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5.18 ‘주남마을 사건’의 북한특수군 (5)(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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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9-05-10 00:38 조회4,22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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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5.18 ‘주남마을 사건’의 북한특수군
1.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의 왜곡
2. 11공수 62대대 통신부사관 문병소 중사
3. 공수부대를 추적하는 무장폭도들
4. 주남마을 폭도들의 강간
5. 주남마을의 기나긴 전투
6. 쇠사슬에 묶인 주남마을 버스 운전사
7. 주남마을 미니버스의 사망자들
8. 등에 카빈총을 맞은 주남마을 버스의 사망자들
9. 9공수부대 학살 증언자 최영신의 거짓말
10. 가짜 목격자들의 거짓 증언들
11. 제2의 주남마을 사건들
12. 주남마을의 미스테리
5. 주남마을의 기나긴 전투
독립가옥의 경비조 책임자는 모 대위였고 병사는 15명이었다. 병사 몇 명은 독립가옥 근처의 22번 국도에서 도로 차단을 하고 있었다. 검문소 방향에서는 광주에서 나오는 차량들이 화순 방향으로 쉬지 않고 내려왔고, 내려오다가 도로를 차단한 군인들을 발견하고는 차를 돌려 광주 방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오후 2시경 검문소 쪽에서 폭도들이 탄 버스 두 대가 질주해왔다. 앞에는 덩치가 있는 버스였고 뒤에는 봉고버스 한 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도로를 차단한 병사들이 팔목으로 X자 표시를 해보이며 돌아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버스가 돌아갈 기미를 안 보이자 하늘로 공포가 발사되었다. 이때였다. 버스에서 병사들을 향해 사격이 시작되었다. 폭도들이 사격한 총알 세례가 병사들이 서있었던 도로 근처에서 흙먼지를 내며 튕겨졌다.
이를 기화로 도로 차단을 하던 병사들과 독립가옥 경비조들이 버스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검문소 쪽에서도 폭도들의 사격에 합세하며 병사들을 향한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순식간에 주남마을 22번 국도는 전쟁터로 변했다. 이건 5.18세력이 주장하는 것처럼 ‘학살’이 아니었다. 폭도군과 공수부대 간에 벌어지는 정규전이었고, 여기에서 총을 맞고 죽는 사람은 ‘전사’였다.
사격이 시작되자 앞서 돌진하던 대형버스가 유턴을 하려 했는지 앞바퀴가 길가 도랑으로 빠지며 삐딱하게 미끄러진 채 멈춰 섰다. 대형버스는 길가 도랑에 머리 쪽이 빠진 채 몸통이 기울어지고 도로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멈추며 신작로를 막아버렸다. 도로가 막히자 뒤에 따르던 소형버스도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소형버스에는 앞 유리를 깨고 소형 기관단총이 거치되어 있었다. 소형버스는 전투 중 유턴하여 도망갔고 이 상태에서 교전은 계속되었다. 전투는 2시간여를 더 끈 후에야 끝났다.
주남마을 전투에서 공수부대와 전투를 벌이다 길가 도랑에 코를 박은 버스가 바로 주남마을 사건의 25인승 ‘미니버스’였다. 그리고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라 ‘완전 무장한 폭도’들이었다. 그리고 버스 자체도 ‘승객을 태운 채 운행하는 일반버스’가 아니라 무장폭도들을 태우고 ‘병력 이동’을 목적으로 하거나, ‘다이너마이트 탈취’를 목적으로 한 전투용 차량이었다. 주남마을 미니버스는 공수부대 진지를 돌파하려 시도했던 폭도들의 돌격차량이었고, 버스 안에서 사망한 폭도들은 공수부대에게 총격을 가하며 공격을 감행하다가 전사한 돌격대원들이었다.
주남마을 사건이 벌어졌던 날짜는 위키 백과에는 5월 23일로 밝히고 있지만, 문병소 회장의 주장하는 날짜는 5월 24일이었다. 단순 착각이나 오류가 아니라 5월 24일이라는 문병소 회장의 소신은 확고했다. 그날 같이 있었던 부대원들이 많았기에 이 날짜를 증언해 줄 부대원들도 많다고 했다. 주남마을 사건의 날자 오류는 뒤에 ‘제2의 주남마을 사건들’ 단락에서 상술하게 된다.
이런 날자의 오류는 비슷한 주남마을 사건이 여럿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여기에다가 24일의 주남마을 사건은 차마 공개하지 못할 사연이 많았기에 의도적으로 날짜를 은폐했다는 정황도 있다. 그리고 공수부대가 주남마을 버스를 강가로 유기하여 사고로 위장하려 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버스 앞바퀴가 도랑에 빠진 것을 소문이 전달되면서 와전되었거나, 아니면 5.18세력이 선동을 위해 날조한 거짓말이었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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