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213)] 230 광수 강철환 법원 녹취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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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1-01 22:52 조회18,3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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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213)] 230 광수 강철환 법원 녹취록 정리
고소이유
나는 1968년생이고, 1980년에는 12살이었는데 그때는 요덕 수용소에 수용돼 있어서 광주에 올 수도 없었고, 특수군 나이도 아니었다. 요덕 수용소에는 1977.8.4.~1987.2.16.간 수용돼 있었다. 한국 도착한 날은 1992.8.이였다.
증거자료
2017.1.14. isabel true love 강철환 대표의 탈북과정을 통해
2017.1.23. [ENG Sub] [탈탈탈] 22회 1부, The aquariums of Pyongyang North Korean Prison Comps, torture interview (요덕 수용소 고문 인터뷰)
2017.1.24. [2부] (ENG Sub) [탈탈탈] 22회 2부 (요덕 수용소 고문 인터뷰)
2020.6.18. 왈가왈부 tv. “김정은은 허수아비”라는 북맹 탈북자, 조선일보 강철환 기자
2020.2.20. <공병호tv> 북한의 실상을 고발한다.
2014.2.18. 인터뷰 ‘한양대학교 – 자유를 위한 노래’
2002.12.13. RFA 인터뷰
2019.10.29. 메디컬 트리뷴, 우리 아이 성장판 언제 닫힐까? 적절한 검사 시기는?
2008. 수용소의 노래
가족관계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본에서 7남매를 거느리고 재일교포 북송작전에 따라 만경봉호를 타고 북송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송한 해가 2003년에 발간한 [수용소의 노래]에서는 1961년이라 했고, 2020 ‘공병호tv’에서는 1959년이라 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김일성 옥바라지를 한 가문의 딸로, 혁명가의 딸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아버지와 결혼한 상태에서 왔는지, 북에서 결혼했는지에 대해서는 법정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할머니는 독학으로 공산주의를 학습한 골수 공산주의자로 조총련 창립 멤버에다, 조총련 교토지구 여맹 위원장을 했으며 북한에 와서는 북조선 여맹 부위원장이 되기도 했고, 15년 동안 줄곧 국회의원(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했다고도 한다. 할아버지는 평양시 상업관리소 부사장이었다고 한다.
요덕에 끌려간 동기
증2 (2017.1.23.) 탈탈탈 1부에서는 할아버지가 동료들과 술 마시면서 실수로 한 말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가는 것은 봉건주의다. 찬성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고 했고, 증5 (2020.2.공병호tv)에서는 일본에 있을 때, 김덕수가 조총련 의장에 출마하는 것을 반대한 사실이 문제가 됐다고 했다. 참고로 한덕수는 1955년부터 2001년 사망했을 때까지 47년 동안 조총련 의장을 했다. 1955년 일본에서 할아버지가 했던 발언을 1977년에 북한에서 문제삼아 1급 정치범 수용소인 평남 승호리 수용소로 잡혀갔고, 이로 인해 나머지 가족들이 연좌제에 걸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당에서 강제 이혼을 시켜 보호했고, 할머니, 아버지, 막내 삼촌 강철환, 여동생만 요덕으로 끌려가고 나머지 삼촌 3명과 고모 2명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법원 녹취서 14쪽)
문: 증인은 [수용소의 노래] 46쪽에서, 막내 삼촌이 증인보다 하루 먼저 요덕에 들어와있다가 그 다음날 증인을 포함한 4인 가족을 마중 나와 집으로 안내해 갔다고 했지요?
답: 제가 이런데 답변을 해야 될 필요를 못 느끼거든요. 제 개인적인 아픔이고, 제가 진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인데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그런 개인적인 고통에 대해서...
문: ...부모님은 언제 무슨 이유로 별거하게 되었나요?
답: 저는 답변할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에 답변을 안 하겠습니다. 판사님, 저는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모욕적이라서 그만두겠습니다.
(법원 녹취서 15쪽)
판사: 증인이 답하기 싫거나 곤란하면 답을 안 하겠다고 하면 됩니다.
증인: 듣는 것 자체가 고통이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우리 가족이 북한 정권에 의해서 피해 받았던 스토리인데, 그것에 대해서 제가 쓸데없이 다시 되뇌이면서 이런 것을 가지고 제가 하기가 정신적인 고통이 크기 때문에...
(법원 녹취서 16쪽)
피고인: 이것은 모두 증인이 방송한 내용이에요.
증인: 방송한 내용을 박사님 혼자서 알고 계세요.
문: 부모님이 당에 의해 강제 이혼을 당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할아버지가 육 남매 이외에 며느리까지 데려갔다는 증인의 말이 없는데, 어머니는 어떤 식으로 일본에서 북한으로 왔는가요?
답: 그것을 알아서 뭘 하게요.
문: 어머니는 북한에서 증인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증인과 증인의 여동생을 1968년과 69년에 출산하였다는 것이지요?
답: 판사님, 이것은 인권유린 같습니다.
문: 증인이 다 방송한 내용이에요.
답: 방송한 내용이지만 제 개인의 고통이 크거든요... 이 사건 자체가 제겐 트라우마인데요.
(주: 일본에서 1959년 또는 1961년에 온 가족이 왔다면서 어머니가 첫아기를 1968년에 출산했다는 것, 그리고 연년생으로 1969년에도 딸을 출산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출산능력이 있는 여성이 결혼생활 8년 이상을 하도록 출산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어린 남매를 아버지에게 남겨놓고 혼자 나와 다른 집에서 별거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 이상한 현상을 묻고 있는데 답변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법원 녹취서 17쪽)
판사: 이때 증인 신문의 중단을 명하고, 다시 증인 신문을 행하다.
문: 증인은 탈탈탈 22회에서 증인이 살던 아파트에 대해 “독일에서 지어 준 아파트예요, 독일식으로 짓다 보니까 되게 천정이 높고 집이 되게 좋아요, 방이 네 개가 있고”이렇게 소개했지요?
답: (묵묵부답)
문: ‘독일에서 지어 준 아파트예요’ 맞는가요?
답: 그것은 이 사건과 상관없기 때문에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그런데 그보다 15년 전인 2003년에 증인이 저술한 ‘수용소의 노래’에서는 “이 아파트는 해방 전쟁 후 소련 사람들이 건축한 것”이라고 소개했는데, 15년 사이로 소련 사람이 지어 주었다고도 하고 독일이 지어 주었다고 하고, 말이 다른데 왜 다를까요?
답: 다른 이야기 한 적 없습니다.
문: 증 25의 80페이지를 보십시오.
답: 독일하고 소련이 같이 들어와서 같이 지어 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것이지, 그것이 뭐 대단한 것이라고 그것을 가지고 그럽니까? 그것이 무슨 대단한 증거가 되나요.
(법원 녹취서 20쪽)
문: 2017년 탈탈탈입니다. 할머니가 15년 동안 인민위원(국회의원)을 했다고 했어요. 인민위원을 몇 년부터 몇 년까지 했나요?
답: 잘 모릅니다.
문: 북에 도착한 61년부터 곧장 시작해서 15년 동안 국회의원을 했다면 1976년이 되는데 맞는가요?
답: 그런 것들은 불필요한 이야기입니다.
문: 공병호tv에서 할머니가 여맹 부위원장을 했다고 했어요. 그러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여맹 부위원장을 했나요?
답: 제가 그 당시에 9살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한 것만 알지요.
(법원 녹취서 21쪽)
문: 증인은 2020년 공병호tv에서... “두 분은 7남매를 거느리고 1959년 재일교포 북송선을 타고 청진항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평양시 상업관리소 부책임자가 되었고, 할머니는 북조선 전체의 여맹 부위원장이 되었다. 이때 여맹 위원장은 김일성의 부인이 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여맹 위원회에 나갔다가 김일성 부인을 보았고, 김일성 부인은 나더러 똘똘하다고 귀엽게 생겼다는 말을 했다.” 맞지요?
답: 그런 답변을 왜 해야 합니까?
문: 할머니가 여맹 부위원장을 했다고 했어요. 언제부터 언제까지 하였는지 아는가요?
답: 그것이 이 질문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문: 증인은 김성애를 어제 만났나요.
답: 제가 9살 이야기를 어떻게 다 기억합니까. 만난 추억만 있는 것이지요.
요덕 수용소로 가는 과정
앞에서 강철환은 9살 때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추억으로만 기억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래에는 9살 때의 기억력이 매우 구체적이다.
①수용소의 노래 28쪽 내용이다.
여덟살 배기 여동생 미호는 울고 있는 할머니 옷깃을 잡고 겁에 질려 떨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얼른 달려 왔다...“노친네 남편 강태휴는 우리 민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졌소. 그래서 지금부터 동무네 전 재산을 몰수할 것이오. 또 살림 나간 자식들은 어쩔 수 없지만 여기 있는 전 가족도 압송하겠소.”...
(수용소의 노래 29쪽)
침입자들은 닥치는 대로 세간을 뒤엎으면서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간나’, ‘에미나이’, ‘새끼’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수용소의 노래 45쪽)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첫 초소에서 30분 더 달려 어느 부락 앞에 멈춰서더니 완전히 시동을 껐다. 우리는 400여 리의 길을 장장 10시간 만에 달려온 것이다.
②(2017.1.23. 탈탈탈 22회, 유튜브 녹취록 84쪽)
평양에서부터 요덕까지 5시간 반 정도 걸린 거 같아요. 그래서 도착한 곳이 이제 간판을 보니까 함경남도 요덕군 구읍리라고 돼 있어요. 그런데 수용소 간판은 조선 인민 경비대 제2915 군부대, 그러니까 2015를 안 돼 가지고 15관리소라고 불러요.
(유튜브 녹취록 85쪽)
정문에 딱 내려가지고 호송한 보위부 요원이 그 수용소 보위부 요원하고 무슨 이렇게 서류상 절차를 뭐 따지더니 문을 딱 열더라구요. 그래서 차가 딱 진입했는데 처음 진입한 집은 이제, 거기 처음 진입한 마을은 그 수용소를 지키는 이제 경비대나 국가안전 보위부 요원들이 사는 마을이었어요.. 처음에는 걸어가다가 다시 또 차를 탔는데, 그래서 1반 마을에서 이제 10반 마을까지 가는 거리가 한 40분 정도 걸렸어요.
③수용소의 노래 28쪽
철부지 미호와 나는... 어른들의 근심은 아랑곳없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죽은 금붕어들 가지고 놀기도 하였고 침대에 올라가 구르고 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어둡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답답하고 지겨워 미호와 나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할머니를 졸랐다.
(법정 녹취서 11쪽)
문: 요덕으로 실려갈 때 트럭에는 밖을 볼 수 없도록 포장이 쳐져 있었나요? 아니면 오픈이 되어 있었나요?
답: 풍차라고 하지요.
문: 어떤 차지요?
답: 차에다 천을 씌웠어요.
문: 끌려갈 때 수갑이나 포승줄이 채워졌는가요?
답: 아니요.
문:증 25입니다. 증인은 2017.1.23. 탈탈탈 22회 1부 방송에 출연하여 요덕 수용소 이력에 대해 “딱 9년 8개월, 9살 들어오고 19살 때 나왔다.”라고 했지요?
답: 예.
문: 1977년 8월부터 9년 8개월을 보태면 87년 4월이 되는데, 출소일이 87년 2월이라면 아귀가 안 맞지 않나요?
(법정 녹취서 12쪽)
답: 왜 아귀가 안 맞습니까?
문: 들어갔다가 9년 8개월만에 나왔으면.
답: 그런데 그게 이 사건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문: 1977년 8월 3일부터 9년 8개월을 보태면 4월이 되는데, 증인은 출소일이 87년 2월이었다면서요?
답: 2월은 김정일 생일로 판결난 날이고, 실제 나온 날은 4월쯤 되는 것이지요.
문: 증 33, 2017년 탈탈탈에서 증인은 1977.8.에 요덕 수용소로 끌려갔다 했고, 2020. 공병호tv에서는 할아버지가 77년 4월에 행불이 되었고, 5월경에 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쳤다고 했는데, 왜 틀리게 말 하나요?
답: 그것을 제가 30년 전 이야기를 잠깐 틀릴 수도 있는 것이지 제가 기계도 아니고 어떻게 다 기계처럼 알 수 있나요.
(법정 녹취서 13쪽)
문: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나요, 북한에서 태어났나요.
답: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법정 녹취서 21~22쪽)
문: 증인은... 요덕 수용소까지 400여 리의 길을 10시간 만에 달려 왔다고 했어요. 평균 시속 16km/h였나요?
답: 그냥 쭉 얘기하세요.
문: ‘수용소의 노래’ 28쪽에는 철부지 미호와 나는 어른들의 근심은 아랑곳없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죽은 금붕어들 가지고 놀기도 하였고... 그럴 만큼 철부지였는데 2017년의 증인이 한 말에는 도착한 곳의 수용소 간판을 보니까 함경남도 요덕군 구읍리라고 돼 있고... 수용소 간판을 제 2915 군부대... 1반에서 10반 마을까지 가는 거리는 한 40분 정도 걸렸어요... 이런 구체적인 기억을 철부지가 다 기억했다는 것인가요?
답: (묵묵부답)
(주 : 9세였던 강철환은 보위부 요원들이 평양 아파트로 들이닥쳐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했던 말을 다 기억하여 썼다. 간나, 에미나이, 새끼라는 욕설 표현까지도. 철이 없어서 그 와중에 보위부원들이 세간을 팽개치고 금붕어 어항들이 다 깨져서 금붕어들이 바닥에 떨어져 뛰고 있는 것을 주워서 가지고 놀기도 하고, 침대 위에서 구르다가 따분하여 할머니 옷자락을 잡고 동생과 함께 밖에 나가 놀겠다며 때를 썼다고도 했다. 이렇게 철없던 9살 아이가 10시간 또는 5시간 반 동안 커버 포장이 씌어진 트럭 짐칸에 실려 요덕 수용소에 도착한 후부터는 어른도 기억하기 어려운 간판명들을 기억하고 부대 번호를 기억하고, 1호 마을에서 10호 마을까지 캄캄한 짐칸을 타고 가면서 걸린 시간을 40분이라 기억하고 마을의 생김새까지 다 보았다며 기록했다. 밖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트럭 짐칸에 두꺼운 포장을 쳤는데 어떻게 밖에 있는 입간판을 보았고, 부대 명칭을 읽었고, 각 마을의 성격까지 파악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공상 소설일 수는 있어도 현실일 수는 없다. 여기에다 평양에서 함경남도 요덕까지 160km(400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 160km를 10시간씩 걸려 갔다는 것도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시간당 16km의 속도로 갔다는 말이 된다.)
강철환의 아이콘 금붕어에 대한 화려한 거짓말
⑦RFA인터뷰(2002)
[평양의 어항](Aquariums of Pyongyang)이라는 영문 책에 대한 소개에서, 평양의 어항이라는 책인데요. 이 책의 제목이 된 동기는, 제가 어릴 때 금붕어들을 키우기를 좋아했습니다. 77년도 당시에 평양시에서는 어린이들이 금붕어를 키우는 것이 유행되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우리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면서 저는 영문도 모르고 금붕어 어항을 가지고 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20마리 정도요. 그러나 수용소에 끌려간 후에 금붕어가 한 마리 한 마리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마리 남았는데 겨울이 찾아오면서 저희 거처가 영하로 내려가자 그 어항이 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금붕어는 다 죽었으며 그 이후 바깥 세상과 결렬이 시작되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수용소의 노래 26~28쪽)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어항은 산산조각이 나 금붕어들이 바닥에 나뒹그러져 펄떡대고 있었고, 다른 가재도구들도 뒤엉켜 널려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집안은 험상궂게 생긴 침입자들로 꽉 차 있었다... 우리는(9살 강철환, 8살 미호) 죽은 금붕어를 가지고 놀기도 하였고, 침대에 올라가 뛰며 구르기도 했다.
(주: 금붕어에 대한 애착심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였음. 금붕어를 사랑해서 요덕 수용소까지 가져갔다는 앞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되는 이야기임)
(②탈탈탈(2017))
우리 집에 내 어항이 5개인가가 있었어요... 애들한테 다 나눠주고, 이제 내가 제일 아끼던 고기들을 다 골라가지고 어항에 담았어요. 하나에다가, 이거는 내가 가지고 간다해가지고... 이제 그 준비를 하니까 그 보위부 요원이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그거 놓으라고, 놓고 가라고, 그러니까 내가 막 그 보위 요원한테 막 욕, 같이 막 싸움질하면서 막 가져가겠다고 막 떼를 썼거든요. 그래서 내가 그거 금붕어 어항을 이제 아예 통째로 가져왔어요. 수용소까지.
(주: 염라대왕으로 상징되는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역적의 자식인 9살짜리 아이가 떼를 쓴다고 해서 관용을 베푼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랬다면 북한 보위부는 무척 인간적이다. 북한 도로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다. 장장 10시간 동안 달리면 사람의 몸도 공중에 떴다 내렸다 하는데, 트럭의 짐칸에 어항이 있으면 그 어항이 어떻게 되겠는가? 산산조각이 나고 붕어는 바닥에 흩어져 비린내를 풍길 것이고, 짐칸은 물로 범벅이 될 것이 뻔한데, 보위부 요원들이나 할머니, 아버지가 이를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승용차에 싣고 아스팔트 길을 10시간 달린다 해도 어항은 보존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를 허락한 한국 부모도 없을 것이다. 비포장도로를 어항을 가지고 트럭 짐칸에 싣고 깨지지 않게 10시간을 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법정 녹취서 17쪽)
문: 지금 현재 증인이 운영하는 ‘강철환tv’를 열면 증인의 첫 멘트가 “평양의 어항 강철환tv입니다.”이렇게 시작하지요?
답: 예
문: 이만큼 증인과 평양의 어항은 동일시되는 것이지요?
답: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법정 녹취서 18쪽~20쪽)
문: 다시 말하면 평양의 어항에 모순이 있으면 증인에 대한 신뢰도 훼손되는 것이라 하겠지요?
답: 요점을 이야기하세요. 무슨 잡다하게 그렇게 이야기하십니까.
문: RFA인터뷰 내용에 있는 기재입니다. “평양의 어항이라는 책인데요... 하도 떼를 쓰니까 금붕어를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20마리 정도요... 겨울이 찾아오면서... 금붕어는 다 죽었으며” 이렇게 썼지요?
답: 지만원 박사님, 너무 인간적이지 않네요. 그런 말은 하지 마시지요. 제가 지금 힘들다고 하잖아요.
문: 여기 사진들 중 1번 사진은 수조형 어항이고 2번 사진은 소형 어항인데 20마리를 가지고 간 어항은 수조형인가요?
답: 그것을 제가 여기서 왜 말해야합니까?
문:...2017년 탈탈탈에서 증인은 어항 5개 중에서 4개는 친구들에 나누어주고 1개에 좋아하는 고기를 다 담아서 갔다 했고,... 수용소의 노래에서는 어항이 박살이 나서 고기들이 다 죽었다 했고... 또 RFA에서는 20마리를 가져갔다 했는데... 이렇게 거짓말을 하면...
답: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까 지금.
문: 20마리를 가져간 어항이 수조식 어항인가요, 일반 어항인가요?
답: 그런 것을 여기서 말할 필요 없습니다. 도대체 지금 뭐 하자는 것입니까.
문: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며 달리는 트럭의 적재함이라면 사람도 퉁퉁 튀어 올라 몸을 가누기 어려웠을 텐데, 10시간 동안 어항을 깨트리지도 않고, 물도 쏟아지지 않게 하고, 출렁이는 물에 금붕어가 밖으로 튀어나오지도 않게 한다는 것인가요?
답: 판사님, 똑같은 것 같은데요. 요점도 없고, 그냥 제 고통을 계속 물어서 꼬투리 잡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달라진 질문이 없는 거 같습니다.
(주: 20마리의 금붕어를 수용하는 어항이라면 수조여야 하며, 전기를 필요로 하는 수조를 죽음의 계곡이라는 요덕 수용소로, 그것도 역적의 가족들이 비포장도로를 트럭에 실려 가면서 싣고 갔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요덕 수용소는 먹을 것이 없어 피골이 상접하고, 강제 노동에 시달려 쉴 시간조차 없다는 곳인데, 5월달에 금붕어 20마리를 가져가서 11월~12월 방안에서도 얼음이 얼 정도의 계절까지 최소 6~7개월이 지났는데 3마리씩이나 살아있었다면, 붕어 먹이는 어디서 구했고, 1급수 물은 어떻게 자주 갈아주었고, 전기는 어떻게 공급받았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금붕어를 기르는 목적은 관상이다. 먹여서 살리기 위한 노력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 피곤하고 허기진 공간에서 언제 금붕어를 감상했다는 것인지, 별나라 이야기만 같다. 금붕어 20마리를 6~7개월 키우다 세 마리가 남았고, 그 세 마리마저 얼어 죽었다는 환경이면 요덕 수용소는 사치의 공간이지 죽음의 계곡이 아닐 것이다.)
수용소 방출 후의 생활
②녹취록 91쪽
“수용소에서 나온 곳이 농장이었다. 집단 농장에 가면 못 빠져나오니까 삼촌들이 몰려와서 요덕 군당 책임 비서, 조직 비서, 보위부장에 뇌물 줘서 요덕군 소재지에 집을 마련했고 나는 요덕군에 직장 하나를 얻었다.”
②녹취록 92-93쪽
“일본제 옷으로 막 싹 뿌리고, 돈 뿌리고 하니까 하루아침에 부자가 됐다. 군당 책임 비서가 놀러 오고, 보위부장도 찾아오고, 간부들이 다 한 번씩 방문하는 거예요. 올 때마다 뇌물 주니까 나의 위상이 돌변했다. 수용소 나올 때의 키가 160센치 중반이었는데 지금은 170센치 중반, 1년 사이에 10cm가 훅-큰 거예요.”
②녹취록 93-94쪽
“돈을 주니까 좋은 직업을 고를 수가 있었다. 돈을 주고 편의봉사 위원회 자재지도원이 됐고, 돈이 있으니까 전국에 안 가본데 없이 막 여행을 다녔다.”
②녹취록 78쪽
“임수경 보려고 평양에 몰래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②녹취록 94-95쪽
“막내 삼촌이 북한 리과대학, 여기의 카이스트의 생화학분야 권위자였다. 막내 삼촌이 만점 채운 천재였기 때문에 국가과학원에 들어갔다. 그 빽으로 김책공대에 10만 엔만 내면 내가 들어갈 수 있었다. 막내 삼촌이 그 교수들 다 삶아 놓았다. 적당한 점수만 받으면 입학하게 돼 있었다. 그 공부하다가 탈북했다.”
②녹취록 96-99쪽
“수용소에는 해외유학생도 있고, 중앙당 간부 자식들도 많이 와 있었다. 이들이 다 반정부 그룹을 조직했다. 김정일 개새끼라는 욕도 했다. 이 친구들이 다 내게 몰려왔다. 너무 친구들이 많이 몰려오니까 담당 보위부 지도원이 나한테 물었다. “그 애들 다 묶어가지고 뭐하려 하느냐?” 그런데 그 보위부 담당관도 또 사귀게 됐다. 나하고 친하려고 노력한 애가 내게 김정일 욕을 막 했다. 내가 넘어갔다. 그 배신자가 나를 꼰질렀다. 보위부에서 나를 부르더니 내가 얘기한 내용이 분, 초 단위로 기록돼 있더라. 나에게 보여주고는 책을 딱 덮더라. “앞으로 조심해라.” 자기 애들 결혼시키는데 돈이 필요하더라. 형 동생하며 지냈다. 나와 친하다는 걸 다른데 알리지 말라 했다.”
③녹취록 104쪽
“보위부와 친해지면서 내가 점점 쎄게 나갔다. 북한에서 내로라하는 당간부 아들들이 수용소에 다 한 번씩 왔다. 수용소에 와서 혁명화되는 게 아니라 반동화 됐다.
(법정 녹취서 22쪽)
문: 증인은 증인의 가족이 출소한 이유가 증인의 일본 친척들이 돈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 했지요?
답: 동문서답 (”박사님, 특별한 충격이 있는 사건들은 당연히 기억하지요.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해도 수용소 가는 그 날짜를 제가 왜 기억 못합니까.“)
문: 증인은 몸보신하느라 매월 개 한 마리씩 잡아먹어서 1년 사이 키가 160cm에서 170cm 이상으로 10cm 자랐다 했지요?
답: 묵묵부답.
문: 그런데 증 43, 2016년 헬스조선 기사에는 성장판 닫히는 시기가 남자아이가 17세경이라 하는데, 증인은 10세부터 20세까지 10년 동안 영양실조 환경에서 중노동을 했는데도 키가 160은 넘었고, 출소 후 20세가 되어서 개고기를 1년 먹고 1년 만에 10cm이상 컸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데요.
답: 한 사람의 표본이 평균이 아니고 박사님이 말하신 것은 그것은 평균치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요.
문: 증인은 요덕군 소재지에서 중앙당 간부들의 자식들, 해외 유학했던 친구들을 모아 반체제 그룹을 형성했는데 그 악명이 평양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고 했지요? 그런데도 안 잡혀갔다 그런 이야기이지요.
답: 소문이 났으면 다 잡혀갔겠지요.
문: 그런데 여기는 안 잡혀간 것으로 돼 있어요.
답: 잡히게 됐으니까 도망갔겠지요.
문: 반체제 그룹 중 한 친구가 보위부에 증인을 밀고 했는데, 보위부 요원이 증인을 부르더니 처벌은커녕 아이들 결혼자금이 아쉬워 증인을 봐주었고, 형님, 동생하고 지내다가 사태가 위험해지자 도망가라고 해서 도망쳤다 했지요?
답: 묵묵부답.
문: 가난한 보위부 간부에게 돈 자랑을 하면서 최고 수준으로 통제되는 국경 연선지역 여행증을 열댓 개 받았다 했지요?
답: 국경 연선 여행증이 아니고 국경 전까지 가는 여행증입니다. 정확히 하셔야지요.
문: 전이 어디인가요?
답: 운흥역이라고 한 정거장 앞입니다.
(주: 요덕수용소에서 방면되고 난 다음의 이야기는 투 트랙으로 미화됐다. [수용소의 노래] 제 25쪽에서 “강철환은 삼촌들을 소개했다. 강화정은 평양 철도성 기자이며, 강복남은 평양 의과대학 의사, 막내 삼촌은 평양 리과대학을 졸업하고 혁명소조로 검덕산에 나가 있었다. 고모 강신자는 일본에서 약학대학을 나와 약사로 일했고, 막내 고모 강경희는 평양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있었다. 우리 집안은 명실상부한 모범집안이었다.” 이렇게 밝혔다. 이 막내 삼촌과 아버지의 이름은 강철환이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강철환은 리과대학을 나와 검덕산 혁명소에 나가 근무하다가 요덕수용소로 잡혀 와 10년간 수용소 생활을 하고 1987년 2월 16일 강철환과 동시에 방면된 그 막내 삼촌을 학계의 대부인 것으로 묘사했다. 막내 삼촌은 천재 과학자로 과학원 과학자들과 김책공대 교수들을 다 휘어잡는 대부로 변신해있었다고 묘사했다. 김책공대 교수들을 다 포섭했기 때문에 10만 엔만 있으면 강철환을 입학시킬 수 있다 해서 약간의 점수라도 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다가 탈북했다고 한다.
반면 같은 시기를 강철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영웅적 행각을 묘사했다. 요덕수용소에서 방면되자마자 일본 친척들과 삼촌들이 몰려와 돈 세례를 퍼부었다고 했다. 집단 농장으로 가면 빼내기가 힘들다며, 돈을 주고 개인집을 구해 부자로 살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군 단위의 책임 비서를 위시하여 모든 보위부 요원들이 줄을 이어 방문해서 돈을 받아 갔다고 했다. 자기가 찍으면 그게 자기 직장이었다. 평양을 비롯하여 전국 전체를 다닐 수 있는 편의봉사 위원회에 취직했고, 실제로 평양에 가서 임수경도 보았고, 전국 안 다닌 데 없이 다 다녔다고 했다.
10세부터 20세까지 영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용소에서 매일 강제 노역을 하고서도 키가 160 중반이었는데 개를 1년에 12마리 잡아먹고 20~21세에 키가 10센티 더 자랐다고도 했다.
요덕군 소재지에서 그는 반체제 그룹의 대부가 됐다고도 했다. 요덕에는 내로라하는 당간부들의 자식들이 몰려 들어왔고, 해외 유학파들이 들어왔는데 강철환은 요덕에서 그들을 다 포섭해서 요덕군에서 반체제 반동 그룹의 총수가 되었다고 했다.
이 사실을 군 단위 보위부에서도 파악했고, 평양에까지 명성이 알려졌다고 했다. 그룹원에 의해 김정일을 욕한 내용 등 책 한 권짜리 내용이 분, 초 단위로 밀고 됐는데도 담당 보위부 요원이 자식의 결혼자금을 지원받고 무마해줬으며 호형호제하고 지냈다고 했다. 강철환은 더욱 빡세게 반동했다. 보위부 요원의 힘으로 감당이 안되자, 보위부 요원이 불러 동료들과 함께 도망가라며 여행증을 15매씩이나 내주었다고 한다. 요덕수용소에서 내로라하는 당 간부들이 자식들이 많이 갔다는 것도 믿기 어렵고, 그들이 방면되어 모두 요덕군에서 따로 집을 구해 자유롭게 그룹 활동을 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수용소에서 사망의 담장을 걸으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감시를 받는 당간부 자식들과 교제를 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강철환의 요덕 스토리는 모두가 가짜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이런 ‘탈북 구라’를 믿을 사람 어디 있겠는가? 유명 탈북자들의 말을 믿으면 안보가 무너진다.
탈북과정
③녹취록 105~108쪽
보위부 간부가 나를 불렀다. 지금 분위기가 안 좋다. 너 잡히면 나와의 관계를 말하지 말라고 했다. 눈치 빠른 나는 의리를 지키겠다 다짐해주었다. 여행증 좀 떼어 달라했다. “너 도망가려는 거 아니지?” 하면서 15매를 떼어주었다. 암호로 친구들한테 쫙 연락을 했다.
압록강 강가에 열댓 명 오기로 했는데 안혁이만 나왔다. 나머지는 다 잡혔다. 안혁은 남의 이름 남의 공민증 가지고 왔다. 안혁이 걸릴 때마다 담배 한목때기 주고, 뇌물 주었다. 길주역에서 양강도 혜산으로 타고 갔다. 여행증에는 비밀번호가 있는데 내가 딱 알아서 썼다. 눈이 많이 쌓여 기차가 느렸다. 혜산역 한 정거장 못 미친 우능역에서 뛰어내렸다. 혜산에는 안혁 친구가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뛰어내린 지점에서 15리 걸어가니까 혜산역이 있더라. 안혁의 친구가 좁쌀이라는 혜산 바닥에서 노는 유명한 깡패였다. 이 깡패들하고 술 마시고 돈 주니까 나를 경비대에 소개해주었다. 교대 시간을 알아가지고 술을 왕창 먹여 잠들었을 때 새벽 2시에 일어나 강을 건넜다.
(법정 녹취서 23쪽)
문: 가난한 보위부 간부에게 돈 자랑하면서 최고의 수준으로 통제되는 국경연선지역 여행증을 열댓 개 받았다 하였지요?
답: 국경연선 여행증이 아니고 국경 전까지 가는 여행증입니다. 정확히 하셔야지요.
문: 그것을 15개나 주었다는 것인가요?
답: 여러 개를 받았어요.
(법정 녹취서 25쪽)
문: 어느 날 보위부 간부가 증인을 불러 가지고... “너 도망하려는 거 아니겠지” 하면서 의심을 하면서도 여러 장 떼어주었다는 것인가요?
답: 예, 그럴 수 있지요.
문: 기차표, 비행기 표에도 일련번호가 기재되고... 국경연선지대로 가는 여행증에도 일련번호가 있는데 일선 보위부 간부가 마구 내주었다는 것인가요?
답: 내줄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문: 증인은 증인의 공민증을 가지고 왔고, 안혁은 남의 공민증을 가지고 오다가 여러 번 걸렸는데 걸릴 때마다 담배와 뇌물을 뿌렸다 했는데, 안혁에게 공민증을 내준 사람은 북한에서 어떻게 사나요?
답: 그래서요. 이야기하세요.
문: 열댓 명 중 증인과 안혁만 제외하고 모두가 다 잡혔다고 했는데, 그러면 보위부 당국은 증인과 안혁에 대해 즉각 추격을 시작했을 텐데 이후 증인이 도강 이전에 취했던 여유만만한 행적을 보면 보위부 추격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답: 그것이 근거가 무엇이지요.
문: 요덕에 있는 친구가 어떻게 혜산에서 활동하는 조폭 두목을 친구로 만들었는가요?
답: 혜산 사람이 남포 체육학원에 가서 같이 친구를 맺었습니다.
문:... 증인은 근무중인 경비병들에게 술을 왕창 먹여놓고, 곯아떨어진 새벽 2시에 깨가지고 강을 건넜다 했지요?
답: 이야기하세요.
문: 소설같은데 어떤가요?
답: 그게 왜 소설입니까. 북한의 국경지역 군인들이 다 뇌물 먹고 사는 애들인데 뇌물 타 먹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것을 무슨 소설이라고 이야기합니까. 본인이 소설 쓰고 계시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에요.
(주: 1991년이면 강철환 나이 23세다. 그런 풋내기가 당 간부들과 보위부 간부들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농락하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체포 직전에 있는 강철환에게 도망가라며 여행증을 15매씩이나 발부해 주었다면, 그 보위부원은 강철환의 도주로 즉각 처형됐을 것이다. 혜산역을 15리 걸어서 갔다면 그 역은 혜산시에 있다. 그런데 혜산시 전체가 국경연선지대에 속한다. 15리 걸어서 혜산역까지 갈 수 있다면 그 누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국경연선지대 여행증을 구하려 하겠는가?
요덕은 함경남도 남쪽에 있고, 길주역은 함경북도 북쪽에 있다. 혜산 근방으로 가려면 요덕에서 길주까지 최소 세 개의 군계선을 넘어야 하고, 길주에서는 ‘백두산 청년호’를 타야 혜산에 갈 수 있다. 그런데 강철환은 반동 친구들 15명에게 압록강에서 만나자고 암호 연락을 했다고 한다. 핸드폰도, 전화도 없는 1991년의 북한에서. 압록강의 길이는 수백 키로인데, 그 광활한 지역 어느 지점에서 15명이 만날 수 있는 것이며 철로가 드물고, 감시가 거미줄 같다는 북한에서 동쪽에 있는 함경남도 끝에서 북서쪽 끝에 있는 압록강까지 간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다. 15명에서 본인과 안혁을 뺀 13명이 붙잡혔으면 즉시 전국에 비상망이 작동되어 수배에 나섰을 텐데 강철환은 안혁과 함계 태연하고 여유롭게 술도 마시면서 깡패들과 어울리고, 강을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술을 먹여 잠재우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 함경남도 요덕에서 압록강 변에 모이라는 말은 경부선을 타고 강릉에 모이라는 말과도 같은 말이다.
중국에서의 화려한 생활 6개월
2. 녹취록 109쪽
...혜산 바로 앞에 창빠이라고 중국에 있다. 정겨운 풍경의 도시였다. 밤에 무도회장에 나갔더니 중국인들이 춤을 멋지게 추더라. 좋은 경험이었다. 혜산에서 연길까지 가는 트럭에 몰래 올라탔다. 몸이 얼어 동상 직전까지 갔다. 연길에서 내렸다. 아는 분들을 만나 두달정도 살다가 그분들의 도움으로 심양(선양)에서 좀 살다가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갔다.
2. 녹취록 110~111쪽
대표부가 도와줄 수 없다고 하면서 돈을 주었다.
3. 녹취록 112쪽
대련으로 갔다. 매우 친한 위인을 만났다. 중국인 누나였다. 평안에 누나 동생이 누나에게 놀러왔다. 김일성 칭찬을 하더라. 내가 욕을 해주면서 대련 시장을 구경시켜 주었다. 3일 지나니까 북한에 안가겠다 하더라.
3. 녹취록 113쪽
북한 선박이 오더니 북한 선원 20명이 내리기에 내가 마중나가 그들을 안내했다. 대련 시장에 데려갔더니 벨트를 탐냈지만 돈이 없더라. 불쌍해서 내가 사줬다. 걔네들 데리고 다니면서 밥도 사주고 이것저것 사주면서 달고있는 김일성 배지 다 떼라고 했더니 떼더라.
3. 녹취서 114쪽
중국에서 6개월 있는 동안 인권 활동을 했다. 공안이 잡아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놓아주더라. 그래서 한국인 행세를 했다. 내가 한국 노래를 잘 부르니까 다 한국사람이라 믿더라. 공안이 잡더니 여권 보여달라 하더라. 여권 집에 두고 왔다하니까 누나에게 전화하더라구요. 그러면 누나가 커버해주었다. 중국 공안 앞에서 한국 노래를 부르면 놓아주더라. 신변의 반은 보장돼 있었다. 이렇게 6개월 있으니까 갑자기 한국에 가서 북한 인권을 폭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국으로 갈 방법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흑룡강 성에서 깡패 무리들이 우르르 집으로 몰려왔다. 한국과 뱀 장사를 하더라. 깡패 두목과 의형제 맺었다. 한국에 가거든 흑룡강 성으로 와서 같이 깡패짓 하자고 하더라.
3. 녹취록 115~117쪽
아침 다렌항에 한국인들이 왔다. 누나와 친한 사람들이 몇명 있더라. 누나가 선장에게 거짓말을 했다. "한국 기관에서 북한에 파견했다가 임무를 수행하고 나온 사람들이다. 선장이 이 둘을 한국에 데려다주면 한국 정부가 선장에게 법을 보장해 줄 것이다." 선장이 나를 보더니 남한말을 쓰고 한국 노래 잘 부르니까 도와주겠다 했다. 다음날 선원 중 2개를 가지고 나왔다. 선원 중 선원 나이가 40살인거야. 그런데 중국 공안은 한국 사람은 자세히 보지도 않고 그냥 통과시켰다. 프리패스. 갑자기 나를 잡더니 금새 그냥 통과시켜 주더라.
선장과 배에서 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공해상에서 한국 해군에게 인계하더라. 해군 배 안에 TV가 나오더라. 북한 청년 2명이 바다로 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인천항에 내려 승용차타고 서울로 왔다.
(법정녹취서 27~30쪽)
문 : 중국 창바이에 도착해 무도회장까지 가서 경험을 쌓았다 했네요?
답 : 넘어가세요.
문 : 탈북한 사람에게 긴장감이 전혀없네요.
답 : 불필요한 이야기니 쭉쭉 넘어가세요.
문 : 지도를 보면 심양에서 베이징까지 직선거리만 해도 1,200km인데 공안이라는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답 : 35,000명의 탈북자가 다 중국을 통해 왔는데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문 : 베이징에서 다렌으로 가려면 직선거리로도 2,000km가 되는데 어떻게 갔는가요?
답 : 뭐타고 갔겠지요.
문 : ...중국 공안에 잡힐 때마다 한국 노래를 부르면 한국인인줄 알고 가라 했다했지요?
답 : 한국 사람 흉내내면 놓아주었지요.
문 : 여권 요구하면 누나가 해결해주었나요?
답 : 묵묵무답.
문 : 흑룡강 깡패 두목과 의형제를 맺고 잘 지냈는데 갑자기 한국에 가서 북한 인권 운동할 생각이 들었다 했지요?
답 : 묵묵무답.
문 : 배에 오를 떄 중국 공안이 증인에게 여권을 보자 잡는데 증인이 긴장하는 순간 그냥 승선하라 했네요.
답 : 보자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얼굴을 돌린 것이지요.
문 : 중국 공안이 검사를 하는데 여권 없이 선원증만 가지고 되나요?
답 : 그때는 그랬어요. 92년도에는 그랬어요.
문 : 선장이 태워준다고 타는 게 아니지요. 공안이 타라해야 타는 것 아닌가요?
답 : 공안이 우리를 배에 왜 태워줍니까.
문 : 한국 노래를 부르니까 선장이 북파공작원이라고 믿었다면서요.
답 : 믿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문 : 증인과 안혁이 북좌공작원 행세를 했다면서요?
답 : 그것을 그들이 그렇게 짐작하겠거니 한 것이지요. 우리가 북파공작원이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요.
(주 : 24살의 나이, 그것도 10~20살까지는 외부와 단절됐던 비문명계의 청년이 탈북하여 중국 땅을 밟는 순간 무도회에 구경을 갔고, 연길에 가서도 아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다렌에서는 중국 누나를 사귀어 6개월 동안 돈을 흥청거리며 쓰면서 시장 바닥을 누볐고, 중국 말도 모르면서 중국 흑룡강 깡패들과 어울리며 의형제를 맺고, 북파공작원이라 한국 선박 선장을 설득하여 배를 몰래 타고 오다가 공해상에서 한국 해군 함정에 올라 방송을 타면서 선물로 승용차타고 왔다고 한다. 공작 탈북 냄새가 진동한다. 이런 걸 믿으라고 한국 사회에 공개하는 그의 정신적 자세가 궁금하다. 남한 국민을 미개한 개돼지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우화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결론>
국정원과 북괴가 짜고 위장 탈북시켰다는 것 말고는 달리 평가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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