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의미(5)일본군 위안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3-12 19:57 조회19,20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5.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발단
한일병합의 역사에는 일본의 부끄러움이 있었던 게 아니라 조선의 부끄러움이 있었다. 약육강식이 상식이었고 대세였던 시대, 일본은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밖에 있는 나라를 침략하고 점령하고 있었는데 반해 조선은 문을 걸어 잠그고 제닭 잡아먹기에 정신이 없었던 한심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치를 아는 문명인이라면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우리도 부끄러운 역사를 외부적으로 까발리는 유치한 행동은 자제했어야 했다. 한일병합에는 전적으로 조선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객관적이다.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는가? 여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없는 것을 반국가 세력이 허위로 모략하여 반국가 활동에 이용했을 뿐이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90년 노태우 시절 이대교수 윤정옥이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하고 정신대 문제를 선정적으로 보도한 데서부터였다. 곧바로 1990년 11월 16일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회의)이 설립되었고, 이때부터 한일관계는 정대협이 좌지우지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부터 1990년까지 45년동안 위안부 문제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1951년 10월부터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14년동안 1,500여회의 회담이 있었지만 회담 안건에는 위안부의 ‘위’자도 들어있지 않았다. 1980년대 한국 땅을 주사파 즉 김일성주의자들이 장악하면서부터 ‘찜짜붙기’ 전략으로 등장한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기간은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됐을 때부터 45년 해방될 때까지의 8년 동안이었다. 여러 연구들에 의하면 이 8년 동안 일본군 위안소에 등록됐던 여성 수는 누적 인원 3,600명이었고, 그중 40%가 일본 여성이었다. 두 번째로 많은 여성은 중국 여성, 그리고 조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 등 아시아 10개국 여인들이었다고 한다. 중국은 우리나라처럼 식민지까지는 아니었는데도 일본군 위안소를 우리보다 훨씬 더 많게 채웠다. 그런데 일본 여성들도 말이 없고, 중국 여성들도 말이 없고, 아시아 10개국도 말이 없다. 한국에서도 해방 후 45년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김일성 신봉자들이 뒤늦게 나서서 한일관계를 훼방놓고, 한국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북한 정권에 충성하기 위해, 없는 문제를 창작하여 선전선동 모략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다.
삼성, 현대, LG 등 대한민국 유수의 기업들이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올려놓는 동안 이들 내적들은 대한민국을 창녀의 나라, 위안부의 나라로 이미지 메이킹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대한민국 땅을 소녀상으로 뒤덮고 미국과 유럽 땅에도 소녀상을 설치해 ‘대한민국은 창녀의 나라’ 라는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김일성주의자들은 조선 여성 20만 명이 일본군의 성노예였다고 선전해 왔다. 일본군을 성도착에 빠진 인간 늑대라고 비하했다. “제주도 아낙이 밭일을 하고 있는데 일본 순사가 위안부로 잡아갔다.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처녀를 일본 순사가 낚아채 갔다.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5학년 만에 헌병이 담임 선생을 대동하고 나타나 덩치 큰 12살 여학생을 잡아갔다.” 위안부 관련 괴담들은 1980년 광주의 유언비어만큼 많고 황당했다. 이 황당한 괴담들은 김대중이 여성가족부(여가부)를 신설함으로써 더욱 증폭됐다. 여가부와 정대협의 콤비플레이로 위안부 문제는 5.18과 동급의 수준으로 성역화됐다. 동기와 목적은 이념이었다. 한일 관계를 대립관계로 악화시켜 대한민국의 번영을 방해하고 김일성의 항일 신화를 더욱 빛나게 만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해방 직전에 일본군 위안부가 20만 명이나 되었는데 어째서 1948년 2월에 서울시에 등록돼있는 위안부 수가 겨우 568명 뿐이었는가?
정대협과 여가부가 이룩한 공적은 무엇인가? 국제사회에 한국 여성을 위안부와 동일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국 여성이 외국에 나가면 세계인들은 한국 여성을 보고 위안부를 상상할 것이며 한국에 관광을 오는 외국인들 역시 한국 여성들을 볼 때마다 위안부와 결부시켜 상상을 할 것이다. 소녀상은 한국 여성 가슴 가슴에 더러운 주홍글씨를 달아주는 악이 아닐 수 없다. 생각없는 한국 여성들, 어린 딸을 데리고 소녀상을 쓰다듬고 목소리를 둘러주고 꽃다발을 바친다. 어린 딸, ”엄마, 나도 이 다음에 위안부 될래“, 위안부가 포부로 등장했다.
2019년 한 인터넷 기사에는 참으로 모골이 송연한 내용이 떴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하는 여성 엘리스, 2019년 8월 어느 주말, 호주에 왔다가 운전 중, 밤 9시에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주말이라 수리를 하지못해 견인차를 이용해 한 호텔로 갔다. 가기 전에 호텔에 전화를 걸어 방까지 예약했다. 막상 체크인을 하려는데, ”당신 혹시 위안부 아니냐?“는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여의사는 경찰을 불러 항의했지만, 호주 경찰 역시 호텔 종업원 편을 들었다. 며칠 전, 그 호텔에 한국인 여성이 체크인해서 매춘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당신도 한국여성이니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한다. 결국 소녀상은 ‘한국 여성은 매춘녀’라는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이다. 한국 여성을 천하게 비하시키는 이 소녀상, 대한민국에서도 세계 모든 곳에서도 시급히 제거돼야 할 대한민국의 주홍글씨인 것이다.
대한민국을 추락시키는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주사파들은 언론을 동원하여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를 성역화시켰다. 5.18 성역화 방법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그냥 ‘위안부’라고 부르면 안 된다. ‘위안부 할머니’라고 정중하게 호칭해야 한다. ‘위안부 할머님’들은 모두 다 가정에서 곱게 자란 규수였는데 짐승만도 못한 일본 헌병, 일본 경찰이 강제로 잡아갔다고 말해야 애국자가 되고 지식인이 되었다. 위안소에서는 매일 야수와 같은 일본 군인들이 달려들어 녹초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적셔야 지식인이고 양심가가 되었다. 자발적으로 성매매 목적으로 브로커를 통해 위안소에 갔다고 하면 여러 해 징역을 살아야 했다.
매춘의 성격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욕구’가 정의돼 있다. 제1의 욕구는 식욕, 음식의 재료와 음식의 완제품이 자연스럽게 시장화돼 있다. 제 2의 욕구가 성욕(sex)이고 제 3의 욕구가 남으로부터 인정받는 욕구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세를 하려 하고 재능을 뽐내려 하고, 악행까지도 하여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한다. 세기의 악한 알 카포네도 스스로를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제2의 욕구인 성(sex)에 대해서는 왜 시장이 없어야 하는가? 조선 역사와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매춘 시장 즉 섹스 시장을 불법 대상으로 막아놓은 존재는 오로지 노무현 한사람이었다. 매춘의 시장을 여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폐쇄시켜 놓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인가?
정신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돼있는 사람들의 섹스는 아름답고 숭고한 로맨스의 무대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섹스는 욕구 배설의 수단이다. 세상에는 후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일편단심의 숭고한 섹스도 있지만 충동과 거래에 휩쓸리는 섹스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선 매춘 시장을 폐쇄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돌려차기 범죄가 기승을 부릴 것이고, 연쇄살인 행위가 줄을 이을 수밖에 없다. 하수구를 막아놓으면 하수가 지상을 오염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심리학이 공식인정한 인간 제 2의 욕구를 아무런 부작용 없이 강제로 틀어막을 수 있는 능력자는 없다. 그런데 노무현이 이를 막은 것이다. 돌려차기해서 가정의 여성을 실신시켜놓고 일회성 만족을 취한 다음 끔찍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얼마나 많겠는가? 당해놓고도 창피해서 고통과 트라우마를 홀로 삼키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연쇄살인자가 있는가 하면 일회성 살인자들도 많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범죄는 다 ‘노무현 효과’로 불려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노무현 효과가 있다. 2016년, 미국의 공식 통계에는 미국에 진출한 매춘녀들 중 제1위로 많은 여성이 한국 여성이었다. 23.5%! 태국 여성이 그 절반도 안 되는 11.7%, 페루 여성 60.0%, 멕시코 여성이 9.6%였다. 만일 한국에 매춘 시장이 살아 있었다면 한국 여성이 그렇게 많이 미국에 진출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허물고,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부끄럽게 추락시키는 악의 효과인 것이다. 이어서 2017년 3월, 매춘관광에 나섰던 국영기업체 간부 2명이 포함된 한국인 남자 9명, 필리핀에서 성매매를 하다가 붙잡혀 6~12년의 감옥살이를 했다. 그 집안들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고 그 9명의 인생은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이 무슨 국제망신이고 비극인 것인가? 전두환은 일본으로부터 40억 달러를 얻어다가 88국제 올림픽을 개최해서 세계를 감동시킨 반면, 민주팔이로만 먹고 살던 노무현은 대한민국을 섹스의 나라로 추락시킨 것이다.
매춘 시장, 막아야 하는 존재인가, 열어야 하는 존재인가? 가정에 화장실이 있고, 사회에는 하수구와 정화시설이 있어야만 하듯이, 인간 제2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배수구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섹스 시장을 부활시켜야 한다면 어떤 시스템으로 부활시켜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외면하지 말고 지금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매춘의 역사
조선의 양반들은 여성들이 가축과 노예였기에 성을 굶주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매춘의 역사는 조선 노예들이 양반으로부터 독립한 시점, 사유 재산이 보호되는 일본 통치 시대에 비로소 발아되었다. 일본은 조선왕 대신 총독을 통해 조선을 다스렸다. 합병을 시킨 후 일본이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은 교육이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부터 전국적으로 세웠고, 학교에서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이 청결과 도덕이었다. 이를 닦고, 몸을 자주 씻고, 옷을 자주 빨아입고, 거짓말시키지 말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들이었다. 일본이 시작한 이 도덕교육은 1997년까지 지속해오다가 김대중에 의해 폐기되었다. 도덕교육이 사라지고, 그대신 일본과 미국과 이승만과 박정희와 맥아더를 증오하는 살쾡이 교육을 시켜온 것이다. 도덕 교육이 있었을 때 아이들은 훈육이 시작되었지만, 증오심을 키우면서부터 아이들은 맹수처럼, 공격적으로 사육돼 왔다. 일본과 김대중, 누가 더 도덕적인가? 우리가 착안해야 할 점은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는 자들이 다 김대중 추종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은 매춘시장을 열었다. 그 매춘시장에도 도덕율이 있었다. 매춘 시장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됐다. 공장과 사창, 공장 시스템은 국가가 매춘 시장의 터를 정해주고, 그 지역에서만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고, 사창은 시장을 지정해주지 않고 자연발생 현상에 내맡기는 것이었다. 공창 시스템에서는 매춘 시장에서 인권 유린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가 최소한의 관리를 함과 동시에 성병을 예방하기 위한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사창 시스템 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역할이 배제된다. 공장 시스템에서도 매춘녀의 모집은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본 공창 시스템의 도덕율이었다.
일본군 위안소는 중일전쟁이 본격화됐던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동안만 존재했지만 종전 후 일본인 위안부가 조선에 유입됐다는 증거나 연구는 없다. 그렇다면 20만 조선 위안부는 다 어디로 갔는가? 일본군 위안소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다가 독립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통치시대가 미군통치시대로 전환됐다. 미군정은 1947년 11월 14일부로 일본식 공창 시스템을 폐지시켰다. 과연 적절한 조치였는가?
식민통치 마지막 10년(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기였다. 땅 없이 노예 생활만 했던 농촌 노예들이 자유의 신분이 되자 도시로 몰려와 노동계급을 형성했다. 일본의 선정적인 잡지를 접한 도시 청춘 남녀들로부터 싹튼 신여성과 신남성에 대한 동경심이 입소문을 타고 농촌으로까지 파고들었다. 구박받던 처녀들에 도시는 기회의 땅으로 떠올랐다. 이광수의 소설[무정]이 신문에 연재되면서 청춘남녀들에게 도시 로맨스의 환상을 심어주었다. 심훈의 [상록수]에는 농촌 문화의 따분한 자화상이 거울처럼 묘사돼 있었다. 도시를 선망하던 농촌 처녀들의 골드러시가 인신매매단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식모가 되고, 공순이가 되고, 식당과 기생집의 접대부가 되었다. 위안부 광고를 보고 뛰어든 여성들도 많았다. 화장품도 사고 싶었고, 예쁜 신여성 옷도 입고 싶었고, 장신구들도 갖고 싶었다. 미래가 꽉 막힌 가정폭력의 희생물이 되느니 위안부를 해서라도 자유를 누리고 신여성이 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충분히 생길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일본이 불어넣어준 자유의 바람이었다.
해방이 되자 미군이 조선을 통치했다. 고급 유흥업소, 카바레 등 위락시설이 들어섰다. 파마머리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 하이힐 신고 다리 꼬고 앉아 양담배 꼬나물고 양주잔 기울이는 미국식 신여성, 뭇 여성들의 새로운 로망으로 부상했다. 유명대학 여학생들과 가정주부들까지도 성에 개방적이 되었다. 눌려왔던 것만큼 용수철은 높이 튀어 올랐다. 성은 개방이 되었는데 미군정이 공창을 폐쇄시키고, 이승만 정부가 12년 동안이나 더 폐쇄시켰으니 그 폐해가 얼마나 극심했겠는가? 매춘 행위가 몰래몰래 주택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사회질서가 난잡해지고, 임질과 매독이 유행되었다. 체면상 병원에 가기를 꺼리는 바람에 성병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일본식 공창 시스템이 도입돼야만 하는 이 절실한 시기에 박정희 시대가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집권하자마자 도지사가 되고 시장이 되고 군수가 된 군 장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본식 공창 시스템을 부활시켰다. 주택가와 동떨어진 곳들에 ‘적선지대’ 즉 홍등가를 설정하여 매춘업자(포주)들을 하여금 영업을 하게 허가했다. 용산역, 서울역, 영등포역, 청량리역, 미아리, 신당동, 초동, 충무로 4가, 동두천, 의정부, 춘천, 원주, 속초, 강릉, 부산의 완월동 및 범전동, 대구의 오원동, 대전의 중앙동... 등 104개 지역이었다. 이 홍등가들에는 필리핀 여성을 비롯해 러시아, 볼리비아, 조디루, 몽골, 중국, 방글라데시, 키르키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여러 나라의 여성들도 들어왔다.
유사이래 세계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때마다 군병들이 사회와 격리된 채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군병들에게 의료진이 필수이듯이 위안소 역시 필수였다. 한국군 역시 6. 25전쟁때 위안소를 운영했다. 일본군 역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아시아 국가들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 미군은 한국에서 위안소를 어떻게 운영했는가? 자유방임이었다. 미군 기지촌에는 자연히 위안부들이 몰려들었다. 치안도 없고, 성병에 대한 진료도 없었다. 치안 공백의 지대가 바로 기지촌 창녀촌들이었다. 벼라별 해괴한 폭력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 10월, 노태우때 발생한 윤금이 사건이었다. 윤금이는 미군전용 클럽 종업원이자 양공주였다. 치정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살해 방법이 엽기적이었다. 질에는 유리 콜라병을 박고 항문에는 우산을 꿰어넣는 방법으로 고통스럽게 살해했다. 이것이 반미감정에 불을 질렀다. 매춘에 대한 자유방임주의는 한국 여성에도 미국 국익에도 결코 도움이 안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내막
일본군 위안소는 아시아 국가들에만 있었고 1937년부터 45년까지 8년 동안만 존속했다. 일본군 위안소의 뿌리는 상해 위안소였다. ‘모리사키 가즈에’의 저서[가라유래상]에 의하면 상해에는 1882년 당시 800명 정도의 일본 여성이 매춘부로 있었다. ‘가라유키상’이라는 말은 매춘을 위해 해외를 떠도는 일본 여성을 뜻한다. 상해 주재 일본 영사관은 이를 수치로 여겨 600명 정도를 본국으로 강제 송환했지만 200여 명은 송환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이 200여명의 일본 여성이 1932년부터 설치한 일본군 위안부의 모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와 상해 소재의 일본군 위안소 운영을 공식화한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의 설치 목적은 네 가지였다.
지역주민에 대한 강간을 방지하고
군의 사기를 앙양하고
성병을 예방하고
군사 기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1932년 3월 14일자 상해 파견군 고급 참모 ‘오카베나 오자브로’의 일지에 기재된 글이 있다. ”요즘 병사들이 여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의 회고록도 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게도 위안부 방안의 창설자다. 쇼와 7년 (1932) 상하이 사변 때 두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했다. 파견군 참모장이었던 나는 나가사키현 지사에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러들였다. 그후 강간죄가 완전히 그쳤기 때문에 나는 기뻤다.
“상해에서 일본군이 개설했던 위안소는 ① 군 직영 위안소 ② 군이 감독 통제하는 군용 위안소 ③민간 매춘소를 병사용으로 지정한 위안소였다. 1936년 당시 상해에 진출한 한국 여성은 일본군 위안소에 들어갈 처지가 아니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상해의 조선 여성은 댄서 37명, 일본 카페 및 음식점 종업원이 48명이었다 한다. 이들은 음성적으로 밀매음을 하고 화대는 주인과 반반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중일전쟁이 한참인 1940년부터 비로소 중국 여성이 일본군 위안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선 여성은 1941년 브로커가 20명 단위로 데려온 것이 첫 케이스였다. 일본군 위안소에는 6개의 준수사항이 있었고, 이용시간별 요금표도 있었고, 월경 있는 여인과 성병이 있는 여인을 제외시키는 엄격한 기율도 있었다.
<일본군 위안소 준수사항>
1) 이용 시 연대본부가 발행한 허가증을 영업자에게 제출해야 한다.
2) 위안소 내에 음식물을 들일 수 없다.
3) 위안부 및 영업자에 대한 난폭한 행동을 금한다.
4) 이용 시간을 엄수하고 타인에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5) 영업자와 기타 위안부 여급 둥에 대한 일체의 대차관계를 엄금한다.
6) 위안부들은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 한다.
<위안소 이용시간 및 요금표>
1) 병사는 10시부터 17시까지, 30분에 1원, 1시간에 2원
2) 하사관은 17시부터 22시까지, 30분에 1원 20전, 1시간에 2원 40전
3) 준사관 이상은 22시부터 1시간에 3원, 24시 이후는 10원
4) 사쿠(콘돔)은 영업자가 부담한다.
5) 황군 이외의 자는 접객을 금한다.
6) 영업자는 매월 초 5일까지 위안부별 영업상황을 보고한다.
위안부로 입신양명한 문옥주
일본군 위안부의 전형 문옥주(1924~1996)은 대구에서 태어나 버마 수도 랑군 소재 일본군 위안소에서 2년동안 위안부를 했다. 2년 동안의 위안부 생활 결과 1944년 81,000원의 현찰과 우체국 예금 통장을 들고 다이아반지를 끼고, 하이힐을 신고, 화장을 하고, 악어백 들고, 아름다운 초록색 레인코트를 입고, 아시아의 흑진주라는 사이공 거리를 누비면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 비싼 장신구와 비싼 화장품과 옷으로 장식하고도 현찰 31,000원과 우체국 예금액 50,108원의 저금된 통장을 갖는데 불과 2년만 걸린 것이다. 당시의 화대는 병사의 경우 30분에 1원이었는데 81,000원이면 천문학적인 화대다. 팁을 많이 받은 것이다. 일본군 병사나 장교들이 위안부에게 두둑한 팁을 주었다는 이 이야기는 위안부를 성노예로 마구 학대했다는 기존의 이야기와 정반대다. 그만큼 위안부 문제가 사실과 동떨어지게 왜곡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그 거금을 가지고 대구에 와서 부자로 날렸다. 그녀는 자서전까지 일본어와 한국어로 냈다. 제목은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일본어판은 그녀가 사망한 1996년에 냈고, 한국어판은 2005년에 냈다. 아마도 정대협이 냈을 것이다.
자서전에 의하면 그녀는 1924년 대구 대명동에서 태어나 12살 때 일본으로 팔려가 17세까지 요정에서 심부름을 했다. 당시 일본은 17세 이전의 여성을 절대로 성접대 현장에 내보내지 못하게 엄격하게 통제했다. 이는 자서전에 있는 내용이다. 그녀 역시 성접대 현장에 나가기 전에 ’권번‘에서 기생수업을 받았다. 1942년 매춘업자가 문옥주 등 대구 여성 20명을 모아 부산을 출발, 사이공과 싱가포르를 거쳐 버마(미얀마)수도로 데려갔다. 수도 랑군에 소재한 일본군 ’방패사단‘에서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고, 거기에서 마감했다. 그녀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상냥하고, 노래도 잘하고, 남을 배려하는 착한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기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군 병사를 한낱 섹스 대상으로만 삼은 것이 아니라 병사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주었다. ’언제 죽을지 몰라 슬퍼하는 일본군 병사들을 가엽게 여겨‘ 모성애를 발휘했다. 노래도 불러주고 대화도 해주었다. 많은 팁을 받았다. 일본군 병사 ’야마다 이치로‘와는 사랑에 빠져 헤어진지 51년이나 지난 1993년에도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친구는 일본군 병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귀국할 때 그 일본군 병사로부터 아이를 잉태해 대구에 와서 귀하게길렀다고 한다. 일본군 병사는 악마도 아니고 성에 미친 괴물이 전혀 아니었다. 대구에 와서 수많은 남자들과 동거를 했다는 문옥주도 사망하기 3년 전인 70세에 일본군 애인 ’야마다 이치로‘가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두 여인들에게 일본 병사들은 상남자였던 것이다. 이 문옥주 자서전이 이제까지 정대협이 악마화한 일본군 병사들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20세의 나이로 일약 부자가 되어 대구 고향에 금의환향한 문옥주, 화류계의 영업을 하면서 프리마돈나가 되었다. 그리고 돈을 보고 달려드는 여러 남자들과 차례로 동거도 하면서 재산을 다 탕진한 쓸쓸한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그녀의 위안부 생활을 알 리 없는 일가친척들과 주위 사람들은 그녀에게 따뜻했었다. 그런데 뒤늦게 정대협의 집요했을 설득에 의해 그녀는 그만 그녀의 부끄러운 과거를 정대협에 등록하고 말았다. 주위는 물론 일가친척까지도 창피하다며 기피하게 된 것이다. ’위안부‘는 그녀의 친척들에 주홍글씨가 되었다.
부모가 딸을 위안부로 내몬 사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에는 센프란시스코대학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소정희 교수의 논문이 실렸고, 여기에는 가정폭력을 이기지 못해 출가하여 위안부가 된 6명의 사례가 소개돼 있다. 당시 신문에는 아버지가 딸을 1,300원을 받고 브로커에 팔아넘긴 사실이 보도돼 있다. ’돈에 눈이 어두운 부모‘ 이조시대의 아버지는 딸을 노예로 생각했기 때문에 딸을 죽이는 일도 다반사, 인신매매단을 통해 중국이나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도 다반사였다. 프랑스 선교사 ’샤를 둘레‘는 ’조선의 굶주린 주민들은 중국의 밀수업자들에게 자신의 어린 딸들을 한 사람당 쌀 한 말에 팔았다‘고 했고, 선조때 오희문이 쓴 ’쇄미록‘에는 ’사람이 사람을 사냥해 인육을 먹었다‘고 했다. 이것이 조선인 여성의 몸값이었다.
1) 문필기: 문옥주보다 한 살 늦게 1925년 2남 9녀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밖에 될 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쌀 한 말을 몰래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지만 일주일도 채 안되서 아버지가 교실에서 끌어내 책을 불태웠고, 딸을 무자비하게 패서 내쫓아버렸다. 큰집에 피신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9살때부터 살림하고 밭일하고 목화밭 매고, 물레질도 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찌고, 밭에 밥을 지어 나르면서 신세를 한탄했다. 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날, 마을에 사는 50대의 남자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게 해준다 해서 따라나섰다. 18세였다. 부산으로 실려가 긴 머리를 자르고, 한복을 원피스로 갈아입고, 다른 4명과 함께 곧장 만주로 갔다. 1943년부터 2년동안 만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이런 여인이 매주 정대협이 주최하는 수요집회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하라, 배상하라“ 외쳐왔다. 이 여성이 정대협 위안부 명단에 이름을 올린 시기는 1992년 6월이었다.
2) 이상옥: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 딸이었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부농집이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의 집요한 방해로 학업을 포기했다.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책을 아궁이 불 속에 넣고 태워버렸다. 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고모가 다시 학교에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집요하게 방해해 서울로 도망쳤다. 소리개라는 곳에 갔더니 9명의 처녀들이 있었다. 모두 아버지가 팔아서 왔다고 했다. 이때 이상옥 나이 15세였다. 이들 9명과 함께 실려온 곳이 시모노세키였다.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일본말을 한다는 이유로 군 병원에서 일하면서 봉급을 받았다. 일본군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 보내주려 했는데, 그 군의관이 폭격을 맞아 사망했다. 이후 어디서 위안부 생활을 했는지는 파악이 안돼 있다.
3) 이득남: 1918년생, 아버지는 술주정꾼이자 노름꾼, 이유없이 딸을 팼다. 집이 곧 지옥이었다. 17세에 이웃친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지만 그것이 위안부의 길이었다. 1939년부터 1942년에는 중국에서, 이후 해방될 때까지 3년을 수마트라(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4) 김옥실: 1926년 평양시 인근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하려 하자 아버지가 심하게 때렸다. ”에미나이 새끼가 글 배워서 어디다 쓰갔네, 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아버지가 무지 싫었다. 평양기생이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타고 다닌다는 동네 아주머니들 말을 듣고 기생집에 가서 양녀가 되었다. 일주일 만에 아버지가 찾아왔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 동네 망신을 다 시키고 돌아다닌다“며 매를 많이 맞고 집으로 끌려갔다. 다시 가출하여 양말공장에서 3년, 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었다. 어디에서 얼마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는지는 자세치가 않다.
5) 배옥길: 1922년생, 어머니로부터 모진 매를 맞고 학대를 받아 자살까지 기도했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중국 위안소였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6) 송신도: 1922년 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부터 가출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에 가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7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군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일본에 도착한 병사는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와의 영원한 결말
매춘시장을 법으로 폐쇄한 것은 순리가 아니라 억지요 횡포다. 여성들에 대한 살인행위를 유도하는 국가의 범죄행위인 것이다. 매춘시장은 반드시 부활시켜야 하고, 공창 시스템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안부를 신격화하고 일본군을 악마화한 것은 사실을 정반대로 뒤집은 모략 행위다. 이 모략 작전은 김일성을 추종하는 반국가 세력의 추악한 공작이었다. 매우 부끄럽게도 대한민국은 위안부를 이념적 장사 수단으로 악용한 반국가 세력에 철저히 농락당했다. 소녀상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독이고, 대한민국 모든 여성들에 붙여진 주홍글씨다. 즉시 땅에 묻어야할 추물들인 것이다.
위안부의 꽃 문옥주,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으로 자서전까지 낸 위안부의 전형 문옥주, 천덕꾸러기로 태어나 12세에서 17세까지 일본에 가서 세련된 처녀로 성장했고, 대구 여성 20명과 함께 사이공-싱가포르를 거쳐 버마 수도 랑군에 가서 불과 2년 동안만 매춘을 해서 고급화장품에 파마를 하고 다이아반지를 끼고 하이힐 신고, 고급 유행 레인코트 차려입고, 악어백 들고, 81,000원을 움켜쥐고, 일본군 병사 ’아마다이치로‘와 사랑을 나누고, 20세의 나이로 대구에 금의환향하여 화류계의 프리마돈나가 되었다. 이것이 어째서 성노예이고 돈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짐승 같은 일본군의 학대를 받았다는 것인가? 문옥주의 동향 친구는 일본군 병사를 너무 사랑해서 헤어질 때 애인의 아이를 임태해 대구에서 귀하게 길렀다 하지 않은가? 이 두 여인들에게 일본군 병사들은 상남자가 아니었던가?
지난 34년 동안 대한민국 역사를 장악했던 소수의 여성들, 일본에 조금이라도 스치기만 해도 오물이 금덩이가 되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대한민국을 파괴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했다. 정대협의 검은 전설 윤미향, 2017년 9월 14일 위안부 김복동, 김원옥을 간판으로 데리고 베트남 대사관 앞에 나섰다. 대형 현수막을 들고나와 한국군이 베트남에 가서 일본군처럼 베트남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으니 용서해달라는 시위를 한 것이다. 주월 한국군은 모두 36만 5천 명, 5천 명이 사망했고, 16만 이상이 고엽제로 신음해 오고 있다. 1952년,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구하는 것과 같다“ 고 혹평했던 바로 그 런던타임즈 기자가 그로부터 14년만인 1966년 5월 29일자 특집에서 ”한국군이 월남전을 맡았거나, 미군이 한국군 전술을 택했더라면 벌써 승리로 끝냈을 것“이라고 극찬을 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단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유명한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명령이었다. 게릴라는 물고기, 주민은 물, 주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군대는 소멸한다는 것이 게릴라전의 핵심 교리였다. 그런데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여자 사냥이나 일삼았다면 한국군이 세계적인 존재로 우뚝 서있을 수 있었겠는가? 필자는 이런 발칙한 윤미향을 필자가 뚫고 다녔던 정글 가시나무 밭을 한 시간만이라도 끌고 다니고 싶다. 이런 발칙한 윤미향이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쥐고 1990년부터 무려 33년 동안이나 쥐락펴락했다는 이 사실, 대한민국의 치욕사일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 국보법 폐지, 통진당 해산 반대, 평화를 위한 북측전쟁 환영, 정대협 핵심 관련자들은 반국가 성향의 식구들을 두었다. 간첩이거나 간첩과 연루한 사람들, 맥아더 동상 철거자들, 북한을 40여 차례나 드나들던 사람들, 김정일 조문을 주장하는 사람들, 조충현과 같이 있는 사람들로 채색돼 있다.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만든 단체가 국가를 제쳐놓고 한일 관계에 도끼질을 한 것이다.
김일성을 맹종하고 김일성 자금으로 고시공부를 한 판사와 검사들, 김일성을 추종하거나 간첩의 마수에 걸려 약점이 잡힌 무수한 사회 저명인들, 언론인들, 정부 요직자들, 이들이 모두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대한민국을 파괴했고, 그 파괴 수단 중 가장 큰 하나가 일본군 위안부라는 모략물이었던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열사였는가 매춘부였는가? 이 땅의 과학자들은 냉정하게 분석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 개화파의 선구자 윤치호, 1865년에 태어난 윤치호 선생이 20대에 진단한 조선인들이다. ’조선인들의 특징은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는 하지 않고 다함께 달려들어 몰매를 때리는 것이다. 조선인과 대화하느니 차라리 벽을 보고 대화하는게 낫다‘ ’한국인은 머리가 비어있는데도 잘난 척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다‘ 100년 후인 1980년 한미연합사령관 위컴 대장은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한 사람이 말을 하면 모두 다 같은 말을 하면서 뒤따른다.“ 정대협을 따라 양심가인 척, 지식인인 척, 눈물까지 흘리면서 정대협 장단에 춤추던 사회인사들과 언론인들, 그 얼굴을 다시 좀 자세히 보았으면 좋겠다. 얼굴이 과학이고 얼굴이 스펙이기 때문이다. 자세히만 볼 수 있다면 들쥐의 실루엣이 서려있을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