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 ~ 5.27. 양아치급 광주인들의 1일 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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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1-28 18:27 조회4,1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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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 ~ 5.27. 양아치급 광주인들의 1일 천하
* 5.18최고 유공자(사형, 무기 등) 10-20대의 무개념 80명, 도청 진입, 갑론을박하다 점령당함
* 북한군이 사라진 이후 현장 사진 전무
* 최고 반열에 있는 5.18유공자들 모두가 무기는 누가 털었는지 모른다 했고, 5월 24일까지 도청은 위엄 있는 사람들이 점령해서 자기들은 5월 24일 오후에야 비로소 도청에 갈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1) 정상용(무기징역)의 증언
정상용은 당시 30세의 회사원이었고, 군법회의 제1심에서 무기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김대중 시절에는 평민당 국회의원,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17권 65쪽 ‘정상용의 5.18회고’(별책 98-177쪽)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습니다. 5월 26일 편성된 기동타격대가 10대의 학생들과 20대의 품팔이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
“21일 누군가가 도청을 탈환했다. 이걸 장악한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닌가?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도청으로 간 거다. 장악한 사람들은 위엄 있는 높은 관료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니 학생들은 나가라’고 말했다. 23일의 이런 모습을 본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책(5.18항쟁자료집)에서 박남선(사형선고)은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광주가 통제해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간 사람들이다”
(2) 허규정(무기징역)의 증언
“나는 5월 26일 출범한 투쟁위원회의 내무위원장을 맡았다. 우연히 지나다가 공수부대 요원들이 젊은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가 나도 공수부대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운동권에 속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자격으로 휩쓸렸다. 시민들 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니기만 했다. 그 시위는 누가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리더도 없었다. 경찰도 공수부대를 욕하고 우리더러는 들어가라며 보호해주려 했다.”
“종교계 지도자, 재야인사만 들어가고 학생들은 들어오지 말고 나가라 했다. 계엄군이 곧 들어온다 하니까 누구든 책임감 없이 나와 버렸다. 종교지도자들도 나갔고, 일반 시민들도 다 나갔다. 도망 나온 거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멀리 안 가고,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일부 시민들이 도청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렸다. 나도 다시 도청에 갔다. 갔더니 시국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있었다. 높아 보이는 사람들은 안 보였다.”
“어른들은 시국수습대책위원회, 젊은 사람들은 학생수습위원회, 어른 청년이 각각 위원회 만들어 가지고 서로 말이 다르고 통제가 안 되었다. 조직이 움직이지 않고 엉망이었다. 그런데 윤석루가 나이도 굉장히 어린데 기백이 있어서 기동타격대를 장악했다. 윤석루는 학생도 아니었다. 특별한 방법은 안 나오고 맨날 회의만 했다. 운동권 간부들은 모두 다 예비검속으로 미리 잡혀 가버렸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개념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23일의 이런 모습을 본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남는 사람들은 오직 종교지도자들, 교수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태를 여기서 끝내고 시국을 수습하지고 했다. 나도 멋모르고 참여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내무위원장이 된 거다”.
2019.1.2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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