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27세에 아무도 나처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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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11-21 09:01 조회4,68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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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27세에 아무도 나처럼 못했다
1970년 5월, 사령부에서 내주는 헬기를 타고 월남의 옛 고향인 뚜이호아로 다시 왔다. 소위와 중위시절에 22개월을 보냈던 뚜이호아, 1년만에 다시 와 보니 비록 전쟁터라 해도 친숙하고 반갑게 느껴졌다. 내가 맡은 제2포대는 뚜이호아 번화가에서 북쪽으로 2㎞ 떨어져 있는 소복한 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었다. 50m의 능선 고지였다. 능선의 높은 곳에는 보병 제2대대 본부가 1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낮은 곳에는 내가 지휘할 제2포대가 배치돼 있었다. ‘기지’(base)라고 해봐야 포와 차량과 목재 더미가 어지럽게 널려진 붉은 흙바닥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포대는 베트콩이 우글거리는 봉로만 위 바위산 속에 요새를 짓고 생활했었다. 집요하기로 이름난 베트콩이 자기들 소굴로 겁 없이 들어온 한국군 기지를 그냥 두지 않았다. 틈틈이 박격포를 쏘아댔다. 어느 날, 박격포가 탄약고에 명중했다. 탄약고 속의 화약에 불이 붙어 탄약고에 쌓아두었던 포탄들이 몇 시간에 걸쳐 연쇄적으로 폭발해 많은 사상자가 났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언제라도 베트콩이 또 공격해 올 것이라는 데 대한 공포 분위기가 확산돼 있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황급히 이곳으로 피난을 오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이 붉은 흙바닥에 새로운 벙커 기지를 건설해야 했다. 불도저가 뾰족한 봉우리를 평평하게 밀어 놓았다. 기둥으로 사용하기 위한 사각 목재들이 무더기 단위로 여기 저기 쌓여 있었다. 새로 이동해 온지라 곳곳에 텐트가 쳐져 있었다.
포대의 동쪽에는 맑고 깨끗해 보이는 시원한 바다가, 남북으로 길게 흐르는 해안선을 끼고 전개돼 있었다. 인도지나해였다. 해안선을 따라 기나긴 백사장이 흘렀고, 백사장을 따라 야자수와 관목들로 어우러진 숲이 또 다른 띠를 이루어 남북으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숲을 따라 1번 도로가 남북으로 뻗어 나갔다. 포대의 동쪽을 제외한 3면은 모두가 검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서쪽에 펼쳐있는 정글산은 수 백리 밀림지대로 이어지는 광대한 산맥의 한 자락이었다. 포대와 산기슭까지의 거리는 불과 1㎞, 논과 밭이 그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베트콩은 산에서 우리 포대를 빤히 내려다보면서 박격포를 쏘지만 우리는 망망대해와 같은 밀림 산 속 어디에서 그들이 박격포를 쏘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베트콩이 봐줘야 살 수 있는 처지였다.
병사들은 하루하루를 공포 속에서 보냈다. 낮이면 진지 공사에 땀을 흘렸고, 밤이면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 올리면서 보초를 서야 했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불안하고 짜증났다. 기지 건설을 완료하려면 6개월 이상 걸린다고 했다. 여기에 기후까지 병사들을 괴롭혔다. 5개월 후면 우기가 다가오고, 우기가 되면 장대비가 내려 건설 작업이 불가능해 진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늘에선 6월의 태양이 붉은 열을 펑펑 쏟아냈고, 땅에선 숨을 콱콱 막을 만큼 맹렬한 지열을 내뿜고 있었다.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많은 병사가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경상자들은 부대에 남아서 텐트 속에 쪼그리고 앉아 발등과 배에서 나는 진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들은 포대장이 다가 가도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짜증스런 얼굴을 했다. 부임한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단 한 개의 지붕도 마련돼 있지 못한 이 흙바닥에 박격포가 날아왔다. 병사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사격이 멈추자 목재 더미와 차량 그리고 포 옆에서 병사들이 툭툭 털고 일어섰다. 다행이 박격포가 변두리에만 떨어졌다. 박격포가 봐준 것이다.
작업 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불안한 요소가 감지됐다. 단지 느낌 하나로 코멘트를 가했더니 갑자기 하사가 표범으로 변했다. “포대장님, 그렇지 않아도 짜증나 죽겠는데 이거 왜 이러십니까?” 양손을 허리에 얹고 눈을 아래위로 부라리며 마치 한번 해보자는 투였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아무리 파월된 병사들이 거칠다 하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말없이 작업장을 떠나 포대장 천막으로 왔다. 괘씸하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솟았지만 처음부터 감정을 내세울 일이 아니었다. ‘맞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야 해!' 입장을 바꿔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하사는 내게 대든 것이 아니라 포대장에게 대든 것이다. 포대장이 그들의 적이었던 것이다. 과거의 포대장이 병사들을 고압적으로 다루면서, 병사들의 애로에는 냉담했다고 한다. 더구나 전임자는 돈을 밝혔다고 했다. 굵은 구리 전선, 놋쇠 탄피, 쌀, C-레이션 등 돈 되는 것이면 무조건 챙겨서 고국으로 보내고 또 시중에 내다 팔았다고 했다. 이런 포대장에 대한 병사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했다. 급기야는 한 병사가 술을 마시고 총기를 휘둘러 3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했다. 이 엄청난 사고로 인해 전임 포대장이 처벌을 받아 조기귀국을 당했고 바로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간 것이다.
설사 포대장이 잘 해준다 해도 환경 자체가 병사들에게는 엄청난 불만이었다. 언제 박격포에 맞아 죽을지 몰랐다. 끈끈하게 무더운 데다가 모기마저 극성을 부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날이 새면 진지공사라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공사 일을 하다가 사격명령이 떨어지면 100m 경주 식으로 달려가 포를 쏘아야 했다. 밤이면 모기떼와 싸우고 졸음과 싸워가며 보초를 서야 했다. 똑같이 파병돼 왔건만 동네 친구는 군수부대에 배치돼 편하게 놀러 다니고 군수품을 내다 팔아 한 밑천 잡았다는 소식들이 들렸다. 이런 환경 속에서 짜증이 안 나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대대에는 포대장 한번 나가 보겠다고 줄을 서있는 고참 대위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겨우 임관 4년짜리의 애송이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데 대해 매우 불쾌해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겐 구경거리가 하나 생겼다. 애송이인 내가, 거친 병사들을 만나 불과 한 달을 견디지 못하고 쫓겨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지켜보는 재미였다. 지금 이 하사로부터 당하는 시련이 그들에겐 구경거리가 될 수 있었다. 성공이냐 실패냐의 분수령이었다. 벌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계급 자랑, 성질 자랑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만은 무엇인가 달라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나폴레옹과 한니발을 생각했다. 만일 그들이 내 입장에 서있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들 역시 병사의 마음을 얻으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나폴레옹 같은 영웅도 병사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 그가 엘바섬에서 탈출해 나오자 왕실의 병사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 그는 웅변을 통해 그 병사들의 마음을 되돌렸고, 그 병사들을 데리고 나가 워털루 전투를 치렀다. 한니발은 혈혈단신 이국땅 스페인에 건너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청년들의 마음을 잡았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병사의 수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그는 그 이방인 병사들을 이끌고 역사상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에서 승리를 거뒀다. 예수를 생각했다. ‘그분처럼 훌륭한 위인도 아무런 잘못 없이 온갖 수모를 당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이 잘났다고 이만한 수모에 자존심을 상해야 하나. 제자들이 그를 따른 것은 그가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기 때문이야’ ‘내가 화를 내고 때리면 앞에서야 잘 하는 척 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뒤에서 내게 해코지를 할 거야. 몸은 잡아봐야 소용없어. 마음을 잡아야지, 마음을!'
마음을 얻으려면 진실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보여야 했다. 달콤하고 번드레한 웅변은 몇 사람의 마음을 얼마간 유혹할 수는 있어도 부하들을 오래 감동시킬 수는 없었다. 계급 하나로 모든 부하들이 처음부터 잘 따라 준다면 이 세상엔 유능한 리더도, 훌륭한 리더도 없었을 것이다. 월남에 지원해 온 많은 병사들은 집안의 어려운 살림을 걱정했다. 이런 생각은 장교들에 더 많았던 것 같다. 진급과 보직이 돈으로 거래되고 훈장도 돈으로 거래된 사례들이 많았다. 푼돈 때문에 병사들끼리 총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에 대한 충동이 있는 한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병사들에게 돈을 버리고 이역만리에서 겪는 병영생활을 추억 만들기의 생활로 바꾸어 보자고 설득할 생각을 했다. 돈보다 더 귀중한 것이 젊은 시절의 추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나는 작업 중인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나는 여러분의 마음을 잘 압니다. 여러분의 동료들이 군수부대 등에서 돈도 벌고 휴양지에도 다니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는 뭐냐. 매일 같이 박격포 공포에 시달리고 끝없는 진지 공사에 노동자처럼 일하면서 고단한 생활만 하다가 손에 쥔 것 없이 허무하게 귀국하는 게 아니냐?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돌려보십시오. 어렸을 때 우리는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말을 배웠습니다. 안에서 얻으려면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능력을 기를 때이지 돈을 벌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 나이에 돈을 쉽게 얻으면 정신이 파괴됩니다. 정신이 파괴되면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생 내내 쉽게 버는 방법만 생각하다가 험하게 늙을 것입니다. 군수부대 친구들이 버는 돈은 그들을 파멸시키는 독약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원정군 자격으로 파병됐습니다. 이러한 기회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보물입니다. 우리의 형들에게도, 동생들에게도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파병 기회 자체로 우리는 엄청난 것을 얻은 것입니다. 늙어서 자식들에게 인생을 회고해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병사로서 총을 들고 정정당당히 싸웠다고 말해주고 싶습니까, 아니면 남들이 싸우고 있는 동안 뒤에서 치사하게 돈을 벌어왔다고 회상해 주고 싶습니까? 부산항을 떠날 때 가족들이 나와서 무엇을 당부하던가요? 돈을 벌어 오라 하던가요, 손끝 하나 다치지 말고 몸 성히 다녀오라고 하던가요? 이 상황에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습니까? 얻는 것 없이 인격만 치사해 집니다. 우리 그런 것을 잊기로 합시다. 우측에 보이는 저 산에서 여러분 또래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목숨을 많이 잃었습니다. 몸속에서 마지막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그게 돈이었겠습니까? 지금은 추억을 쌓을 때이지 돈을 벌려 할 때가 아닙니다. 저 아름다운 바다가 눈 아래 보입니다. 끝없는 백사장이 보입니다. 야자수 잎들이 보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한국에 어디 있던가요? 여기에서 찍는 사진 한 장이 백만금보다 더 귀합니다. 이다음 늙었을 때, 그런 사진을 어떻게 찍어내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사진을 찍읍시다. 그리고 재미있게 생활해 봅시다.”
나는 육사생활을 독서로 보냈다. 그래서 하기군사훈련 대대장 생도였을 때에도 1,2학년 후배들을 집합시켜놓고 이런 정신적 터치를 많이 했었다. 육사에서 1,2학년 후배들이 그러했듯이 병사들의 눈알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복잡했던 마음이 단순하게 정리되는 듯 했다.
전투복 바지 궁둥이까지 잘라 입어라
“이제부터 몇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입고 있는 전투복 바지, 잘라 입으십시오. 궁둥이까지도 좋고 무릎까지도 좋습니다. 이 더위에 치렁치렁한 바지를 왜 입습니까?”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편리함을 추구한다 해도 규정된 군복을 자르는 행위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귀를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식사 때면 여러분들은 식기를 들고 줄을 섭니다. 거지 될 일 있습니까? 식당에 노트를 비치하겠습니다. 분대마다 사람을 보내 노트에 시간을 예약하십시오. 다른 분대와 중복이 되지 않도록 기록하십시오. 분대별로 가서 오붓하고 여유 있게 식사를 하십시오. 한 시간에 걸쳐 잡담하며 식사를 해도 좋습니다.” “앞으로는 일체의 집합이 없습니다. 일조점호, 오전과 오후의 일과개시 집합, 일석점호 모두를 생략합니다. 집합해 있다가 박격포가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기상시간은 6시, 취침시간은 10시입니다. 나머지 시간은 분대장 인솔 하에 사용하십시오. 세수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팬티를 입던 안 입던 자유입니다. 아침 식사를 10시에 하든 12시에 하든 분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초롱초롱한 눈빛이 내 얼굴에 집중됐다. 순종과 경이의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분대장을 포함한 모든 간부들은 매일 밤 나와 회의를 해야 합니다. 내일 무엇을 해야 하며, 일을 할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이며, 사고가 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이며,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의를 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군대에서 나가야 합니다. 사회에 나가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어떻게 당했는지 요령 있게 호소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가져야 할 것 아닙니까? 매일 토의를 하면 아이디어가 좋아집니다. 자기의 말을 요령 있게 전달하고, 남의 말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능력이 향상됩니다. 이런 훈련은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병사들에게 포대장은 귀신이었다
중대장급 초급 지휘관은 매월 1회씩 병사와 신상면담을 하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우기 철이 오기 전에 벙커 식 내무반 8개동과 상황실 및 포대장 벙커의 건축을 서둘러 끝내야 하는 병사들을 불러 가족사항으로부터 애로사항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묻는다는 건 짜증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규정이라 해도 나는 1년 내내 병사들을 개별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대신 병사들이 쓰는 편지를 보기로 했다. 들어오는 편지는 개봉할 수 없어도 나가는 편지는 보안검열의 대상이 됐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보안검열을 하사관에게 맡겼다. 숫자가 담겨 졌는가만 체크한 후 편지를 봉해서 보내도록 했다. 하지만 나는 편지 읽는 일을 스스로 맡아 했다.
개인별로 신상 파일을 만들어 놓고, 편지내용과 수신인과의 관계를 메모했다. 오는 편지는 주소와 성명만 메모했다. 한두 개의 편지는 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많이 모이니까 신상파악이 제대로 됐다. 신상면담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사실들과 느낌들이 시시각각 들어 있었다. 트럭 운전병이 면허증 갱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옛날 면허증은 쉽게 따지는 것도 아닌데다, 3년마다 갱신해야 했다. 시한을 넘으면 면허증 자체가 취소됐다. 이를 회복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지옥 같은 획득 과정을 거치면서 돈을 써야 했다. 그런데 그 갱신 기간이 파월 기간 중에 걸려 있으니 얼마나 걱정이 됐겠는가? 나는 경남 도지사에게 정중하게 편지를 썼다. “전투에 전념해야 할 병사가 이런 일에 마음을 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고국의 모든 국민이 파월장병들을 위로합니다. 매일같이 편지와 위문품을 보내주십니다. 존경하는 도지사님, 이 병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대위의 간절한 소망에 도지사가 매우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주었다. 도지사의 서명날인이 들어 있는 그 편지를 고이 간직했다가 귀국해서 운수교통과에 제시하면 무조건 갱신시켜 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당번병을 통해 그 병사에게 전달했다. 생색내는 것이 싫어서였다. 또 다른 편지를 읽어보니 중태에 빠진 어머니를 걱정하는 병사가 있었다. 그를 위해 대대장께 특별휴가를 부탁했다. 주월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보잉 707 여객기의 좌석 하나를 얻어냈다. 그리고 그 병사를 불렀다.
“어머님이 몹시 아프시다며? 자네, 독자라고 했지?”
“…….”
병사는 눈만 크게 떴다.
“차를 내 줄 테니 대대본부 인사과로 가봐. 보름간의 휴가다. 사이공까지 가면 고국에 가는 보잉 707 여객기를 탈 수 있어. 모래 오전 11시에 떠나는 보잉기에 자네 자리를 마련했어. 잘 갔다 와.”
나는 그에게 20달러를 봉투에 넣어 주었다.
“포대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996년 어느 날 나는 수원 소재의 경기대학 최고경영자 과정에 특강을 나간 적이 있었다. 앞에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학생이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그는 자기의 이름을 댔다. 바로 이렇게 휴가를 보내주었던 부하였다. 그는 지금은 귀뚜라미 보일러 대리점을 많이 가진 부자가 됐다고 했다. 그날, 그는 내게 동원참치 스페셜과 술을 대접하며 이런 말을 했다. “포대장님, 그때는 참 크게 보이시더군요. 패기의 화신이셨죠.” 당시 47kg의 바싹 마른 체구가 그때 당시의 병사들 눈에는 크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또 다른 병사는 내게 많은 보약을 만들어 주고 금전적 지원도 하고 있다. 또 다른 병사는 쌀을 보내고 인삼을 보내준다.
또 다른 편지를 읽었다. 태권도 5단인 박병장이 갑자기 세상을 비관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평소에 쾌활하던 녀석이 왜 그럴까?……혹시…?'
나는 위생병을 불렀다.
“어이, 김상병. 박병장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 볼래? 그 녀석 혹시 말 못할 병 걸린 거 아닌지 말야. 내가 그러더란 말은 하지 말고. 눈치 못 채게 물어봐.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곧 보고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위생병이 다시 왔다. 눈이 커다래 가지고.,
“맞습니다. 그런데 포대장님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셨습니까?”
“얼마나 심하디?”
나는 연대 군의관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그 녀석으로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명약(?)을 구해 위생병에게 건네주었다. 포대장이 구해줬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 당부하면서. 이런 조치가 취해질 때마다 소문은 그날로 모든 병사들에 퍼졌다. 포대장은 자기들과 일일이 대화하지 않고서도 병사들의 행동과 애로를 귀신처럼 꿰뚫어보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그리고 포대장이 병사들에게 일일이 생색내지 않고 애로를 해결해 주듯이 그들 역시 포대장에게 생색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일을 찾아 했다.
‘내 새끼’ 의식
하루는 연대 기지에서 보급품을 수령해오던 병사가 헌병 초소에서 뺨을 맞고 왔다. 인사계와 중위가 쉬쉬하며 소곤거리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뭐야?”
“아, 포대장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가 맞았다구? 어서 말해봐.”
“김병장이 연대 헌병 초소에서 C-레이션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뺨을 맞고 왔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김병장을 불러와.”
“포대장님, 졸병들은 원래 다니면서 헌병에게 맞게 돼 있습니다. 예사로운 걸 가지고 무얼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진정하십시오.”
2년 후배인 중위의 말이었다. 그는 후에 2성장군으로 예편했다. 나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났다. 나는 우람하게 생긴 15명의 고참들에 총을 장전시킨 후 트럭에 태웠다. 날은 벌써 어두웠다. 트럭을 타고 가다가 베트콩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연대 정문 헌병대에 도착했다.
“야, 이 헌병 놈들 포위해.”
헌병들이 덜덜 떨었다. 뺨을 맞은 김병장을 앞으로 내세웠다.
“어느 놈이야, 나와.”
“접니다.”
“너, 임마 계급이 뭐야?”
“네, 상병입니다.”
“오라, 너 바로 하극상을 저질렀구나. 너 내일 영창에 넣을 꺼다.”
겁이 나자 그 녀석은 다시는 안 그럴 테니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한동안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다.
“야, 사단 헌병대장에게 전화 걸어.”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퇴근해 버렸다. 헌병 세 녀석 모두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비는 모습을 보는 병사들의 얼굴에 만족감이 흘렀다. 남의 부하들에게 혼만 내주고 그냥 돌아서 온다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져갔던 C-레이션 5개 박스를 던져 주면서 앞으로 필요하면 병사들에게 달라하지 말고 내게 직접 전화하라고 말했다. C-레이선 1개 박스는 당시 시중에서 5달러에 거래됐다. 그 후부터 녀석들은 우리 포대 차번호 ‘30포 2-’자만 보면 무사 통과시켰다. 이는 모든 병사들에게 신나는 무용담이 됐다.
1970년 월남 포대에서 꽃 핀 진중 토의문화
분대장 이상과의 간부회의가 매일 2시간씩 계속됐다. 첫 번째 회의는 “어떤 내무반을 지어야 하는가”가 의제였다. 베트콩의 박격포 공세 때문에 내무반은 지붕을 지면과 일치하도록 땅에 묻으라는 상부 지시가 있었다. 빨간 진흙 속에 내무반을 지붕까지 묻으면 더위에 숨이 막히고 냄새가 나며 우기에는 습기가 차고, 마루 밑에서 물이 솟아 밤새내 물을 퍼내야 했다. 아무리 상부의 명령이라지만 이러한 내무반에서는 나도 살기 싫었다. 밤늦도록 나는 병사들이 남기고 간 작업장에 쪼그리고 앉아 궁리를 했다. 이틀만의 궁리 끝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물을 퍼내지 않으려면 물이 마루 밑에서 자동적으로 흘러나가도록 해야 했다.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바닥을 좌우로 수평이 되도록 판다. 그런데 나는 가로와 세로가 다 같이 한쪽 귀퉁이로 기울어지도록 땅을 팔 생각을 했다. 네 개의 코너 중에서 한 개의 코너를 향해 물이 흐르도록 경사지게 파는 것이었다. 마루 밑에서 샘물처럼 솟아난 흙물은 가장 낮은 한쪽 코너를 향해 내려갈 것이고, 거기에 드럼통을 묻으면 맹물은 위에 뜨고 흙은 가라앉게 된다. 맹물은 파이프를 연결해서 자연스럽게 배수시키고, 흙은 가끔씩 마루 뚜껑을 열어 퍼내면 될 일이었다.
쾌적한 내무반, 바람도 잘 통하고 채광도 잘 되고 시원한 내무반을 짓기 위해서는 벽의 50%만 땅에 묻기로 작정했다. 병사를 박격포 파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철판과 흙으로 덮인 튼튼한 지붕을 벽에서 3m 정도 길게 내뽑기로 작정했다. 지붕 위에 떨어지는 박격포는 모두 안전할 것이다. 지붕 밖에 떨어지는 포탄의 파편이 내무반에 들어오려면 3m의 거리를 수평으로 이동해서 직각으로 낙하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동하는 파편은 없다. 지붕 하나만 넓게 빼면 내무반의 50%만 땅에 묻어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그리고 신이 났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내 생각을 지시하면 병사들은 피동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다음날 회의에 이 문제를 회부했다. “내무반을 지금 짓는 방식대로 지으면 우기 철에 마루 밑에서 샘이 솟는다. 그러면 밤새내 물을 퍼내야 한다. 물을 퍼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집을 지을 수는 없을까?” “그런 방법이 있으면 다른 부대에서 벌써 했게요?” 좀 늙어 보이는 상사가 가소롭다는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다. 기분이 좀 상했지만 모른 체 했다. “방법이 있다.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해결책도 있다. 반드시 있으니 찾아내야 한다. 자, 우리 분대장들 중에 누가 먼저 말해 볼까?” 내 눈이 가는 데마다 하사들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얼굴을 숙였다. “야, 맥주 한 깡씩만 가져와라. 커피 좀 끓여오고. 마시고 나면 말해야 해” 10여분 후에 제2분대장을 지명했다. 그는 말을 약간 더듬어서 고문관으로 불렸다. 그가 얼떨결에 한참 중얼거렸다.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중사가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니는 마, 좀 알아 묵도록 말해라. 도대체 무슨 말인겨?” “아 아, 김중사, 여기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모두 다 편하게 말하는 대화의 장소입니다. 2분대장 말을 들으니 나는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가 한 말 중에서 살릴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를 찾아내 내가 생각해낸 방안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듣기에도 그럴듯한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마 맞습니다. 포 포 포대장님, 바로 그런 말인데 제가 말하는 게 서툴렀습니다. 감사합니다. 포 포 포대장님.” 나는 김중사를 돌아봤다. “거 봐요. 김중사, 2분대장이 일리 있는 말을 했잖아요.” 나는 그 하사에게 여러 번 발표 내용을 따라하게 했다. “자, 이렇게 말하니까 알아듣겠나?” “예, 알아먹겠습니다.” 이 얼마나 멀고 먼 길인가? 나는 토의가 막힐 때마다 힌트를 주면서 하사들을 표 나지 않게 유도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내가 생각했던 결론이 그들로부터 나왔다. “첫째, 지붕을 넓게 내뽑을 것, 둘째, 바닥을 경사지게 팔 것, 이 두 가지만 준수하고 각 분대는 마음대로 집을 지어라. 원형으로 지어도 좋고, 빨갛게 지어도 좋다. 이의 없지?”
병사들의 창의력이 전투력
그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들이 시행하는 것이라 주인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토의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하루를 거르면 열흘을 거를 수 있다. 열흘을 거르지 않으려면 단 하루도 거르면 안 된다. 하사들은 매일 무엇을 착안해야 포대장에게 예쁨을 받고 동료들에게 쭉정이가 안 될까 생각하면서 일했다. 분대원들의 도움도 받았다. 내무반에서는 분대장을 중심으로 모든 병사들이 토의를 했다. 착안사항이 날로 예리하고 다양해 졌다. 어제까지는 예사로 지나치던 것들이 오늘은 문제로 부각됐다. 관찰력이 향상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4개월을 훈련하니까 다음부터는 내가 참석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검열이나 전투력 점검이 언제 있는지 등에 대한 외부 정보를 얻어 무전기로 포대에 알렸다. 알리기만 하면 금방 시행됐다. 이처럼 시스템을 설치하고 궤도에 올리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단 시스템이 돌아가고 나니까 포대장은 여유를 가지고 보다 큰 것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병사들은 그들이 갖게 될 내무반 설계를 매우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만큼 진도가 빨랐다. 6개월 이상이 걸릴 것이라던 작업이 불과 3개월 만에 끝났다. 병사들마다 철침대가 있었다. 내무반은 웬만한 가정집보다 더 깨끗하고 넓고 시원했다. 휴양을 가라고 해도 “여기가 최고”라며 가지 않았다. 나는 외부에 나가 교환병의 친절 정도를 체크했다. 교환병과 정문 보초병의 매너는 그 부대의 대외 이미지를 좌우했다. 지적만 해주면 교육은 하사들이 알아서 철저하게 시켜 주었다.
전투는 시스템이 한다
전쟁터에서는 포성이 자장가였다. 고요와 적막은 오히려 긴장과 공포를 유발했다. 필자가 너무도 곤히 잠들었던 어느 날 밤, 나민하 소위가 매복을 나가 모두 42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 1970년 11월이었다. 나민하 소위는 그날로 특진을 했고, 영웅이 되어 고국을 방문했다. 그가 김포에 도착하자 국회의원들까지 공항에 나와 그를 영접했다. 바로 그 매복전에서 우리 포대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나를 깨우지 않고 베트공 퇴로에 1,800발의 포탄을 밤새내 날렸다. 당시에는 미군이 포탄 사용량을 통제했기 때문에 하루 밤에 50발정도 밖에 쏠 수 없었다. 하지만 간부들은 필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배짱 좋게 1,800발이라는 엄청난 포탄을 밤새 쏜 것이다. 이로 인해 베트콩 18명이 퇴로에서 죽었다. 보병이 24명을, 우리 포병이 18명을 사실한 것이다. 베트콩들도 우리 포대를 향해 박격포를 쏘았다.
포대 장교들이 훈장을 탔다. 필자는 자다가 훈장을 받게 됐다. 간부들이 깨우지 않는 것은 필자의 조치가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필자의 몸무게는 47kg, 가끔 코피를 흘렸다. 월남전에서만 40개월을 보내고 있었으니 월남사람처럼 마를 만도 했다. 그래서 간부들은 필자가 과로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챙겨주었을 것이다. 며칠 후 사단 포병사령부에서 이 1,800발을 문제 삼았지만 사령관님은 “포는 그렇게 운영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 감싸주셨다 한다.
내 시스템은 무질서 해 보였다
1970년 11월13일,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참모들을 이끌고 고지로 날아와 나민하 소위와 그의 부하 병사들에는 물론 필자와 필자의 부하들에도 화랑무공훈장을 달아주었다. 그런데 그 후 두 달 정도 지나자 사단부관참모부에서 중위가 찾아와 행정착오가 발생해 화랑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인헌무공훈장으로 바꾸어야 하니 화랑무공훈장을 돌려 달라 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인헌도 화랑도 다 내겐 필요 없으니 그냥 가져가고 다시 오지 마시오” 하고는 화랑무공훈장을 던져 버렸다. 나는 사이공 사령부에서 전속부관을 하면서 사단 부관부 참모들이 돈을 받고 훈장을 판다는 부끄러운 말들을 많이 들어 그 중위가 그런 심부름으로 왔을 것이라고 직감했기에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 자신이 훈장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훈장은 이렇게 해서 인헌무공훈장이 된 것이다.
부대에 포대장은 없는 존재와도 같았다. 단체 행동도 해 본 적이 없으며 그들을 집합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두가 그들 마음대로 했다. 마음대로 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포대장이 있었다. 사단에서 소령이 지휘검열을 나왔다. 그가 왔을 때 9개 분대들은 제각기 행동했다. 어떤 분대는 영내 25m 시격장에서 사격을 했고, 어떤 분대는 포를 가지고 훈련을 했으며, 어떤 분대는 인접 분대와 배구를 했고, 어떤 분대는 내무반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분대단위로 작성된 시간표가 포대장에게 제출됐기 때문에 포대장은 앉아서도 각 분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검열관의 눈에는 포대가 오합지졸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포대가 군대가 아니고 개판”이라며 나의 직속상관인 대대장님에게 귀띔을 했다. 그러나 당시 이신오 대대장님은 싱긋이 웃으며 2포대장은 절대로 그런 포대장이 아니고, 2포대는 주월사령부에까지 잘 알려져 있는 모범부대라며 포대의 생활개념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드셌던 병사들은 어느새 양같이 순해졌고 행동이 민첩했으며 포사격과 소총 사격이 가히 경지에 올랐다. 그들은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서 했다. 어느 날 대대본부에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십여 대의 차량이 분해되어 있었다. 적재함을 분리해 해묵은 녹을 긁어낸 후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들은 포를 분해하여 녹을 제거하겠다고 졸랐다. 그들의 등쌀에 못 이겨 나는 사단에 부탁해서 병기전문 하사관을 지원 받아 포의 정밀성이 파괴되지 않도록 지도케 했다. 그의 감독과 지도하에 포대원들은 단 하루 만에 모든 포를 새 포로 둔갑시켰다. 수류탄, 탄창, 소총탄약도 반질반질하게 기름으로 닦았다. 이 모두는 내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병사들의 생활습관이 돼버린 착안과 부지런함이 스스로 찾아낸 일들이었다.
과학적 지도가 곧 명중력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소총 사격에 관한 것이다. 한국에서나 월남에서나 소총 사격장은 부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안전지대에 설치돼 있다. 병사들이 사격을 하려면 거창하게 날을 잡아 부대 단위로 행군해 나가야 했다. 1개 분대가 사격을 하는 동안 나머지는 소위 PRI라고 하는 사격 자세 연습을 했다. 땡볕에 사격을 할 때에는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사격장에서는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군기 잡는 얼차려가 당연한 과정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병사들은 사격하러 나간다는 말만 들어도 주눅이 들고 상을 찡그린다. 사격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각종 기합이 주어졌다. 사격점수를 정신점수로 착각하는 것이다. 정신이 똑바르지 않기 때문에 사격점수가 좋지 않다는 신념하에 기합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신자세를 강조하는 식으로는 사격실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100%의 병사가 100점 맞은 사격시험
어떤 지휘관들은 무조건 많이 쏴봐야 한다며 훈련의 양을 강조한다. “실탄을 많이 쏘아봐야 해. 거기에는 못 당한다니까” 하지만 나의 생각은 이들과는 달랐다. 나는 불도저를 빌려다 영내 한쪽 끝에 사람 키 만큼 깊은 도랑을 파서 25m사격장을 만들었다. 사거리가 겨우 25m인 것이다. 파낸 흙은 표적(Target) 지점에 올려 쌓고, 병사들이 엎드리는 사격선에는 모래주머니를 깔고 지붕을 만들어 주었다. 이 사격장을 만드는 동안 바로 인접해 있는 보병 대대 참모들과 나의 직속 상급대대 참모들이 제발 그만 두라고 성화를 했다. “감히 어떻게 영내에 사격장을 만들 생각을 다 하느냐”, “뭘 몰라서 저런다”, “사고가 나면 어쩔려고”. 하지만 이 사격장은 따분한 병영생활에 상당한 활력소가 됐다. 모든 분대가 매일 한 시간씩 사격을 했다. 무조건 많이 쏴봐야 한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었다. 잘 쏘는 요령을 터득해야 했다. 사격의 요령이 무엇이냐에 대해 토의를 했다. 무조건 생각해 보라고 하면 착상을 하지 못한다. 마치 거북이 등을 뚫듯이 딱딱해 보이는 주제에 대해 실마리를 뚫어줘야 토의가 시작된다.
“사격을 잘 하려면 우리 무엇부터 따져봐야 할까?”
“자세입니다.”
“어떤 자세.”
“자세가 정확하고 숨을 멈추고 방아쇠 당길 때 조심하라는 거, 그거 있지 않습니까?”
“그게 뭔데?”
“왜 있지 않습니까. 애인 가슴을 만지듯 부드럽게 당기라는 것 말입니다.”
“야, 그건 방아쇠를 당길 때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고. 방아쇠 당기기 전에 정확히 조준을 해야 하잖아.”
“조준부터 잘 해야지요.”
“어떻게 하면 잘 하는데?”
여기서부터는 막혔다.
“야, 조준이라는 게 뭐냐. 조준 구멍을 통해 목표물을 조준대(가늠대) 위에 정확히 올려놓는 거, 그거 아냐?”
“맞습니다. 바로 그걸 잘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잘 하는 건데?”
여기에서 또 막혔다.
“조준구멍(가늠구멍)을 눈에 바짝 갖다 대면 구멍이 크게 보이냐 작게 보이냐?”
“크게 보입니다.”
“멀리 갖다 대면?”
“작아 보입니다.”
“자, 그러면 구멍을 크게 만들어 조준해야 정확하겠냐, 작게 만들어 조준하는 게 정확하겠냐?”
“구멍을 크게 해야 조준이 정확합니다.”
그제야 진수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 총과 몸이 30도 되게 하라는 식은 잊어버려. 가늠구멍을 눈동자에 더 가까이 갖다 댈 수 있도록 스스로 자세를 만들어 봐. 광대뼈가 나와 있으면 고개 꽤나 돌려야 할 걸”
병사들이 각기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폼을 개발하느라 열심이었다. 자신 있는 병사로부터 두 세 사람씩 가서 쏘았다. 하루에 9발만 주었다. 표적지에 각자의 이름을 쓰고 9발씩 쏜 후에 그 표적지를 분대별로 모아서 내 책상 위에 갖다 놓도록 했다. 명중도가 좋지 않은 표적지를 따로 뽑아내 놓고 표적지의 주인을 불러 모았다. 이들 중에는 제법 똘똘한 병사들이 많았다.
“너 왜 이렇게 막 쏘았냐? 눈이 안 좋으냐?”
“아닙니다. 눈도 좋고 신중하게 쏘았습니다.”
“그래?……. 그럼 성적이 좋았던 총을 좀 가져와 봐.”
명중률이 높았던 총들을 이들에게 주면서 쏘아보라 했다. 그랬더니 9발 모두가 거의 한 구멍으로 통과했다. 병사에 결함이 있었던 게 아니라 소총에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불량 소총이 18%나 됐다. 100점을 맞는다 해도 소총 불량 때문에 82점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불량 소총을 모아서 바꾸어 달라고 대대로 보냈다. 그 후 사단 병기부대장은 주월한국군 전체에서 불량 소총을 찾아내 교체한 부대는 당신부대 하나뿐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이런 사격생활을 한 지 10개월 만에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 전투력 점검단이 내려왔다. 이웃에 있는 대부분의 보병 중대들이 60점 이하를 받았다. 이런 부대들은 처벌을 받는다며 모두들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속한 포병대대 본부 기지에 있는 제1포대 역시 60점 이하를 받아 대대장님의 입장이 실로 난처하게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40분에 걸쳐 지프차를 몰고 달려가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 검열단장으로 파견된 강복구 해병 대령님을 졸랐다. 그는 부대 내에 지어진 정자에서 보병 연대장님과 맥주를 한잔 하면서 쉬고 계셨다. 그런 그를 내가 갑자기 찾아가 졸라댄 것이다. 하도 졸라대니까 연대장님도 거들어 주셨다. “지대위가 자기의 실력을 꼭 보여드리고 싶어 저토록 조르는데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던 검열단장이 드디어 명령을 내렸다. 연대장님이란 보병 제28연대장이었는데 그는 포병대위에 불과한 나를 예뻐해 주었다. 긴 작전을 하고 철수했을 때 내가 연대장님 이하 연대 지휘부 참모들을 초청하여 포대장 실에서 식사를 대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이공 사령부에서 매일 열리는 파티에 익숙해 있던 터라 파티에 대한 안목이나 매너가 야전에만 있던 장교들과 사뭇 달랐고 연대장님 이하 연대참모들은 식사 내내 나를 칭찬해주었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안면이 있었기에 연대장님이 나를 적극 도와준 것이다. 검열단장 강복구 대령님의 지시가 떨어지자 검열단으로 나온 영관급 장교들이 나를 쏘아 보았다. 검열단 앞에서는 모두가 벌벌 떠는데 새파란 대위가 감히 어디라고 겁도 없이 단장을 졸라 우리를 귀찮게 구느냐는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열단원들은 육회와 야채, 생선회 등을 차려놓고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맥주를 즐기려고 한판 벌이고 있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포대를 떠나 연대로 출발하면서 뾰족하게 솟아난 앞산의 시커먼 봉우리에 대고 105밀리 6문, 155밀리 2문의 포를 집중 사격할 수 있도록 미리 연습을 해놓으라고 했다. 검열관들이 내 부대의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약속한 대로 앞 봉우리에서 포탄들이 장엄하게 작렬했다. 그들을 환영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화가 잔득 난 소령들은 도착하기가 무섭게 당번병, 취사병, 행정병 등 평소 사격훈련에 열외 되기 쉬운 병사들을 포함해 무작위로 36명을 불러 모아 서슬이 시퍼런 표정으로 손등에 도장을 찍었다. 실 거리 사격장은 6중으로 둘러싸인 철조망 밖에 있었다. 검열관들의 명령에 따라 내 병사들은 50m에서부터 350m에 이르기까지의 표적지에 1인당 50발씩 사격했다. 내가 봐도 민첩하게 쏘았다. 이들은 탄창 속에 오물이 끼어 실탄을 잘 밀어내 주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탄창 내부를 분해하여 기름을 칠해 놓았다고 했다. 내가 연대로 출발한 시각에서부터 그들이 착안해낸 것이었다. 참으로 용의주도했다. 이런 걸 어찌 포대장 혼자서 다 착안할 수 있다는 말인가. 36명이 쏜 1,800발 100% 모두가 표적에 명중됐다. 그런데 매우 기이하게도 칭찬을 해야 할 검열관들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노려봤다. 도시 영문 모를 일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여보, 야마시를 쳐도 좀 그럴 듯하게 치소 100점이 뭐요, 100점이”
“제가 어떻게 장난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시면 좀 불편하시더라도 검열관님들께서 표적지를 손수 가져다가 꽂아 주십시오.”
이번에는 그들이 손수 병사들을 인솔해 나가 표적지를 설치했다. 그런데도 또 100점이 나왔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말을 했다. “여보, 포대장, 도대체 애들을 얼마나 잡아놨소. 아이들 움직이는 게 아주 민첩한데 저렇게까지 만들려면 애들을 얼마나 잡았겠소” 그들의 눈에도 확실하게 100점을 맞긴 했지만 그들은 도저히 100점으로 기록해 줄 수 없다고 했다. 100점으로 보고하면 자기들이 사령관에게 이상한 사람들로 비쳐진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나는 순간 머리를 회전하여 어떻게 하면 대대장의 입장을 살릴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면 1포대 점수와 우리 포대 점수를 합쳐 평균을 내 주십시오.” “알았소. 의논해 보지요.”
이렇게 해서 대대장님의 고민이 해결됐다. 대대장님은 내게 신세를 졌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는 그가 참모들의 온갖 고자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굳게 믿어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대대장님이 믿어주자 나에 대한 참모들의 간섭이 줄어들었다. 그만큼 자유공간이 확보된 것이었다. 흔히 군을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말들 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자유공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유공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확보해 내는 것이었다.
전쟁은 예술
해가 지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앞산이 온 주위에 망령 같은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이는 기지의 분위기를 마치 귀신이라도 곧 엄습해 올 것만 같이 음산하게 만들었다. 밤이 되면 산 밑에서부터 봉우리에 이르기까지의 넓고 높은 공간에 광솔불 같이 훨훨 타는 불꽃들이 날아다녔다. 짐승의 눈에서 내뿜는 불꽃이라면 겹겹으로 포개진 정글의 두터운 나뭇잎 층을 뚫고 나올 수 없었다. 그 음산한 불꽃들은 분명히 날아다녔지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포를 쏘아대면 없어졌다가 포가 멈추면 다시 돌아 다녔다. 그 불꽃들은 포의 위력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이것이 기분 나빠 나는 가끔씩 화력 쇼를 벌였다. 앞산에 대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기관총을 떠난 예광탄이 검은 공간에 붉은 색의 선을 그으며 산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신호로 모든 총과 포들이 기염을 토해 냈다. 105밀리 포, 155밀리 포, 무반동총, 기관총, 그리고 M-16 소총들이었다. 나의 포대가 벌이는 화력 쇼에 고무된 이웃 보병대대 병사들도 박격포 등을 동원하여 가세했다. 앞산을 향해 전개된 검은 공간은 총알들이 긋고 가는 붉은 선들과, 포탄들이 작렬할 때 퍼지는 주황색 섬광들로 가득했고, 기분 나빴던 공간은 이내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공간으로 변했다. 기지에서 나는 콩 볶는 소리, 온 산에서 작렬하는 파열음들이 뒤섞여 내는 화음의 잔치에는 그 어떤 록 음악으로도 구현해 낼 수 없는 힘과 박진감과 쾌감이 듬뿍 들어 있었다. 화력 쇼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이었다. 스스로 쏘아대면서도 스스로 감탄했다. 총 한 자루, 포탄 한 발의 의미는 미미했다. 하지만 집단이 내는 힘은 참으로 엄청났다. 바로 여기에서 병사들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터득했을 것이다. 드디어 쉭- 딱 하고 조명탄이 하늘 중턱에 켜지면서 바람에 나부끼며 흘러내리면 온 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진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총을 놓고 하늘을 보며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이것이 화력 쇼의 피날레였다. 이렇게 한바탕 하고 나면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확 풀리고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당시 미군 당국은 한국군이 쏘는 실탄과 포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른 부대들에는 실탄이 남아돌았다. 실탄도 부지런해야 많이 쏠 수 있었다. 나의 중사와 상사들은 실탄이 남아도는 부대에 돌아다니면서 남는 재고량을 수집해 왔다. 다른 부대에서는 배정 받은 실탄을 소화하지 못해 가끔씩 사격장으로 나가 소나기 식으로 사격해 버리기도 했다. 창고에 실탄이 너무 많이 쌓여 있으면 검열에서 지적 받기 때문이었다. 잠시 주제를 떠나 이와 유사한 한국군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군에서는 배당 받은 쌀이 남아돌았다. 갑자기 검열이 나오면 다급한 나머지 쌀을 뒷산에 지고 가서 땅에 파묻는 부대들도 있었다. 쌀을 부대에서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도록 하면 될 것을 ‘정확’을 기한다며 매일 인원을 파악하고, 그 파악된 인원에 맞추어서 쌀은 576g, 보리는 252g씩을 곱해서 배급해 주니까 쌀과 보리가 늘 남았던 것이다. 곧이곧대로 남는다 보고하면 상급부대 참모들은 행정이 귀찮아진다며 짜증을 냈다. “당신네 부대는 규정을 어기고 외박과 외출을 많이 보내지 않았느냐. 그래서 쌀이 남는 게 아니냐”는 등의 책임추궁도 했다. 이런 상급부대의 행태를 너무나 잘 아는 예하부대 간부들은 “배급받은 쌀 100%를 이상 없이 소모했음”이라는 간단명료한 보고를 하게 된다. 이는 쌀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모든 군수품에도 해당하는 낭비였다. 나는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이러한 배급제를 가계살림 개념으로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군수인들의 반발로 욕만 잔뜩 먹었다. “학자가 뭘 알아.” 군수품과 예산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나는 적(enemy)으로 인식됐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군뿐만 아니라 모든 정부부처에 공통된 현상으로 지금까지 시정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포술이 병사들 다 살려
다시 월남으로 가보자. 저녁에 음산한 앞산에 대고 화력 잔치를 벌이는 것은 베트콩의 의표를 어느 정도 찌르는 것이긴 해도, 베트콩이 쏘아대는 박격포 세례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다. 부대에 부임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것은 베트콩들의 박격포공격으로 부터 당하는 병사들의 공포를 해소시켜 주는 것이었다. 진지라 해봐야 야전천막뿐인 상태에서 가끔씩 베트콩이 산에서 박격포를 쏘아대니 사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베트콩이 봐주는 길뿐이었다. 수많은 선배장교들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묘책이 없다고들 했다. 그때까지 알려진 적의 박격포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은 5만분의 1 지도에서 몇 개의 봉우리를 찾아내 거기에다 6문의 포를 날리는 것이었다. 6발의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에는 가공할 공포가 형성되겠지만,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베트콩에게는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그런 방법이었다. 베트콩이 박격포를 쏘는 지점이 꼭 산봉우리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포신만 덜렁 메고 다니면서, 산의 어느 곳에서나 눈으로 목표를 직접 관측하면서 나뭇가지나 팔뚝에 포신을 의지한 채 포탄을 날린 후 그 자리를 속히 떠났다. 이런 적을 향해 봉우리 사격을 한다는 것은 난센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밤, 그 을씨년스런 도깨비불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옛날이 생각났다. 수색중대에서 정찰작전을 나갔다가 월맹 정규군에게 포위됐던 바로 그날 밤의 일이었다. 베트콩 소굴에서 밤을 새면서 나는 베트콩에게 한국군이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우리 병사들 옆에다 포를 쏘아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포탄이 바위틈에서 작렬하는 소리는 포에 대한 상식이 없는 병사들에게는 엄청난 공포였다. 1㎞ 밖에서 작렬하는 포탄 소리에 사색이 되어 가지고 내게 다가와 “소대장님, 파편이 옆에 떨어집니다. 포를 멀리로 보내 주십시오” 하던 병사가 생각났다. 연이어 또 다른 장면이 생각났다. 소위 때였다. 산악작전에서 길을 개척하기 위해 우리 중대가 가야 할 능선을 따라 50m 간격으로 포를 내려 쏠 때였다. 포탄이 1km 앞에서 작렬하니까 그 독하다는 중대장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었다. “아하! 이것이 바로 1㎞의 공포로구나” 나는 신들린 듯이 사격지휘소로 달려 가 지도 위에 그리스 펜으로 격자를 그었다. 2㎞ 단위로 적당히 바둑판 격자를 그은 것이다. 그 바둑판 네 귀퉁이에 포탄이 한 발씩 작렬한다면 가운데 들어 있는 베트콩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할 것이 틀림없었다. 사격 장교 중위는 그 격자들에 대한 사격제원을 쏜살같이 산출해 냈다. 포탄은 소총과 달라 손으로 던지는 돌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포탄을 멀리 날아가게 하려면 추진용 화약의 양이 많아야 한다. 정해진 목표물을 명중시키려면 그 화약의 양을 계산하고, 굴뚝 같이 생긴 포신을 상하로 몇 도, 좌우로 몇 도에 지향시킬 것인가를 계산해야 한다. 이때에 공기의 온도, 습도, 바람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이렇게 결정된 자료를 사격제원이라 하며 이러한 계산은 숙달된 병사만이 할 수 있다. 이 사격제원들이 각 분대로 배급됐다. 하나의 포에 20개 정도의 표적이 배당됐다. 각 포는 계속 포신을 돌려가면서 20개의 목표에 포를 날려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엔 바둑판의 정점을 약간씩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한판 쏘게 되면 산 전체가 콩을 볶는다. 아무리 간이 큰 베트콩이라도 이런 융단포격에는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때마침 베트콩이 박격포 세례를 가했다. 병사들은 신들린 듯이 이 융단포격을 가했다. 포탄을 포구에 집어넣는 속도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멀리에서 포탄을 포구를 향해 던지면 그게 곧 장전이었다. 나는 혹시 포구에 신관이 부딪쳐 사고가 나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숙달된 병사들은 걱정 말라고 했다. 그게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이런 대책이 없었을 때, 병사들은 박격포 세례가 끝날 때까지 공포에 떨면서 목재 틈에 숨어 엎드려만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6백발의 포탄이 단숨에 날아갔다. 1개의 포마다 100발씩을 신나게 쏜 것이다. 박격포는 겨우 3발 떨어진 후에 중단됐다. 박격포를 쏜 베트콩이 혼비백산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포병 사령관, 포는 지만원처럼 운영하는 거야
사격을 지휘했던 중위가 대대 작전주임인 소령에게 긴급한 목소리로 박격포 공격이 있었다는 사실과 포대가 발사한 탄약의 양을 보고했다. 소령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렇게 많은 포탄을 쏘느냐”며 야단을 쳤다. 미군이 탄약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이때에 웬 정신 나간 짓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중령 대대장님께 사실대로 보고를 했다. 원체 많은 양을 쏘았기 때문에 대대장님도 난감해 하는 눈치였다. “대대장님, 사실 그대로 포사령관님께 보고해 주십시오. 600발은 속일 수 없는 큰 숫자입니다” 대대장님도 다른 대안이 없었는지 포병사령관으로부터 꾸중을 들을 각오를 하면서 사실대로 보고를 드렸다고 했다. 그런데! 꾸중을 예상했던 대대장님은 사령관으로부터 의외의 칭찬을 들었다고 했다. “포탄은 아낄 때는 아껴야 하지만, 쓸 때에는 시원하게 써야 하는 거야. 야, 고놈, 배포 한번 크고 시원시원하구나. 포는 그렇게 운영하는 거야. 베트콩 놈들, 간담이 서늘했겠구먼” 나는 포병 사령관으로부터 그 후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의 사랑은 한국에 와서까지도 계속됐다. 이때부터 나는 포를 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 3개 포대가 쏘는 포탄 양의 70% 이상을 나의 포대가 쏘았다. 어떤 때는 하루에 3번도 쏘았고, 어떤 때는 며칠간 거르기도 했다. 낮에도 쏘는가 하면, 밤중과 이른 새벽에도 쏘아댔다. 베트콩은 나의 포대가 언제 융단포격을 가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1년간의 재임기간 중 나의 병사들은 단 한발의 박격포 세례도 받지 않았다. 역시 공격이 최선의 방어였다.
2018.11.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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