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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9 ~21일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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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1-27 22:38 조회3,9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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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일 상황>

* 지그재그 차량돌진

부대원들이 3-4명씩은 안 된다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에 따라 공수부대는 519일부터 대대 단위로 대오를 갖춰 집결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대장 혼자 손 마이크로 가정으로 돌아 가십시오종용했습니다. 병사들은 눈알조차 굴리지 않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마네킹으로 변해버린 병사들을 폭도들이 조롱했습니다. 긴 장대에 낫을 매가지고 병사의 목에 걸고 당겨 말어”, 가위를 눈앞에 대면서 찔러 말어”, 도끼로 철모를 치면서 뽀개 말어병사들의 몸에서는 진땀이 흘렀습니다. 이런 조롱도 잠시, 폭도들은 드럼통에 불을 붙여 밀집해 있는 병사들을 향해 굴렸습니다. 이것도 잠시 폭도들은 대형차량을 몰고 병사들을 향해 지그재그 궤적으로 돌진하였습니다. 대대장이 병사들을 향해 돌진하는 버스 앞 타이어를 쏘았습니다. 버스는 거로수를 들이박고 정지했습니다. 이 차량번호가 광전교통 전남53704’였습니다. 이 차량번호는 북한의 대남공작역사책 광주의 분노등에도 기재돼 있고, 계엄군 상황일지에도 기재돼 있습니다.

<520일 상황>

* 완전포위, 밤샘 전투

 

520일에는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모두 10개 대대였습니다. 5개 대대는 도청 사수를 위해, 5개 대대는 광주신역을 방어하기 위해 뭉쳐 있었습니다. 이들 대대는 수만 명 시위대에 포위되어 몰살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특히 제3공수 5개 대대는 광주신역 앞에서 완전 포위되어 섬멸될 찰나에 실탄공급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전남대로 피해갔지만, 밤새내 밀고 밀리는 전투를 하였습니다.

 

<521일 상황>

* 20사단 습격

* 아시아자동차 점령, 장갑차 4, 군용트럭 374대 탈취

* 44개 무기고로부터 5,403정의 총기 4시간 만에 탈취,

* 도청지하에 다이너마이트 폭탄제조 2,100

* 계엄군 광주시 탈출

* 교도소 6회 공격 (대량 살상자 발생)

 

5.18세력은 영화 화려한 휴가내용을 사실이라고 주장합니다. 521일 오후 1,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하여 수천 명이 죽었다고 우 깁니다. 이를 증명하겠다며 발포명령’ ‘헬기사격’ ‘집단암매장을 규명하겠다 지난 30여 년 동안 소란을 부려온 것입니다. 30년이면 지치고 잊을 때도 되었을 텐데 저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바로 적화통일을 위한 작전이기 때문입니다. 521일 도청 앞 사건에 대해 저는 두 가지 사실을 밝힙니다. 하나는 광주에서의 소총발사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도청 앞 충돌 상황입니다.

<5.18의 발포 역사>

 

저 사람들은 발포가 521일 오후 1시에 도청 앞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그 발포는 집단 조준사격이었다고 선동해 왔습니다. 하지만 광주사태에서의 총기 발사는 그 이전에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1번째 발포는 5.19일 오후 5, 계엄군 장교가 타고 있던 장갑차가 고립되자 시위대가 장갑차 뚜껑 위에 불타는 짚단을 올려놓고 있을 때, 고열을 이기지 못한 소위가 뚜껑을 열고 발사한 것이었고,

 

2번째 발포는 20일 밤, 공수부대 대오를 향해 고속으로 돌진하는 대형버스 차량 바퀴들에 대대장들이 권총을 쏜 것이고,

 

3번째 발포는 같은 날 광주역에 중과부적 형상으로 완전 포위돼 있던 3여단이 포위망을 뚫으려면 실탄이 필요했는데, 이들에 실탄을 공급해 주기 위해 전남대에 주둔했던 3공수 본부 대원들이 광주역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다수 군중에 포위되자 길을 뚫기 위해 공포를 쏜 것이었고,

 

4번째 발포는 광주역 앞에서 3공수 5개 대대가 포위망을 뚫고 전남대로 철수할 때 발생했고,

 

5번째 발포는 521일 새벽 5시 경에 전남대에서 시위대가 하늘을 향해 카빈총을 가지고 공포를 쏜 것이고,

 

6번째 발포는 52112시경에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면서 발생한 쌍방의 총격전이었고,

 

7번째 발포는 전남대를 지키던 3공수 여단의 최후저지선이 돌파 당함으로써 공수대와 시위대 사이에 주고받았던 사격이었고

 

8번째 발포는 도청 앞에서 장갑차 사수가 기관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방아쇠를 건드려 하늘로 쏘았던 사격이었습니다.

 

가장 문제를 삼아왔던 52113시의 전남도청 발포는 9번째 발포였습니다. 521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면으로 나오더니 그들 중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에 정렬해있던 5개 대대를 향해 돌진하여 하사관 1명을 깔아 죽였고, 1명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차량공격이 그 후 세 차례나 더 계속됐습니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은 그야말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돌진차량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도청 앞 발포의 전부입니다. 도청 앞에 정렬해 있는 공수부대를 향해 대량학살을 기도했던 지그재그 장갑차 돌진은 4차례 연속됐습니다. 영화장면과는 정 반대로 도청 앞에서는 폭도가 공자였고, 계엄군은 방자의 수준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지그재그로 돌진하는 장갑차에 어떻게 하면 깔려죽지 않느냐, 이것이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불쌍한 신세였습니다. 공수대원들의 눈에는 오로지 달려드는 장갑차만 보였습니다. 돌진해오는 장갑차를 향해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 이외에도 520일 밤중부터 521일 오후 5시까지 쌍방 간의 무수한 총격이 있었습니다, 21일 오후 5시부터 3공수 5개 대대가 전남대를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0개 공수대대가 도청과 전남대를 탈출하여 시 외곽으로 후퇴할 때 탈주로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무장 폭도들이 계엄군과 무수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쌍방 교전이었던 것입니다.

 

<모략의 극치, 전남도청 앞 발포사건>

 

521일 오후 1시의 도청 앞 상황은 장갑차의 지그재그 돌진에 의한 살인 작전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인데도 모략과 억지의 달인들은 영화 화려한 휴가를 제작하여 국가를 모략하였습니다. 국가가 병사들에 환각제를 탄 독주를 마시게 한 후 이성이 마비된 살인마로 만들어 무차별 사격을 가하도록 사주했다고 모략해온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담은 책이 황석영 이름으로 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입니다. 한국의 직식인, 학자, 언론인, 기자, -검사 모두가 그 책을 읽고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마구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황석영이 2011년에 실토했듯이 그 책은 누군가가 써서 황석영 이름으로 낸 책입니다. 그 내용들에는 팩트가 단 1개도 없습니다. 오로지 모략용 소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북한 노동당 출판사들이 내놓은 2권의 대남공작 역사책 광주의 분노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내용들을 합성한 이적물입니다. 2010년 저는 이를 역사책 솔로몬 앞에 선 5.18‘에서 증명하였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영화와 언론매체들이 전해준 모략 물들을 5.18의 진실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래의 수사기록을 보면 남북한 반란자들이 얼마나 진실을 왜곡하고 과장 확대하여 소설을 썼는지 금방 드러날 것입니다. 아래 내용은 전두환 등 이른바 신군부를 압살하기 위해 군검찰과 서울중앙지검이 14개월 동안 조사해 1995718일 발행한 “5.18관련사건수사결과보고서 내용입니다. 그것을 분석하여 아래에 정리합니다.

521,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민간 사망자는 61명입니다. 이 중에서 28명은 도청과는 거리가 먼 다른 곳들에서 사망했고, 33명만이 도청 앞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도청 앞 사망자 33명 중 20명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당시 도청 앞 상황은 계엄군과 시민이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수대에 맞아 죽고 찔려죽는 일이 발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들 20명은 누가 죽였겠습니까? 폭도들이 죽인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모두가 다 무기고 총에 의해 사망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521일에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 총에 의해 사망한 61명 모두가 계엄군과는 무관한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계엄군은 지그재그로 돌진해오는 폭도의 장갑차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5월 세력들은 또 거짓말을 합니다. 521, 13:00시경에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총 총 우리도 총이 있아야 해비로소 깨닫고 총기를 탈취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오후 1시 이후, 지휘체계마저 갖추지 못한 콩가루 시민들이 각자가 총기를 구하러 나갔다면 어떻게 이날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4시간동안 전라남도 최 끝단에 있는 무기고까치 포함해 44개 무기고를 털 수 있었겠습니까? 무려 중화기들을 포한해 5,403정이나 되는 통기들을 어떻게 광주로 운반해 올 수 있겠습니까? 아시아자동차에 모인 북한 특수군 600명이 무기고를 털려고 출발한 시점이 바로 521일 아침 9시경이었습니다. 광주의 거짓말은 무협지 수준은커녕 우화에도 속할 자격이 없는 허무맹랑한 내용들입니다.

 

<521, 세계 최정상급 군사작전>

 

1) 1995. 7. 18.에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92-93쪽에는 아래와 같은 9개 줄의 매우 중요한 기록이 있습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위 글에서 56대는 356대의 오타로 보입니다. 별책증거 제23쪽에는 200여대, 33쪽에는 305, 76쪽에는 328대 등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군상황일지, 안기부상황일지, 치안본부상황일지, 계엄사 등을 종합한 결과 지만원은 374대로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군대에 관한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위 검찰보고서를 읽으면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1985년의 안기부가 그랬고, 1995년 검찰이 그랬습니다. 그냥 시위대가 20사단 차량 부대를 공격해 10여대의 지프차를 빼앗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시위대 600명이 모여 장갑차 4대와 수십 대의 차량을 탈취해 시내로 나갔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군대는 물론 게릴라와의 전투경험이 있는 지만원의 눈에는 아래와 같이 읽혔습니다.

 

군부대 이동 상황은 극비 중의 극비정보입니다. 이 극비정보가 이들 300여명의 폭도들에 넘어갔다는 뜻이 위 문장에 들어 있습니다. 군 이동계획에 대한 극비정보를 빼낸다는 것은, 시위의 주역들이라는 10대의 기층계급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매복장소를 선택해 사전에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감히 현역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작전능력, 이 역시 20세 전후 양아치 기층계급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광주에는 이렇게 조직화된 순수한 민단인 300명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전 08:00에 정규군을 공격했다는 것에도 엄청난 의미가 내포돼 있습니다. 적어도 06시 정도에는 300명의 시위자들 각자가 집에서 기상하여 최소한 07:00경 공격대기지점(Line of Departure) 근방에 집결하여 실무적 작전점검을 하고, 공격대기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작전을 개시했다는 말이 됩니다. 10~20대 최하층 노동자 300명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집결지에 모여 작전 전 회의를 하고, 공격대기지점에 매복하고 있다가 정규부대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할 사람, 아마 지구촌에는 없을 것입니다.

 

300명은 전투력이 뛰어난 제20정규사단을 상대로 기습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사단장용 지프차를 위시하여 14대의 지프차를 몰고 곧장 이웃 10km 에 위치한 군납업체 아사이자동차공장으로 달렸습니다.

  

폭도들이 탈취한 20사 지프차   공수부대원 복장의 시민군

 

이들 300명은 왜 이 어려운 작전을 통해 지프차를 탈취해가지고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직행했겠습니까? 아래에 설명하겠지만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의 무기고를 털 군용트럭이 필요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차량들은 군납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있었습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의 벽은 요새의 벽입니다. 높고 견고하고, 철조망이 있고, 망루가 있고, 경비병들이 있습니다. 경비병들은 높은 망루에 모래 마대를 쌓고 기관총을 거치하고 여차 하면 발사할 준비를 갖춘 전투병들이었습니다. 이런 벽을 뚫고 그 많은 차량을 탈취하려면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경비병을 제압해야 합니다. 경비병과 싸우려면 총이 있어야 하는데 폭도에는 총이 없습니다. 싸우면 총 없는 600명이 전멸합니다. 총 없는 폭도 600여명이 총을 가진 경비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발한 작전이 필요했습니다.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를 구태여 빼앗아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이 거 봐라, 20사단이 다 일망타진됐다, 이미 대세가 기울였으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또는 우리가 20사단 지휘부다. 문 열어라는 식의 엄포용이었을 것입니다.

 

시위대 600여명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했다는 말은 경비병력이 순순히 경비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갑차와 군용차를 수백 대 단위로 내주었다는 것은 차량키를 꽂아주었다는 뜻입니다. 그 많은 장갑차와 군용차량들을 몰고 시내로 나갔다는 말은 자가운전 시대가 아니었던 시대에 광주에 장갑차를 4대씩이나 운전을 할 수 있는 운전기술자들, 군용트럭을 300여대나 몰 수 있는 많은 운전사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계엄사(계엄역사)에는 탈취당한 차량이 군용 민수용 다 합쳐서 총 882대인 것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900대에 가까운 차량을 몰 수 있는 운전자들이 광주에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이렇게 많은 운전자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600명은 부대이동에 대한 극비 정보도 얻을 줄 알고, 매복해 있다가 현역부대를 급습할 줄도 알고, 지프차를 몰고 다닐 줄도 알고, 장갑차와 트럭도 몰 줄도 알고 38개 무기고 위치(별책3-49)를 사전에 파악할 줄도 알고, 무기고 경비병을 단번에 제압할 줄도 알고, 무기고를 단숨에 부술 줄도 알고,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도 알고, 총기사용방법도 교육시킬 줄 알고, 뒤에 설명하겠지만 8톤 트럭분의 다이너마이트로 2,100여발의 폭탄을 조립한 매우 희귀한 기술도 보유했습니다. 실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600명 팀인 것입니다. 이런 맥가이버들이 600명씩이나 광주에 있었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상이 지만원이 검찰보고서에 기록돼 있는 9개 줄을 읽는 독해방법이었습니다. 9개 줄을 놓고 군-안기부-검찰-법관들이 읽은 방법과 지만원이 읽은 방법이 천지차이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특수군을 보지 못했고, 지만원만 보게 된 것입니다.

 

별책 77쪽에는 당시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195명에 불과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같은 제78-82쪽을 보면 이들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 나이, 직업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구두닦이 껌팔이, 자개공, 목공, 철공 등 59개종의 하층직업들에 분산돼 있고 그 80% 정도가 10-20대입니다. 사망한 민간인이 154, 이들 중 33명이 10대 전후의 아이들입니다(별책 57). 별책 59-64쪽에는 나머지 사망자 119명과 신원미상 12명이 있습니다. 119명의 직업과 나이를 보아도 다 20대의 무직자와 식당종업원 급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5.18의 주역들이라며 5.18유공자가 되어 있습니다. 10세 전후의 33명을 제외한 5.18주역들은 사망자와 유죄판결을 받은 자들을 모두 합쳐봐야 불과 349명에 불과합니다. 600명의 절반 정도의 수자입니다. 이러한 직업과 이러한 나이에 속하는 광주시민 349명은 600명도 안되고 번개같이 날아다니는 맥가이버들도 아니었습니다.

 

2) 1985.5. 안기부가 발행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는 1980.5.21.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서 38개 무기고를 털어 5403정의 총기,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했다는 기록이 기재돼 있습니다.

 

별책 22-64쪽의 안기부 자료에는 38개 무기고들이 언제 얼마나 털렸는지에 대한 목록이 나열돼 있습니다. 북한군의 모습은 5.21.자 상황을 정리한 검찰자료와 안기부자료에 확연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검찰자료와 안기부 자료는 사실들만 나열해 놓고 이를 정보로 가공해 내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지만원만 이 두 자료들로부터 위와 같은 정보를 가공해낸 것입니다. 가공해 낸 위 정보가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는 것이고, 검찰이나 안기부처럼 사실들을 나열만 해놓고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1985'조선노동당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별책 85) 35쪽에는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뇌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 . 이리하여 무기탈취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 2,240, <-1> 보총 1,235, 권총 28. . ."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어서 이 책에는 무수한 무기고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중에는 안기부 리스트에 없는 무기고가 6개 더 있습니다., 따라서 전남 전역에서 털린 무기고 수는 44(안기부자료 38 + 북한자료 6)인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4시간 만에 턴 것입니다.

 

3) 북한특수군은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사진들을 남겼습니다. 5.18진상규명에 앞장 선 김양래는 이들 날랜 사람들을 놓고 광주사람들이 아닌 외지인들이라 증언했습니다.

 

2017.10.12. 5.18기념재단 대표 김양래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증인으로 나와 신문을 받았습니다. 아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들은 총기에 훈련이 되어 있고, 조작체계가 갖추어져 있고, 몸매가 단련되고, 행동이 숙달돼 있고, 무전기를 가지고 지휘하고, 맑은 날에도 북한군처럼 총을 거꾸로 메고, 지휘체계가 확립돼 있고, 다이너마이트를 조립하고, 전남도청을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일반 광주시민들의 도청출입을 금지하는 등 갑질을 하고, 깔끔하게 생긴 광주사람들(카톨릭농민회 김인태, 학원강사 김중식)을 도청으로 체포해 가서 고문을 가한 후 사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다 광주시민들이냐고 물었습니다. 김양래는 현재 5.18 진상조사에 독보적으로 앞장 서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김양래가 법정에서 답변했습니다. “저들은 광주사람이 아니라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중국 고대사 용어로 게릴라를 의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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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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