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주로 konas 정경웅씨가 쓴 글을 간단히 요약하고 여기에 다른 정보를 보탠 것이다. 대한민국을 붉게 만든 학생운동 계보에 대해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정경웅씨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구국학생연맹(救學聯) 사건(1986년 9월 17일)
구국학생연맹(이하 救學聯)은 「단재사상연구회(이하 단사그룹)」에서 시작되었다. 단사그룹은 이념투쟁을 표방하고, 이념써클 해체, 종파주의 척결, 학번제 철폐, 권위주의 잔재 말소를 주장하면서 통일된 학생운동조직으로 1986년 3월 29일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했다.
救學聯의 활동은 1986년 4월 10일 자민투가 발족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구학련은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투쟁의 영역을 反美자주화투쟁, 반파쇼민주화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으로 나누고, 전국적인 이념서클의 조직화를 위해 학생운동연합체를 만들었으며, 10월 28일 건국大에서 벌어진 「전국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이하 愛學鬪련)」발대식을 계기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구속자: 김영환, 정대화, 하영옥 등, 김영환은 강철 서신이라는 글로 6개월 만에 운동권을 모두 장악했고, 주체사상을 운동권의 핵심 이념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김영환은 이후 민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후 자신의 조직원들과 함께 전향하여 현재는 계간지 시대정신을 통해 북한민주화와 탈북자 지원활동을 펴고 있다. 한편, 김영환의 전향을 변절이라며 폄하했던 하영옥은 민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복역 중.
건국大점거농성사건(일명 건국大 愛學鬪聯 사건) (1986년 10월 28일)
1986년 10월 28일 서울大, 고려大, 연세大, 등 전국 26개 대학교 학생 2천여 명이 건국大에 모여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愛學鬪)발대식을 벌이다 교내로 진입한 3천여 명의 경찰에 밀려 본관, 사회과학관 등 5개 건물을 점거하고 4일 동안 철야농성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천5백25명이 연행되고 이들 중 1천2백87명이 구속되었으며 연세대 반제학생연맹, 서울대 구국학생연맹, 고려대 애국학생회 등도 함께 일망타진된다. 그러나, 愛學鬪는 한국사회를 미제식민지반봉건사회로 보는 주체사상을 그대로 차용하여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폭력적 방식의 투쟁으로 인해 운동권이 대중적 지지를 잃는 시초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에 전대협 등과 같은 전국적 조직의 시초가 됐다.
반미청년회 사건(1988년 10월 1일)
1987년 6월 이후 1987년 8월 충남大에서 전국적 총학생회의 협의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全大協)이 전국 95개 대학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탄생했다. 전대협은 대표자 협의체 조직이라고 선전했지만, 그 내부에는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정치적 노선과 흐름이 존재했는데 이를 주도한 것이 반미청년회였다. 반미청년회의 전신은 「전국사상운동추진위원회」로 1986년 10월부터 전국적인 학생운동 통일적인 지도부를 형성하기 위하여 활동을 하였으며, 全大協 결성을 조종한 조직이다.
반미청년회는 1986년 ~ 1987년까지는 직선제, 민주헌법개정, 美國의 光州학살에 대한 책임 규명등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88년 이후에는 통일운동을 벌였다.
구속자: 1988년 3월, 조혁(고려大 82, 노문과), 장원섭(고려大 농대 84), 양홍관(동국大 81), 안희정(고려大 철학 83), 안내상(연대 84), 이철우(시립대 83), 김철(연대 법대 83), 서민석(고려大 83), 한기원(연대 84), 김태원(고려大 법학 83)등 12명이 체포되고 1990년 2월에 해산됐다.
당시 사건 연루자였던 김기식은 현재 참여연대의 사무총장으로써 실질적인 참여연대의 수장 역할을 맡으면서 국가보안법 전면철폐, 주한미군 즉각 철수 등의 이슈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으며, 안희정은 고려大 애국학생회와도 연관이 있고(고려大 애국학생회 사건 참조) 이철우는 1992년에도 민족해방혁명 노선을 추종하는 민족해방 애국전선(일명 남조선 노동당 사건)활동을 한 것이 적발되어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포천문인협회 사무국장, 한탄강 네트워크 사무처장, 북부비전 21 공동대표, 민주개혁국민연합 운영위원 등 시민단체 활동과 행정 자치부 지방분권위원회 자문위원,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거쳐 현재 열우당 국회의원이 됐다. 최근에는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250 만원을 구형 받았다. 반면, 의장이었던 조혁은 현재 북한민주화네트워크에서 다른 주체사상파 출신들과 함께 북한민주화와 탈북자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釜山 동의大 사건(1989년 5월 3일)
1989년 5월 1일 동의大에서는 전날 집회의 원천봉쇄에 대한 항의로 가야파출소로 몰려가 화염병 투척을 했고, 가야파출소에서는 여기에 맞서 공포탄을 발사했다.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항의 농성을 하게 되었고 경찰과 학생의 충돌 과정에서 경찰이 학생들에게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5월 3일 연행된 학생과 경찰의 교환협상이 결렬되고 나서 새벽 5시경 경찰은 도서관을 포위하고 최루탄을 쏘며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옥상으로 대피하면서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 이 사고로 경찰 7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학생 측은 아침 7시경 인질이 된 경찰들을 경찰에게 넘기고 자진 연행됨으로써 동의大 농성은 일단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의大생 71명이 살인▪방화치사상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31명은 방화치사상 혐의로 징역 2년에서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구속자: 화염병을 던진 윤창호(무기징역), 오태봉(총학생회 기획부장, 징역 15년) 등은 이후 사면 복권되었으며, 2002년 4월 30일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의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돼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임수경, 문규현 밍입북 사건 (1989년 7월 1일)
1989년 6월 30일 全大協 대표 임수경(한국外大 불어과 4)이 밀입북하여,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뒤 8월 15일 돌아온 사건이다. 정부는 원래 평양축전 참가를 허용하려 했으나, 문익환)목사의 밀입북 사건을 계기로 참가봉쇄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고, 이에 전대협은 한양大학교에서 「평양축전 참관을 위한 판문점돌파출정식」을 거행하고 임수경을 대표로 뽑아 독일을 경유해 평양에 파견했다. 임수경은 「통일의 꽃」으로 북한의 환영을 받으며 북한학생위원회위원장과 남북청년학생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축전이 끝난 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92년 성탄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당시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은 이 사건으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 소장, 정대협 동우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다 1999년 새천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했다. 새천년 민주당 당무위원, 청년 위원장, 대표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 선대위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노무현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 民和協 회장, 열우당 국민참여운동본부 본부장, 同 공동 대변인, 원내 부대표 등을 맡고 있다. 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송두율 입국을 위해 활동했다. 한총련 합법화 성명서 서명, 이라크 파병반대, 『美國의 對北강경발언이 남북화해방해하고 있다』는 성명서 등에 서명했다. 여중생 사망 사건 때에는 부시 美 대통령에게 사과 요구를 하기도 했다. 한편, 임수경은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어린이를 위한 통일 관련 서적을 내기도 했다.
凡民聯, 凡靑學聯 관련 통일운동 구속사건(1990년 11월 19일-현재)
범민련은 1988년 남한의 운동권 인사의 제의와 북한조국통일위원회의 화답으로 북한, 남한, 해외동포로 구성되는 통합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한의 대남사업에 활용되는 전위조직에 불과하다. 이들은 1989년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의 밀입북으로 고무되어 19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남측 대표로 황석영(소설가)이 참가한 가운데 첫 출범식을 가졌다. 이들은 1990년대 들어 운동권의 투쟁 노선이 민주화에서 통일운동으로 변화함에 따라 맞춰진 조직이며, 이런 이유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자가 대단히 많다. 한편, 범청학련은 범민연의 청년단체로 남측 대표는 한총련이 맡고 있다. 이 단체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조용술(목사,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공동본부장), 이해학(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 조성우(범민족대회 사무처장), 이창복(凡民聯실행위원장, 全民聯 공동의장, 全國聯合 상임의장), 김희택(凡民聯 준비위원, 全民聯 사무처장), 권형택(凡民聯 사무처 차장), 김희선(서울민협 의장), 김종식(全大協의장, 한양大 총학생회장), 한철수(全大協산하 학추위 위원장, 경희大 총학생회장), 허동준(중앙大, 全大協 대변인), 하태경(서울大, 서총련 조통위 연대사업담당), 손성표(고려大 서총련 사무국계열부문 담당), 김시몽(목포대 전 총학생회장) 신현욱(한양大全大協의장 수행비서), 박순경(목원대 명예교수, 凡民聯 남측본부 결성준비위 부의원장), 전창일(凡民聯 남측본부 조직위원), 홍근수(향린교회 목사), 김재용(한양大 총학생회장, 韓總聯 의장), 김병삼(韓總聯 조국통일위원장, 연세大 총학생회장), 황석영(소설가), 허현준(凡靑學聯 부의장, 전북大 회계4), 김세원(凡民聯 남측본부 光州전남연합 창립준비위원장), 오병윤(민주주의 민족통일 光州전남연합 사무처장), 김양무(凡民聯 중앙정책실장), 강희남(凡民聯 의장), 이종린(凡民聯 부의장), 전창일(凡民聯 부의장), 강순정(凡民聯 부의장), 안희만(凡民聯 간사), 황인성(凡民聯 집행위원장, 全國聯合 상임집행위원), 조성우(민족회의 정책위원장), 강재우 (凡民聯 남측본부 의장), 신창균(凡民聯 남측본부 상임고문), 유근삼(凡民聯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의장), 정민주(凡靑學聯 남측대표, 인천대 건축3), 이혜정(凡靑學聯 남측대표, 가톨릭대 회계2), 박용모(법명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의장), 민경우(凡民聯 남측본부 사무처장), 이종린(凡民聯 남측본부 의장), 이천재(凡民聯 상임부의장) 등이다.
이들은 지금도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 통일연대, 민족문제연구소, 범님련 등의 단체에서 그 이름을 볼 수 있다. 한 편, 소위 원로라 일컬어지는 의장단들은 모두 1960년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출신들이다. 이들 이외의 세력들은 대부분 운동권 출신들이다. 이들 중 조성우는 현재 열우당 중앙위원으로 동북아발전연구소장과 미래전략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이창복은 새천년 민주당에서부터 정치활동을 시작, 열우당 16代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 열우당 강원도 지부장이다.
金希宣(김희선)은 열우당 의원으로 1995 년부터 국민회의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대표로 국가보안법 폐지, 친일파 진상규명에 앞장서고 있다. 2004년 7월,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 당시 우리 군의 대응 및 보고 논란과 관련, 군 장성들의 리더십에 대해 『5ㆍ6 공 당시 초급장교로 리더십을 키웠던 사람이다』라는 발언, 조병옥 박사 친일파 의혹 제기, 본인의 가족사 문제 등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김시몽은 金在洪(김재홍) 열우당 의원의 비서관을 맡고 있고, 黃寅成(황인성)은 노무현 시대의 청와대 비서실 시민사회 비서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회(한총련) 관련사건(1987년 11월 ~ 현재,
1980년부터 1986년 10월의 건국大 愛學鬪 사건에 이르기까지 운동권은 전국적 조직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결성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全大協)는 이후 학생운동권의 핵심적 역할을 했고, 1993년 민선 대통령 선출 이후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韓總聯)으로 변신하여 학생 운동권의 주류 세력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1987년 결성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공안 사건들과 관련되었으며, 범민련, 범청학련과 같은 사회 운동권 단체들과도 연계하는 것은 물론, 지하조직을 통한 이념 지도 또한 계속했다. 全大協 ▪ 韓總聯 관련 사건으로 구속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전문환(前 서강大 총학생회장), 홍순철(서총련 서부지구정책위원장, 연세大 국문과졸), 송갑석(全大協 前 의장), 김종식(한양大 총학생회장, 全大協 의장), 임헌태(연세大 총학생회장), 표홍철(서강大), 이동균(대책회의 정책기획국장), 한상열(대책회의 상임대표), 정원택(한국外大 총학생회장), 강희남(목사, 全民聯 고문), 배다지(釜山 민련의장), 문정현(신부, 정의구현사제단), 한철수(全大協 조국통일위원장), 성용승(全大協 축전대표, 건국大 행정 4), 박성희(全大協 축전대표, 경희大 작곡 4), 한철수(학추위 위원장, 경희大 총학생회장), 허동준(중앙大 全大協 대변인), 하태경(서울大 서총련 조통위 연대사업담당), 손성표(고려大 서총련 사무국계열부문 담당), 김시몽(목포대 前 총학생회장), 신현욱(한양大 全大協의장 수행비서), 정미연(全大協 축전예비대표, 전남大 회계 4), 이관복(凡民聯 남측본부), 김쾌상(凡民聯 남측본부), 송규봉(全大協 정책위의장, 경희大 국문 4), 최정봉(前 서강大 총학생회장, 경영학과 4 휴학), 손종국(全大協 의장 경호원, 전남大), 박종렬(前 全大協 정책실장, 연세大 경제 4 제적), 신동호(全大協 문화국장, 한양大 국문과 졸), 태재준(全大協의장, 서울大 총학생회장), 김영하(全大協 조국통일위원장, 중앙大 총학생회장), 이상현(건국大 총학생회장), 김호상(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이명석(조선大 정외 2), 송진환(남총련의장, 전남大 총학생회장), 우상호(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간부), 김정기(한양大 총학생회장), 김재용(韓總聯 의장, 한양大 총학생회장), 김병삼(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연세大 총학생회장), 김현준(韓總聯의장, 부산大 총학생회장), 양동훈(조통위 위원장, 조선大 총학생회장), 김연식(교지 민주조선 前편집위원, 조선大 환경공학 3), 이현화(조선大 생물 3), 태광호(전북大 화학 졸), 서일석(조선大 前기공학 4), 이종욱(서총련 의장, 한양大 사학 4), 설충석(韓總聯 대변인, 중앙大 체육교육 4), 진재영(전남大 총학생회장), 선세규(건국大 총학생회 간부), 이준형(광주大 조통위원장), 정태흥(韓總聯 의장), 배정기(韓總聯 조통위 부의장), 이원구(서총련 의장), 정민주(全大協 축전대표, 인천大 건축 3 제적), 이혜정(全大協 축전대표, 가톨릭대 회계 2), 정명기(韓總聯 의장, 전남大 총학생회장), 박병언(韓總聯 대변인, 연세大 총학생회장), 유병문(韓總聯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동국大 총학생회장), 홍성규(서울大 도시공학 4), 박진빈(단국大 투쟁국장), 강위원(韓總聯 의장, 전남大 총학생회장), 박현정(전남大 여학생회장), 김창학(서총련 투쟁국장), 설증호(충청총련의장), 이태환(韓總聯 조직국장), 정기찬(남총련 임시의장, 조선大 총학생회장), 정영훈(韓總聯 대변인, 한양大 총학생회장), 박휴상(韓總聯 사무처장 박휴상), 오경만(韓總聯 의장정책비서), 김광수(서총련 중집위 선전국원), 유병서(凡靑學聯 전술담당), 최진수(금오공대 총학생회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장정숙(韓總聯 대의원), 정병도(서울大 총학생회장 당선자), 배병화(서울大 부학생회장 당선자), 이준구(韓總聯 조국통일위원장, 前 건국大 총학생회장) 등 수 백 명.
이들 중 특히 의장단들은 현재 국회의원, 정당원, 보좌관 등 정치권으로 진출한 사람이 많다. 全大協 1기 의장이었던 李仁榮(이인영)은 열우당 의원으로 1987년 이한열 장례식에서의 시위로 집회 및 시위 관련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집행 유예 시기에 다시 집회 및 시위 관련법,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자격정치 2 년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全民聯 정책실 간사 및 부장, 全國聯合 조직국장을 지냈다. 새천년 민주당 창당과 함께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동북아 경제중심추진위원회 자문위원, 열우당 중앙위원, 한반도재단 내 동북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全大協 2기 의장이었던 吳泳食(오영식) 또한 열우당 의원으로 1988년 고려大 총 학생회장 겸 全大協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主體思想 노선에 따라「反美청년회」를 결성한 혐의로 국가 보안법, 특수공무집행방해, 공용물건손상, 집회 및 시위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대학졸업 후 노점상 등을 하다 1995 년 국민회의 청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 당시 盧武鉉 후보 선대위 청년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全大協 동우회 회장, 열우당 청년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全大協 3기 의장이었던 任鍾晳(임종석) 도 열우당 의원이다. 1989 년 全大協 3 기 의장 당시 林琇卿(임수경) 密入北을 추진,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 소장, 全大協 동우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다 1999년 새천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했다. 새천년 민주당 당무위원, 同 청년 위원장, 대표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盧武鉉 후보 선대委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盧武鉉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 民和協 회장, 열우당 국민참여운동본부 본부장, 同 공동 대변인, 원내 부대표 등을 맡고 있다. 宋斗律(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 위원으로 宋斗律 입국을 위해 활동했다. 韓總聯 합법화 성명서 서명, 이라크 파병반대, 『美國의 對北강경발언이 남북화해방해하고 있다』는 성명서 등에 서명했다. 여중생 사망 사건 때에는 부시 美 대통령에게 사과 요구를 하기도 했다.「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입법 추진 모임」간사이다.
全大協 1기 부의장이었던 禹相虎(우상호)도 열우당 의원으로 1987 년 이한열 장례식 중 시위 주도로 국가모독,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 년을, 1988 년 집회 및 시위 관련 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全國聯合 부대변인, 月刊 말誌 기획위원으로 在野 활동을 했다. 1998 년 高健 서울시장 선거대책본부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민주당 부대변인 등을 거쳐 현재 열우당 원내 부대표를 맡고 있다. 이들 全大協 의장단 이외에 凡民聯, 凡靑學聯으로 全大協과 관련있는 사람들 중 배다지는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과 민주국민연합 대표를 맡고 있으며, 문규현 신부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와 민주노동당 후원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4기 의장이었던 송갑석은 2000년 16代 총선에서 군산 지역에서 낙선한 이후, NGO 활동과 사업에 전념하고 있으며, 5기 의장이었던 김종식은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全大協 6 기 의장이었던 태재준은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다 현재 美國 유학 중이다. 의장단 출신 이외에 全大協 연대사업국장으로 활동하던 白元宇(백원우)도 현재 열우당 의원이다. 1986 년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징역 1 년을, 1989 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 년, 자격정지 1 년을 선고 받았다. 한 때 노동운동을 했다. 대학 졸업 후 통합 민주당을 거쳐 盧武鉉 대통령의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李光宰(이광재), 徐甲原(서갑원), 李華永(이화영) 등과 친분을 맺었다. 盧武鉉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에는 비서관을, 現정권 출범 이후에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행정관을 지냈다. 宋永吉(송영길) 열우당 의원은 연세大 총학생회장 겸 全大協 대변인이었으며, 1985년 집시법 위반 및 절도,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 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대우자동차, 선퍼니처 가구, 까치마을 장갑공장, 대진 산업 등에서 노동 운동을 했다. 1994 년 사법 고시에 합격했다. 전국민주택시노련, 인천개인택시사업조합, 한국통신노조, 대우자동차 노조 사무노조위원회 등의 고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성균관大 총학생회장, 全大協 수원의장으로 활동하던 李基宇(이기우)도 열우당 의원이다. 1990년 특수공무집행방해와 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 관련 법률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全民聯-全國聯合 경기 남부 조직부장, 수원시민광장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1998년 국민회의 소속으로 경기도 의회 의원으로 당선돼,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8년 全大協 조국통일 특별위원장이었던 鄭淸來(정청래)도 현재 열우당 의원이다. 당시 집회 및 시위법,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으며, 1989년 全大協 결사대 駐韓 美 대사관 점거농성으로 집회 및 시위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2001년 평양 민족통일 대축전 청년대표, 금강산 민족 대토론회 청년대표로 참가했다. 현재 열우당 국민참여운동본부 부본부장, 열우당 언론발전특위 간사를 맡고 있다. 노사모의 후신인 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 힘 초대대표를 지냈다. 최근 노사모 대표를 지낸 明桂男 씨가 대표로 있는 「라디오 21」의 이사를 맡았다.
崔宰誠(최재성) 열우당 의원도 1988년, 동국大 총학생회장,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회(이하 서총련) 중앙상임위원 겸 남부지구 대표, 全大協 학원자주화 투쟁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집회 및 시위법, 폭력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출소 후, 한국정책연구소장, 남양주시 시정 기획단 상임 부단장으로 활동하다, 2002 년 민주당 내 盧武鉉 후보 선대위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韓秉道(한병도) 열우당 의원도 1989 년 원광大 총학생 회장, 全大協 전북지역 조국통일위원장 활동 시절 집회 및 시위법, 폭력관련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원광 보건대에서 근무하다 2003년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현재「진보적 종교인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운영위원 등도 맡고 있다.
金晩洙(김만수) 청와대 비서실 상근 부대변인도 전대협 출신으로 1987년 연세大 총학생회 부회장 시절 국가 보안법 위반,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元惠榮(원혜영)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연구원으로 盧武鉉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경기도 부천시 의원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 盧武鉉 후보경선캠프 공보팀장,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대변인, 청와대 홍보 수석실 보도지원비서관 겸 부대변인을 거쳤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社勞盟)사건(1992년 4월 29일)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 (이하 社勞盟) 은 1988년 4월 1일 백태웅, 박노해를 비롯한 약 200여 명이 준비위를 만든 것에서 시작하여, 1989년 11월 12일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 조직은 자생적 비합법사회주의조직으로 남北韓 정권을 모두 비판하는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社勞盟은 1991년 3월10일 박노해가 구속되고 다음해인 1992년 4월 29일에 백태웅을 비롯한 중앙위원과 주요간부 전부가 국가 안전기획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社勞盟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박노해(본명 박기평), 김진주, 현정덕, 백태웅(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사건 참조), 남진현, 은수미, 정명섭, 이은경, 김기수, 박홍순, 차익종 등 무려 300여 명으로 해방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평가된다. 社勞盟 사건 관련자들은 1999년 3월 1일자로 잔형면제의 특별 사면 및 복권 조치를 받았다. 이들 중 백태웅은 현재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조교수로 재직하다 국내 모 법무법인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박노해는 시인으로 활동 중이다. 한편, 2004년 7월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중 社勞盟 사건 관련 출신자가 현직 장성과 기무부대를 조사했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남한조선노동당(민족해방애국전선·애국동맹)사건(1992년 10월 6일)
1992년 10월 6일 안기부는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며 권력서열 22위인 이선실 간첩망 사건을 발표했다. 이에 운동권들은 실체가 없는 사람을 내세워 운동권을 탄압하려는 용공조작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北韓 노동당 이선실은 1979년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위원 선출, 1982년 4월 김일성의 70회 생일에 김일성훈장 수훈. 19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임명.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 기념연회에서 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北韓의 대남공작사업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이선실은 사건 당시 월북했으며, 2000년 8월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사건의 관련자는 민영완, 최진섭, 최종만, 이형두, 노중선, 정경수, 정경진, 최호경, 황인오, 양홍관, 심금섭, 함정희, 김현찬, 은재형, 임명규, 황인욱, 마윤종, 임인출, 이철우, 김경태, 손민영, 우민성, 이경섭, 윤정환, 신동욱, 이근희, 손병선, 김낙중, 변의숙, 이강훈, 김표무, 장창호, 심상득, 조덕원, 이철, 진용근, 김동훈, 장기표, 김선태, 고한석, 김옥기, 양진우, 이승미, 한경임, 조일준, 이원배, 신선아, 이영지, 박미옥, 최상, 이규성, 이성구, 정인미, 최지영, 주병화, 전재순, 송혜숙, 전달수, 전송임, 윤임현, 김부겸, 조무하, 양견웅, 손병구, 임종호 등이다.
이 중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이철우는 열우당 의원(反美 청년회 사건 참조)이고, 사북탄광사태의 관련자이기도 했던 황인오는 석방 후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편, 1991년 김일성 훈장을 받기도 했던 김낙중은 현재 평화운동가라는 직함으로 현재도 파병반대, 주한미군 철수, 통일연대 활동 등의 운동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철우 등의 경우, 대부분 하부 조직원으로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북한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몰랐다는 점이다. 즉, 당국에 적발 시 북한과의 연계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북한을 보호하고, 가입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민족해방애국전선, 애국동맹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 노동당은 이철우와 같은 하부 조직원은 당원으로 입당시키지 않는다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 노동당은 아무나 당원으로 가입시키지 않는다. 결국, 이철우와 같은 하부 조직원은 상부조직원과 북한에 이용당한 것 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사상을 신봉했으며, 충성맹세를 했음은 이미 판결문 등을 통해 인정된 사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운동권의 합법 활동기(1993년 이후 ~ 현재)
운동권들은 1993년 민간인 출신 대통령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운동권과 좌익 세력들은 과거의 지하 활동뿐만 아니라, 합법적 활동도 동시에 개시한다. 좌익들은 기존의 다양한 단체들을 양성화하여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이라는 거대단체를 결성하고, 이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1998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들이 초기 주로 내세운 이슈는 통일, 환경, 인권, 여성, 빈민, 노동 문제 등이지만, 그 내부의 주장은 대부분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어 있다.
즉, 이들의 전술은 사회적 이슈를 내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고 이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지지 세력을 넓히는 것이었다. 반면, 기존의 보수계층은 승리감에 젖어 그 맥이 점점 사라지고 다음 세대를 키우지 않고, 타성에 젖어 살고 있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대학교의 수가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나면서 각 대학교에 좌익 성향의 교수들이 포진하게 되고, 변호사, 언론인, 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심지어는 대학 자체가 좌익 성향인 경우도 나타나는데 대부분 이 시기에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거나 설립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현재 시민들이 질려하는, 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이슈를 연결 짓는, 자칭 시민단체의 약 70% 이상이 1998년 이후에 설립되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일성 조문 파동(1994년 6월 2일)
1994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추진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김일성이 돌연 사망했다. 이에 운동권들은 김일성에게 국가차원의 조문 사절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조문을 위해 밀입북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학내에 빈소를 설치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정부는 이에 대대적인 주체사상 관련 조직들을 검거했다. 관련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김세원(凡民聯 남측본부 광주전남연합 창립준비위원장), 오병윤(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사무처장), 김양무(凡民聯중앙정책실장), 이종욱(서총련 의장), 설충석(韓總聯 대변인), 김종백(서총련 조통위원장), 최종민(서총련 동부지구 의장, 건국大 총학생회장), 이석준(고려大 동양사 2), 강희남(凡民聯 의장), 이종린(凡民聯 부의장), 전창일(凡民聯 부의장), 강순정(凡民聯 부의장), 안희만(凡民聯 간사), 신광수(법명 법탁, 평불협 상임부회장), 이지범(평불협 前 총무부장), 이영규(전남大 법대 학생회장), 문정우(전남大 부총학생회장), 정연철(고려大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장), 이광훈(고려大 경제2), 전창근(고려大 경제3), 김준일(고려大 경제3), 최윤규(고려大 경제3), 남창유(고려大 경제3), 이창복(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공동본부장, 全國聯合 상임의장), 황인성(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집행위원장, 全國聯合 상임집행위원), 조성우(범추본 서명운동본부장, 민족회의 정책위원장), 이종순(전주대 총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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