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은 한국판 갈릴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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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11-20 18:04 조회5,2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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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은 한국판 갈릴레오
빨갱이 없는 세상 만드는 핵폭탄 18년 동안에 개발
많은 사람들이 지만원을 자기들과 동급이거나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또라이, 사이코패스 정도로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사람이 연구했다는 5.18연구가 정신병자의 상상물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빨갱이 없는 세상’에서 살려면 지만원의 연구결과가 전국민에 전파돼야 한다. 내 연구결과는5.18이 ‘민주화역사’가 아니라 ‘북한게릴라역사’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대부분의 국민이 알아야 이제까지 빨갱이들의 사기행각에 놀아났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한다. 그러면 빨갱이들이 얼굴을 들지 못한다. 이게 바로“빨갱이 없는 세상”인 것이다.
5.18 진실 믿게 하려면 지만원의 비범한 내공 널리 알려야
5.18에 대한 진실이 전국에 퍼지게 하려면 그것을 연구한 주인공이 또라이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 국민들이 내 연구결과를 신뢰하려면 지만원이 ‘대단한 사람’장삼이사가 아닌 '비범한 내공을 쌓은 사람'이라는 정서가 확산돼야 한다. 이제까지 나는 나에 대한 소개를 별로 하지 않았다. 이력서에 써있는 내용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최근 펴낸 증보판”뚝섬 무지개“에 나의 살아있는 이력서가 영화처럼 그려져 있지만 이 책은 530쪽이나 되어 전파 범위가 상대적으로 협소하다. 그래서 아래에 그 일부를 요약하여 알린다.
지만원이 보통사람인 것으로 인식되면 연구결과가 죽는다
나에게는 일반인류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성실함이 있다. 극기의 인생을 살았고, 몰입의 경지에 입문하여 이 세상에 없었던 수학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를 발명했고, 1980.9.26. 내가 박사학위를 받던 날까지 미해군이 발명하지 못했던 함정 수리부품 적정 재고량 계산법을 발명했다. 누구도 엄두 낼 수 없는 18만쪽의 수사-재판 기록을 다 연구하겠다며 이양우 변호사로부터 빌려다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진실을 발굴해 내겠다고 결심한 ‘스케일 있는 사람’이다. 그 어느 누가 감히 이 엄청난 대업을 실천하려 나섰는가? 이런 사실을 이제부터라도 널리 알려야 내 연구결과가 살고 국민이 산다. 나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5.18의 진실을 살리기 위해서다. 지만원이 보통 사람 수준인 것으로 인식되면 내 연구결과가 죽고, 지만원이 어마어마한 사람인 것으로 인식되면 연구결과가 산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만원은 비범한 연구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 능력을 한마디로 증명하자면 내 박사 논문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개의 발명 물들이다. 이런 수학적 발명을 할 수 있으려면 성실, 극기, 몰두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전쟁터 철모 속에 영문소설 넣고 다닌 사람 또 누가 있을까?
위 사진은 베트남 작전지역에서 찍은 것이다. 가운데 사람이 지만원이다. 내가 쓴 철모 속에는 영문 단편소설이 들어 있었다. 언제든 총알이 날아들 수 있는 위험하고 긴장감 도는 전투지역은 내게 세상의 종말이었다. 하지만 26세의 나는 그 순간들에도 작은 사과나무들을 심었다. 1974년, 나는 육해공군 해병대 전군에서 단 1명만 선발하여 미해군대학원 경영학 석사과정에 보내는 유학 영어시험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100점 만점에 97점을 받아 기록을 깼다.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책을 놓은 지 9년만의 일이었다. 내가 영어시험에서 이런 성적을 냈던 것은 오로지 성실함 때문이었다. 남보다 앞서가려면 조각난 시간을 이어 써야 하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스스로에 자극을 가해야 한다. 이런 자세는 지금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미해군대학원 창설 70여 년 동안 문과석사에서 응용수학박사 학위를 딴 사람 오직 지만원뿐
1974-75 사이에 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2년 동안 미국 맥나마라 국방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는 업무를 보다가 1977-80에 다시 동 대학원 시스템공학부(응용수학)에 입학하여 불과 3년 만에 수학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 알고리즘 한 개가 포함된 박사논문을 썼다. 미해군대학원이 설립된 1909년 이래 동 대학원에서 문과(경영학) 석사가 응용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경우는 오로지 지만원 혼자였다. 아래에 미해군대학원 경영학석사 증서와 응용수학 박사 증서가 있고, 원고가 창조한 수학 공식증명과정 일부가 제시돼 있다.
이런 것이 극기다
위 박사 학위증에는 여느 대학, 여느 학위증과는 달리 모든 인류들이 괄목할만한 “전설”이 담겨있다. 긴장과 중압감으로 인해 위장병이 도졌다. 책상에 앉으면 몸이 무겁고 대퇴부가 저리고, 졸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실패할 것이 틀림 없었다. 20분 거리의 침술사에 몇 번 갔지만 그 시간을 감당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실 침을 한 웅큼 얻어왔다. 날마다 배에 30개 이상 꽂았다. 주위에서는 큰일 난다 말렸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배가 고슴도치로 변했다. 위와 장은 좋아지는 듯 했지만 체력이 저하돼 잠이 쏟아졌다. 2층에서 목조 계단을 내려와 비틀거리며 뛰었다. 하루를 거르면 열흘을 거르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정신이다. 열흘을 거르지 않으려면 하루도 거르면 안 되었다. 비가와도 뛰었고, 새벽 2시에도 뛰었다. 이것이 바로 극기였다. 이런 일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이 몰입의 경지다.
뛰는 시간에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수학 문제를 머리에 담고 뛰었다. 이렇게 훈련된 머리는 커다란 칠판 같았다. 위 사진과 같은 수학기호들이 머리 속 칠판에 전개됐다. 여러 개의 칠판이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몰아의 경지요 몰입의 경지인 것이다. 그 머리 속 칠판은 잠을 잘 때에도 전개됐다. 잠을 자면서도 문제를 풀었다. 꿈속에서 답이 나오면 즉시 일어나 노트에 정리했다. 이런 것이 극기이고 몰두-몰입의 경지인 것이다. 이런 몰두의 과정 없이 새로운 수학공식을 창조하고 수학정리를 창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새로운 발명과 새로운 창조는 몰입의 과정 없이 탄생되지 않는다.
내 발명품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주임교수
아래 사진은 1980.10. 원고가 미해군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순간이다. 얼른 보면 색다를 게 없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은 엄청난 역사와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1980.9.26. 미해군대학원은 500명 정도의 석사를 배출했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혼자였다. 머리 좋은 이스라엘 스웨던 미국 캐나다의 수재 4명이 나와 함께 이 날의 축복을 함께 하려다 논문에 "새로운 것”을 발명하지 못해 실패했다. 그들의 가족들이 나를 붙들고 울었다. 담당 교수가, '내가 무엇을 발명했고 미해군에 무슨 선물을 주었는지'에 대해 한동안 설명했다. 그 지역 교포들이 몰려와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눈물들을 흘렸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는데 대한 고마움과 내가 이룩한 경이로운 업적에 감동한 눈물이었다.
로키드마틴사 중역들로부터 받은 국빈대우
아래 몇 장의 사진은 1990년에 내가 로키드마틴사로부터 받은 앨범에서 뽑은 사진이다. 세계 최대 방위산업업체인 로키드마틴사가 나에게 국빈대접을 했던 사진들이다. 세계 최대의 방위산업 업체 중역들이 정신병에 걸려서 나를 이토록 특별 초대하여 외국의 수뇌들에나 제공하는 예우를 해주고, 사진을 찍고 앨범을 만들어 보내주었겠는가? “군이 전투기를 살 때에는 전투기 대수(Number of Fighter)를 사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떠 있는 시간(Time in the Air) 즉 체공시간을 사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분석 요령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고, 여기에 내가 박사논문에서 발굴한 ‘가동도’(Availability) 계산 공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나에게 감사를 표하는 방법이 엔진 납품권을 주는 방안이라고 했다. 나는 이 엄청난 제안을 반려했다. 그렇게 부자가 되는 것은 내가 그리는 아름다운 캔버스에 어울리지 않았다. 창조자가 갑자기 장사꾼(Merchant)으로 전락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런 애국 그 누가 또 했는가?
1980.9. 박사학위를 받아가지고 귀국하자마자 중앙정보부로 불려가 근무를 시작했다. 북한의 공작 생태에 대해 연구했고, 그 후 1987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국방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을 하면서 군의 방어 상태와 무기체계 조달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했다. 대한민국 높은 고지에는 공군 레이더 기지와 방공포 부대가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나는 그 80%의 고지들을 방문하여 작전능력을 평가했고, 해안 레이더 기지들을 방문해 취약점을 분석해 윤성민 당시 국방장관에 직보했다. 애국심 없으면 본연의 임무 외로 이런 어려운 일 나서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는 적도 많이 생겼고, 우군도 많이 생겼다. 나는 이때 생각했다. "적이 없으면 친구도 없다"고.
지만원만 나타나면 모든 군부대가 극도로 긴장했고, 그래서 각군에는 ‘지만원 대책반’이 구성돼 있었다. 공기나 물처럼 자유재로 인식됐던 모든 군수물자들에 관리책임자를 정해주었고, 회계 처리되도록 시스템을 설치했다. 이는 군 전체에 비용의식을 불어넣은 일대 혁명이었다. 나로 인해 모든 독립부대에는 ‘자원관리참모’가 새로 생겼고, 부대마다 전산기가 들어갔고, 전산 인력이 들어갔다. 군의 모양이 바뀌었고, 국가예산이 절약된 것이다. 국방자원관리 상의 이 혁명은 모든 행정관서로 파급되었다.
대령 예편 직후 미해군대학원 교수
1987.2.에 대령으로 예편하자마자 도미하여 1987-89. 3년 동안 미해군대학원에서 교수직으로 봉직했고, 이후 귀국하여 국가와 기업에 시스템을 심어야 한다며 프리랜서로 방송, 기고, 저술, 강연 활동에 매진하다가 나라가 좌경화되면서 반공운동의 한 축을 형성해 투쟁해오고 있다. 지만원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18만 쪽 수사기록 품에 안고 10년 20년 연구하겠다는 정열과 배짱과 스케일 나말고 누구에게 또 있었나?
감히 5.18을 연구하겠다고 전두환측 변호인 이양우 변호사로부터 18만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과 재판 문서들을 트럭으로 실어올 의지와 배짱과 스케일이 그 누구에게 있었던가? 철옹성 같은 5.18성역을 감히 쳐부수려 나선 패기 있는 사람이 나 말고 그 어디에 있었는가? 하루하루 돈 벌기에 여념이 없는 보편적 인류의 생활을 포기하고, “10년이고 20년이고 나는 반드시 5.18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의지를 실천한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었는가? 나는 정신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고 쌓아온 내공이 다르고 스케일이 다르고 생활자세가 다르다.
지만원은 한국판 갈릴레오
지만원이 쌓은 내공은 일반적 인류가 쌓을 수 없는 내공이다. 갈릴레오도 몰입을 생활화한 과학자였고, 지만원도 몰입의 경지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명한 과학자다. 갈릴레오는 서기 1600년 사람이다. 기원전 600년은 피타고라스 시대였다. 과학이 문을 연 이때로부터 무려 2,200년이 지나는 동안 세계인류는 천동설을 믿었다. 2,200년이 지난 후에야 갈릴레오가 지동설이라는 새로운 발견을 했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이단아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불과 38년 동안 굳어온 ‘민주화역사’를 부정하고 ‘게릴라역사’를 주장했다고 하여 ‘민주화역사’를 믿어온 사람들에게 이단아가 되었다. 5.18을 놓고 1980년에는 '김대중의 내란음모'라고 판결했고, 1997년에는 '전두환의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두 개의 재판부 모두가 5.18을 '내란'으로만 판결했고 '게릴라'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감히 그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다. 이제야 많은 국민들은 빨갱이들과 전라도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민주화역사’를 부정한다. ‘저런 인간들이 무슨 민주화운동을?’ 또 많은 국민들은 지만원이 한국판 갈릴레오라 생각한다. 애국자라고도 생각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한다.
이제 패러다임 측면에서 정확히 정의한다면 "지만원은 한국판 갈릴레오"다. 갈릴레오는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었고, 지만원은 ‘민주화역사’를 ‘게릴라역사’로 바꾸었다,
Jee Man-Won Is A Galileo Of Korean Version
I Developed an Atomic Bomb in 18 Years That Can Make a World Devoid of Reds.
Many people think that Jee Man-Won belongs to the same class with them or is inferior to them. There are some people who disparage me as a weirdo or psychopath. These people say that the May 18th research made by this deviant is only an imagination of a mental patient. For South Korean people to live in the world devoid of the Reds, Jee Man-Won's research result must be propagated across the nation. The result of my research concludes that the May 18th is not 'the history of democratization', but 'the history of North Korean guerilla war'. Most of the nation have to know it, and then only they will get angry about the Reds' cheating practices that have been made so far. From then the Reds can not lift up their faces. This is the world devoid of Reds.
To Make People Believe The May 18th Truth, Jee Man-Won's Extra-Ordinary Inner Energy Need to be Widely Known
To make the truth of May 18th spread across the nation, the hero who made the research should not be known as a weirdo. For the people to believe the result of my research, a certain national emotions have to be widely spread acknowledging that "Jee Man-Won is a great man" and "he is not a man of ordinary Tom and Dick but a man who attained extra-ordinary inner energy accumulation. Up to now, I have not introduced myself much. What was written in my résumé might be all that I have. Though recently enlarged edition of my book 'Rainbow on the Dike Island' portrays my living history in it like a movie, this volume has as many as 530 pages, so the realm of propagation is rather narrow. So I summarize it hereunder to make it known.
If Jee Man-Won Is Known As Ordinary Man, My Research Result Will Perish
I have a faithful devotion in me which any ordinary human is hard to take after. I lived a self-denial life, invented two mathematical formulas and six mathematical theorems that were not existing in the world during when I entered the sate of absolute absorption. Until the day September 26, 1980 when I was granted Doctors' degree, I kept on inventing a computation method for warship repairing spare parts adequate inventory which the U.S Navy was unable to do. I had the gut to borrow 180,000 pages of investigation and trial documents from a lawyer Lee Yong-Woo saying I would do complete research, which no one could dare to attempt. I am a man of immense scale who had a firm determination to dig up the truth however long it would take, regardless of 10years or 20 years. Even from now, I have to make it widely known so that my research result can stay alive and the whole nation can survive. It is not for me only, but it is to save the truth of May 18th alive. If Jee Man-Won is recognized as one of common people, my research result will perish. If Jee Man-Won is recognized as a great man, my research result will survive. In one word, Jee Man-Won is a man of extra-ordinary research capability. To prove it in a word, it is the several inventions which are contained in my Doctorial thesis. To make this sort of mathematical inventions, you have to live a life of faithful devotion, self-denial and absolute absorption.
Who Else Walked Around Battle Field Having English Novels In Steel Helmet
The picture above was taken in an operation area in vietnam. The man in the center is Jee Man-Won. In the helmet on my head was a book of English short stories. Though it was dangerous combat area full of tension to where bullets could be flying in any time, it was like that I , at the age of 26, had planted very little apple trees. In 1974, I took a study abroad exam which was to select one officer from the entire Armed Forces of Army, Navy, Air Force and Marine Corps to be sent to Master's course in Administration Department of Graduate School in the U.S Naval Academy. In the exam, I obtained 97 out of 100 the first time in history, breaking the existing record. It was nine years after I graduated from Military Academy putting down the books. The reason I could obtain such a good mark in English exam was, because I kept on studying to the degree that I went around combat area carrying English book with me, as I wanted to improve even the sole object of my English. If you want to advance ahead of others, you have to link up the fragmented times to use it, and stimulate yourself not to get lazy. My attention like this has not been distracted up to now.
For 70 Years Since the Establishment of Graduate School in the US Naval Academy, Jee Man-Won Was the Only One Who Obtained Doctor's Degree in Applied Mathematics out from Master in Liberal Arts
Upon finishing Management Master's Course in 1974-75 period, I came back home, worked for the mission of introducing McNamara Defense Management System, and then entered System Engineering Department (Applied Mathematics) in the same Graduate School again(1977-80), and completed writing Doctorial thesis in only three years, which contains two mathematics formulas, six mathematics theorem and one algorithm.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Graduate School in the Naval Academy in 1909, Jee Man-Won was the First case when a Master in Management obtained Applied Mathematics Doctor's degree. Seen below are Certificate of Master in Management and Certificate of Doctor in Applied Mathematics, and a part of proving process of mathematical formula which I invented are also suggested.
This Is Self-Denial
The Certificate of my Doctor's degree has, different from any other certificate of any college, a remarkable legend that may attract attention of all mankind. My stomach got worse because of strain and oppressive feeling. When I sit still behind the desk, I felt heavy, had pins and needles in my femoral region and got sleepy. If things go on like this, I felt I had to end in failure. I visited an acupuncturist several times in 20 minute distance, but I could not afford to spend more time. So I got a handful pins from him. I pinned more than 30 pins on my belly everyday. Those around me tried to stop me saying it would cause big problem, but for me, it was a matter of life or death. My stomach turned to a hedgehog. The stomach and intestines seemed getting better, but physical strength got down and I was overpowered with drowsiness. I came down the wooden stairs from upstairs and started to run staggering. If you skip one day, you will easily skip over ten days because that's what our mind is made to be. If you don't want to skip over ten days, you must not skip even one day. I ran in the rain, and I ran even around two O'clock at night. This is self-denial. This is not a thing that anyone can do.
This Is The State of Absolute Absorption
At the time of running, I always ran with a math problem in my mind which I had to solve. My brain was trained in this manner, and it was like a big blackboard. The mathematical signs, like those in above picture, were expanded on the blackboard in my mind. This is the state of absolute selflessness and absolute absorption. The blackboard in my mind expanded even when I was sleeping. I kept solving the problem even in sleep. When I got the solution in my dream, I woke up fast and noted in down. This is self-denial, and the state of perfect devotion and absorption. It is impossible to invent new math formula and new math theorem without going through this process of absolute absorption. New invention and new creation are impossible to be born without this process of absolute absorption.
Chief Professor Explains the Greatness of My Inventions
Below picture has the moment when I was granted Doctor's degree from Graduate School in the US Naval Academy on October, 1980. In a glimpse, it looks to have nothing new. But this one picture contains remarkable history and meaning. On September 26, 1980, the Graduate School of the US Naval Academy produced about 500 Masters. But I was the only one who were granted Doctor's degree. Four geniuses from Israel, Sweden, America and Canada, all of them the brightest man, were expecting to share the blessing with me, but they failed because they were not successful to invent 'something new in their thesis'. Their families caught me and wept. The professor in charge explained for a while what Jee Man-Won invented and what present Jee Man-Won gave to the US Navy. A lot of Korean residents in America gathered to come there and shed tears watching it. The tears were for their appreciation that Jee Man-Won raised Korean self-respect for them, and that they were moved by the marvelous achievement I made.
Jee Man-Won, Treated by Lockheed Martin Directors as A State Guest
The Picture below are the ones I took out from the album which I received from Lockheed Martin Corp. in 1990. These pictures were taken when the Lockheed Martin, the biggest defense industry in the world, treated me as a state guest. Were the Lockheed Martin directors suffering from mental disease to invite Jee Man-Won on a special occasion, to give me the best treatment which they would offer to head of foreign country, to take picture to make an album and sent it to me? It was because I taught them new analysis conception that "when you buy Fighters, you are not buying Number of Fighters but you are buying Time in the Air". Also because I taught them 'Availability computation formula' which I dug up in my Doctorial thesis. They said that their way of expressing thankful appreciation for me was to offer me engine supply license. I returned this gigantic proposition to them. To be so rich like that was unbecoming to the beautiful canvas which I was painting on.
This Patriotic Acts, Who Else Would Have Done
As soon as I returned home after getting Doctor's degree in September in 1980, I was called to KCIA and started to work there. I usually made research on the mode of North Korean maneuvering practices there. After that till I retired as a colonel in 1987, I worked at Defense Institute as a responsible researcher, and made research on Armed Forces defense readiness and military arms supply system. At the top of high mountains in the country, there are Air Force radar bases and air defense artillery units. Nobody asked me to, but I visited to the tops, almost 80 percent of them, and evaluated their operational capability. I also visited costal radar bases, made analysis on them and reported it directly to then Defense Minister Yoon Sung-Min. If without patriotism, there would be nobody who would do this kind of difficult work other than his own mission.
Whenever Jee Man-Won appeared, all the military units got extremely nervous. So each unit prepared an organization of 'countermeasure team to Jee Man-Won'. I assigned responsible managers for all military supplies which had been recognized as free goods like air and water, and installed data processing system to process accounting. This was a big revolution that implanted cost conception to all military units. Because of me, resources management staff came into being in each independent unit, computing systems were installed in every unit, and computing personal entered with them. Armed Forces changed its shape, and national tax were economized. This revolution of defense resources management spread to all administration offices.
Upon Retiring as Colonel, I Became Professor at the Graduate School of US Naval Academy
Upon retiring as colonel in February, 1987, I went to America, served at the Graduate School of US Naval Academy as a professor for three years (1987-89). After then, I returned home, devoted myself to doing activities such as doing commentary on broadcasts, writing books and columns, giving lectures as a free-lancer in an effort to implant system management in the state and industries. Then as the country began to turn left-leaning, I formed an axis of anti-Communist movement, and have been struggling against communism. Wherever Jee Man-Won went, there was always a wind blowing.
Who Except Me Ever Had Passion and Guts to Do Research on the 180,000 Pages Regardless of 10 or 20 Years
Who else ever had the passion, daring guts and huge scale to borrow 180,000 pages of investigation and trial documents from a lawyer Lee Yang-Woo, who defended Jon Doo-Hwan, and take it in by a truck to make research on the May 18th? Where was anyone other than me who had the great spirit to come out to attack and destroy the strong fortification of the sanctuary of May 18th? Who else except me put the will into practice that "I must disclose the truth of May 18th however long it may take regardless of 10 or 20 years", giving up universal human life of being devoted to making daily money? I am different from others in mind, ways of thinking, accumulated inner energy, magnitude of scale and life itself.
Jee Man-Won Is a Galileo of Korean Version
The inner-energy Jee Man-Won accumulated is the one which no ordinary human can attempt to do. Galileo was a scientist in the state of absolute absorption, and Jee Man-Won is also a scientist who achieved new inventions in the state of absorption. Galileo was a man in the times of 1600s. BC 600s was the times of Pithagoras. For 2,200 years long since science opened its gate, mankind in the world believed geocentric theory. Only after 2,200 years passed, Galileo made a new discovery of heliocentric theory. But this made Galileo a heresy.
As for me, I've been made to a heresy by those who have been believing the 'history of democratization' just because I denied their 'history of democratization', which has been hardened merely for 38 years, and contented 'history of guerilla'. Many people know what the Reds and Jonra-province people have been doing, and now they deny the history of democratization', -- 'How that kind of human can do any pro-democracy movement?' -- Many people think that Jee Man-Won is a Galileo of Korean Version. They recognize that Jee Man-Won was a patriot and very believable man. In conclusion, Jee Man-Won is a Galileo of Korean version. Galileo changed geocentric theory to heliocentric theory, and Jee Man-Won changed the 'history of democratization' to 'history of guerilla'
2018.11.20.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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