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68)] 지만원 족적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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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4-28 14:15 조회5,40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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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68)] 지만원 족적 13~16
⑬ 국방연구원 6년
나의 첫 연구, 처녀 연구는 '단위 부대별 책임관리자'였다. 이에 대한 발표는 1982년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있었다. 육해공군 해병대 수뇌들과 대령급 이상의 고위 간부들이 대형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연구원들은 뒤의 영상실에서 슬라이드를 비추고 나는 단상에서 시나리오를 낭독했다.
“장관님, 각 군 총장님, 혹시 1개 사단이 1년 동안 얼마의 예산을 쓰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마 아무도 모르실 것입니다. 왜냐? 군에 가계부 시스템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빗자루로 대략 쓸어 담아보니 제1사단의 연간 운영비는 300억 원이었습니다. 이는 삼성, 대우의 연간 운영비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돈을 관리하는 책임자가 있습니까? 국방장관님과 육군총장님께서 제1사단 비용을 책임관리 해주십니까? 아닙니다. 1사단장에게 물었습니다. 사단장님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돈이 1사단에서 2사단에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사단에서 쓰인 예산은 6%의 현금과 94%의 물자예산입니다. 사단장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물자를 늘 사단장님이 관리하고 계십니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물자를 주면 쓰고, 안주면 안쓰고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끝발 있는 사단장님은 물자를 많이 확보해가서 남기고, 그 반대의 사단장님은 장비를 가동해야 할 때 가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낭비이고 후자는 전투력 감소입니다. 투자, 장비, 금전에 대한 책임관리자가 지정돼야 합니다. 군대물자는 공기나 물처럼 자유재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가계부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발표 순간순간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고요하고 눈빛들이 빛났다. 발표가 끝나자 맨 앞에 있던 진행 담당 대령이 엄지손을 들어 ‘홈런’이라 말해주었다. 윤성민 국방장관님은 이를 프로젝트화 시켰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혜성이 되었다. “전군 예산개혁”. 사단단위, 독립대대 단위의 조직에 변화가 일었다. 편제가 바뀐 것이다. 없었던 자원관리 참모가 신설되고, 사단에 회계사와 전산요원들이 확보되고 대형 전산기들이 들어갔다.
모든 장비에 관리책임자가 임명되고, 고장이 나서 수리되면 수리비가 책임자 앞으로 기록됐다. 회계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자유재로 인식되던 물자에 대해 비용의식이 생겼다. 이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나는 전 군을 돌면서 필요성과 요령에 대해 강의를 했고, 육해공군 장교세계에서 나는 혁명가 정도로 인식됐다. 윤성민 국방장관은 이를 전두환 대통령에 보고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이를 전 정부기관에 확산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윤성민 장관은 임기 5년을 누리시게 됐다. 5년 임기는 전무후무했다. 이런 국방관리 개혁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첫 홈런을 친 나는 연구소에서 새벽 2시까지 불을 켰다. 경비원들은 “지 박사는 가정도 없나~” 이런 말들을 했다고 한다. 방위 산업체의 국산화장비에 대한 원가회계시스템을 비판하고 개선안을 냈다. 해외 조달부품이 많게는 100배 부풀려졌다는 사례도 조사했다. 율곡사업(전투력 증강사업)의 13년을 평가하라는 전두환 대통령 지시도 나에게 떨어졌다.
육사에 남아도는 교수 역량을 이용해 육사 골프장에 미 해군대학원과 같은 석사과정을 만들자고 했다. 김복동 장군은 기꺼이 하겠다 했지만 그의 라이벌인 이범천 장군이 방해해, 학교는 육사가 아니라 국방대학원에 설치됐다. 해외 장비를 하나 사려면 38개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도장값을 주어야 하고 빨리 진행돼야 8년이나 걸리기 때문에 구입되는 장비는 언제나 구식이 되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방위청을 신설하자 했다. 장관님은 ok했는데 육사출신 장군들이 결사반대하면서 “지만원은 장관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문제아”라는 낙인을 찍었다.
1979년 공군은 공중에 나는 새까지 탐지할 수 있는 레이더 시스템, ‘방공 자동화 시스템’을 휴즈사로부터 도입했다. 그런데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넘어와도 탐지하지 못했고 중국 여객기가 춘천에 불시착해도 잡지 못했다. 보안사는 모든 자료를 나에게 넘기면서 ‘방공 자동화사업’의 성능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예산은 당시 2억5천만 달러, 국방예산의 7%였다. 이에 대해 나는 25달러 가치도 없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이는 보안사에 의해 전두환 대통령에 보고됐고, 대통령은 국방장관 이기백과 공군총장 김인기를 불러 혼을 냈다.
앙심을 먹은 김인기는 아웅산에서 살아온 육사11기생, 이기백을 찾아가 “공군이냐, 지만원이냐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했다. 육사12기 황인수는 차관, 12기 황관영은 기획관리 실장, 이 두 사람이 나더러 국방대학원 교수로 갈 것을 압박했다. 1987년 2월 28일 나는 대령을 마감으로 예편을 하고 미 해군대학원 교수로 갔다. 두 사람에게 나는 하필이면 “오래 사십시오”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분은 그 후 2~5년 사이에 작고했다.
⑭ F/A-18을 F-16으로 바꿔
1989년 말,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차세대 전투기가 F/A-18로 결정된 데 대해 매우 우려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안보수석 김종휘 휘하에 있는 동기생은 “야, 군에서 나갔으면 그걸로 끝이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군 문제에 관여하느냐?”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국비로 육사를 나왔고, 그 비싼 미 해군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도 했다. 국가에 대한 보답과 충성은 군복을 입었을 때만 하고 군복을 벗으면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F/A-18은 해군 함재기다. 짧은 이착륙 거리에서 뜨고 내리려면 엔진도 2개여야 하고 충격을 흡수하는 비용도 추가된다. 해수를 견뎌야 하기 때문에 재료도 비싼 티타늄을 써야한다. F-16은 미 공군 주력기다. 특히 F-16은 전투기 공중전 이론의 대가이자 2차대전 영웅이었던 ‘보이드’대령과 리치아니, 스피니 등 이른바 전투기 마피아들이 개념을 설계한 것으로 공중전 장비인데 반해 F/A-18은 이름 그대로 폭격이 주 임무다. 따라서 미국에서의 대당 단가는 F/A-18이 두 배로 비쌌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30%정도만 더 비싸다며 사업권을 따냈다. 특히 F/A-18의 제작사 MD(맥도널 더글라스)는 방위산업 부분이 6%에 불과한 반면 F-16사인 GD(제너럴 다이니믹스)사는 100% 방산제품만 만들기 때문에 회계를 정부가 담당한다. MD사는 로비자금을 많이 뿌릴 수 있지만 GD사는 단 돈 100달러를 쓸 수 없었다. 승패는 로비자금에 달려있었다.
더구나 나에게는 나만의 독특한 이론이 있었다. 바로 박사논문이었다. “가동도(Availability)”. 100대 중 떠야 할 시각에 뜨는 댓수가 몇 대냐, 이 요소를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전투기 댓수가 아니라 공중에 떠 있는 시간, 즉, ‘체공시간(Time in the air)’을 사는 것이라는 나만의 이론이었다. 이런 개념으로 따지면 F/A-18은 F-16의 2배 이상 비싼 장비였다.
나는 이 내용들을 당시 육군총장인 이종구 선배님께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990년에 보안사 윤석양 일병이 보안사의 민간사찰 의혹을 폭로하는 바람에 국방장관이 이종구 장관으로 교체됐다. 교체되자마자 내 예언대로 MD사는 설계변경을 이유로 값을 2배로 올렸다. 배경지식이 있었던 이종구 장관은 즉시 노태우에게 보고해 F/A-18을 취소하고 F-16으로 바꾸었다. 이런 사실을 놓고 김영삼과 감사원장 이회창은 F-16으로 바꾼 것에 대해 로비와 부정이 있다고 단정하고 숙청의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⑮ 장관자리, 전국구자리, F-16 사업권 사양
1991년 초, 나는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처녀작을 김영사를 통해 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 1위를 7주 연속으로 차지했고, 거의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신문 칼럼, 방송에 단골 주자가 되었다. 김대중이 아태재단 강사로 초청했다. 그가 주최한 국제세미나에서 기조연설도 했다. 1995년 10월 하순에는 일주일 간 중국에 가서 그의 식탁에 앉아 말동무가 되었다. 대통령이 되자 많은 수석들과 김상현 의원을 통해 장관자리를 제안했다. 나를 좋아하는 김대중에게 나는 1999년 김정일의 앞잡이라는 혹평을 했다. 빨갱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웃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떤 것이다.
이회창이 총재였던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홍사덕이 내게 세 차례 찾아와 전국구를 하거나 정책위 의장을 하라고 제안했지만 나는 자유를 택했다.
F-16 제작사에서 엔진 등 사업권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장사꾼(Merchant)’이라는 굴레가 싫어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 걸어온 길이 5.18 가시밭길 이었다. 이런 나의 자세 역시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 범주에 벗어나 있을 것이다.
⑯ 결론
열 사람을 인솔해 견학을 시켰는데 각자가 본 것이 다 달랐다. 각자는 자기 머리 능력만큼만 보기 때문이다. 지만원을 이해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가 나를 이렇게 주제로 내세우는 이유는 나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5.18을 연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5.18이라는 위험한 역사를 연구한다면 그 연구자는 장삼이사가 아니어야만 하는 것이다.
5.18은 우선 위험한 물건이다. 5.18을 연구하려면 돈벌이를 20년 멈춰야 한다. 재판기록 18만쪽이 위압감을 준다. 내용이 군사 분야이고 법조분야라 배경지식이 턱없이 딸린다. 의협심이 없으면, 군과 법문에 대한 소화능력이 없으면, 위험을 감수할 정신이 없으면, 돈벌이를 20년씩 포기할 여건과 마음이 없으면, 5.18을 20년씩 연구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5.18을 그들의 상식, 그들이 매스컴을 통해 습득한 지식에 의해 함부로 말한다. 아무리 특별한 박사라 해도, 아무리 연구를 오래 했다 해도 연구하지 않은 자기가 더 똑똑하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있다.
그들이 연구내용을 읽기 싫으면, 그들과 지만원이 어떻게 떡잎에서부터 달랐는가에 대해 그 급수와 군번이라도 깨우쳤으면 한다. 그들과 나 사이에 군번이 다르듯이 5.18에 대한 21년의 연구내용과 그들의 고정관념 사이에도 군번이 다르다. 이를 깨우쳐주기 바란다.
2023.4.2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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