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공부 합시다(임헌영과 이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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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4-20 00:07 조회4,89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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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공부 합시다
임헌영(본명 임준열, 민족문제연구소장)은 父子가 빨갱이
임준열의 아버지 임우빈은 빨갱이 집단인 보도연맹 가입으로 처형되었고, 임준열 자신은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5년형을 받았다. 남민전에 가입할 때까지 37세가 되도록 변변한 직장 없이 열등의식에 차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가 다 대한민국을 증오한 빨갱이다. 대한민국을 증오-파괴한 자가,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국가를 부자로 만든 애국자, 반공을 국시로 하여 빨갱이 사냥을 했던 박정희 대통령에 욕을 해댄다. 빨갱이 물에 들면 선악 구별이 안되고 오직 한풀이에만 올인한다. 신경쓸 것 없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쏟아내는 쓰레기 발표를 인쇄로 찍어내는 언론들이 더 쓰레기들이다.
1941년 1월생, 남민전 당시의 직업은 문학평론가, 당시 주소는 은평구 녹번동, 본적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구연리, 남민전 가명은 한미정, 필명은 임헌영인 자다. 박헌영을 흉내 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임준열은 임우빈의 2남, 그의 부친은 임우빈 본적지인 의성군 금성면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처형당했다. 이 나라에 한이 맺힐 만한 사람인 것이다.
임준열은 1959년 3월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과 동시에 소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이듬해인 1960년 12월에 사임하고 1961년 3월-1965년 3월간 중앙대 국문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8년 3월에 동 대학원을 이수했다.
1969년 10월 경향신문 주간경향 기자로 재직하다가 1970년 10월 월간 ‘다리’지 주간으로 전직하여 여기에 근무하면서 1972년 3월 중앙대 강사를 겸직하다가 1974년 1월 ‘문인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자 동직을 사임하고, 1976년 7월 대법원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4월부터는 ‘태극출판사’ 기획부장으로 있으면서 1978년 6월부터는 월간 ‘독서’ 주간으로 재직하다가 1979년 8월부터 도서출판 ‘상황사’를 설립하여 경영해 오다가 남민전에 뛰어들어 1심에서 징역 15년, 2-3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 형량은 이제오와 동일하다.
남민전은 1976년 3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3인에 의해 발기를 한 후 박대통령이 서거하신 계절인 1979년 10월에 일망타진되었다. 일당 73명이 재판을 받았고, 임준열의 피고인 번호는 72번, 참고로 이재오는 60번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은 이재오가 포섭하여 키운 사람
임준열은 1976년 11월 하순, 15:00시 경, 주욱 필동 소재 근무지인 태극출판사 사무실로 찾아온 이재오로부터 “민주화투쟁의 핵심 조직”(민투)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자마자 이를 쾌히 승낙하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0:00경 서대문구 냉천동 소재 이재오의 집에서 이재문의 주재와 이재오의 추천 및 사회로 민투의 강령과 규약을 선서하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남민전에 가입했다. 수일 후 20:00경 은평구 홍은동 4거리 중국집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민주화운동‘에 대한 교약을 받았고, 12월 초에도 같은 음식점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점조직에 대한 교양을 받았다.
1979년 1월4일 20:00 이재오의 집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민투의 첫 활동으로 삐라를 뿌려야 하니 삐라 문안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익일인 1월 5일, 22:00시 삐라 문안을 작성했다. “오늘 박정희 1인 학정은 군대와 경찰의 사병화 . . 한국 민주투쟁국민위원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1인폭정과 무제한 투쟁할 것을 . .” “인권을 유린한 박정희 1인 폭정을 타도하기 위하여 . .” 그리고 이를 이재오에게 전달했다.
1월 중순 20:00시 임재오, 임기묵,(10년에서 3년으로 확정) 최석진(1,2심 사형에서 무기로 확정) 등과 4인 1조가 되어 삐라 살포를 위한 수개지역 사전답사를 했다. 이재오가 삐라를 살포하다가 구속되자 이재오의 영치금, 변호사 문제를 이재문과 논의하고, 이재오가 맡고 있던 민투책을 승계했다, 이후 수회에 걸쳐 자금을 전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섭하여 남민전 조직 확대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1977년9월 16일,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신 초안을 작성했고, 동년 9월말에는 권오헌의 집 안방에서 안재구가 준비해온 남민전기를 걸어놓고 안재구가 가져온 단도를 임준열과 함께 세 사람이 거머세우고 강령, 규약, 선서문을 앙독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 자는 아버지도 빨갱이, 자신도 빨갱이다. 그가 박정희를 친일파로 몰아간 것은 국가-사회에 대한 아버지의 원한과 그 자신이 치룬 재판들과 감옥생활에 대한 보복심리 그리고 그가 심취했던 사회주의 서적들에 의해 형성된 공산주의 사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심취했던 책들은 “1981년 10월 20일, 발간된 ‘좌익사건실록’ 746-747쪽에 수록돼 있다.
그가 친일파 명단을 작성한 것은 자신이 빨갱이 행각으로 감옥생활을 했고, 변변한 직장조차 가져보지 못했고, 그의 부친은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처형당한 데 대한 한풀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2019.4.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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