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댐에 얽힌 이야기 (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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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07-31 22:23 조회3,04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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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댐에 얽힌 이야기 (4)
김일성의 수공 위협
올림픽을 방해하지 않으면 김일성의 신격화에 균열이 생기게 되고, 남북한 사이의 국제적 브랜드 가치와 경제력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지게 돼 있었습니다. 이는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김일성이 패배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983년 10월 9일, 김일성은 아웅산에서 다 잡은 토끼를 놓치는 격으로 청와대 참모들과 장관들 17명을 폭사시켰는데도 오로지 전두환 대통령만은 잡지 못했습니다. 다급한 김일성은 하늘이 전두환 대통령을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바로 올림픽이 열리는 서울을 수장시킨다는 공포심을 세계만방에 전하기 위해 200만톤 규모의 금강산댐(임남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전 세계에 대고 방송하였습니다. 세계 각국들이 서울에 선수들을 보내면 그 선수들이 모두 수장될 것이라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대응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김일성의 집념은 끈질겼습니다. 실제로 금강산 댐 검설이 속도를 내고 있었습니다. 1986년 10월 30일, 건설부장관 이규호가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북한이 금강산 댐 수문을 열면 삽시간에 여의도 63빌딩의 3분의 2가 물에 잠기고 서울이 수장될 수 있다는 토목공학적 시뮬레이션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전국민이 경악하였습니다. 대응댐을 건설하자는 여론이 충천하였습니다. 대응댐의 이름을 ‘평화의 댐’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수공전략은 예상치 못했던 돌출적 이변이라 이를 위해 마련한 국가예산이 없었습니다. 모든 언론사들이 나서서 국민성금을 호소하였습니다. 총 639억 원의 성금이 모였습니다.
장군-멍군 게임
화천과 양구를 따라 흐르는 북한강의 수원(fountain head)은 북한이었습니다. 북한강이 휴전선에 의해 두 동강 나 있는 것입니다. 휴전선의 이북 26km 지점에 있는 임남면에 건설한 댐이 ‘금강산댐’이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휴전선 남쪽 10km 지점인 화천읍 동촌리에 건설한 댐이 ‘평화의 댐’입니다.
1986년 10월에 착공한 ‘평화의 댐’의 1단계 공사는 1988년 5월에 가까스로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완공된 지 4개월만인 1988년 9월 17일부터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총 공사비 639억원. 높이 80m, 저수량 5억 9천만 톤, 팔당댐의 3배에 조금 못 미치는 규모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평화의 댐’을 건설하자 밤낮을 모르고 진행해오던 금강산댐의 건설 속도로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평화의 댐이 김일성의 의표를 짜른 것이었습니다. 저수량 5억 9천만 톤의 규모의 1차 건설만으로 금강산댐에 의한 수공전략은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사실 200만톤 규모의 댐은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지어낸 허풍이었습니다.
전두환 죽이기에 나선 김영삼과 이회창
1993년에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기습적으로 하나회를 해체하고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 지지율 90%를 넘겼습니다. 이에 신이 난 김영삼은 자기가 최초의 문민-대통령이라며 군사정권을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패악적 군바리라고 몰아갔습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대를 군사 쿠데타 패거리 집단이라고 몰아갔습니다. 군사정권을 악마로 만들어야 문민정부의 위상이 상승하고, 일본을 악마로 만들어야 김일성이 더 위대해지고, 전두환을 악마로 만들어야 5.18이 더 많이 성역화된다는 판에 박힌 수작들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김영삼은 12.12사건, 차세대전투기사업, 평화의 댐에 ‘3대의혹사건’이라는 딱지를 붙여 군사정권으로 지목된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더러운 사기정권으로 몰았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로고 말이 [문민]이었습니다. [군사]에 대조되는 말이었습니다.
① 12.12는 훌륭한 정승화를 깡패 같은 전두환이 때려잡고 정권을 탈취한 군사반란 사건이라고 몰았습니다.
② 차세대 전투기사업에 대해서는 노태우 집단이 돈을 먹고 F/A-18를 F-1`6으로 바꾸었다고 몰아갔습니다. 1989년 말, 노태우는 미해군 함재기(항공모함에 싣고 다니는 해군 전폭기) F/A-18을 차세대 공군 전투기로 선택했습니다. 이 전투기를 F-16기로 바꾸게 했던 논리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이 논리는 여러 공간에서 제가 설명한 바 있습니다. F/A-18은 노태우가 1989년에 선택했습니다. 그것을 노태우가 다시 1991년에 공군기인 F-16으로 바꾸었습니다. 바로 이 바꾼 과정에 부정부패가 있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여기에서 F는 Fighter(공중전 전투기)의 약자이고, A는 Attacker(지상-수상 목표물 폭격)의 약자입니다. 해군기인 F/A-18은 항공모함에 실려 다니면서 공중전과 지상-해상의 목표물을 폭격하는 기종이고, F-16은 주로 공중전을 주 임무로 하여 개발된 것입니다. 공군기인 F-16은 이제까지의 공중전 역사에서 무적 최강의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아래는 조선일보 만믈상에 나와 있는 F-16 예찬론입니다. 이런 전투기를 조갑제는 1990년 월간조선에서 깡통비행기라고 모략한 바 있습니다.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3/07/13/5OXJFJFQ5BEAJF4WF4CUFCFJG4/
③ ‘평화의 댐’은 전두환 대통령이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안보 위기를 위기라고 국민을 속여 급조한 사기댐이라 하였습니다.
한국군을 군바리로 이미지화시킨 두 존재, 김영삼과 이회창
군사정권을 안보-사기 정권으로 몰아가기 위해 총대를 메고 나선 사람이 당시 감사원장이었던 이회창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부정부패를 산더미처럼 많이 찾아내겠다며 호기를 부리면서 무려 9개월 동안 관련자들을 협박하고 탈탈 털었습니다.
그는 12.12를 쿠데타로 규정짓고, F/A-18을 F-16으로 바꾼 것을 놓고 돈 먹고 바꿔준 것이라고 단언했으며, 평화의 댐을 안보 위협을 거짓으로 지어내 독재정권을 유지해 보려는 사기-사업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9개월 동안 감사를 했지만, 이 세 가지를 증명하는 증거들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결론은 감사 기간인 9개월 이후에 나왔지만, 그 9개월 동안 이미 여론은 이회창과 김영삼이 공동하여 선동한 위의 여론몰이 내용으로 형성돼 있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사기꾼이라는 선동은 모든 언론들이 대들어 확대 증폭시켰지만, 9개월 이후에 나온 감사 결과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생사람 잡는 정치꾼들의 수법인 것입니다. 이 수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영삼과 이회창에 의해 한국군이 군바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군인은 목숨 바쳐 국가를 지키는 존재로 인정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특히 미국과 호주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후 지금까지 군이 가장 멸시받는 하빠리 집단으로 취급되면서 괄시받고 있습니다. 지금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 많은 장교들이 군에 복무하는 것이 쪽팔린다며 사표를 쓰고 군문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이 ‘시다바리’, ‘하빠리’로 전락하게 된 첫 단추를 끼운 사람이 바로 김영삼과 이회창인 것입니다. 대쪽 법률가라는 명예로운 가운을 입었던 이회창, 알고보니 여론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저는 당시 이회창을 매우 저질스러운 ‘가면자’라며 그를 조롱하는 글을 참으로 많이 썼습니다.
평화의 댐을 도둑질한 김대중
이렇게 15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전두환은 ‘평화의 댐’을 통해 ‘안보팔이’를 해서 정권을 유지한 사기꾼이 되어 있었고, 한국군은 군바리라는 별명을 얻어 사회적 하빠리로 멸시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2002년 5월 7일, 난데없이 조선일보가 “15년 동안 천덕꾸러기로 여겨왔던 평화의 댐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신동아는 2002년 7월호에서 “금강산 댐은 제2의 노동미사일이고, 또 하나의 핵무기다. 고의든 부실공사 때문이든 터지면 전시체제로 돌입될 수밖에 없다”는 제하의 기사를 썼습니다. 일부 다른 신문들도 “평화의 댐, 존재가치 다시 부각”이라는 기사를 썼고, 2015년에는 오마이뉴스까지 평화의 댐이 효자댐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동안 전두환과 평화의 댐을 싸잡아 조롱했던 언론들이 왜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겠습니까? 금강산댐은 1986년에 건설하기 시작해 17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200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완공된 댐의 저수량은 26억 2,400만 톤이었습니다. 소양강 댐이 29억 톤이었으니 이 댐이 무너지면 서울이 쓰나미를 맞게 돼 있었습니다.
2002년 초, 미국의 아이코너스 위성 사진 판독 결과 금강산댐 중앙과 우측 두 곳에 커다란 구멍이 촬영되었습니다. 댐에 뚫린 이 두 개의 구멍을 통해 2002년 1월, 흙탕물이 분출되었습니다. 다행히도 2002년 1월 당시 금강산 댐의 저수량은 5억 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70%에 해당하는 3억4,000만 톤의 흙탕물이 두 구멍을 통해 홍수처럼 쓸고 내려와 ‘평화의 댐’을 타넘어 ‘화천댐’까지 덮었습니다. 김대중은 이를 조사하고서도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준다며 쉬쉬 국민을 속였습니다.
이후 쉬쉬를 연속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지어놓은 80m 높이의 평화의 댐을 125m로 높이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2002년 9월에 착공하여 2005년 5월에 준공시켰습니다. 증축된 평화의 댐 담수량은 26억 3,000만 톤, 금강산 댐보다 600만 톤만큼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평화의 댐은 소양강댐과 충주댐에 이어 제3 순위로 큰 댐이 되었습니다. 노무현 시절인 2005년에 치러진 준공식에는 아무 인사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야반도주하듯 쉬쉬하며 동네 이장 정도만 불렀습니다.
그런 평화의 댐이 지금은 어떻게 치장돼 있겠습니까? 온통 김대중의 이름과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이름은 ‘전’자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이 사실이 조선일보를 위시한 몇몇 언론에 의해 볼멘소리 정도로 기사화됐던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화의 화신들이라는 두 인간, 김영삼과 김대중의 파렴치한 민낯이었던 것입니다. 전두환을 공부하지 않으면 공산당 손아귀에 들어간 이 나라를 다시는 구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전두환 리더십]과 [다큐소설 전두환]에 자세히 기재돼 있습니다. 위의 제 글은 요약된 글입니다.
모든 역사를 도둑맞고 있습니다. 역사 학습에 모두가 게을리하면 억울한 역사는 누가 바로 잡습니까? 역사를 도둑질한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라를 지킨다는 것입니까? 이런 게으른 정신을 가진 우익들이 입만 가지고 지켜질만큼 가벼운 존재가 나라일까요?
연재 끝
2002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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