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내란을 전두환 내란으로 뒤집은 과정(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12-24 11:07 조회149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김대중 내란을 전두환 내란으로 뒤집은 과정(1)
1979년의 역사, 10.26과 12.12
1979년 말경에는 10.26 사건과 12.12 사건이 있었습니다. 10.26 사건은 김재규가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궁정동 안가에 데려다놓고 그 옆 건물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입니다. 12.12 사건은 김재규 재판 과정에 정승화가 개입했고, 그의 시해방조 혐의에 대한 전두환의 수사를 집요하게 방해한다는 이유로 정승화를 전격 체포한 사건입니다.
서울의 봄
1979.10.27.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된 최규하는 만 4개월만인 1980년 2월 29일,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갇힌 빨갱이 687명을 갑자기 사면-복권시켰습니다. 687명은 김대중, 문익환, 지학순 등 거의가 다 김대중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최규하로부터 횡재에 해당하는 선물을 받은 빨갱이들은 신이 나서 춤을 추었고, 그들은 이 횡재를 [서울의 봄]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12.12와 서울의 봄은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인데도, 영화 [서울의 봄]을 제작한 김성수 감독의 선무당식 역사인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서울의 봄]을 [12.12]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12.12는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을 전두환 소장이 체포한 사건이고, [서울의 봄]은 빨갱이들의 잔칫날입니다.
김대중의 선동 시국
1980.2.29. 감옥에서 풀려난 김대중은 3월부터 5월까지 학생 및 노동자를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시위가 극렬해지고, 규모가 커졌습니다. 치안이 마비되어 폭력과 강도 등 흉악한 범죄가 잇따랐습니다. 이에 대해 전두환은 삼청교육대를 창설하기로 방침을 세웠지만, 오로지 국가안위를 허무는 데에만 올인했던 김대중은 전국을 다니며 피를 흘려야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고 선동 연설을 했습니다.
김대중은 4월과 5월, 세 차례에 걸쳐 북악파크 호텔에서 전국 시위를 모의했고, 24명으로 구성된 [김대중 혁명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이때 학생시위를 주도한 사람이 장기표와 심재권이었습니다. 중정 수사관이 이휘호의 핸드백을 뒤져 24명의 혁명 내각 명단을 압수했습니다. 혁명내각은 곧 북한이 남침하여 남한을 점령하면 김대중이 남한을 접수하여 통치할 장관들이었습니다.
2025.12.24. 지만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