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서면 (광주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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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5-24 18:17 조회4,2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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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면 (광주고등법원)
사 건 2018나25730 손해배상(기)
원고 (재)5・18 기념재단 외 8
피고 지만원
피고 지만원은 북한문헌과 자료에서 5.18은 북한이 일으켰고,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수많은 현장을 북한의 전사기록요원들이 직접 외서 기록하고 묘사했다고밖에 달리 판단할 수 없는 한 사실자료 등을 다음과 같이 제출합니다.
1. 김일성이 황석영 윤이상 데려다 만든 5.18영화: 1991. 북한은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 개봉하였습니다. 황성역이 시나리오를 썼고, 유인상이 음악을 깔았습니다. 이 영화가 비디오 형태로 통일부자료센테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은 을54의 1~2쪽에 증거 돼 있습니다.
2. 을55는 통일부 소관의 북한자료 목록의 일부입니다. 매년 5.18을 맞이하면 평양과 각 지역에서 5.18을 기념하고 반미반파쇼 선동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 발단 20주년 보고대회 (1쪽)
2) 5.18광주민주화운동 반미 반정부 투쟁 선동(1쪽)
3) “남포시 등 지방도시에서 5.18기념 군중대회 개최 (1쪽)
4) “광주의 넋은 거족적인 반미 반보수투쟁을 부른다”(1쪽)
5) 5.18항쟁요사들의 넋은 살아있다“(2쪽)
6) “5.18정신의 국제화, 아시아인권선언 광주선언(2쪽)
7) “5.18광주민주화운동 17주년 기념 평양시 군중대회 개최(2쪽_
8) 분노의 지점에서, 광주인민봉시 10돐 기념문학 작품집(3쪽)
3. 을56의 ‘주간북한동향 제93호(1992.5.17.~5.23) 굵은 글씨의 페이지 272쪽에는 “북한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동시건을 ’광주인민봉기‘라고 규정하여 매년 평양시 군중대화를 개최하는 한편 우리 국내 자야운동권에 대한 반미 반정부 투쟁의 계기로 활용해오고 있는바 올해도 부총리강희원, 조평통 부위우너장 윤기복 평양시 당책 강현수 등 고위 당.정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군중대회를 개최하고 이를 각 시-도 군중대회로 확장시켰음”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매년 북한은 5.18을 평양에서 뿐만 아니라 전지역의 시도 단위에서 개최하고 이를 남조선 학생들로 하여금 반미 반정부 활동을 선동하는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 남한의 5.18행사는 북한의 전지역에서 개최하는거국적 전민적 행사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초라합니다. 을56을 일견만 해도 5.18은 북한의 역사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남한의 만지화운동이라면 북한이 무엇 하러 그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전지역의 시-군 단위로 해마다 그 엄청난 행사를 주최하는 것이겠습니까?
2010.5.17. 평양노동자회관 5.1830돐 기념행사(연합뉴스)
사진 생락
4. 을57은 1982.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중에서 546쪽 이후의 광주역사만을 따로 발췌한 것입니다. 이 책은 1946. 화순탄광 노동자폭동과 하의도 농민폭동으로부터 1980년 5.18사건까지의 역사를 마치 현장에서 눈으로 보는 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북한이 발행한 책 을57은 남한 당국의 자료들보다 더 상세한 상황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짙은 가스 연기속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버스1대(광전교통소속 전남5에이3706호)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어섰을 때 계엄군 100명이 들이닥치자 차안에 있던 10명의 청년들이 결사적으로. . ”(을57, 576하5-8줄). 남한 자료 어디에도 차번호까지는 없습니다.
“광주봉기자들은 버스에 나뉘어 타고 목포와 라주 등 전라남도 기타의 도시들로 출발하여 봉기를 확대시키는 한편 그곳 경찰서와 향토예비군의 무기고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라주에 진출한 봉기자들은 라주경찰서 관내 5개지서를 점거하고 경기관총을 비롯한 무기와 다량의 실탄을 빼앗았다. 화순, 승주, 호남탄광과 리양경찰지서에서도 . .화순광업소에 몰려간 봉기자들은 향토예비군에 사격을 가하여 물리친 다음 광주사이를 오가면서 무기와 폭약을 실어날랐다. 인민봉기는 라주, 화순, 함평, 완도, 승주, 담양, 령광, 해남, 목포, 장성, 송정, 려수, 순천, 광양, 보성 등 도 안의 많은 시,군으로 확대되어 . .”(을57, 580쪽 하반부). 모두가 수사기록들과 일치하는 내용들입니다.
“봉기군은 시 중심부에 있는 전남대학교부속병원 옥상에 경기관총을 걸어놓고 . .”(을571, 581쪽 하9-10줄). 수사기록의 상황자료들에는 전남대부속병원이 시 중심부에 있는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오후3시부터 봉기자들은 공격서열을 편성하였다. 봉기군중은 승용차 4대에 불을 달아 저지선을 향해 밀어보냈으며, 뒤이어 기름이 가득 찬 드럼통을 실은 화물차에 시동을 걸어 저지선쪽으로 나가게 한다음 솜뭉치에 불을 달아 차에 던졌다”(을57, 582쪽 7-11줄). ‘공격서열을 편성했다’는 말은 군사용어이며 리는 수많은 단위의 시위대들에 공격 목표를 배당해주었다는 뜻입니다. 광주시위는 누군가에 의해 통제된 조직적인 작전이었다는 뜻입니다.
“전라남도 26개 시,군 중에서 17개 시,군이 봉기에 합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19일에는 서울에서 1,000여명 학생들이 반정부 집회와 시위에 떨쳐나섰고, 21일에는 전주, 리리에서 투쟁이 벌어져 전라북도에도 항거의 불길이 타번졌다”(을57, 584쪽 8-12줄). 이 말도 수사기록과 일치합니다.
“오후 4시 50분경, 시위대열이 도청으로 통하는 5개 방향으로물밑듯 밀어닥쳤다. 이들은 제각기 화염병과 대형 드럼통을 굴리며 다가왔고, 이루 시위대열은 쇠파이프와 식킬을 들고 같이 죽자고 웨치기도 하였가”(을57의 576쪽 상단)
“밤 10시 30분경, 동구 동명동 앞길에서는 공정대 병력과 봉기자가 충돌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광주역에서는 11시경 공정대 병력이 약 20분간에 걸쳐 봉기자들에게 야수적인 맹사격을 가하여 수다한 희생자를 내었다”(을57, 577 하단)
(2) 1980년 5월의 남한시위들에는 군사전략, 국사전술을 응용한 시위전략과 시위전술이 있었습니다.
시위전략: 을571의 567쪽에는 남한의 시위전략이 기술돼 있습니다. “그들은 교외시위를 위주로 하면서 성토대회, 성명발표, 교내시위와 롱성투쟁 등을 결합하여 투쟁을 준단 없이 벌려나갔으며 시내 중심부를 시위구역으로 설정하고 역량의 집중과 통일행동을 보장함으로써 시위의 정치적 효과를 높였다”(을57, 567쪽 10-13줄).
실제로 당시 학생들은 이런 식으로 시위를 했습니다만 이것이 전략에 따른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전략의 요점은 1) 주력시위(주공)는 시내중심부에서 벌이고, 성토대회, 성명발표, 교내시위, 농성투쟁 등을 조공으로 하여 중단 없는 공격을 실시하고 2) 모든 시위대들은 집중과 통일된 행동을 통해 정치적 효과를 높여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하라는 북한전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시위전술: 같은 증31의 567쪽에는 또 시위전술이 기록돼 있습니다. “시위에서는 과감한 육박에 의한 경찰저지선의 정면돌파와 경찰의 포위를 역포위로 전환시켜 앞으로 열어나가는 돌파, 분산과 집합, 큰 대열과 작은 대열의 배합, 속도행진에 의한 빠른 기동과 바리케트에 의한 완강한 방어 등으로 주도권을 틀어쥐고 적을 피동에 몰아넣었다. 또한 작은 돌과 큰돌 심지어는 화염병까지 준비하여 적에 대한 타격력을 높였으며 의학대학 학생들로 치료대를 조직하여 부상자에 대한 응급조치를 받게 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시위와 대중선전을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광장과 큰거리에서의 집회에 큰 의의를 부여하는 한편 시민들에게는 <함께 싸우자!>고 호소하는 삐라를 뿌렸고, 공장지대에서는 로동자들에게 확성기로 <함께 나가자!>고 호소하였고, 경찰들에게도 함화를 들이대었다. 이것은 학생들의 투쟁전술에서도 종전의 투쟁에 비하여 큰 진전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을57, 567쪽 13-26줄)
여기에서 ‘돌파’,‘제역량의 배합’, ‘역포위’‘속도전’, ‘주위선동’이라는 군사용어가 나오며 이는 북한 특유의 전술입니다. 북한의 전략 전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이며, 이 전술은 남한 시위에서도 응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북한식의‘돌파’작전은 첨입작전으로 대표됩니다. 적의 약한 곳에 최강-대량의 군사력을 투입하여 나무에 쐐기를 박는 작전을 의미합니다. ‘역포위’경찰저지선을 뚫은(돌파한) 시위대가 저지선상에 늘어선 다른 경찰들을 뒤로부터 둘러싸는 전술이며 이는 휴전선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우리 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돌파병력에 의해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우리 군을 뒤로부터 포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한의 시위에 이런 고수준의 전술이 응용되었다는 것은 북한 전문가들이 시위에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국에서는 물론 서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던 1980년 5월의 시위들이 그냥 산발적으로 발생한 시위가 아니라 시위전략과 시위전술을 통달한 검은‘시위작전사령부’의 일사불란한 지휘(계획, 명령, 상황파악) 하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는 대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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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한은 광주사태로부터 차후 대남폭동의 성공을 위한 3가지 교훈을 이끌어 냈습니다.
더욱 가공할 것은 을57의 609-610쪽에 기술된 ‘광주 반파쇼민주화투쟁에 대한 교훈’입니다. 앞으로 남한에서 일으킬 반파쇼민주화투쟁은 3가지 교훈을 참작하여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교훈1: “광주인민봉기는 새로운 단계의 반파쇼민주화투쟁을 위해서 귀중한 교훈들을 남기었는데 그 교훈은 첫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승리는 반미투쟁과 결합될 때에만 확고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을57, 609쪽 16-19줄)
교훈2: “광주인민봉기가 남긴 교훈은 둘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청년학생운동과 로동운동과의 결합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심화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을57, 609쪽 하3-5줄).
교훈3: “광주인민봉기가 남긴 교훈은 셋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보다 광범한 대중적 지반 위에서 반파쑈민주역량을 형성하고 그것을 조직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을57, 610쪽 7-9줄)
광주인민봉기는 해방 후 남한에서 발생한 좌익소요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합니다.
모든 역량들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시위가 실패한다는 뜻을 뒤집어 보면 1980년 5월에 자행된 모든 시위들이 조직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뒷받침된다 할 것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매 시기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새로운 구국통일방안을 내놓으실 때마다 그것을 전적으로 지지하여 나섰으며, 원쑤들의 파쑈폭압과 분령책동이 극도에 이른 어려운 속에서도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려왔다”(을57, 611쪽 하 10-15줄). 남한에서 조성된 정세를 이용하여 김일성이 구국통일방안을 내놓았다는 말입니다. 이 김일성의 교시를 남조선 인민세력이 적극 지지하면서 국가전복 투쟁을 끝없이 벌여왔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에 더해 이 책(을57)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남조선에서의 투쟁들은 다 주체의 지휘아래 남조선 통일세력의 적극적인 지지와 투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그 중에서 광주폭동이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의 내용으로 뒷받침됩니다.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력사에 불멸의 위훈의 탑을 쌓아올린 영웅적 광주 인민봉기는 커다란 력사적 의의를 가지는 사변으로 된다. 영웅적 광주인민봉기는 그 성격에 있어서 민주와 통일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한결같은 지향을 반영한 대중적인 애국적 항쟁이며 가장 높은 형태의 반파쑈민주화투쟁으로 된다.”(을57, 596쪽 8-12줄)
5.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년에 발간한 단행본 <광주의 분노> (을58)
<광주의 분노>가 내린 5.18에 대한 정의: ‘광주봉기는 민족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이었고, <광주민주국>을 세우는 데까지 성공했으며, 광주의 영웅들이 세운 위훈을 교훈으로 기려야 한다.’ ‘영웅적 광주인민들의 봉기는 바로 자주성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한 고리였다.’(을58, 3쪽 하3-4)
“민주정권의 싹 <광주민주국>을 일떠세울 수 있게 하였다.”(을58, 4쪽 11-12줄)
“비록 그들의 육신은 죽었어도 그들이 이룩한 영웅적인 위훈만은 민족사에 불멸의 문자로 기록되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을58, 4쪽 17-19줄)
5.18은 반미자주통일을 위한 봉기였으며, 해방구(‘광주민주국’)까지 설치했을 만큼 성공적인 봉기였다는 뜻일 것입니다.
<광주의 분노>에 실려 있는 계엄군에 대한 모략들:“세 녀학생을 알몸으로 만들어 놓은 놈들은 한참 히히닥거리더니 군화발로 녀학생들을 걷어차며 <빨리 꺼져 이념들아, 지금이 어느 때라고 지랄이야> . . 녀학생들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알몸이 된 것이 부그러워 앞가슴을 그려안고 길바닥에 주저앉었다. 그러나 우악스럽게 생긴 한놈이 <이 쌍년들이 살기가 싫은가봐>하고 지껄이며 녀학생들의 잔등에 차례차례로 총검을 내려 박았다. . .총검으로 엑스자를 북북 그어놓은 다음 쓰레기차에 싣고 사라졌다. . . 금남로2가에서는 체포한 청년의 손을 묶어 자동차 공무니에 달아매고 . . 시체들은 분간 못하게 각을 떼내거나 얼굴에 뼁키칠을 해놓았다.”(을58, 20쪽)
을58의 21쪽에서 31쪽까지에는 “격노한 80만”(주: 당시 광주시민이 80만)광주사태의 날짜별로 상황이 요약돼 있었으며 대체로 정확히 묘사돼 있습니다. 이 책은 1982년도에 발간된 을57(단행본)의 상황묘사와 흡사하며 1985년에 내놓은 황석영의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내용과도 흡사합니다.
을58의 32-51에는 “<광주민주국>의 출현”부분에서는 우리 경찰, 군, 국정원, 검찰의 보고서보다 더 상세하여 과연 북한이 그 시기(1982,1985)에 이렇게 자세한 정보들을 어떻게 알았는가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안기부가 1985년에 작성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보고서 96-97쪽에는 사망한 33명의 학생들의 인적사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주의 분노'가 눈물 나는 사례로 거명한 학생 이름 9명을 안기부자료와 대조해 보니 이름도, 나이도, 학교명도 모두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박상권(을58, 70쪽 3줄)은 동자료 71쪽 3줄에 광주숭의중학교 2학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안기부 자료 증8의 96쪽 14번에 박상권 나이 14 숭의중 2년 산수동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김완봉은 을58, 74쪽 중간에 광주무등중학교 3학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안기부 자료 증8의 96쪽 5번에 김완봉은 무등중 3학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을58의 76쪽 상반부에는 7명의 학생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최연(광주학운초등학교 1학년 7살)은 증8 97쪽의 32번 학생과 일치하고, 을38의 76쪽 상반부에 있는 전재수(호덕초등학교 4학년)는 안기부자료와 30번과 일치하고, 박광법(전남중악교 1학년)은 안기부자료 96쪽 16번과 일치하고, 증58 76쪽에 있는 김명숙(서광여중 3학년)은 안기부자료 96쪽 3번과 일치하고, 을58 76쪽의 박성용은 안기부자료 96쪽 13번과 일치하고, 을58의 76쪽 안동필은 안기부자료 96쪽 19번 안종필과 일치합니다. 북한자료 을58은 이들 학생들이 죽는 과정을 허위로 극화하여 계엄군을 모략하는 데 사용했지만 거리이름, 사람이름, 파출소 이름은 매우 정확하고 자세합니다. 북한이 어떻게 우리 정보기관들이나 군의 상황일지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그 시기에 가지고 있는지는 통상의 환경에서는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광주의 분노'(을58)의 36쪽에는 시민군이 탈취한 무기고의 이름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안기부 자료 및 검찰보고서와 비교를 해보니 복한자료가 훨씬 더 자세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기부 자료(57쪽) 및 검찰자료(101쪽)에는 '화순군'의 '동면지소' 등 4개지서의 무기고를 털었다고 되어 있는데, 북한자료에는 '전투경찰중대무기고' '동면지서' '통주지서' 향토예비군무기고'로 특정하고 있습니다. 라주군의 5개 경찰서에 대한 기록도 북한자료 을58(36쪽 상단 3개줄)이 훨씬 더 정확한 것입니다. 무기고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상황들도 자세히 기록돼 있고, 시가지의 방향까지 자세히 묘사돼 있습니다.
“괴뢰군 제179지원단의 무기고를 습격할 때의 일이었다. 폭동군중이 무기고를 향해 밀려들자 보초놈들은. .”(을58, 36쪽 하5-7줄)
“상무동 부근에서였다. 중앙여자공등학교 학생이 공정대의 총검에 찔리워 . . ”(을58, 22쪽 6-7줄)
“무등운동장 부근에 있는 버스 정류소에서도 격노한 주민들이 공정대를 향하여 사생결단으로 달려들었다 . .”(을58, 23쪽 10-11줄)
“북쪽의 신전동으로부터 남쪽의 학동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우산동으로부터 서쪽의 상무동까지 시민들은 큰 길가와 골목들에서 놈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 ”(을58, 23쪽 하2-4줄)
“5월 19일 시내 중심부인 금남로1가에서부터 류동까지의 거리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이곳에서는 공정대 31련대놈들과 폭동군중이 맞붙어 . .”(을58, 24쪽 6-8줄)
“금남로에서 있은 일이다. 수천명의 군중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달려드는 한 개 중대 가량의 공정대놈들을 . .”(을58, 24쪽, 13-15줄)
“싸움은 <계엄군통신지휘소>가 있는 <카톨릭센터>에서도 격렬하게 벌어졌다. 공정대의 만행에 격노한 시민들은 카톨릭센터 차고에서 끌어온 4대의 승용차에 불을 달아 놈들의 저지선 안으로 몰아넣었다.” (을58, 25쪽 15-19줄) 카톨릭센터에 계엄군 통신지휘소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북한이 알고 있는 것인지, 북한의 개입이 없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됩니다.
“동아일보 광주지국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옳은 보도를 하지 않은 문화방송국과 방송공사를 불태워버렸고 기독교방송국도 점거하였다. . . 이날도 비는 계속 내렸다”(을58, 26쪽 하3-9줄) 평양에 앉아서 비가내리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금남로 남쪽에 자리 잡은 관광호텔 앞에서였다. 100여명의 공정대 놈들이 . .”(을58, 37/쪽 하1-2줄) 관광호텔이 금남로 남쪽에 있다는 것, 거기에 100여명의 공정대원이 있었다는 세세한 사정을 어찌 평양에 앉아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까?
“카톨릭센터 앞에서는 200여대의 택시와 20여대의 버스, 3대의 화물자동차가 폭동군중에게 돌을 날라주었다. 그런가 하면 15대의 버스와 50대의 각종 자동차들이 야밤에 일시에 조명등을 켜서 놈들의 앞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봉기 군중을 진전시켰다.”(을58, 28쪽 하3줄-29쪽 3줄) 이런 자료는 계엄사 일지와 비슷하지만 계엄사 일지도 이렇게까지는 자세하지 않습니다.
“이날(주:5.19) 폭동군중은 도청차고와 괴뢰세무서, 8개의 괴뢰경찰파출소, 3개의 신문사와 방송국, 우체국, 은행 등을 불태워버렸고, 놈들의 자동차 50여대를 파괴 소각하여 버렸다.”(을58, 29쪽 8-11줄)
“이 싸움의 선두에는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 조선대학교병설공업전문대학, 동신대학, 서강대학, 성인대학, 송원대학, 전남대학교간호전문대학 등의 10여개 대학 학생들이 섰다.”(을58. 29쪽 19-22줄)
6. 600명이 명시된 자료
(1) 을58, 제35-36쪽에 있는 글입니다.
“폭동군중은 괴뢰들의 군용차량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중들은 로획한 이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여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내였다”.
“200여명으로 묶어진 다른 한 폭동집단은 시내의 ≪향토예비군≫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총들을 로획하였다. 그리고 ≪카톨릭쎈터≫앞에서는 괴뢰군 지방 ≪계엄군≫을 포위하고 놈들의 군용차와 여러대의 버스를 탈취하였다.”
“이리하여 무기탈취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 2,240정, ≪엠-1≫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만 6,400여발이였고 장갑차가 4대, 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에로 확대되였다.”
“라주군에 진출한 폭동군중은 괴뢰경찰서 ≪산포지서≫, ≪로안지서≫ 등 5개의 괴뢰경찰서들을 습격하고 놈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모조리 빼앗아내였다. 화순군에 진출한 봉기군중은 괴뢰경찰서의 역전무기고, ≪전투경찰중대무기고≫, ≪동면지서≫, ≪릉주지서≫, ≪향토예비군무기고≫들을 들이치고 수많은 무기들을 탈취하였다. 장성군, 강진군, 령광군, 승주군, 해남군에서도 무기탈취투쟁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에는 오전보다 더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하여 오후에 이르러 봉기군중들은 일반상용무기들을 대체로 다 장만하였다.”
(2). 을57 제 595쪽에 있는 글입니다.
“5월 26일 600여명의 광주학생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
7. 을57, 58에 대한 소결
위와 같이 북한에서 발간된 을57 및 58은 광주의 상항들에 대해, 우리 계엄군 자료나 안기부 자료 및 검찰자료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돼 있으며, 계엄군을 모략한 것 말고는 대체로 우리 측 상황자료들과 대동소이합니다. 우리 측 자료는 2005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비로소 공개되었는데 북한이 어떻게 10년이나 앞선 1982년과 1985년에 ‘한국이 비밀로 보관했던 자료’보다 더 자세하게 마치 눈으로 본 듯이 묘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혹이 깊습니다. 북한 측이 광주 현지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수집 정리하였을 것이라는 확신이 안 들 수가 없습니다.
8. 참고사항
2019.5.16. 서울형사사건 2016고단2095 심리에는 광주 신부 이영선, 남재희, 정형달이 증인으로 출석하였습니다. 귀 재판부에 제출하려고 공판조서와 녹취서를 서울법원에 신청했지만 아무래도 5.31.까지는 어려울 것 같아 양심적으로 두 가지 사실을 보고드립니다. 1987년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이라는 사진집을 제작했을 때, 정평위 위원이었다던 이영선은 증인신문에서 “저는 당시 학생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재차 물어도 확실하다 하였습니다. 서울 형사재판과 광주재판이 많이 다릅니다. 그 다음 아래 사진들을 3명의 신부들에 보여주면서 물었습니다. “1982년 북한이 인쇄한 삐라에서의 5인 얼굴과 1987년 정위가 발행한 사진집 속 5인 얼굴이 똑같이 보이는데 어떤가요“ 하고 물었지만 이들은 모두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결 론
1. 5.18역사는 평가가 종결된 역사일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 5.18에 북한군이 왔느냐에 대해 조사한 정부기관 없습니다. 학자가 역사연구를 한 것이 왜 죄가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5.18역사에 대해 18년 동안 연구한 것이 왜 죄가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특별한 범죄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이상 학문분여의 연구결과에 대해 정치와 사법부가 개입하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월권입니다. 이번에 제출한 북한자료와 통일부 자료를 보면 5.18은 북한이 실행했고, 북한이 기록했고, 북한이 전군의 시-군 단위로 추모하고 기념합니다.
2. 광주교도소를 공격한 집단이 “전두환이 조작한 편의대”라는 뉴스가 도배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주시민은 편의대에 선동당한 부나비일 뿐, 거룩한 민주화운동이 될 수 없습니다. 전두환이 사살명령 내다는 말도 대특필돼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5.18이 결코 평가가 종결된 역사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편의대를 발언한 사람, 전두환의 사실명령을 발언한 사람에게는 무한한 언론의 자유가 있고, 이 피고에게는 학문의 자유마저 없다는 것이 도대체 어느 나라 법인지 말문이 막힙니다.
입증방법
을54. 북한자료센터 북한영화 자료
을55. 통일부 소관 북한자료 목록
을56.통일부 발간 북한주간동향 보고
을57. 주체의 기치따라 나이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을58. 광주의 분노
2019.5.24.
피고 지만원
광주고등법원 제1민사부 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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