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대중은 수령님의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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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2-01-23 16:48 조회10,8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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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번호 | 26354 | 조회수 : 963 추천수 : 23 다운횟수 : 2 |
작성자 | 남한산성 | |
제목 | 김대중의 정체에 대한 탈북 통일전선부 요원의 한 증언 [펌] | |
홈페이지 |
** 엊그제 김대중씨의 법적인 책임 문제를 놓고 게시판에서 공방이 있었군요... 이 문제는 지역감정과는 무관하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 이전에 사실(fact) 여부의 문제입니다.
이같은 문제를 공공연히 제기하면 호남분들 가운데 괜히 '슨상님'을 옹호하면서 흥분하는 분들이 있으나, 이 나라는 엄연한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입니다. 누구라도 법을 어긴 사실이 입증되면 그는 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하는 겁니다.
이 나라의 일부 지역을 국가 전체, 혹은 헌법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김대중씨가 과거에 (혹은 현재에) 법적으로 범죄한 사실이 분명히 있다면, 특검 아니 무슨 조사를 해서라도 반드시 이를 구명하고 단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전에 올렸던 김대중에 관해 증언한 탈북 통일전선부 요원의 증언 하나를 다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부디 이 증언의 사실성 여부 외의 문제로 논쟁이 이탈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는 김대중을「수령님의 전사(戰士)」라고 불렀다
- 제3국 체류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의 충격적 폭로고백 (장혜영 前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 근무) -
『김정일의 지령하에 통전부-친북단체-남한 정권이 삼위일체로 움직인다. 열린당은 통전부보다 더 잘한다. 대북지원금은 대남공작비로 돌아간다』
● 金日成은 金大中 집권의 길 열어 주려고 朴正熙 암살 명령, 陸英修 죽게 했다.
● 金正日 정권 연장이 386 정권 연장이고, 金正日 붕괴가 386 정권 붕괴로 이어지는 게 한반도 운명. 386은 지금도 國保法 대상이기에 철폐 추진, 현재가 두렵기에 과거 캐기, 親北 감추려고 親日 캔다.
● 金正日의 경멸 -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 金正日이 송호경에게 지시-『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 이철우(李哲禹) 의원이 가입했다는 민족해방애국전선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內 지하당 조직. 노동당 깃발 金日成 초상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것이 노동당 입당의 증거
● 金正男은 親中派. 위조여권으로 제주도 방문
● 金正日 지시 - 『관리 중인 親北派를 공작원으로 포섭하여 활용할 때가 왔다』
● 안기부 해체적 개편과 康仁德 장관 해임은 통전부 작품
● 남측 민족문화작가회의 상대역은 작가가 아니라 통전부 국장
● 한국 민주주의의 첫 과녁은 金正日 정권 타도이어야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얼마 전 외국순방 길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北核)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며, 『남북간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것이 옳은 말이겠는가.
나는 북한 노동당의 적화통일 정책을 제1선에서 실행해 오던 통전부(통일전선부)의 한 일원으로서 최근 김용순 계열 숙청과 관련하여 여러 요원들과 함께 탈북한 뒤 지금 제3국에 머물면서 이 글을 쓴다. 나는 노무현의 무식한 이 말에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
김정일은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에 북한을 절대로 가난한 나라로 생각지 않는 특이한 자아 절대감이 있다.
바로 거기서 끈질긴 세습정치욕도 나오고 적화통일 야망도 계속되는 것이며, 그래서 수백만이 굶어 죽든 말든 핵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억만금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지금 자기의 의지대로 좌경화돼 가고 있는 한국 현실을 굽어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 통쾌함을 혼자만 즐길 수 없어 그는 얼마 전 측근들과의 파티에서 불쑥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道가 몇 개 있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던 중 아홉 개라는 누군가의 대답에 김정일은 웃으며 소리쳤다.
『왜 아홉 개만이야.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순간 좌중에 박수가 터졌는데, 그들 중 누구보다 소리 크게 박수를 친 사람은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이었다. 그의 손에 든 힘은 무엇이며 김정일의 만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오늘까지도 내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통전부내(內) 각 연락소들의 실체와 그들이 어떤 공작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을 증언하고자 한다.
북한 노동당 규약에는 이렇게 밝혀져 있다.
「조선로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보다시피 북한 노동당의 통일관은 철두철미 적화통일이다. 이러한 야망은 북한정권 수립 이전부터 집요하게 시작됐다. 통전부의 역사적 뿌리는 1946년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국가안전성 국제정보국 예하에 「소련군 정찰대 극동지부 북조선 파견대」를 조직하고 남한의 좌익세력 확장과 한반도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1946년 「서울공작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 대남 공작부서의 원조이다.
좌우의 첨예한 대결과 끊임없는 분쟁들이 결국 남북이라는 국토분열로 이어지도록 소련의 충견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공로와 경험을 토대로 김일성은 1948년 10월10일 당 창건 후 「서울공작위원회」를 「대남사업부」로 승격시켜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소속시켰다.
철저한 비밀보안과 은밀성을 보장하기 위해 중앙당 본 청사와 분리시켜 타(他) 구역에 별도의 건물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북한 주민들 속에서 신비의 존재로 불려지는 「3호청사」의 유래이다.
6·25 전쟁 후 북한은 휴전상태의 체제경쟁에서 최우선 당략을 적화통일로 더욱 절박하게 내세웠다.
그래서 김일성은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병행한다는 「군사 제일론」으로 나라의 모든 정책을 펼쳐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대남 공작부서의 기능과 역할을 좀더 세부화·고도화했다.
이를테면 1960년대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제와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무장기습에 의한 파괴·와해·교란 등 힘의 정책을 대남전(對南戰)의 기본으로 했다면,
1970년대부터는 주한 미군에 의해 한반도에 분열이 정착되어 가는 상황에 맞게 장기전(長期戰)에 대처한 우회적 전략, 즉 사상·문화적 침투와 인물포섭, 심리전 등을 총괄하는 지능 기능의 전문부서를 만들고 발전시켰다.
(중략)
...김정일의 직접 지휘체계 하에 움직이는 통전부는 북한 노동당의 핵심부서로서 오늘까지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밀집된 중앙당 청사들과는 별도로 모란봉구역 전승동 본래의 3호청사에서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대남 공작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세계 선진국인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략적 주동성을 잃지 않을 만큼 통전부의 수완은 참으로 완벽하다.
그들이 공작 차원에서 「수령님의 전사」로 체계적으로 길러낸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통전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치인으로서의 목숨이 당장에 끝장날 386이 「적색무리당」이라고나 말해야 할 열린당에 대거 포진하여 공공연한 친북 및 좌경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오늘의 한국 현실은 모략가 김정일을 부장으로 하는 통전부 주도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은 수령님의 전사(戰士)」
김정일이 비준한 2000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 일정에 대한 통전부의 계획서에는 역사적 의미로 볼 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 부분이 백지화 되어 있었다.
그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나란히 순안 비행장에서부터 숙소까지 평양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가게 되어 있는 연도 환영행사였다.
김일성 사후 공개행사를 극력 피하는 김정일이라 신변보호 차원에서 삭제한 공백인 줄로만 알았던 준비 성원들은 행사 당일에 마치 사전 약속이라도 있은 듯 김정일의 리무진에 단독으로 오르는 김대중의 행동을 보고서야 계획서 공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어느 한 술자리에서 임동욱은 취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벌써 첫 만남에 있었다』
그 후에는 더 무게 있는 말들이 통전부 간부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수령님은 확실히 천리혜안의 예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정상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 임동욱, 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戰士)」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적국(敵國)의 괴수를 「수령님의 전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김대중,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북한 독재자의 충복인가.
김대중의 이름은 이미 그가 한국의 민주투사로 인정받던 1970년대에 통전부의 문건에 올라 있었다. 북한이 인물 흡수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1960년 4·19 혁명이었다.
김일성은 그때 통일의 호기를 놓쳤다고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4·19 혁명이 붉은혁명으로 승화되지 못한 요인은 그것을 주도할 만한 적색인물과 그 중심의 지하당이 없었기 때문이니 하루빨리 한국 내에 혁명정당을 구축할 것에 대한 과업을 주었다.
북한은 급기야 「통일혁명당」을 결성하고 마치 그것이 한국 내에 실존하는 지하당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미국, 일본, 유럽, 동남아에까지 그 지부를 설치하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밖에서부터 만들어진 이 유령조직을 안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통혁당」의 이름으로 출간된 각종 격문들과 인쇄물들을 한국에 살포하거나 침투시키는 것은 물론, 인물포섭과 지하당 결성에 총력을 다했다.
『김대중은 쌀을 달라면 쌀을 주고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다』
이를 위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돌격대로 내세웠다. 1950년대에 조직된 이 협의회라는 것은 조소앙, 안재홍과 같은 납북자들과 월북자들로 이루어진 순수한 이남 출신 집단이다.
이 협의회는 한국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함께 편지발송, 방송심리전 등 온갖 수단을 통해 한국에 남아 있는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여 대남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주(主)업무로 삼았다.
지금은 「재북평화통일촉진위원회」로 격상시켜 그 명맥을 잇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위상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대남공작의 제1과제를 반(反) 정부 의식이 강한 인물 흡수와 지하당 구축, 좌파 단체 확산으로 정한 통전부는 1970년대에는 민주투사로 자처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에게 김일성의 친서와 공작비도 보낼 만큼 혁혁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지금도 통전부 기밀실에는 박정희의 유신독재 반대를 부르짖으며 김대중이 일본에서 맹활약하던 당시 그 흡수공작에 적지 않게 공헌한 조총련 산하 비밀요원들에 대한 활동내용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박정희가 암살된 후 김대중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정국조종 전술안(案)도 보관되어 있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은 바로 이 전술안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작전이었다.
정상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 김정일은 『김대중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 상대라 생각지 말고 무조건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하고 지시했다.
이렇게 이용 가치 있는 인물들을 하나 둘 점거하고,
1970년대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일어서는 운동권에도 「통혁당」 지하가 심어지자 여기에 힘입어 김일성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 통일방안」을 주동적으로 제기하고 박정희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다.
1999년 1월1일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에서
북한은 「안기부는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안기부를 해체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통일을 바라는가 분열을 바라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고 전에 없는 어감으로 강조했다.
이어 통전부내(內) 각 연락소들을 발동하여 일대 섬멸전을 벌이듯 안기부 공격 전략을 펼치도록 했는데 실지 그때 이미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정답이 나와 있었다. 아니 훨씬 그 전일지도 모른다...
* 월간조선 2005년 1월호에서 펌. (전체 글의 4분의 1만 발췌 소개함. 나머지는 찾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같은 문제를 공공연히 제기하면 호남분들 가운데 괜히 '슨상님'을 옹호하면서 흥분하는 분들이 있으나, 이 나라는 엄연한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입니다. 누구라도 법을 어긴 사실이 입증되면 그는 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하는 겁니다.
이 나라의 일부 지역을 국가 전체, 혹은 헌법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김대중씨가 과거에 (혹은 현재에) 법적으로 범죄한 사실이 분명히 있다면, 특검 아니 무슨 조사를 해서라도 반드시 이를 구명하고 단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전에 올렸던 김대중에 관해 증언한 탈북 통일전선부 요원의 증언 하나를 다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부디 이 증언의 사실성 여부 외의 문제로 논쟁이 이탈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는 김대중을「수령님의 전사(戰士)」라고 불렀다
- 제3국 체류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의 충격적 폭로고백 (장혜영 前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 근무) -
『김정일의 지령하에 통전부-친북단체-남한 정권이 삼위일체로 움직인다. 열린당은 통전부보다 더 잘한다. 대북지원금은 대남공작비로 돌아간다』
● 金日成은 金大中 집권의 길 열어 주려고 朴正熙 암살 명령, 陸英修 죽게 했다.
● 金正日 정권 연장이 386 정권 연장이고, 金正日 붕괴가 386 정권 붕괴로 이어지는 게 한반도 운명. 386은 지금도 國保法 대상이기에 철폐 추진, 현재가 두렵기에 과거 캐기, 親北 감추려고 親日 캔다.
● 金正日의 경멸 -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 金正日이 송호경에게 지시-『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 이철우(李哲禹) 의원이 가입했다는 민족해방애국전선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內 지하당 조직. 노동당 깃발 金日成 초상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것이 노동당 입당의 증거
● 金正男은 親中派. 위조여권으로 제주도 방문
● 金正日 지시 - 『관리 중인 親北派를 공작원으로 포섭하여 활용할 때가 왔다』
● 안기부 해체적 개편과 康仁德 장관 해임은 통전부 작품
● 남측 민족문화작가회의 상대역은 작가가 아니라 통전부 국장
● 한국 민주주의의 첫 과녁은 金正日 정권 타도이어야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얼마 전 외국순방 길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北核)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며, 『남북간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것이 옳은 말이겠는가.
나는 북한 노동당의 적화통일 정책을 제1선에서 실행해 오던 통전부(통일전선부)의 한 일원으로서 최근 김용순 계열 숙청과 관련하여 여러 요원들과 함께 탈북한 뒤 지금 제3국에 머물면서 이 글을 쓴다. 나는 노무현의 무식한 이 말에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
김정일은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에 북한을 절대로 가난한 나라로 생각지 않는 특이한 자아 절대감이 있다.
바로 거기서 끈질긴 세습정치욕도 나오고 적화통일 야망도 계속되는 것이며, 그래서 수백만이 굶어 죽든 말든 핵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억만금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지금 자기의 의지대로 좌경화돼 가고 있는 한국 현실을 굽어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 통쾌함을 혼자만 즐길 수 없어 그는 얼마 전 측근들과의 파티에서 불쑥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道가 몇 개 있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던 중 아홉 개라는 누군가의 대답에 김정일은 웃으며 소리쳤다.
『왜 아홉 개만이야.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순간 좌중에 박수가 터졌는데, 그들 중 누구보다 소리 크게 박수를 친 사람은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이었다. 그의 손에 든 힘은 무엇이며 김정일의 만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오늘까지도 내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통전부내(內) 각 연락소들의 실체와 그들이 어떤 공작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을 증언하고자 한다.
북한 노동당 규약에는 이렇게 밝혀져 있다.
「조선로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보다시피 북한 노동당의 통일관은 철두철미 적화통일이다. 이러한 야망은 북한정권 수립 이전부터 집요하게 시작됐다. 통전부의 역사적 뿌리는 1946년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국가안전성 국제정보국 예하에 「소련군 정찰대 극동지부 북조선 파견대」를 조직하고 남한의 좌익세력 확장과 한반도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1946년 「서울공작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 대남 공작부서의 원조이다.
좌우의 첨예한 대결과 끊임없는 분쟁들이 결국 남북이라는 국토분열로 이어지도록 소련의 충견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공로와 경험을 토대로 김일성은 1948년 10월10일 당 창건 후 「서울공작위원회」를 「대남사업부」로 승격시켜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소속시켰다.
철저한 비밀보안과 은밀성을 보장하기 위해 중앙당 본 청사와 분리시켜 타(他) 구역에 별도의 건물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북한 주민들 속에서 신비의 존재로 불려지는 「3호청사」의 유래이다.
6·25 전쟁 후 북한은 휴전상태의 체제경쟁에서 최우선 당략을 적화통일로 더욱 절박하게 내세웠다.
그래서 김일성은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병행한다는 「군사 제일론」으로 나라의 모든 정책을 펼쳐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대남 공작부서의 기능과 역할을 좀더 세부화·고도화했다.
이를테면 1960년대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제와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무장기습에 의한 파괴·와해·교란 등 힘의 정책을 대남전(對南戰)의 기본으로 했다면,
1970년대부터는 주한 미군에 의해 한반도에 분열이 정착되어 가는 상황에 맞게 장기전(長期戰)에 대처한 우회적 전략, 즉 사상·문화적 침투와 인물포섭, 심리전 등을 총괄하는 지능 기능의 전문부서를 만들고 발전시켰다.
(중략)
...김정일의 직접 지휘체계 하에 움직이는 통전부는 북한 노동당의 핵심부서로서 오늘까지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밀집된 중앙당 청사들과는 별도로 모란봉구역 전승동 본래의 3호청사에서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대남 공작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세계 선진국인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략적 주동성을 잃지 않을 만큼 통전부의 수완은 참으로 완벽하다.
그들이 공작 차원에서 「수령님의 전사」로 체계적으로 길러낸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통전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치인으로서의 목숨이 당장에 끝장날 386이 「적색무리당」이라고나 말해야 할 열린당에 대거 포진하여 공공연한 친북 및 좌경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오늘의 한국 현실은 모략가 김정일을 부장으로 하는 통전부 주도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은 수령님의 전사(戰士)」
김정일이 비준한 2000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 일정에 대한 통전부의 계획서에는 역사적 의미로 볼 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 부분이 백지화 되어 있었다.
그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나란히 순안 비행장에서부터 숙소까지 평양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가게 되어 있는 연도 환영행사였다.
김일성 사후 공개행사를 극력 피하는 김정일이라 신변보호 차원에서 삭제한 공백인 줄로만 알았던 준비 성원들은 행사 당일에 마치 사전 약속이라도 있은 듯 김정일의 리무진에 단독으로 오르는 김대중의 행동을 보고서야 계획서 공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어느 한 술자리에서 임동욱은 취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벌써 첫 만남에 있었다』
그 후에는 더 무게 있는 말들이 통전부 간부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수령님은 확실히 천리혜안의 예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정상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 임동욱, 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戰士)」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적국(敵國)의 괴수를 「수령님의 전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김대중,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북한 독재자의 충복인가.
김대중의 이름은 이미 그가 한국의 민주투사로 인정받던 1970년대에 통전부의 문건에 올라 있었다. 북한이 인물 흡수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1960년 4·19 혁명이었다.
김일성은 그때 통일의 호기를 놓쳤다고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4·19 혁명이 붉은혁명으로 승화되지 못한 요인은 그것을 주도할 만한 적색인물과 그 중심의 지하당이 없었기 때문이니 하루빨리 한국 내에 혁명정당을 구축할 것에 대한 과업을 주었다.
북한은 급기야 「통일혁명당」을 결성하고 마치 그것이 한국 내에 실존하는 지하당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미국, 일본, 유럽, 동남아에까지 그 지부를 설치하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밖에서부터 만들어진 이 유령조직을 안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통혁당」의 이름으로 출간된 각종 격문들과 인쇄물들을 한국에 살포하거나 침투시키는 것은 물론, 인물포섭과 지하당 결성에 총력을 다했다.
『김대중은 쌀을 달라면 쌀을 주고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다』
이를 위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돌격대로 내세웠다. 1950년대에 조직된 이 협의회라는 것은 조소앙, 안재홍과 같은 납북자들과 월북자들로 이루어진 순수한 이남 출신 집단이다.
이 협의회는 한국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함께 편지발송, 방송심리전 등 온갖 수단을 통해 한국에 남아 있는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여 대남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주(主)업무로 삼았다.
지금은 「재북평화통일촉진위원회」로 격상시켜 그 명맥을 잇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위상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대남공작의 제1과제를 반(反) 정부 의식이 강한 인물 흡수와 지하당 구축, 좌파 단체 확산으로 정한 통전부는 1970년대에는 민주투사로 자처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에게 김일성의 친서와 공작비도 보낼 만큼 혁혁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지금도 통전부 기밀실에는 박정희의 유신독재 반대를 부르짖으며 김대중이 일본에서 맹활약하던 당시 그 흡수공작에 적지 않게 공헌한 조총련 산하 비밀요원들에 대한 활동내용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박정희가 암살된 후 김대중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정국조종 전술안(案)도 보관되어 있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은 바로 이 전술안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작전이었다.
정상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 김정일은 『김대중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 상대라 생각지 말고 무조건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하고 지시했다.
이렇게 이용 가치 있는 인물들을 하나 둘 점거하고,
1970년대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일어서는 운동권에도 「통혁당」 지하가 심어지자 여기에 힘입어 김일성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 통일방안」을 주동적으로 제기하고 박정희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다.
1999년 1월1일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에서
북한은 「안기부는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안기부를 해체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통일을 바라는가 분열을 바라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고 전에 없는 어감으로 강조했다.
이어 통전부내(內) 각 연락소들을 발동하여 일대 섬멸전을 벌이듯 안기부 공격 전략을 펼치도록 했는데 실지 그때 이미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정답이 나와 있었다. 아니 훨씬 그 전일지도 모른다...
* 월간조선 2005년 1월호에서 펌. (전체 글의 4분의 1만 발췌 소개함. 나머지는 찾아 읽으시기 바랍니다.)
2008-02-11 20: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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