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200)] 전두환 VS 5.18, 어느 쪽이 민주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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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12-04 00:37 조회15,1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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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200)] 전두환 VS 5.18, 어느 쪽이 민주화인가?
결론 : 애국에 역행하는 폭동은 반역이다.
서부 활극에선 악당이 선한 사람을 죽이고 시체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 돈과 귀중품을 챙기는 장면이 나온다. 악당이 전라족이고, 선한 사람은 전두환이다.
민주화의 핵심 가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다. 이 두 개의 자유를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많이 확보시킨 대통령은 오로지 전두환뿐이었다. 전두환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화신이고 아이콘이다. 아래에 그 근거를 자세히 열거한다. 이 화려한 업적을 가로챈 민족이 전라 민족과 북조선 민족이다. 업적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연연세세 부관참시하여 우려먹고 산다.
애국 없는 폭동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반역이다. 1789년 왕을 살해한 프랑스 폭동은 그 동기가 애국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내건 가치(Value)가 [자유, 평등, 박애]이기 때문에 민주화 혁명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5.18폭동에 애국이 있으며, 민주적 가치가 있었는가? 오로지 국군과 광주시민을 향한 총질만 있었다. 총상 사망자의 75%가 무기고 총에 죽었다.
그 어느 나라에 국가를 지켜주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 걸고, 고생하는 국군을 향해 살인마 집단이다, 강간을 일삼는 집단이다, 사람이 아니라 군발이다, 이렇게 모략하고 침 뱉고 조롱하는 국민이 있겠는가? 오로지 이 나라에만 있다. 5.18을 숭배하는 빨갱이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빨갱이들이 숭배하는 5.18이 어떻게 민주화운동이고, 지휘자 없는 폭동이 무슨 애국 운동인가? 5.18은 땅에 매립해야 하고, 5.18을 성역화하는 빨갱이들은 국민으로부터 몰매를 맞아 영원히 사망해야 할 것이다.
전두환은 누구인가?
6.25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젊은이들이 많이 필요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밴 플리트 UN군 사령관에게 각별한 부탁을 했다. “대한민국에 미국 육군사관학교 West Point의 복사판을 설치해주시오.” 이렇게 해서 진해에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다. 1951년 전두환 동기들을 정규 육사 4학년 과정으로 선발하여 미 육사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독서광
전두환은 독서광이었다. 내무반 생활상 밤 10시에 불을 끄고 아침 6시에 기상해야 했다. 하루에 허용된 자습 시간은 2시간, 2시간을 가지고는 학업 내용에 대한 복습과 예습을 하기에도 부족했다. 일제히 소등이 되면 전두환은 신문지, 판초 우의, 책, 전등을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당시 화장실은 재래식이어서 1분만 앉아있어도 눈이 시큼시큼해질 만큼 악취가 진동했다. 전두환은 화장실 구멍을 신문지로 두껍게 덮고 그 위에 판초 우의를 깔아놓고 때로는 새벽 시간까지 독서를 했다. 독서는 그가 공수부대 여단장을 할 때도 많이 했다. 그 여단에서 인사 참모를 했던 육사 19기는 전두환이 원하는 책들을 사 나르느라 바쁘다고 필자에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토의가 생리화
그는 동기생들보다 연장자이기도 했지만, 의사가 통하는 5~6명의 동기생들과 주말에 외출해 밤늦도록 장차의 군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느냐의 주제를 가지고 토의를 했다고 한다. 이런 토의 습관은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에도 계속됐다. 그는 모든 정책을 토의를 통해 수립했다. 미국 유학을 두 차례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식 지휘요령을 터득했고,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관찰을 유심히 하였다.
국가경영에 깊은 관심
중령 때에는 청와대를 경비하는 대대장을 했다. 이때 전두환은 청와대 각 부서에 다니면서 각 부서는 어떤 일을 수행하는가에 대해 유심히 묻고 다녔다 한다. 1968년 1월, 김신조 침투조 30여 명이 청와대 지근거리까지 침투했다. 전두환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청와대가 뚫렸을 것이다.
김신조 일당 일망타진한 영웅
그때 전두환은 어떻게 했는가? 여러 달 전에 상상을 했다. ‘밤중에 적 특공대가 들어오면 적군 아군이 뒤섞일 텐데 캄캄한 밤에 어디를 향해 총을 쏜 것인가?’ ‘그는 청와대 경비대가 보유한 박격포를 평시에 포탄만 위에서 통속으로 넣으면 자동적으로 발사될 수 있도록 포구를 청와대 양쪽 상공을 지향하도록 방열해 놓고, 바로 옆에는 조명탄만 많이 적재시켜 놓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침투조가 검문하는 경찰 간부를 총으로 쏘면서 비상이 발령됐다. 전두환은 즉시 조명탄 발사를 명했다. 청와대 주위는 단숨에 밝은 대낮이 되었다. 하늘에는 조명탄을 서서히 낙하시키기 위해 펼쳐진 낙하산들이 곡선들을 그렸다. 31명이 암살조로 침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33명이 진실이다. 김신조 소위가 잡혔고, 대위를 포함한 반탐조 3명이 생포됐다.
작두 작전
보안사는 3명을 보안사 서빙고로 데려가 회유를 했다. “충성맹세서를 써라. 그리고 북에 가서 대한민국에 충성하라” 세 명은 호기를 부리며 저항했다. 작두를 가져왔다. 호기를 부리던 대위가 목을 넣었다. 배짱이 있으면 잘라보라는 식이었다. 신문자가 그대로 작두를 눌렀다. 그러자 방 안에는 피가 낭자했고, 잘려진 얼굴에는 눈이 한동안 살아있었다. 이 모습을 본 2명은 그 자리에서 충성맹세서를 썼다. 우명훈과 림태영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수근이 판문점을 넘어올 때, 북이 쇼를 부렸던 것처럼, 남한의 쇼에 의해 북으로 넘어갔다. 휴전선을 넘어가는 동안 우리 병사들이 두 사람을 향해 불을 뿜는 쇼를 한 것이다. 두 사람은 북에서 영웅이 되었다. 림태영은 3성 장군, 우명훈은 2성 장군, 이러한 식으로 우리 박정희 대통령이 북에 심어놓은 우리 측 간첩이 250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1998년 10월에 모두 처형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되면서 국정원 간부 1,000여 명이 일거에 숙청되었고, 국정원에 기록돼 있던 명단이 북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는 2011년 말 중앙선데이에 연재됐던 내용이다. 황장엽이 광주에 왔고, 혼자만 왔던 것이 아니라, 당시 현역 대남공작 부장 김중린, 인민군 전설인 리을설, 김덕홍이 함께 5.18 광주에 왔다고 진술한 내용도 증거 인멸시킨 것으로 증언돼 있다. 중앙선데이는 이 말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국가기록원에서 목 없는 시체 사진을 확인했다.
제 1로 땅굴 발견
최전방 전투사단 20여 개 중에서 가장 전투서열이 높은 부대가 서울의 길목을 막고 있는 1사단이다. 전두환은 1사단장 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먼저 땅굴을 발견하였다. 땅굴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고 전 부대원에게 지시돼 있어야 찾을 수 있는 존재다. 전투를 잘하는 지휘관은 늘 “내가 적장이라면 무슨 계책을 꾸밀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더 축적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경제 개인 수업
보안사령관은 당시 모든 정보를 그 누구도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 직보(직접보고)하게 돼 있었다. 모든 정보는 자신있게 보고를 하겠는데 경제분야가 약했다. 그는 매일 아침 김재익을 위시한 경제 전문과들과 기업인들을 초청해 새벽 특강을 받았다. 이조 때, 왕들이 받는 [경연]수업인 셈이었다. 그는 경제 전문가가 되었다. 업체들이 중공업 투자를 중복해서 과잉 투자하는 풍조가 제어되지 않고 있어서 과도한 외채 문제가 곧 IMF를 불러올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였다.
김재규라는 공룡, 즉시 체포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했을 때 전두환의 나이는 47세, 신참 2성 장군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갔다가 헬기로 돌아오신 박정희 대통령이 고단했던 하루를 정리하는 조촐한 식사 자리에 앉았다. 김재규는 평소의 앙숙인 차지철을 살해하고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을 앞에서 쏘고 뒤로 가서 뒤통수까지 쏘았다. 총을 허리춤에 꽂고, 맨발로 40m 떨어진 별채에 대기하고 있던 정승화에 달려갔다. 와이셔츠에는 피가 낭자하게 튀어있었고 앞섶은 허리띠 밖으로 뽑혀져 나와 있었다.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김재규 몸에서 풀풀 솟았다. 별채로 달려간 김재규는 부엌으로 가서 노란 큰 주전자를 입에 대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정, 정, 정총장 빨리 나오시오” 떨리는 음성을 날렸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무슨 일입니까?”하고 물었다. “빨, 빨.. 빨리 갑시다. 당신 차 오라 하시오” 운전수 옆자리에는 육군 대령(육사 19기) 박흥주가 탔고 뒤에는 김재규와 정승화가 나란히 탔다.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더구나 김재규는 맨발이었다. 부관인 박대령은 자기 신발을 내주고, 평소 준비했던 와이셔츠와 상의를 내주었다.
최규하의 배신과 반역
김재규는 차 안에서 정승화에게 비상계엄을 선포시키라고 주문했고,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는 국방장관 노재현이 옆에 와 있는데도 본체만체하면서 전화기를 들고 김재규가 바라는 대로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차지철이라는 경호실장만이 지휘할 수 있는 경호대와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까지 지휘했다. 차지철과 대통령이 살해되지 않고서는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편 시해 현장에서 김재규를 도와줬던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최규하 국무총리(권한대행)에게 귓속말을 해주었다. “김재규가 차지철과 각하를 시해했습니다.” 8시 40분이었다. 최규하는 이 사실을 알고서도 이후 김재규를 옹호했다. 이 사실은 전두환도 다음날 알게 됐다. 그래도 이런 잡놈을 전두환은 9개월 동안 깍듯하게 모시고 시국을 수습했다.
정승화의 반역
11:40분, 간신배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뒷배경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김재규를 배신했다. 국방장관실은 김재규가 차지하고 있었고, 장관보좌관실에 국방장관 노재현과 정승화와 김계원이 앉아있었다. 이 자리에서 김계원은 대통령 시해범이 김재규라는 사실을 털어놨다. 소스라치게 놀란 노재현은 즉각 정승화에게 “빨리 안에 있는 김재규를 체포하라”하고 장관실에 있는 김재규를 턱으로 가리켰다. 정승화가 장관의 명령을 따를 리 없었다. 정승화는 꾀를 냈다. 헌병감 김진기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벙커로 불렀다. “헌병감은 장관실에 앉아계시는 김재규 부장님의 신병을 인도해 보안사령관에게 인계하라, 보안사령관은 보안사가 관리하고 있는 정동 안가로 정중히 모셔라.” 안가는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처럼 꾸며진 최상의 호화공간이었다.
전두환과 오일랑
눈치 빠른 전두환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그리고 국방부 건물 맞은편 (지금의 전쟁기념관 자리)에 사무실이 있는 오일랑 보안사 중령에 전화를 걸었다.
“오중령, 너 김재규 얼굴 알아?”
“네”
“김재규는 네 얼굴 알아?”
“모를 겁니다”
“그러면 됐어. 너 당장 부하랑 헌병 옷으로 갈아입고 장관실에 앉아있는 김재규를 유인해서 서빙고로 데려가”
오일랑은 헌병 행세를 하면서 김재규에게 갔다. “지하 벙커에 있는 정승화 총장님이 부장님을 몰래 모셔 오라.” 했다며 그를 컴컴한 비상계단으로 안내해갔다. 건물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헌병 옷을 입은 어깨들이 김재규를 차 안으로 밀어 넣고 양쪽에서 감시했다. 후암동 헌병 초소가 나타나자 김재규의 목을 앞으로 밀어 헌병이 김재규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김재규가 말했다. “세상이 바뀌었어” 서빙고에 도착하자마자 김재규는 자기가 새 세상을 열었고 정승화가 시해 현장에서부터 자기를 수행했고, 지금도 자기 명령대로 계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불과 몇 분 사이에 최규하는 국무회의를 열어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의결해 내렸다. 사실 최규하는 역적이었다.
정승화 체포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과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정승화는 그것을 숨기고 비상국무회의에서 계엄사령관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1979년 12.12.사태가 발생할 때까지 47일 동안 김재규를 의인으로 부각시키고, 정치 현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을 향해 좁혀들어오는 수사를 방해했다. 정승화를 빨리 체포하자는 이학봉의 건의를 여러 번 뒤로 미룬 전두환은 12월 12일을 D-day로 정했다. 자기는 오후 7시에 이학봉 수사단장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에 정승화 체포에 대한 결재를 받으러 갈테니 서빙고 수사팀은 19:30분에 무조건 정승화를 연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이전에 정승화는 수사팀을 여러 차례 불러 고압적인 자세로 자기는 시해 사실을 김계원이 실토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입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꼼수에 불과했다. 청와대 경호실 차장은 이재전 중장이었다. 정승화는 B2 벙커에 도착하자마자 경호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호병력을 시해 현장으로 가지 못하게 고압적인 목소리로 지시했다. 수경사령관 역시 차지철의 명령만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정승화는 수경사령관 전성각에게 전화를 걸어 청와대 경비병력으로 하여금 청와대를 포위하도록 지휘했다. 차지철과 대통령이 살아있다고 생각했다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월권행위를 한 것이다. 이 10.26사건을 수사기록으로 분석할 때에 만일, 분석하는 사람이 경호병력과 수경사를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청와대 경호단장 차지철뿐 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정승화의 범죄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을 것이다.
정승화는 계엄사령관이 되자마자 수경사령관을 교체했다. 스스로 촌놈 출신이라고 말하는 장태완이 수경사령관이 됐다. 장태완은 공개적으로 “나 같은 촌놈을 영광스러운 이 자리에 임명해주신 정승화 각하께 건배”라는 건배사를 외치기도 했다.
정승화는 보안사령관을 거친 사람이다. 보안사 수사관들과 계엄사 수사 대령이 공관에 찾아와 정중하게 “녹음장치가 돼 있는 수사실로 가시자”라며 요청할 정도면 사안의 엄중함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큰 소리를 지르고 경호 헌병과 부관을 부르는 등 소란을 피웠다. 수행 경호 대장과 전속 부관이 총을 빼 들다가 수사관들 총에 여러 차례 사격을 당해 일생 내내 불구가 되게 했고, 정승화 아들이 계단에서 헌병 대령을 쏘아서 평생 하반신불수가 되게 했다. 이것이 정승화의 품위 없는 추태였다. 결국 수사관이 거실 유리창을 M16 개머리판으로 깨고 들어가 “이 새끼 못 일어나~”하고 망신을 당한 후에야 순순히 차에 올라탔다.
12.12는 추태쇼
한남동 육군 총장 공관에서 벌어진 이 총성 소동은 즉시 정승화 부인에 의해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전달됐다. 윤성민 차장은 정승화의 심복이었다. 윤성민은 즉시 장태완에 “총장님이 체포됐다. 빨리 구해라.” 전화를 걸었고, 당시 술이 잔뜩 취해 있던 장태완의 난동이 시작됐다. 특정 사령관 정병주, 헌병감 김진기 등이 군사를 동원했다. 군은 아군끼리 충돌하는 내전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재가 사항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성격의 사건이었다. 총소리에 놀란 국방장관 노재현은 단국대 담을 넘어 여의도 부하 집에 가서 숨기도 하고 8군에 가서 숨기도 하다가 끝내는 국방부 1층 계단 밑으로 들어가는 등 새벽 4시까지 숨어다녔다. 이에 최규하는 재가가 늦어지면 아군끼리 내전이 발생한다는 다급한 상황을 여러 차례 보고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국방장관이 먼저 서명해야 재가할 수 있다.”라며 황소고집으로 버텼다. 애국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보신주의자였다. 결국 12.12는 4대 추태 사건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정승화 추태, 장태완 추태, 노재현 추태, 그리고 최규하의 보신주의 추태인 것이다.
5.17 구국의 영웅
(1)남조선 정치 문화 역사는 북의 대남공작 역사
2023년 9월 27일 5.18 조사위원회 제3과장 이하 3명이 서울구치소에 두 번째 조사차 방문했다. 북한에서는 매년 5월이면 28개 도시 전역에서 5.18을 성대하게 기념한다는 사실이 42개의 결정적 증거 중 하나로 꼽혀 있는 것을 탄핵하기 위해 “북에서는 5.18뿐만 아니라 4.19도 기념한다고 하는데 그럼 4.19도 북한이 개입했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필자는 “4.19도 북괴 간첩이 배후 조종한 사건이다.” 이렇게 대답했다. 눈들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근거가 있습니까?” “핸드폰 가지고 있으니 이석, 이명영 교수를 검색해봐라.” “성균관대 이명영 교수는 유명한 대북 전문가다. 그는 책 [통일의 조건]에 ‘보안사 조사관에게 이석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실었다. 이석은 4.19는 물론 1946년 9월 폭동과 10월 1일부터 3남 지방을 피바다로 만든 대구폭동도 배후 지휘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조사3과 요원들은 “어떻게 그런 것 까지 다 암기하고 있느냐”라며 더 이상의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거목 간첩 김용규가 저작한 [소리 없는 전쟁]을 읽어봤느냐? 1999년 원민 출판이 내놓은 책이다. 그 책에서 김용규는 남한에서의 크고 작은 모든 시위는 100% 북한의 소행이다. 북의 배후 조종이 없는 학생시위, 노동자, 농민 시위는 없다. 김대중을 목포에서 당선시키기 위해 피 터지게 선거운동을 해준 존재는 통혁당이었다.”
목포 역전에서 한 김대중 연설에는 이 말이 키워드다. “여러분 내 눈을 똑똑히 보십시오. 저는 포부가 큰 사람입니다. 시시하게 돈 같은 거는 밝히지 않습니다.” 1967년 목포 역전의 유세였다.
(2) 김일성과 김대중이 기획한 전국 폭동과 남침의 배합전
1980년 봄을 ‘서울의 봄’으로 인식하는 국민은 많아도 서울의 봄에 남침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필자 말고는 없을 것이다. ‘서울의 봄’이라는 것은 최규하가 모든 시국 사범들을 묻지마 식으로 감옥에서 꺼내주고 복권 시켜 준 사실을 표현한 말이다. 시국 사범이라는 말은 적화통일을 지향하는 빨갱이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김대중은 1980년 4월 초부터 노골적으로 학생들을 선동했다. 민주화를 위해 피를 바치라는 연설을 매일같이 하고 다녔다. 1980년 4월 3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졌다. 하루가 멀다 할 만큼 시위의 규모와 양상이 험악해졌다. 4월 10일 김대중을 북악 파크 호텔에 추종자들과 복학생들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장기표는 학생시위를 격화시켜 4.19와 같은 무정부 상태를 만들 테니 선생님은 집권의 기회로 삼으시라는 말까지 했다. 5월 1일, 김대중과 그 추종자들이 다시 북악 파크 호텔에 모여 전국 시위로 정권을 뒤엎은 뒤, 새로 출범할 [김대중 혁명정부의 내각]을 구성했다. 24명이 각 부 장관에 선정됐다. 5월 15일 서울역에는 10만 대학생 시위가 열렸다. 버스로 경찰관들을 깔아뭉개고, 청와대로 진입할 기세를 보이다 어쩐 일인지 거기에서 멈추고 해산했다.
어쩐 일일까? 지금도 많은 운동권들은 그날 청와대로 몰려가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워하면서 당시의 시위 주도자 심재철을 원망한다. 심재철의 독자적인 결단이었을까? 여기에 상상력이 동원된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16일, 김대중의 선전포고문을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김대중의 전국 폭동명령
5월16일, 김대중은 이른바 제2차 ‘민주화촉진선언’을 한다. 이는 1석2조의 효과를 냈다. 전국의 추종자들은 모두 5월22일 정오를 기해 들고 일어나라는 명령으로 들었을것이고, 정부는 국가에 대한 선전포고로 인식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즉각 철회하고 내각을 총해산할 것 등을 김대중에게 5월19일까지 통보하라. 이에 불응하면 5월22일 정오를 기해 장충단을 중심거점으로 하여 전국시위를 단행할 것이다. 학생, 노동자, 농민은 모두 일어나 민주화시대를 열 것이며, 군인과 경찰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성스러운 시위에 동참하라.”
최규하는 헌법 초안만 마련되면 즉시 과도정부를 해산하고 선거를 치르겠다고 수십번 약속을 공표했지만 마치 민노총의 원조인 위장취업자들이 기업을 도산시키기 위해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내걸고 폭력을 행사하듯이 김대중 역시 똑같은 공산당 수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상상해보자. 감히 계엄정국 하에서 국가를 뒤엎어버리겠다고 공공연히 나대는 이 뒷배는 무엇이었겠나? 이때는 5월 중순, 5.18이 임박해있던 시기였다. 김대중이 5월22일을 전국폭동의 날로 정해놓은 상태에서 심재철이 5월15일 청와대로 밀고들어가면 5월22일의 거사가 커다란 방해를 받는다. 따라서 서울역에서는 심재철이 10만시위의 위력만 보여주는 선에서 곧바로 해산해버린 것이다. 서울역 시위가 간첩의 기획물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일성의 남침준비
10.26이 발생해 남한이 무주공산, 주인없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를 김일성이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적보다 더 기적일 것이다. 김일성은 5월22일 김대중이 주도할 전국폭동을 드라마틱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10월말부터 살인기계로 훈련시킨 맥가이버 특수원들을 10~30명 단위로 잠수함과 태백산을 통해 광주 근방으로 침투시켜 5월18일 이전에 600명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광주에서 호응할 김대중 프락치들을 조직케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주에 상륙시킨 10만대군을 해주에 대기시켜놓았다. 전국 폭동이 성공하면 김대중은 의로운 전쟁을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북에 공식발표하고, 김일성은 이를 명분으로 휴전선을 통해 남침을 하면서 인천상륙작전처럼 해주에 대기하던 10만대군을 광주로 상륙시켜 전쟁을 3일 이내에 종결하려했다. 당시 ‘3일전쟁’은 군 내에서 유행어처럼 번졌다. 이 3일전쟁의 성패여부는 김대중의 전민봉기의 성패여부에 달려있었다. ‘전민봉기’는 ‘전국봉기’의 김일성표현이었다.
전민봉기 전격차단한 전두환의 신의한수
당시의 국민정서하에서 김대중을 단지 전국규모의 시위를 선포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에 대한 계엄사령관의 조치는 단지 계엄을 보다 강화한다는 것에 불과했다. 이것이 5월17일, 국방장관이 소집한 전군지휘관회의의 회의결과였다. 5월17일, 밤12시에 계엄령을 확대강화하는 포고령을 내렸는데도 5월18일 광주에서 계엄군을 비웃고 폭동을 일으켰듯이 김대중이 건재했다면 5월22일에도 김대중이 포고한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전국폭동을 좌절시킨 신의 한수가 바로 김대중 체포였던 것이다. 김대중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명분이 있어야만했다. 그것이 북악파크호텔에서의 ‘내란모의’와 ‘혁명내각’명부였다. 이 정보를 추적했기에 김대중을 아슬아슬하게 체포할 수 있었다. 김대중을 체포했기에 5.18을 진압할 수 있었고, 5.18을 진압했기에 김일성의 남침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적화통일 일보직전에서 전두환이 김일성-김대중의 콜라보 야욕을 무산시킨 것이다. 국민은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가 대한민국을 살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낸다. 매카시가 없었다면 6.25가 발생했을 때 트루먼이 즉시 파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민은 1980년 5월의 남침계획을 김대중을 전격체포함으로써 좌절시켰다는 사실을 모른다. 북악파크호텔을 추적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을 5월17일에 체포할 수 없었다. 김대중 체포의 명분이 ‘내란모의 혐의’였다. 김대중과 김대중 추종자 24명을 체포하자 주동자 잃은 김대중 졸개들이 5월22일의 전국시위를 포기했듯이, 주동자 없는 폭동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광주의 폭동은 동서고금을 통해 유례가 없는 무서운 폭동이었는데도 주동자가 없다. 주동자가 바로 김일성이었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다. 주동자는 광주에 직접 내려온 김중린과 리을설이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전두환 업적 1~7
(1) 일본으로부터 40억달러 방위차관 받아내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국가는 박정권의 말기현상에 겹쳐 3고 시대의 고통으로 인해 IMF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대기업들은 서로 경쟁하느라 중복투자를 했고, 가동율이 20%대로 떨어져 해외 빚을 얻어 빚을 갚고 있었다. 도매물가 상승률은 44.2%, 사재기가 횡행하여 인플레를 더욱 악화시켰다. 저축은 제로, 모든 투자는 해외자금으로만 충당되었다. 1974년에 이어 제2차 석유파동과 달러값 폭등으로 인해 국가는 부도직전에 있었다. 다행인 것은 전두환이 보안사령관 시절인 1979년에 경제공부를 집중적으로 했기 때문에 문제의 성격과 심각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횡재가 생기지 않으면 헤쳐나갈 길이 없었다. 그래서 전두환은 횡재의 길을 모색했다.
1981년 1월20일,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베시 초대 한미연합군사령관과의 친분을 활용하여 레이건 대통령을 세계의 어느 지도자보다 먼저 만났다. 1981년 1월28일, 레이건 취임 8일만에 미국으로 출발, 2월2일, 60분동안 정상회담을 했다.
“각하, 저는 두가지 목적을 가지고 대통령 각하를 만나러 왔습니다. 하나는 각하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드리고 싶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각하와 미국을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한국은 늘 미국에게 도와달라는 말만 해왔는데 도와주다니? 모두가 의아해했다. 수행원들은 대통령이 무슨 사고를 치려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죄송하지만 각하, 미국 캘리포니아 연간 GNP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몰랐다.
“800억달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GNP는 얼마인지 아십니까?” 또 아무도 몰랐다.
“연간 600억달러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미국인 모두가 한국이 그렇게 작은 나라인가에 놀라워했다.
“각하, 일본의 GNP는 1조 1,600억달러입니다. 한국의 20배입니다. 한국은 600억달러에서 해마다 6%를 떼어내 국방비로 쓰고있는데 반해 일본은 겨우 0.09%만 떼어내 국방비로 사용합니다. 한국이 민주진영의 최전선에 서서 공산세력을 막고 있습니다. 이래서 한국경제가 지금 파탄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미국의 달러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 돈을 주십시오. 일본의 무임승차 자세는 매우 비신사적입니다. 일본의 돈을 주시면 저는 그 돈으로 미국 탱크와 전투기를 사겠습니다.” 레이건이 즉시 전두환 편이 되었다.
1981년 4월22일, 전두환은 외무부를 통해 100억 달러의 청구서를 일본에 발송했다. “미친놈!” 일본 스즈키 총리의 반응이었다.
이에 나카소네 총리가 들어서고, 미국을 방문했다. 1983년 1월, 나카소네가 한국에 찾아왔다. “대통령 각하, 사실 일본이 무임승차 한 데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60억달러를 마련하려고 노력했는데 제가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은 40억달러입니다.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후 전두환과 나카소네는 형제처럼 가까웠고, 레이건은 전두환의 퇴임 후에도 전 대통령을 초대했을 정도로 전 대통령을 좋아했다. 그리고 한국에 통큰 전력증강을 지원했다.
(2) 44.2%의 인플레를 2.3%로
봉금을 동결했다. 공공요금도 동결했다. 적자가 나면 구조조정을 시켰다. 당분간의 실업은 어쩔수없었다. 한가지를 얻으려면 다른 한가지는 버려야만했다. 물가는 쌀이 주도했다. 정부가 아무리 사재기를 하지말라고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다. 심리전을 사용했다. 양곡 수송차량에 쌀을 잔뜩 싣고 “양곡수송”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 붙인 후 시내를 여러차례 돌아다니게 했다. 이를 관찰한 시민들이 “양곡이 아주 많이 풀리고 있다”라는 소문을 냈다. 이후 쌀 사재기 심리가 소멸됐다. 5년만인 1986년, 물가는 2.3%로 낮아졌고, 저축이 GNP의 32%로 급증했으며 경제성장율은 13%로 지속됐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마이나스 성장을 하고있을 때 이러한 성과를 냈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으로 평가됐다.
(3) 국제올림픽으로 남북격차 30배 따돌려
국가가 부도 위기에 몰려있을 1980년, 전두환은 1988년의 국제올림픽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전두환의 드라이브는 무모하기 짝이 없게 보였다. 주위의 모두가 군인대통령이라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생각했다. 1981년 9월30일, 서독의 작은 도시 바텐바덴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서울 52, 나고야 27을 발표하고 1988년 국제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한다고 선언했다. 이변중의 이변으로 평가되었다.
돈은 어디서 나서 올림픽을 치루는가? 그것이 일본에서 유치한 40억달러였다. 이러한 꾀가 있었고, 배짱이 있었기에 그는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지금의 올림픽 촌은 그때 똥냄새나는 수박밭이었다. 한강은 가뭄이 되면 똥냄새를 풍기고, 장마가 지면 논밭을 쓸어가는 골칫거리였다. 전두환은 일본에서 받은 40억달러 중 10억달러를 투입해 [한강개발사업]을 폈다. 한강변 땅속에는 덤프트럭이 넉넉히 다닐만큼 커다란 터널이 54.6km에 걸쳐 뻗어있다. 오폐수를 통과시키는 터널이다. 4개의 정화시설을 건설했다. 중랑, 탄천, 안양, 난지들이다. 고수부지의 면적은 210만평, 엄청난 규모의 경기시설과 선수촌, 아파트촌 등의 건설은 일본에서 받은 돈으로 충당했다. 올림픽을 위해 지하철 3,4호선도 서둘러 건설했다. 여기까지의 사실을 알고있는 국민은 매우매우 드물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여기에서도 진실인 모양이다. 일본과 10여년동안 밀당을 해서 1965년 일본에서 유상, 무상으로 받아낸 달러가 겨우 8억달러이다. 1983년 1월, 5배나 더 많은 30억달러를 말 한마디로 받아낸 지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허위 전설은 종교로 믿으면서 전두환의 이 사실적 전설은 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것인가?
(4) 미래의 먹거리 한국형원자로 창조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 미래의 먹거리를 개발하여 발판을 마련해준 대통령은 오로지 박정희와 전두환, 두 대통령 뿐이다. 경제대통령이라고 자화자찬했던 이명박도 먹거리기반을 마련하는 것과는 사돈의 팔촌관계도 없었다. 빨갱이인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은 박대통령과 전대통령이 쌓아놓은 곡식을 북한에 훔쳐내주느라 눈이 빨갛도록 번뜩였다.
지금 한국의 원전은 대단한 먹거리산업이고, 국가 브랜드가치를 높이는 외교자산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열심히 세일즈하고 다니는 이 [한국형 원자로] 누가 개발했는가? 한국형 원전이야말로 제2의 포항제철이다. 포항제철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박태준 회장이 탄생시켰는가? 모든 폴란드 건설에는 설계, 시공, 감리가 있다. 포항제철 건설에는 설계가 80%의 비중을 차지했다. 그 설계를 일본이 해주고, 감리도 일본이 했다. 박회장은 시공을 감독했다.
1965년 일본과 국교를 튼 이후 제2대 주한 일본대사 가나야마가 부임했다. 박정희는 그를 불러 “당신은 일본수상의 대사역할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박정희 대통령의 대사 역할좀 해주소” 이렇게 운을 뗐다. 그리고 일본수상에게 전하는 편지를 건넸다. 가나야마는 일본 외무상을 거치지 않고 곧장 수상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한국과의 외교가 일본외교의 핵이라는 것을 설득했다. 수상이 ‘이나야마’ 일본 제철왕을 밤중에 불렀다. “손톱깎이조차 만들지 못하는 한국에 무슨 제철소냐” 단번에 거절했다. 가나야마가 끝까지 설득했다. 한국에는 포항의 모래바닥과 맨몸뿐인 박태준만 있었다. 상상해보자. 포항제철의 설계도가 어디에서 왔겠는가? 설계는 부품과 모듈을 제작하는 수백 수천의 하청기능업체의 설계를 다 모아야한다. 건설현장 관리는 박태준이 했지만 모든 것이 일본의 기여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면 전두환은 어떻게 해서 오늘과 미래의 중요 먹거리인 한국형 원자로를 개발했는가? 이에 대한 스토리는 일종의 신화다. 원자로 건설은 박정희 대통령에서부터 본격 산업화됐다. 고리1,2,3,4호기와 월성1호 중수로, 원전이 건설됐지만 이는 모두 턴키베이스였다. 미국이 지어주고, 운전키만 건네주는 방식이었다. 캐나다와 프랑스 등으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으려고 했지만 미국이 늘 방해했다.
원자로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연료였다. 중수로 연료보다 더 개발하기 어려운 것이 경수로 연료였다. 전두환은 핵연료를 개발시키기 위해 한전, 에너지연구소, 원자력 연료 주식회사, 한국중공업 등으로 TF를 구성했다. 여기에 한필순 박사라는 보물이 있었다. 그가 주도하여 중수로 연료를 개발했다. 이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의 손을 힘있게 잡으며 “내가 적극 지원할테니 경수로 연료를 개발하라” 그를 대덕공학센터장 자리와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자리를 겸임시키고, 육사14기인 박정기를 한전사장으로, 과기부장관에 동기생인 김성진 박사를 임명하여 한필순을 적극 돕도록 했다. 1983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경수로 원료가 개발됐다. 쉴 틈도 주지 않고 전두환이 한필순 박사를 불렀다. “미국의 방해를 받지 않을 한국형 독자적 원자로를 개발하시오” 이는 이행이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각하, 그건 10년이 가도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이에 전두환이 노기를 띄우며 말했다. “이보쇼, 한박사. 포항제철은 누가 건설했소?” “박태준 회장이십니다.” “박태준회장도 맨 바닥에 포항제철을 짓지 않았소. 당신이 박태준이 되든지, 박태준을 찾아내든지 하시오. 5년이오. 가보시오” “예, 알겠습니다”
돌아온 한필순이 며칠째 식음을 하지 못하고 노랑병에 걸렸다. 이병령 박사가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물었다. 한필순 박사가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이에 이병령 박사가 큰소리쳤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인데 우린들 뭐가 부족해서 못만듭니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이에 한필순의 얼굴이 노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었다. 개발 모업체는 자기회사인 에너지연구소로 하고 하청업체를 원자로 설계기술을 가진 미국의 CE(커버스천 엔지니어링)사로 하여, 70명의 브레인을 CE사로 보내 한국형 독자원자로를 공동으로 설계하도록 추진했다. 이로써 영광 3-4호기가 한국형 표준원전으로 건설됐다. 지금 현재 독자적 원전기술을 가진 나라를 미국, 러시아, 중국, 그리고 한국 네 나라 뿐이다.
한국형 원자로로 국위를 날리고, 원자로 외교를 확대하고, 수주를 따내고 계신 윤 대통령, 이 독자적 한국형 원자로가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지 아실까, 모르실까! 이런 대통령을 군사독재자라 하는 전라도족들 중 이처럼 국가에 기여한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는가? 군사독재? 군인출신이 하면 무조건 군사독재라는 말인가? 미국을 보라. 1789년 연방정부가 구성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뽑힌 조지워싱턴, 그는 장군출신으로 식민지 종주국들과 전쟁을 치른 사람이다. 그랜트 장군도 대통령이 됐고, 아이젠하워도 2차대전의 영웅이었다. 맥아더는 5성장군 ‘원수’계급이었지만 일본 민주화의 아버지다. 군사독재? 박정희가 어째서 독재자인가? 전두환이 어째서 독재자인가? 이분들을 독재자라 하는 인간들 입에서 김일성이 독재자라는 말,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5) 미래의 먹거리 통신, 전자, 반도체산업 개발
1950년대 미국의 GNP는 세계 GNP의 54%를 차지했다. Made in U.S.A. 생산설비를 전제로 하는 공업제품이었다. 그 다음의 국제브랜드는 Made in Japan이었다. Made in U.S.A가 Made in Japan에 밀렸다. 1980년대였다. 미국에 수출된 상품 중에는 Made in Korea도 있었다. 1970년대부터였다. Made in Korea시대를 누가 열었는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국산화! 박정희의 꿈이었다. 선진국에서는 한물 간 사양제품(Sunset Item)에 대한 기술자료(TDP: Technical Data Package)를 미국, 일본에서 실어왔다. 편물, 제사, 라디오, 방직, 차량, 전화기, 박격포들이었다. 갑자기 기능공들을 대거 양산하여 서독 기능 올림픽에 내보냈다. 한국 기능공이 1,2,3등을 다 차지했다. 국제사회에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되었다. 공단을 설치했다. 창원, 구미, 인천, 시화 등 외국에 대사를 내보내 한국에는 공단도 많고 값싸고 온순한 기능공들이 많으니 공장을 지어달라고 했다. 외국에서 실어온 기술자료(TDP)는 설계, 스펙들에 대한 자료라서 과학자 기술자들이 대거 동원되어 해독을 해야했다. 박 대통령은 해외에 나가있는 한국인 두뇌들을 대거 유치해 그들의 동무가 되어주고 격려했다. Made in Korea는 박대통령의 개발품이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면 감히 박정희 대통령을 감히 독재자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전두환이 마련해준 먹거리는 한국형 원자로 말고 무엇들이 더 있는가?
Made in U.S.A.가 Made in Japan에 밀려나면서 미국은 더 이상 공업제품에 연연하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의 새로운 먹거리산업을 IT, BT로 전환했다. 정보산업과 건강산업으로 전환한 것이다. 정보산업은 통신, 전자, 컴퓨터, 반도체, 핸드폰, TV등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엘리트들로 내각을 구성한 전두환은 이 새로운 산업을 미국보다 7~8년 앞서서 개발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전화기가 신분이었다. 아파트 30평형이 200만원이었을 때 전화기 값이 260만원인 적도 있었다. 수동형 교환기에 여성 교환수가 매달려 원하는 번호단자에 선을 꽂아주는 것이었으니 가입자가 몇 명이나 되었겠는가? 그러니까 전화기가 금값이었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전자식 교환기만 있으면 누구나 전화기를 싸게 보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자식 교환기 개발에 최우선을 두었다. 이를 계기로 이 분야의 전문가인 육사18기 오명을 체신장관으로 임명하고 IT산업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전자식 교환기는 6개국만 생산하고 있었다. 도입가격이 너무 비싸 1가구 1전화시대를 열 수 없었다. 개발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우리나라가 개발한다는 생각은 미친 생각에 해당했다. 전자교환기 사업에 예산을 대폭 늘려 5개년 사업의 핵심사업으로 선정했다. 반도체사업, 컴퓨터사업도 동행되었다. 주위에서는 그런 돈이 있으면 차라리 한강에 다리 하나를 더 늘리자고 비아냥댔다. 기술직 공무원들과 기업 기술자들로 TF를 만들어 합숙케했다. 4년만인 1986년, 불가능하다던 전자교환기가 개발되었고 개발에 참여한 금성반도체, 동양정밀, 삼성반도체가 세계IT업계의 신화적 존재로 부각됐다. 그리고 필리핀, 베트남, 몽골, 러시아 등으로 수출길이 뚫렸다. 1가구 1전화, 전화를 개설하는 데 단 1일만 걸렸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복지혜택이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을 독려해 64K DRAM 개발을 성공케했다. 1986년에는 1메가 DRAM개발, 이어서 4M DRAM에 도전했다. 당시 반도체 생산업체는 삼성, LG, 현대였다.
전두환이 이렇게 정력을 쏟아 이룩한 IT기술을 김대중이 북에 훔쳐다주었다. 2001년 5월,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가 450억원을 북에 보내 평양과기대를 세워주었고, KAIST 교수출신 박찬모가 50여명의 교수를 북에 데려가서 IT기술을 집중 훈련시켜주었다. 오늘날 북이 우리를 괴롭히는 해킹기술은 김대중, 곽선희, 박찬모의 간첩질 때문일 것이다. 이런 김대중은 존경스럽고, 전두환은 군사독재라 하는 인간들, 광대뼈부터 관찰해보라.
오늘날 세계 TV시장에 삼성과 LG가 판을 치고있고, 세계 핸드폰시장을 삼성 LG가 석권하고 있는 것은 그 뿌리가 전두환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아름다운 한강을 즐기고 찬미하는 사람들, 그 한강이 전두환이 일본에서 돈을 받아내 건설한 예술품이라는 사실을 알고있는가? 오늘날의 먹거리를 박정희-전두환 두 대통령이 뼈빠지게 그리고 창의성 있게 일해서 마련해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국민, 감사하는 국민 몇 명이나 되는가? 이 두 어른을 함부로 욕하는 인간들은 분명히 지옥에 이미 명단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함부로 은인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가 걷는 길은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는 섭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6) 시장경제 시스템의 선진화
아담스미스가 정리한 시장경제의 작동은 크게 두가지 전제가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는 자유경쟁이고 다른 하나는 공정성이다. 박정희 시대의 애국은 ‘국산품 애용’이었다. 이것 때문에 국제경쟁력이 없는 기업에 보조금을 주고 수입장벽을 높여주었다. 만일 이것을 가만 두었더라면 1990년대부터 쓰나미처럼 몰려온 WTO에 다 휩쓸려 모든 기업이 사망했을 것이다. 전두환은 국산품애용을 폐기하고 외국제품 수입을 국제관례대로 손질했다. 수입 자율화, 기업들이 죽는다고 아우성 쳤지만, “사지 않으면 팔지도 말라”며 후진국적 억지를 포기하라고 했다. 국제경쟁력을 가지려면 창의력이 배양돼야 하고, 창의력은 자유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며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폭넓은 자유를 허용했다.
규제를 거의 다 없애고, 경쟁력이 가장 취약한 농촌과 중소기업의 육성에 정책적 우선을 두었다. 공정거래위원회를 설치하고 금융실명제를 추진했다. 금융실명제는 금융전산망이 없으면 실행이 불가능했기에 그는 모든 은행거래의 전산화를 추진했고, 모든 행정부에 종합국가전산망 사업을 추진했다.
[7.3조치]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1982년 7월3일, 전두환은 이른바 7.3조치를 발표했다. 1년 후인 1983년 7월1일부터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치가 발표되자 은행에서 자금인출사태가 벌어졌다. 이 금융실명제법은 이미 국회를 통과했고, 대통령이 실행만 하면 되는 상태에까지 준비돼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자금인출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전두환은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발표를 하지 않고 기습적으로 했어야 했다. 전두환은 언제라도 이후의 대통령이 실행할 수 있도록 부칙에 “1986년 이후 대통령이 정하는 시기에 시행한다”는 조항을 삽입한 후 뒤로 물러섰다. 전두환 뒤를 이은 노태우는 이런 공적인 문제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리고 1993년 2월에 취임한 김영삼이 인기를 상승시킬 목적으로 취임 6개월만인 1993년 8월12일, 목요일 저녁 19시 45분, 모두가 퇴근한 시각에 기습적으로 긴급명령을 발동해 이튿날부터 시행케 했다. 국회인준을 이미 전두환이 마쳐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명령이었다. 오늘날의 시장경제시스템의 골격은 전두환의 작품인 것이다. 이렇게 기업의 자생력을 1980년대 초부터 길러주었기 때문에 1990년에 갑자기 밀어닥친 WTO쓰나미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7) 대한민국 역사상 최광의 자유공간 제공
청년시절 육사에서 미 육사교재로 공부하고 미국 유학을 두 차례 다녀오면서 전두환에게는 자유가 아이콘이 되었다. 그가 열어제낀 자유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은 밤 12시의 통금해제였다. 통금해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국민은 단 한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통이 크지 않고서는 감히 입에조차 담을 수 없는 금기어였다. 단지 그 혼자만의 소신으로 그는 통금을 없앴다. 통금이라는게 있으면 자유의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제올림픽까지 유치해 국가 브랜드가치를 높이려는 마당에, 외국인들이 와서 통금이 있는 나라라고 인식하고 간다면, 어떻게 한국의 브랜드가치가 상승할 수 있겠는가? 교복과 두발로 자유를 묶으면 자유를 실감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 묶음을 다 풀었다. 수입자유화? 모든 국민이 자기 살을 꼬집었다. “이것이 생시인가!” 유학도 자유로 가라, 해외송금도 자유로 하라, 해외이주도 자유로 하라, 연좌제는 더 이상 없다.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다. 자유가 방임되지 않으려면 양식이 있고, 교양이 있고, 문화국민다워야 한다. 문화분야의 소비를 늘리기 위해 전국에 문화공간을 설치하고, 수업의 블랙홀인 과외수업을 차단시켰다.
필자의 명예를 걸고 평가하건대 대한민국 역사상 이 이상의 자유주의자는 대통령중에 없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애국역사의 위대한 영웅들이다. 이들의 역할을 놓고 누가 위고 누가 아래냐를 상대평가 할 수 없는 세계적 세기적 위인들이다. 이 세 영웅들이 이룩한 터전에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살면서 이 세 영웅을 욕하는 인간들은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
도대체 5.18이 이룩했다는 가치가 무엇인가?
5.18족은 주장한다. 전두환 독재에 항거했기 때문에 민주화라고. 그러면 전두환은 5.18 폭동 후 제거되었는가? 전두환은 그 후 장장 7년 이상에 걸쳐 대한민국을 경제 10대강국으로 올려세웠고, 국제올림픽을 유치해 대한민국 브랜드가치를 높였고,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자유공간을 선사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먹고사는 먹거리 산업기반을 탄탄하게 건설해주었다. 한강은 전두환의 대명사인 것이다. 전두환의 이러한 업적을 놓고 그를 군사독재자라 욕하는 것은 정신병이다.
설령 그들의 주장대로 독재에 항거했다고 하여도, 결국 전두환을 타도하지 못했는데 무슨 민주화인가? 전두환이 사상 최고의 애국자였는데 그가 왜 독재자인가? 5.18 이전에 전두환은 겨우 투스타에 불과했는데 무슨 독재를 했다는 것인가? 이처럼 5.18 추종 빨갱이들은 헛소리를 가지고 국민의 등을 쳐먹고 있는 것이다.
이 정부는 도대체 국민을 무엇으로 보는 것인가? 근거없는 일로 유공자로 등록해있는 사기꾼들에게 무슨 권리와 명분으로 국민세금을 해마다 퍼주는 것인가? 폭동의 내용과 성격을 한번만이라도 들여다보라. 이런 반국가 폭동이 헌법정신으로 보이는가?
이 정부는 5.18 단체들의 구성을 들여다보고 행실을 들여다본 적 있는가? 5.18단체 구성원들은 조폭과 사기를 일삼는 자들이다. 5.18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면 단체로 버스를 타고 달려가 폭행을 한다. 교수가 5.18에 대해 말하면 폭력배를 몰고가 대학 재단 이사장과 총장을 협박해 해직시킨다. 좋은 직장에 압력을 넣어 광주족을 취직시킨다. 주사파 판사들을 믿고, 민형사 소송을 남발한다.
폭력, 사기, 세도, 막말의 아이콘이 5.18족이다. 이 나라의 국민적 품위는 5.18 전라도족들이 추락시키고, 이 나라 국민의 행복도 5.18 전라도것들이 파괴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민주화족들이라는 말인가? 이 나라 민주화의 아버지는 단연코 전두환 대통령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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