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죽은 유공자, 산 유공자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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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6-03 22:28 조회4,173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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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죽은 유공자, 산 유공자의 정체.
1. 죽은 5.18유공자들의 정체
<연령 분포>
5.18기념재단에는 “사망자현황”이 있다. 총 166명이 기록돼 있고, 그 중 8명은 신원 불상으로 처리돼 있다. 그리고 이 5.18유공자 중에는 5월 20일, 버스에 깔려 사망한 함평경찰서 직원 4명(1942~43년)이 있다. 따라서 순수한 광주시민 사망자는 154명이다. 1960년생 이하는 60명, 1959년생 이상은 94명이다. 20세 이하가 40%, 21세 이상이 60%인 것이다. 여기에서 59년생은 9명, 58년생이 3명이다. 22세 이하의 젊은 사람들이 72명, 그 이상이 92명인 것이다. 비율로 보면 47% 대 53%다. 대략 주먹구구로 보아 절반은 22세 이하이고, 또 다른 절반은 그 이상의 연령대라는 것이다.
<직업 분포>
직업을 보면 어린이, 학생, 공원, 페인트공, 프레스공, 오토바이정비공, 가사 돕는 여성, 목공, 운전, 주점, 재수생, 방직공원, 가정주부, 농업, 판금공, 주방장, 미장공, 상업, 다방주방장, 주점, 식당보이, 이용사, 연탄배달원, 농아, 목공, 타일공, 행상, 공원, 구멍가게, 야채상, 노동, 보일러공, 기공사공원, 한약방점원, 표구점점원,당구장 점원, 방위병, 문방구점원, 사원, 선반공, 판화기능공, 샷슈공, 여관종업원, 재개공, 페인트공, 양계장종업원 등등이다. 여기에서 생략된 직업은 없다. 이들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산화한 특급 유공자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직업과 연령을 보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정치일선에 나섰을 것이라 생각하기 참으로 어렵다. 이들의 대부분은 공수부대가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북한군이 희생시킨 것이다. 총기 사망자 116명중 무기고 총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88명(계엄사)이고 계엄군이 없는 곳에서 사망한 사람이 80%를 넘는다. 사망자 중에는 76년생도 있고, 67년 68년생들도 여럿 있다. 이상이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여 사망했다는 최고반열의 5.18유공자들의 정체인 것이다.
2. 산 유공자들의 정체
아래 자료는 2003년, 전남대학출판부가 발행한 책자, “5.18항쟁증언자료집-시민군들의 구술-” 에 5.18유공자들 중 최고반열에 속하는 유공자들이 증언한 내용이다. 먼저 이들의 진술을 요약발췌한 후 그 원문자료를 스캔하여 붙인다. 이 다섯 사람의 최고반열의 유공자들 증언을 보면, 공주의 산 유공자들은 민주화를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고, 5월 25~26 사이에 도청에 모인 광주인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고, 5월 25일 이전에는 모두 다 숨어다니고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이것이 살아있는 5.18 최고반열 유공자들의 정체인 것이다. 아래 그들 스스로 말한 내용을 관찰하라. 이런 자들이 무슨 공적을 세웠는가?
1) 김창길의 증언(5.25일에 형성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초기 위원장)
“수습위원회는 학생들이 다 도망갔고 일반인들로 채워졌다. 시민군조직들은 모두 자생적인 조직이었고, 도청에서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23일부터 무기를 회수하러 다녔다, 윤상원 정상용 등 인물들은 5월 24일 오후에 도청에 들어왔다”
2) 김종배 증언(사형선고, 평민당 국회의원)
“예비군을 모아가지고 본격적으로 투쟁해보자 작정한 날이 5월 25일이었다. 이날 기동타격대를 조직한 사람은 자개공 이재호였고, 기동타격대장을 한 사람은 윤석루(19, 구두공, 무기징역)였는데 그는 어리고 뭐 잘 모르는 아이였다. 도청발포 이후 21일 오후에 총이 나왔다.
3) 정상용의 증언(무기징역 선고, 수습위원회 외무위원장)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일명 항쟁지도부였다. 이는 5월 25일 오후에 급조된 조직이었다. 5월 19일부터 윤상원 등과 녹두서점에서 대책을 상의하다가 21일 총소리가 나자 각자 도생하자며 보성기업으로 도망쳤다가 22일 YWCA에서 다시 만났다. 운동권들은 5월 18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다 잡혀갔기 때문에 운동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는 사람들만 모였다. 국장급처럼 보이던 사람들(북한군) 은 24일 도청을 빠져나갔다.
4) 허규정의 증언(무기징역 선고, 내무위원장)
“주도자도 리더도 없었다. 도청을 군인들로부터 빼앗은 사람들은 우리더러 도청에 들어오지 말고 나가라 했다. 높은 관료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맨날 회의를 했지만 방법은 안 나왔다. 어른모임 따로, 학생모임 따로 일반모임 따로 제각각이었다. 통제도 안 되었고, 콩가루 식이었다. 나는 밖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 다시 왔다.
5) 박남선의 증언(사형선고, 상황실장)
“운동권들은 다 도망갔다가 5월 23~25에 돌아왔고, 지식인들은 수습대책이나 만들어 가지고 얼굴 세우는 일만 했다. 앞장 선 사람들은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들 뿐이었다.
이상으로 죽은 유공자, 산 유공자가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2019.6.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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