인 유인물을 뿌려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검거된 김명인이 수사 과정에서 운동권을 지도하는 지하조직이 있다고 진술하면서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졌지만 안개와 같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霧林 사건이라 불렸다. 처음으로 공개된 386 운동권 지하조직.

구속자: 김명인(국문 4), 박용훈(동양사 4), 현무환(국문 4), 허헌중(정치 4), 고세현(국사 졸), 남충희(철학 4), 남명수(언어 4), 김희경(교육 4), 윤형기(토목 4), 최영선(사회 4) 등

김명인은 문학평론가로 활동, 고세현은 창작과비평 사장, 현무환은 웅진미디어 사장, 최영선은 한겨레신문 교육사업단장, 허헌중은 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 윤형기는 사설 학원가의 인기 수학강사.

學林사건: 1981년 7월 23일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노동자.학생)

“서울역 회군”에 반대한 자들이 기존의 학생운동권 지도부의 노선이 현실타협적이라고 판단하여, 1981년 2월 27일 새로운 노선의 전국민주학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결성했다. 이선근과 이태복이 활동했던 흥사단 아카데미의 전국적 연합인 연합서클 아카데미가 중심이 됐다. 3개월 동안 무려 8차례의 시위를 일으켰고, 김태훈은 서울大 시위 중 투신자살까지 했다. 이 사건은 남민전 사건과 연계되었고, 학생들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學林 사건으로 불린다.

구속자: 이태복(무기징역), 양승조(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신철영(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김철수(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유해우(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김병구(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박태연(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송병춘(징역, 자격정지 2년), 송영인(징역, 자격정지 2년), 노숙영(징역,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4년), 최규엽(징역, 자격정지 2년), 엄주웅(징역, 자격정지 2년), 오상석(징역, 자격정지 2년), 정경연(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이선근(징역, 자격정지 7년), 박문식(징역, 자격정지 5년), 박성현(형집행 면제, 소취하), 이덕희(징역, 자격정지 3년), 홍영희(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윤성구(징역, 자격정지 2년), 민병두(징역, 자격정지 2년), 김창기(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최경환(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김진철(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손형민(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이종구(징역 10월)

李泰馥(이태복)은 1988년10월 가석방되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全民聯) 편집실장을 거쳐 DJ 정부 시절 청와대 노동복지수석비서관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현재 국민大와 한서大 초빙 교수를 맡고 있다. 閔丙梪(민병두)는 이 사건 이후에도 1986년 공개 운동 조직인 民民鬪를 지도하던 제헌의회(CA)그룹을 조직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징역 5년을 구형 받았다. 그는 全民聯을 끝으로 운동권 생활을 일단 마무리하고 1991년 문화일보에 입사, 워싱턴 특파원과 문화일보 정치부장을 지냈다. 열린당 기획위원장으로 소위 개혁 입법에 대한 전반적 기획조정을 맡았다. 이선근은 이후에도 위장 취업 등을 통해 노동 운동을 했으며,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으로 민노당의 부동산 정책을 맡고 있다.  박성현은 벤처 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박문식은 공인회계사다.


釜林사건: 1981년 7월 7일 양서협동조합 독서 토론회 사건

學林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운동권들이 주로 모이던 양서협동조합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제3세계와 종속이론」등을 읽고 토론한 것이 적발됐다. 경찰은 7월 7일부터 9월 7일 사이에 21명을 구속했다. 이 사건에서 구속된 사람들이 주로 부산大 졸업생과 재학생이어서 釜山의 學林이라는 의미로 釜林사건이라고 불린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김광일 변호사의 소개로 무료변론을 맡게 된 노무현이 이호철의 변호인을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운동권 변호사로 입문하게 됐다.

구속자: 송병곤(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3년), 이상록(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6년), 고호석(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6년), 노재열(부산大생, 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이진걸(부산大생, 징역, 자격정지 1년6월), 전중근(공원, 징역, 자격정지 1년6월), 김재규(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장상훈(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 박영옥(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 송세경(서울大 졸, 징역, 자격정지 3년), 설동일(서울大, 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이상경(부산大, 징역, 자격정지 2년), 최준영(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2년6월), 윤연희(부산大 졸, 불구속 기소), 주정민(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2년6월) 이 외에 정귀순(징역 8월, 집유 2년), 오흥민(기소유예), 이호철(징역1년), 설경혜(선고유예), 허진수 등.

김재규는 현재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맡고 있고, 노재열은 민노총 산하 금속노조연맹 정책기획실장, 이호철은 배재 여행사를 경영하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냈다. 이진걸은 釜山노동단체협의회에서 10 여년간 활동하다 자영업.

釜山 美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3월 18일 釜山 美문화원 건물을 방화하고 유나 백화점 등 도심에서 전단지를 배포했던 사건이다. 문부식은 5.18의 책임은 美國에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경고성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5.18 관련으로 수배 중이던 김현장을 원주에서 만나 1980년 12월에 있었던 光州 美 문화원 방화 사건에 대해 듣게 되었다. 문부식은 美國에게는 이와 같은 방식의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 여자친구 김은숙, 후배 등과 함께 모의, 1982년 3월 18일 釜山 美문화원 건물을 방화하고 유나 백화점 등 도심에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1층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던 동아大 장덕술이 중화상을 입어 사망하고 김미숙 등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구속자: 김현장(무직, 사형), 문부식(고신大 3 제적, 사형), 김은숙(고신大 3 제적, 징역 10년 자격정지 7년), 유승열(부산大 공대 3, 징역 자격정지 7년), 박원식(고신大 의예과 2, 징자 7년), 최충언(고신大 의예과 2, 장7년 단5년 자7년), 이미옥(고신大 의예 2, 징10년 자7년), 최인순(부산大 약대 3, 징10년 자7년), 김지희(釜山여대 3, 징10년 자7년), 박정미(釜山여대 3, 징자 3년 집유 4년), 최기식(신부, 징 3년, 자 2년), 문길환(원주교구 성당관리인, 징자 3년 집유 4년), 김영애(치악산 서점 경영, 징자 3년, 집유 4년), 허진수(기장청년회부회장, 징2년), 김화석(부산大 공대 제적, 징3년), 이창복(교회사회선교협 회계, 징자 1년 집유 2년)  

문부식은 당대비평의 주간 겸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후회와 죄책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최충언, 이미옥은 의사, 최인순은 약사가 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은숙은 소설가, 김지희와 박정미는 평범한 가정주부, 김영애와 김현장은 1984년 결혼해 光州에서 케터링 사업을 하고, 박원석은 개인 사업, 류승열은 무역업, 최기식 신부와 문길환은 원주에서 천주교사회복지재단에서 사회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 허진수는 경남도의원을 지냈고,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민청련-민총련 사건

1983년 10월 29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民靑聯)-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民統聯)사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民靑聯)은 1983년 9월 30일 7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고, 1984년 6월말 民靑聯을 비롯한 운동권 단체들이 다시「민중민주운동협의회(民民協)」를 결성했다. 民民協은 이후 민주·통일국민회의와 통합하여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民統聯)'을 창립했다. 1985년 5월 9일 종로2가에서 民靑聯은 청년단체, 전국학생총연합(의장 김민석, 서울大 총학생회장)과 함께 「光州학살정권퇴진을 위한 국민대회」를 주최했다. 이에 당국은 民靑聯을 학생운동과 민추위사건(깃발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여 간부들을 구속▪수사했다.

구속자: 김근태(民靑聯 전의장), 이을호(民靑聯 상임위부위원장), 김희상(民靑聯 대변인), 김종복(民靑聯 청년부장), 최민화(民靑聯 부의장), 권형택(民靑聯 사회부장), 연성수(民靑聯 상임위 부위원장), 한경남(民靑聯 의장), 김희택(民靑聯 부의장), 천영초(民靑聯 상임위 위원장), 이범영(民靑聯 집행국장), 박우섭(民靑聯 운영위원장), 윤여연(民靑聯 사무국장), 서원기(民靑聯 집행국장) 등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고문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이로 인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이 생겨났다. 김근태는 출소 후 1990년 全民聯 정책기획실장 및 집행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자당 창당반대 시위를 주도했고, 全民聯 결성선언문 작성으로 다시 한 번 국가 보안법, 집회 및 시위 관련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정계에 입문한 후, 새정치 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 민주당 지도위원, 열린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국가 보안법 폐지운동을 주도했고, 한총련 합법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라크 파병반대에도 서명했다. 2003년 10월에는 『宋斗律(송두율)에 대한 공격은 舊시대적 매카시즘』이라며,『본인의 소원대로 조국에서 후학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金 장관의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숙부 등이 월북했다. 崔圭成(최규성) 열린당 의원도 1986년 서울 民統聯 부의장 시절, 국가 보안법 상 범죄은닉 혐의로 구속,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서울민족민주운동 협의회 공동의장, 全民聯 상임집행위원, 全國聯合 제도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민청련이 사라진 현재, 민청련 동지회를 통해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 장영달은 국민대 행정학과 출신으로 1974 년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활동 시절, 民靑學聯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 조치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7 년을, 1975 년 긴급 조치법 9 호 위반으로 징역 1 년, 자격정지 1 년을 선고 받았다. 출소 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의장 및 상임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民統聯 총무국 국장, 사무국 차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인천 5.3 사건 관련 국가 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평민당 13 대 총선대책본부 기획조정실 실장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평민당 부대변인, 신민당 대회협력위원회 부위원장, 민주당 통일국제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쳐 국민회의 국회의원, 환경운동연합 국정정책위원회 위원 및 간사, 국민회의 원내 수속부총무, 국민회의 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 새천년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21 세기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의원,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한-일 의원연맹 부회장을 맡았다. 북한의 NLL 침범과 관련, “꽃게철 만이라도 NLL 부근에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자.”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해찬, 설훈, 박선숙, 청와대 춘추관장을 지냈던 최경환,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장준영, 민주평통 사무처장으로 발탁된 김희택, 송두율 초청으로 조사를 받았던 나병식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부이사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조성우 민화협 대표 등이 이 민청련 출신들이다.  


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 사건

1984년 9월 17일 서울大 복학생들은 9월 17일 교내에서 80여명의 회원과 50여명의 재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복학생협의회 창립 대회를 열고, 78학번 유시민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고 유시민은 민간인 감금고문사건을 일으켰다.



① 임신현 사건(9.17∼18): 평소에 서울大를 선망하던 임신현은 서울大에 재학중인 친구를 만나러 갔으나 친구는 만나지 못하고 복학생협의회의 술자리에 우연히 어울리게 된 후, 자신을 '78학번 공법학과 출신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유시민 등이 78학번에는 공법학과가 없었다며 기관 정보원으로 의심, 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가 다음날 오후 8시까지 기관 정보원임을 자백하라며 감금▪폭행한 사건이다. 임신현은 학교 직원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형이 고소하겠다고 하자 26시간 만에 풀려났다.

② 손형구 사건(9.21∼26): 손형구는 학력고사성적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으나 성당 교우들에게 서울大 법대에 입학했다고 속였다가 돌이키지 못하고 가짜 서울大생 행세를 했다. 이후 40여 차례나 서울大에 출입했고 사건당일에도 법대 앞에서 배회했다 손형구는 9월21일 오후 1시쯤 법대 사무실 앞 의자에 앉아 있다가 김진욱 등 2~3명으로부터 신분을 조사 당하고 서울大 학생이 아님이 드러나자 학도호국단 사무실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유시민, 백태웅, 백기영, 윤오중, 오재영, 김도인 등으로부터 기관 정보원 추궁 받았다. 손형구가 기관 정보원이라는 명확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자, 유시민, 백태웅(일명 이정로) 등은 신림동 소재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손형구를 감금했다가 다시 총학생회장실에 감금하는 등 약 5일 동안 불법 감금했다. 결국, 학교 직원의 연락을 받고 어머니와 삼촌이 왔으나, 석방해 달라는 요청이 거절당했다. 이에 가족들은 학생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구출해 냈다. 이후 손형구는 강박증세로 인한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③ 전기동 사건(9.26-27): 전기동은 1982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법대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후 방송통신大에 입학했다. 그 해부터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도움을 받던 교수로부터 고시공부에 필요한 참고도서를 추천 받고자 서울大에 가끔 출입해오고 있었다. 전기동은 26일 오후 4시30분쯤 독도 문제와 관련된 국제법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서울大에 잠시 들어갔다가 『잠깐 볼 일 있다』는 학생 7~8명에 의해 학생회관 3층 총학생회장실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유시민, 백태웅, 윤오중 군등이 전氏의 소지품을 뒤져 주민등록증과 방송통신大학증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너 소속이 어디냐, 기관원이지』하며 추궁했고, 전氏가 계속 『방송통신大학생이다, 왜그러냐?』고 하자 『안되겠다』 면서 오후 5시쯤 총학생회장실과 같은 층에 있는 서클 연합회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이곳에서 4~6명의 학생이 플래카드로 사용했던 나일론천을 찢어 전氏의 눈을 가리고 의자에 앉혀 양손을 의자 뒤로 묶은 다음 구타하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전氏가 자백을 완강히 거부하자 학생들은 다시 전氏를 화장실로 끌고 가 자갈과 숟가락으로 입을 벌려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붓고 세면대 물통에 얼굴을 쳐박아 숨을 못 쉬게 하는 등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래도 자백을 하지 않자 복도로 끌어내어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힌 뒤 양 무릎 안쪽에 각목을 끼워놓고 위에서 밟는 등 고문을 계속했다. 다음 날인 27일 밤 10시까지 29시간 반 동안 이 같은 감금 폭행을 해 전氏가 실신상태에 빠지자 학생들은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학교직원들에게 연락, 직원3명이 들것으로 전氏를 앰뷸런스에 실어 관악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 측은 혈변 증세로 전氏의 상태가 악화되자 28일 오후 서울大병원으로 옮겼다.

④ 정용범 사건(9.26-27): 정용범은 7급행정직 공무원시험준비를 위해 서울大에 출입하면서 공기 좋고 조용한 연못 앞에서 수험공부를 했으며, 지난7월부터 3차례정도 서울大에 출입했다. 9월26일 오후 3시 30분쯤 정氏가 서울大 연못 앞 벤치에서 수험서를 보고 있는데 학생2명이 다가와 『여기 어떻게 왔느냐, 잠깐 좀 가자』면서 학생회관 3층에 있는 복학생협의회 사무실로 끌고 갔다. 서울大 학생이 아님을 안 유시민, 백태웅 등 학생 5~6명은 광목천으로 눈을 가리고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벗기고 기관 정보원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학생들은 다시 정용범에게 학생훈련복을 입혀 손을 뒤로 묶어 사무실 바닥에 꿇어앉히고 자백하라며 주먹과 발길질로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가슴 등 다리를 구타하였다. 유시민 등은 이곳에서 폭행을 지시한 후 27일 오전 5시30분쯤 철야 조사한 것을 확인하는 등 감금폭행을 주도했으나 정보원이라는 사실이 끝내 확인되지 않자 27일 낮 12시30분쯤 정氏를 버스정류장까지 안내해 풀어주게 했다.

구속자: 유시민(경제 4, 복학생협의회장, 징역 1년 6월), 백태웅(공법 4, 학도호국단장, 징역 1년 6월), 윤호중(철학 4, 징역 1년 6월), 오재영(인류 4, 징역 2년), 신윤남(인문계 1년 복학생, 유치장에서 정신이상으로 국립정신병원으로 이감), 윤호중은 열우당 국회의원으로 사건 이후, 평화민주당 기획조정실 기획위원, 한광옥 의원 비서관 등을 거쳐 국민회의 부대변인, 대통령비서실 민정국장,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국장을 지냈다. 유시민은 졸업 후「창작과 비평」誌에 소설 『달』로 데뷔, 이해찬 의원 보좌관, 한겨레신문 독일통신원, 성공회大 교양학부 겸임교수, MBC 100분 토론진행자,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개혁국민정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 열우당 제4정책 조정 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친누나인 유시춘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백태웅은 이후에도 社勞盟 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었으나, 1999년 사면복권되어 유학,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조교수를 하다가, 현재는 국제 변호사로 국내에서 활동 중,

이 사건의 피해자들 중 전기동을 제외하고는 대인기피증 등 극심한 후유증을 보이고 있다. 사건 피해자 중 전기동은 유시민, 윤호중 두 의원의 총선 자료집 중에서 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 사건을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라 부르고 민주화 운동이라고 거짓말 한 것을 고소했고, 이에 검찰은 유시민 의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 벌금 100 만원을 구형했다.

서울美문화원점거농성사건(1985년 5월 23일)

1980년 12월 9일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3월 18일 釜山 美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4월 22일 강원대생들의 성조기 소각사건, 1983년 9월 22일 대구美문화원앞 폭발사건, 1985년 4월 9일 釜山 美영사관투석사건과 같은 일련의 反美활동에 이어 全學聯의 결성 이후, 1985년 5월 23일 서울大, 고려大생 등 대학생 73명이 서울 중구 소재 美國문화 2층 도서관을 점거하고 3일간 철야농성을 벌인 사건으로 19명이 구속기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全學聯과 그 지하지도조직인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이른바「三民鬪(삼민투)」라는 학생운동조직이 떠올랐다.

구속자: 함운경(서울大 三民鬪위원장) 등 25명

함운경은 全國聯合 중앙위원 및 정치위원,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기획이사 등을 지냈으며, 1995년 부여간첩사건으로 구속됐다. 지난 17代 총선 당시 군산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했고, 열우당 산하 재단인 열린정책연구원 교육연수센터 소장을 맡았다. 許仁會(허인회)는 총선 낙선 이후 열우당 청년위원장을 맡았다. 정태근은 민가협 간사 등을 거쳐 한나라당 성북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이명박 라인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高鎭和(고진화)는 全民聯 기획위원, 민주연합청년회 회장 활동을 하다 민주당 기획조정실 전문위원, 민주당 중앙위원, 李富榮(이부영) 민주당 최고위원 보좌관을 거쳐 17代 총선에서 당선, 한나라당 院內 副대표까지 맡았다가 탈당, 열우당 의장을 했다.  신정훈은 나주 시장, 장영승은 벤처기업 레츠 사장, 이강백은 시민단체「아름다운 가게」의 사무처장, 姜琪正(강기정)  열우당 의원은 1985년 6월, 전남大 민중-민주-민족 투쟁위원회(이하 三民鬪) 위원장으로 4ㆍ19 기념 시위 관련, 폭력 시위와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7 년, 자격정지 5 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빛고을 새날청년회 회장, 북한동포돕기 범시민 운동본부 사무처장, 민주개혁 국민연합 광주본부 사무국장, 5ㆍ18 시민봉사단 「오월의 빛」단장, 아파트 공동체 연구센터 소장, 「바른 정치와 통일을 여는 시민의 힘」대표를 거쳤다. 17代 총선에서 열우당으로 光州 북구 甲에서 당선되었다.  

구로지역 연대 파업 투쟁(1985년 6월 1일)

19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던 곳이다. 이 지역 기업들의 대부분은 당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존재하였다. 위장취업을 통해 운동권 출신들이 노동자로 들어가 노조 결성을 시도했다.

이목희 열우당 의원, 노영민 열우당 의원, 백원우 열우당 의원, 송영길 열우당 의원, 신계륜 열우당 의원, 우원식 열우당 의원, 이화영 열우당 의원, 심상정 민노당 의원, 노회찬 민노당 의원, 조승수 민노당 의원 등이 위장취업자들이었다. 노조 결성은 물론, 노조 간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해 왔으며 85년에 임금인상을 위한다는 핑계로 최초의 연대 파업을 일으켰다.

19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은 대우어패럴 노조 위원장 김준용, 사무국장 강명자, 여성부장 추재숙을 구속하고 조합간부 8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6월 23일 대우어패럴 외에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 노조 위원장들이 모여 24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6월 24일 오전 8시 경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명이 파업을 시작한 것을 신호로 오후 2시 효성물산 노조원 4백 여명이 파업에 동참하였고 같은 시간 가리봉 전자 노조원 5백 여명, 선일섬유 노조원 70여 명 등도 파업에 돌입하였다. 6월 25일에는 남성전기 조합원 3백 여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 전자 노조원 250여 명, 룸코리아 1백 여명이 지지 철야농성을 하는 등 연대투쟁은 7개 업체로 확산되었다. 학생 및 재야의 지지도 이어졌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22개 운동권 단체에서 지지 농성이 있었고 6월 26일 오후에는 서울대생 2명이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대우어패럴 맞은 편 협동봉제 공장에 올라가 지지 구호를 외치는 것을 비롯해 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이어졌다.

구속자: 김준용 등 노동자 다수, 노철호 등 학생 다수, 심상정은 서울대 역사교육과 출신으로 서울대 여학생회 결성을 주도했다. 심상정은 1980년부터 구로 공단에 취업, 노조 결성 및 쟁의 혐의로 수배를 받았으며, 1985년 구로동맹 파업과 관련하여 쟁의조정법위반, 제3자금지법위반, 사문서위조, 방화, 폭력, 집단방화, 집단폭력사주, 집시법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중앙위원장, 전국노조협의회 쟁의국장 및 조직국장, 민주금속연맹 사무처장을 거쳐 민주노동당 당대회 부의장, 민주노동당 대의원 겸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 의원단 수석 부대표를 맡았고 지금은 진보신당 대표.  

서울大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깃발사건) (1985년 7월 29일)

「깃발」은 운동권 내부의 운동 노선에 대한 평가와 반대파 운동권들과의 이념 논쟁을 위한 홍보책자였다.  민추위는 노동문제투쟁의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간연락책 등 4개의 산하 기구를 두고 각 대학에 三民鬪委을 결성하고,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을 주도하는 한편,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대우어패럴 동조시위 등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검찰은 이를 ‘자생적 사회주의’로 규정했다.

고속자: 박문식(철학4), 문용식(국사 3휴), 안병룡(국사4휴), 황인상(무역졸), 이종원(지리4), 민관홍(인류4), 윤성주(동양사 3년), 이종원(지리4휴학), 조경애(의류과 졸), 이홍균(인류4년), 성명섭(공법과졸), 김태룡(경영4년), 민병렬(사회4), 윤성주(동양사3), 이홍구(공법3), 김희갑(동양사2), 김재광(영어교육4), 박충렬(법학졸), 장혜경(중문4), 김찬(국사3 제적) 김신훤((정치4), 유경완(무역4), 김형섭(농대졸), 석미주(종교3 제적), 황경희(경북대 불문과 졸) 등이 구속되었고, 김근태 전民靑聯 의장이 문용식에게 민족민주혁명 이념교양을 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들 중 박문식은 공인회계사와 21세기 프론티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황인상은 변호사로, 문용식은 나우콤의 사장과 김근태 계열과 관련 있는 한반도 재단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제헌의회(Constituent Assembly: CA)그룹사건 )1985년 11월 20일)

해방 이후 제헌의회가 구성된 적이 있었지만, CA 그룹이 상정하고 있는 제헌의회의 모델은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의 제헌의회였다. 즉, 혁명에 의해 기존의 전제적인 반동 정치권력을 타도 무력화하고 민중들이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얻은 상태에서 민중이익에 진정으로 봉사하는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생각을 잘 드러낸 것이 유명한 CA 슬로건 즉 “파쇼 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였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한 것이었다.

깃발 그룹은 1985년 대중조직인 삼민투의 미국문화원 점거투쟁 등을 통해 학생운동의 리더십을 장악했지만 1986년 들어 이른바 강철서신으로 대표되는 자민투가 등장하면서 대중들에 대한 지도력을 점차 NL 그룹에게 뺏기고 있었다. 특히 NL 그룹이 보수야당의 직선제 개헌요구 투쟁에 동참하면서 적어도 대중성이라는 점에서는 CA 그룹은 NL 그룹을 따라잡기 어렵게 됐다. 운동권에는 이런 농담이 있었다. "NL은 인간성은 좋은데 머리가 나쁘고, PD(ND)는 머리는 좋은데 인간성이 나쁘다" 신지호는 PD계열이었다.

1986년 5월을 전후하여 제헌의회 그룹(CA : Constituent Assembly)은 「파쇼하의 개헌반대,혁명으로 제헌의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CA 그룹은 「헌법제정민중의회」소집투쟁을 주장하면서, 산하 학생조직으로 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이하 民民鬪)계열을 지도했다. 민민투 계열은 1986년 5월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전민학련)을 결성하여 1986년 여름 방학을 전후하여 신민당사농성투쟁, 성남공단지역 선전작업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CA그룹은 한국 사회를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간접통치방식 사회로 간주했고, 종속성을 특수성으로 하면서 자본주의의 압축적 발전의 길을 걸어온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규정하였다.

구속자: 최민(서울大 78, 징역 7년), 윤성구(서울大 78, 징역 6년), 민병두(성균관大 78, 징역 5년), 김철수(서울大 75, 징역 5년), 김성식(서울大77, 징역 5년), 유강근(서울大79, 징역 4년), 이선희(서울大 79, 징역 3년), 강석령(서울大79, 징역 5년), 김현호(성균관大79, 징역 7년), 김찬(성균관大77, 징역 2년), 한승권(서울大81, 징역 1년 6월), 이호균(서울大 78, 징역 2년), 차호정(서울大 79, 징역 1년 6월), 김옥수(한국한국外大 81, 집행유예), 하윤숙(서울大 79, 집행유예) 등

최민은 현재 열린당 중앙위원이며 장애인 특별위원회 위원장, 민병두는 열린당 의원이자 정책위원장.


民民鬪, 自民鬪 사건(1986년 4월 10일)

민민투는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의 약칭으로 1985년 全學聯, 三民鬪사건으로 학생운동 조직이 붕괴된 후 1986년 3월 서울大 인문대를 중심으로 결성되기 시작하여 성균관大, 연세大 등 다수의 대학으로 파급되었다. 독재타도와 비타협 원칙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自民鬪와 차이점이 있다. 급진적 사회주의 계열 노선이다. 「민족민주선언」을 기관지로 발간하였다.

自民鬪는 反美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의 약칭으로 民民鬪와 거의 동시에 표면화된 학생운동조직이다.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노선(NLPDR), 즉, 主體思想을 받아들인 점이 民民鬪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기관지는「해방선언」. 1986년 4월 10일 서울大 사회대에서 결성식을 시발로 각 대학으로 확산되었으며, 처음에는 야당을 배격했지만 「5.3인천사태」이후, 개헌투쟁으로 급선회했다.

이후 학생운동에서 自民鬪는 공식적으로는 없어졌지만 이들의 추종 세력이 현재까지 운동권의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自民鬪는 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받아 들였다. 이들이 바로 主思派(NL)인 것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는 안상종(연대 民民鬪위원장)등 상당수로 1986년도 학생 운동권 구속자의 대부분이 自民鬪, 民民鬪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면 맞다.

5.3 인천사태(1986년 5월 3일)

1986년 5월 3일 신민당의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을 계기로 인천 주안동 시민회관 앞에 학생과 재야단체, 노동자 등 운동권 1만5천여명이 집회를 열고 시위를 벌인 사건. 이들은 '미제축출 파쇼타도'를 내걸고 개헌을 위한 여야 간의 타협에 반대했다.

구속자: 제성민(연대 3제적, 징역 1년), 우제구(民統聯회원, 징역 1년), 윤영민(民統聯회원, 징역 1년), 서동석(民佛聯 회원, 징역 1년), 이종태(교원대조교, 징역 1년 6월) , 김희란(국민大3, 징역 1년 6월), 송대헌(民統聯회원, 징역 1년 6월), 이재영(인천대3, 징역 1년 6월), 한의석(서울大2, 징역 1년 6월), 민춘기(인하大2, 징역 1년 6월), 강경문(서울大4, 징역 1년 6월), 박병무(이천전기해고근로자, 징역 1년 6월), 김동범(성균관大4제적, 징역 1년 6월), 이병철(무직, 징역 1년 6월), 이헌필(성균관大제적,民靑聯회원, 징역 1년), 김경숙(무직, 징역 1년), 조은옥(서울신학大3자퇴, 징역 1년), 주성종(명지大4, 징역 1년), 국승보(운전사, 징역 1년), 이용주(인하大 무역3제적, 징역 1년), 이상명(인하大 철학3 휴학, 징역 1년), 이수영(연세大법학4 휴학, 징역 1년), 김창식(무직, 징역 1년), 김윤기(국민大 무역4, 징역 1년), 박종문(인하大영문4, 징역 1년), 이승민(서울大의대1휴학, 징역 1년), 심영찬(징역 1년), 강권구(동양피스톤해고, 징역 1년), 이상명(인하大4, 징역 1년), 윤택구(연세大3 제적, 징역 1년), 오희숙(연세大교육학4, 징역 1년), 김천석(연세大화공4, 징역 1년), 이건준(서울大경영3, 징역 1년) 등

김교흥 열우당 의원은 당시 인천대 총학생 회장으로 5ㆍ3 인천사태에 참여,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1 년, 집행유예 2 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졸업 이후에는 한국여론정치연구소, 제일리서치연구소 등 정치 컨설팅 활동과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하다가 산업자원부 장관의 추천으로 중소기업연구원장을 지냈다. 1997년 국민회의에 입당. 이광철 열우당 의원은 이 사건 이전에도 1980년 5월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1982년에는 반정부 유인물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3 년을 선고 받았다. 1985년 졸업 후, 民統聯 지역운동협의회대표, 전북민족민주운동연합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5ㆍ18 관련 강연회에 주로 참석했다. 전주 시민회 대표, 시민행동21 공동대표, 5ㆍ18 기념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2002년 개혁국민정당 전북추진위 실행위원장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 현재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열우당 전북 본부장, 전북발전 시민포럼 대표 등을 맡고 있다. 張永達(장영달) 열우당 의원도 民統聯 총무국장 시절, 이 사건으로 국가 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호웅 열우당 의원 또한, 民統聯 상임 집행위원,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의장을 하면서 5ㆍ3 인천 시위 주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았다. 그 후 민통련0 상임 집행위원, 인천지역 민족민주운동연합 의장, 전민련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91년 민주당 정무위원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다. 야권통합추진위 실무협상대표, 인천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국민회의 당무위원, 새천년 민주당 총재특보 등을 지냈다. 현재 열우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고려大 애국학생회 사건(1986년 7월 1일)

'애국학생회'는 1986년에 고려大 학생들이 결성한 주사파 계열의 지하학생운동단체이다. 이 조직을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 빈미청년회다. 고려大는 애국학생회, 서울大는 구국학생연맹(救學聯), 연세大는 반제학생동맹 등이 결성됐으며 산하에는 무력투쟁을 위한 인민 무력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1986년 애국학생투쟁총연합회의 건국대 발대식 사건을 배후조종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1987년 5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의해 26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구속자: 조혁(고려大 82), 이종민(고려大 83), 박정호(고려大 83), 서민석(고려大 83), 안희정(고려大 83) 등.

조혁은 수배 중인 상황에서도 반미청년회를 결성하고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KAL 858기 폭파 사건이 안기부에 의한 조작이라는 설을 퍼뜨렸다. 현재는 주사파를 비판하며, 북한탈북자지원 사업 등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통해 활동하고 있다. 한편, 안희정은 1987년에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되었으며,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을 지내다 노무현 대선캠프에 합류,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수사에서 뇌물알선수재 혐의로 징역 1년이 선고됐다. 안희정은 2003년 2월 17일의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주체사상은 인간이 되라는 이론적 장점이 있다』며 주사파로 남기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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