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25세 때 누구도 나처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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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11-21 11:32 조회4,7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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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25세 때 누구도 나처럼 하지 않았다.
월남어 과정에서도 1등
소위로 월남에 파병된 1967년 8월 이후 나는 10개월 동안 그야말로 강도 높은 고생을 했다. 다른 포병 소위들이 한 개의 중대를 지원할 때, 나는 2개 중대, 그것도 전투 강도와 빈도가 가장 높은 수색중대와 기동타격중대를 동시에 지원했다. 수색중대가 작전에 나가면 수색중대에 투입됐고, 3중대가 작전에 나가면 3중대에 투입됐다. 이는 좀 과한 조치였다. 그게 안쓰러웠던지 새로 부임한 포병 대대장은 나를 즉시 뽑아내 사단 사령부 월남어 교육대로 보냈다. 월남어를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귀국을 연장시키기 위한 하나의 보상수단이었다.
월남어 교육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우리말처럼 높낮이가 없는 그런 말이 아니라 노래하듯 말해야 의사가 통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음치는 배우기가 참 어려웠다. 월남 말 중에는 중국말도 꽤 많이 들어있다. 대통령을 한문으로 ‘총통’(總統)이라고 써놓고 ‘똥~통~’이라고 곡선을 넣어 발음했다. 한문으로 ‘위험’(危險)이라 써놓고 ‘윙이~힘~’이라고 발음했다. 우리말처럼 편편하게 발음하면 알아듣지 못한다. 작곡된 음을 내야 소통이 됐다. 내가 어학을 배우는 요령은 좀 특이했다. 대개의 학생들은 책 내용을 무작정 외웠지만 나는 내용에 상응하는 현실 장면을 상상해가면서 외웠다. 책 내용을 외우면서 장면들을 연상하기 때문에 다이얼로그(대화) 한 줄 한 줄에 마다 영화 장면이 생기는 셈이었다.
책이 없어도 장면들을 연상해가면서 다이얼로그를 복습할 수 있기 때문에 걸으면서도 대본 없이 외울 수 있었고, 눈을 감고 누워서도 외울 수 있었다. 동료들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때마다 거절하지 않고 따라 나섰다. 영화라고 해봐야 옛날 활동사진 시대처럼 운동장 한가운데 영사기와 야전용 스크린을 차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보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다이얼로그(dialogue)를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니까 실제생활에서 비슷한 상황에 접할 때마다 저절로 외국어가 튀어나왔다.
이는 영어를 배울 때에도 적용했다. 영어 책 내용만 달달 외운 사람들은 미국에 가서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적절한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고생을 한다. 책의 내용과 가상 장면과를 연결시키는 방법은 특히 수학을 공부할 때에도 적용됐다. 나는 모든 수학 공식 및 이론을 배울 때마다 현실 세계를 가상했다. 수학을 현실과 매치시키는 것이다. 현실 세계를 연상하지 않고 익히는 공식과 이론은 아무런 응용력이나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수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많다. 많은 이들은 수학을 딱딱한 공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수학 세계를 현실세계로 통역하는 능력을 길렀다.
3개월 과정을 마친 후 나는 1등을 했다. 동료 장교들은 내가 영화도 보러 다니고, 맥주도 마시러 다니고, 공부벌레처럼 굴지도 않았는데 1등을 했다며, 머리가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길을 가면서, 식사를 하면서 속으로 영화장면들을 생각하면서 대사를 외웠다. 연상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오히려 머리는 다른 사람들 이 나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월남어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나는 중위로 진급을 했다. 대대장께서 정찰기에 대위를 태워 보내 내게 중위 계급장을 달아주게 했다. 이를 보고 다른 장교들이 부러워했다. 졸업 후 나는 월남어를 전혀 쓰지 않는 사격지휘 장교로 보직되어 작전 상황실에 투입됐다. 다른 부대에서는 대위 두 사람이 교대하면서 근무하는 자리를 나는 혼자서 지켰다. 대대장님은 나의 요약보고를 매우 좋아하셨다. 다른 장교들이 보고를 하면 자주 역정을 내셨다.
통계로 쏘는 포에는 눈이 달렸다.
상황실에는 매일 수많은 첩보가 접수됐다. 첩보의 신뢰성에 따라 A급부터 D급까지 분류돼 있었다. 이들 첩보들은 접수되는 순서대로 두꺼운 첩보일지에 기록됐다. 한 달이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200쪽이 넘는 책이 됐다. 하루에도 7~8쪽이나 되는 첩보내용을 장교들이 일일이 읽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상황실 선임하사가 중요하다고 표시해주는 첩보만 대강 훑어봤다. “응, 그렇구먼. 이 지역이 늘 말썽이군.” 일단 날짜가 지나면 모든 내용들이 두꺼운 첩보철 속에 묻히고 만다. 하루 이전의 첩보 내용, 열흘 이전의 첩보 내용을 다시 들춰내 읽는 사람은 없다. 자료는 많지만 모두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보석의 원석이 땅 속에 방치돼 있듯이!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 첩보일지 속에는 모든 첩보가 다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많은 첩보를 즉시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중사에게 똑같은 지도판을 3개 만들라고 했다. 중사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급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여유가 있어 보였다. “중위님, 상황판을 3개씩이나 만들어 무얼 하시게요?” “나도 몰라. 일단 한번 만들어 봐.” “합, 옛~써~ 즉각 대령하겠습니다.” 중사는 다섯 손가락을 꼬부려 장난스레 거수경례를 하고 돌아갔다. “김중사. 하나는 초저녁용, 또 하나는 밤중용,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새벽용이야. 상부로부터 첩보 내용을 받아 적을 때마다 상황판을 골라 표정을 하라구. A급은 적색, B급은 청색, C 및 D급은 노랑색으로. 알았어?” “아! 존경하는 중위님, 이제야 감이 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첩보를 받아 적는 노력이 10이라면 지도판 위에 점 하나를 표시하는 노력은 1도 안됐다. 하나하나의 점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 날에 걸쳐 표시된 수많은 점들은 일련의 분포와 추세를 나타냈다. 시간대별로 베트콩이 어떻게 이동해 다니는지에 대해 훤히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통계의 묘미였다. 매일 밤 나는 이 상황도에 따라 사격을 가했다. 구태여 내가 사격을 가해야 할 좌표를 찍어줄 필요가 없었다. 누구라도 상황판만 보면 언제 어디에 사격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잠이 들더라도 병사들은 정해진 시스템에 의해 포를 날렸다. 얼마 후, 체포된 베트콩의 진술이 나왔다. “한국 포병에는 눈이 달렸다.”시간이 갈수록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병사들이 점점 더 많이 메워 줬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대위 두 사람이 해야 할 업무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매일 아침, 나는 밤새 있었던 상황들을 손바닥만 한 쪽지에 요약하여 대대장 숙소로 직접 가져다 드렸다. 구두로 보고를 하지 않아도 그 쪽지만 읽고도 만족해 하셨다. 무섭기로 소문난 대대장이었지만 내가 가면 언제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응, 응, 알았어. 그래그래, 수고했어. 어서 가봐. 아니 우유 한잔 줄까?”
신출내기 중위가 고참 미군 소령 발밑에 사격을
어느 날 미군 중령이 나의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를 찾아왔다. 나의 직속상관은 소령이었다. 내가 통역을 맡았다. 미군 중령은 포병 대대장이었고, 예하 포대들이 월맹 접경지역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포들을 헬기로 공수를 해야 한다는 취지의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헬리콥터로 포를 수송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시험용으로 1개포만 잠시 빌려 줄 수 없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시범에는 미군 장성들이 많이 참석할 것이라며 시범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나의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는 이를 쾌히 승낙했고 대대장님도 이를 허락했다. 다음날, 나는 1개 분대를 포차에 태우고, 차 뒤에는 포를 매단 채 미군부대로 나갔다. 하지만 그 미군 중령은 없고 대신 뚱뚱하게 생긴 미군 소령이 나와 있었다. 그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트럭에 타고 있는 우리 병사들을 거만한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모두들 차에서 내려와 일렬로 서라고 했다. 예상 외의 행동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하지만 나는 정중한 표현을 써서 물었다. “혹시 무엇 때문인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검열을 해야겠다” “나는 미군 중령 아무개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온 사람이다. 당신한테 검열을 받으러 온 게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고문관을 지냈다. 한국군 장군들도 내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검열을 하려거든 한국에 가서 그런 장군들에게나 해라”
소령이 무의식중에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나는 선 자리에서 미군 소령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했다. “야, 오늘 이 건방진 놈, 손 한번 봐주자. 이놈 발밑에다 일제히 조준 사격을 가하라. 얼른 쏴버려” 따따따따닥 . . ! 수많은 총알이 그의 발 밑, 모래 바닥에 꽂혔다. 그는 체신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혼비백산 도망을 쳤다. 지프차도 내팽개쳤다. 병사들이 그의 발밑을 따라가며 조준 사격을 가했다. 그는 아마 십 년 이상 감수했을 것이다. 병사들이 웃어대며 그를 야유했다. 그에겐 일생일대의 모욕이었을 것이다.
지 중위, 당신 이제 불명예 제대야
의외로 빨리 돌아온 내게 작전참모가 사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내가 경솔하게 큰일을 저질렀다며 질책을 가했다. 나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직속상관은 감히 어디라고 미군을 그렇게 건드렸느냐며 겁을 냈다. “과장님, 미군에 대해서는 배알도 없이 대해야 하나요?” “어~어~ 이 친구, 뭘 한참 모르는구먼!” 작전참모는 내게 그가 한국에서 겪어 본 미 고문관의 위력에 대한 사례들을 설명해 주면서 내가 큰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려 했다.
대대장의 예쁨을 받고, 또 대대장님을 위한 통역이라면 도맡아 하는 내게 작전과장이라고 해서 그 이상의 야단을 칠 수도 없었다. 이튿날이었다. 그 미군 중령이 다시 찾아와 중위에 불과한 내게 정중히 사과했다. “나도 그 소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곧 다른 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는 어제 제 계획을 망쳐놓았습니다. 하사관 한 명을 파견할 터이니 우리가 요청할 때, 포를 좀 지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나는 미군 하사관과 함께 근무하면서 얼마간의 회화능력을 더 기를 수 있었다.
미군 하사관
이렇게 8개월을 지하 벙커 속에서 보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벙커생활은 힘든 것이긴 했지만 그런 대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햇빛이 유난히도 밝던 어느 날, 갑자기 코피가 쏟아졌다. 그리고 졸도했다. 들것에 실려 나가 생전 처음 알부민이라는 주사를 맞았다. “안되겠다. 내가 좀 편하자고 저놈 하나 부려먹다가 사람 잡겠다. 당장 미군부대로 보내.” 그래서 나는 졸지에 미군부대 연락장교가 됐다. 그때의 몸무게는 47kg. 26세의 청년 사관에겐 어울리지 않는 몸매였다.
해변가 미군부대 망루
정인숙 누님과 정일권
1969년 5월. 나는 월남 근무 22개월을 마치고 귀국하여 육군본부에서 갓 준장으로 승진한 비육사 출신 장군의 전속부관이 됐다. 관리참모부 내의 핵심 부서인 예산회계처장이었다. 장군 부속실에는 4명이 있었다. 보좌관인 중령, 중위인 나, 정상병 그리고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부속실에 아가씨들이 떼를 지어 놀러왔다. 그런데 날마다 얼굴들이 바뀌었다.
“미스 윤.”
“네?”
“인기가 대단한가 봐요, 친구들이 그렇게 많아요?”
그녀는 대답 대신 책상을 내려다보며 실실 웃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말문을 열었다.
“지중위님, 요즘 우리 사무실에 아가씨들이 왜 자꾸만 오는지 아세요?”
“…….”
“베트콩 구경하러 오는 거래요.”
“베트콩이 누군데? 혹시……나…?”
“어유, 지중위님은 눈치가 빠르시네요.”
“내가 어째서 베트콩이래요?”
“깡마르고, 체구가 작고, 얼굴이 검고, 머리가 짧고, 입술이 푸르스름해서 영락없는 베트콩이라고 소문이 났대요. 장교들이 그랬대요. 월남에 못 가본 아가씨들 그 방에 가면 베트콩 구경할 수 있다구요.”
전속부관이 하는 일은 전화를 받고, 공⋅사를 불문한 모든 심부름을 잘해내는 것이었다. 청량리까지 가서 장군 댁 세금을 납부하는 일도 많이 했다. 사적인 심부름이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사회를 아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장군이 말씀만 내려주시면 알아서 하는 것이 전속부관의 핵심능력이며, 능력이 부친다고 보고하면 무능한 장교가 되는 것이다. 장군의 심부름을 잘하기 위해서는 여러 영관급 장교들의 도움을 받는 요령이 필요했다. 고급 장교들의 능력을 이용해야만 심부름을 잘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웃 영관장교들로부터 귀여움을 받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과 장군과의 인간관계에 대한 센스도 필요했다. 장군이 귀찮아하는 전화를 연결하면 그에 대한 짜증은 전속부관이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속실에 있는 정상병은 기생오라비라고 불릴 만큼 얼굴이 매끄럽게 생겼다. 그는 가끔 장군의 지시내용을 잊기 때문에 장군 방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나는 그를 단지 경상도 말을 쓰는 병사라고만 생각했다. 9월초, 나는 결혼식을 4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정상병이 갑자기 휴가를 가겠다고 했다.
“어이, 정상병.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9월 6일에 결혼식 하는 거 알고 있나?”
“예. 압니다.”
“장군을 모시는 일은 너와 나만 할 수 있는데, 네가 휴가를 가면 나는 결혼식을 연기해야 하지 않는가? 어떤가? 청첩장도 발부됐고, 식장도 이미 예약이 돼 있는데.”
“그래도 저는 가야 합니다. 이미 여자 친구들하고 조를 짜놓았습니다.”
나는 입장이 곤란해 중령 보좌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중령이 화를 내고 언성을 높여 야단을 쳤다.
“야, 임마. 네가 인간이냐? 결혼식장에 가서 심부름은 못해줄 망정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정상병은 장군이 파티에 나가기 위해 황급히 차에 오르는 순간, 느닷없이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보고를 했다.
“오? 그래. 잘 갔다와.”
장군은 나와 보좌관이 그의 휴가를 이미 허락한 것인 줄 알고 건성으로 대답을 한 것이었다. 정상병의 돌출행동에 대해 나는 화가 많이 났다. 2층 사무실로 올라와 정상병을 다그쳤다.
“야, 임마. 너 그따위 버릇, 어디서 배웠어?”
“아까 보시지 않았습니까? 장군님이 허락하셨는데 부관님이 왜 이러십니까?”
“정상병, 한 인간에게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대사인 줄 너도 알지?”
하지만 이런 설득은 그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적되는 화를 꾹꾹 참았다. 장군 방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만큼은 적극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상병. 명령이다. 못 간다. 알았어?”
“그게 무슨 명령입니까?”
그는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모욕감까지 주었다. 오래 참았던 것만큼 감정이 폭발했다. 그 때부터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몇 대의 주먹이 날아갔다. 그래도 그는 약을 올리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두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고 덤빌 기세까지 보였다. 아마도 체구가 작고 바싹 마른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합기도 실력으로 그를 메어꽂았다. 억- 소리를 내면서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그 다음부터는 짐승처럼 패 버렸다. 두드려 팰수록 분노가 더욱 증폭됐다. 재떨이도 날아갔다. 그 기세가 무서웠던지 그가 갑자기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볐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를 죽을 때가지 팼을 것이다. 일단 분노의 세계로 접어들면 이성이 끼어들지 못한다. 분노의 세계에서 과잉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중위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요란한 소리에 인근 사무실에서 병사들이 몰려왔다.
“지중위님, 그만 하십시오. 저희들이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의 팔이 부어올랐다. 병사들과 함께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X-레이를 찍었다. 의사가 두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 정도면 괜찮아. 찜질만 하면 돼”하며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다시 사무실로 갔다. 일직 근무를 서던 소령이 갑자기 나를 힐난했다. 평소의 그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면을 바꾸니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령은 이미 정상병의 어마어마한 배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잘못은 장군님한테 평가받을 테니, 소령님은 상황보고만 하십시오. 내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으면 나를 힐난하지 마십시오.”
이 말 한마디에 소령은 머쓱해 가지고 돌아갔다. 이어서 병사들이 나섰다.
“중위님, 저희들이 찜질해 줄 테니 퇴근하십시오. 탈영 같은 건 없을 겁니다.” 정상병 역시 반성을 하고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이튿날이었다. 정상병은 약속을 어기고 탈영했다. 장군이 출근하자마자 나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과 탈영사실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잘했어. 그놈은 혼 좀 나야 해. 불성실한 놈이야. 같은 일을 여러 번 시켰는데도 제대로 할 때가 없었어. 괜찮아.”
그날 오후였다. 장군이 김계원 참모총장 비서실에서 받은 전통(전언통신문)을 한 장 가지고 오셨다.
“야, 지대위. 이걸 좀 읽어봐. 염려는 하지 말고”
나는 1969년 9월 1일에 대위로 임시진급을 했다. 중위를 3년간 달아야 대위가 되었지만 그 때에는 대위의 수가 모자라 중위 1년 반 만에 임시진급을 시켰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전통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병사를 무단 구타한 몰지각한 장교가 있는 바, 엄중히 처벌하고 결과 보고할 것” 이 전문은 9월 3일에 내려왔다. 장군이 이 전문에 대한 이야기를 대령급 과장들에게 하셨다. 3~4명의 대령 과장들이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국무총리실로 다리를 놓아가며 구명운동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정면 돌파만이 해결책이었다. 나는 이웃 병사로부터 정상병의 집주소를 얻어냈다. 물어보니 정상병은 내무반에서 ‘상당한 집’의 자손인 것으로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퇴근길에 주소 쪽지를 손에 쥐고 찾아가 보니 서교동 2층집이었다. 30세가량의 여인이 꼬리치마를 입고 나와 대문을 열어주었다. 냉랭한 표정이었지만 깔끔하고 예쁘게 생긴 여성이었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자리를 권한 후 말문을 열었다.
“외국에 오래 머물렀다가 바로 어제 돌아왔어요. 와보니 글쎄 내가 가장 예뻐하는 막내 동생이 매를 맞고 얼굴과 팔이 퉁퉁 부어있지 뭐예요. 때려도 어떻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릴 수 있어요? 우리 아버님께서 화가 몹시 나 계세요.”
“알고 왔습니다.”
그녀의 모친이 돌 직전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를 안고 TV를 보고 있었다. TV 소리에 대화하기가 거북했다. 그녀가 짜증을 냈다.
“엄마, TV를 끄고 2층으로 올라가소 마”
“국무총리실에서 총장실로 전문을 보냈더군요. 사병 내무반에서도 정상병은 상당한 댁 자손으로 알려져 있더군요. 저는 4개월 동안 정상병과 한방에서 일했는데도 그걸 몰랐습니다. 만일 그걸 알았더라면 더 많이 때렸을 겁니다.”
잘못했다고 빌러 온 줄 알았던 그녀에게 이 말은 세도가에 대한 증오심으로 비쳤을 것이다.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그녀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몇 시쯤 오시나요?”
“10시쯤 돼야 오실 겁니다.”
“세 시간 남았군요. 불편하시겠지만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꼭 그 어른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2시간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손님을 두고 자리를 뜨는 일을 하지 않았다. 9시가 됐다.
“아버님이 늦으시는 모양입니다. 저와 이야기하시지요.”
“아, 아닙니다. 저는 똑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기 싫습니다.”
“내 판단이 곧 아버님 판단이니 나하고 이야기하시지요.”
“정말입니까?”
“가정에서 그 정도의 역할은 하고 삽니다.”
밤중까지 기다리겠다고 버티는 나의 기세에 오히려 그녀가 더 초조해 하는 기색이었다.
“정상병을 불러 주십시오. 저는 그 애 앞에서 떳떳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상병이 2층에서 내려왔다. 나는 정상병을 앉혀놓고 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묘사해 줬다. 누나의 얼굴에서 노기가 일기 시작했다. 누나의 마음이 변해 가는 것을 눈치 챈 정상병이 가끔 반발하려 했지만 그녀는 위엄 있게 제지했다.
“누님께서 제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나라면 반 죽였을 겁니다.”
“누님, 참 훌륭하시군요.”
“제가 어깨에 달고 있는 이 계급장, 그저께 달은 것입니다. 누님께서 보시기엔 하찮은 계급장이지만 제 일생에는 귀중한 이정표입니다. 저는 4개월 전까지 월남에 있었습니다. 어느 집 자식 치고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위는 소위에겐 하늘입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소위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21명의 우리 병사가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몰살한지가 불과 5개월 전의 일입니다. 그 중에 살아 나온 병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야전삽을 가지고 논바닥을 이리 파서 구르고, 저리 파고 구르면서 몸을 숨겼습니다. 5시간이나 공포 속에서 지냈습니다. 어둠이 깔리자 그 병사가 소대장에게로 달려왔습니다. 소대장을 붙들더니 엉엉 울었습니다. 소대장이 병사의 아버지였습니다. 월남에서 죽고 다친 병사들도 다 귀한 자식들입니다. 여기에 있는 정상병, 그 병사들과는 매우 다른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배경 좀 있다고 상급자를 우습게 여기다가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국무총리까지 동원하여 상급자들을 처벌해 달라 합니다.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정상병 하나만을 위해 있는 건가요? 만일 국무총리가 이런 일에 나선다면 그분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동생 말을 들을 때는, 지대위님이 우락부락하고 힘도 세고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듣고 보니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동생을 꾸짖기 시작했다. 세상에 못난 놈이라고.
“결혼식 잘 올리세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저애를 내일부터 부대로 보내겠습니다. 제가 가서 장군님께도 사과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뜻만 전해드리세요. 그리고 얘가 나가거든 혼을 더 내주세요. 그냥 두면 사람 노릇 못 합니다. 아버님께서 내일 당장 전문을 취소하실 겁니다. 제가 책임지겠어요”
그녀는 밖에까지 나와 택시를 잡아주며 다시 한 번 결혼을 축하한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정여인과의 만남에 대해 장군에 상세히 보고했더니 만족해하셨다. 이어서 정상병이 출근했다. 기가 푹 죽어 있었지만 곧바로 장군 방으로 들여보냈다. 정상병이 나타나자 장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고성으로 꾸중을 하셨다.
그녀는 사리가 분명했다. 어려 보이는 내게 얼굴까지 붉히며 사과를 했지만 내 마음속에 비친 그녀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깔끔했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이겼고 그녀도 이겼다. 만일 그녀의 정신세계가 세속적이었다면 그때 그녀의 위치로서는 나 같은 풋내기쯤은 철저히 무시했을 것이다.
이튿날 국무총리실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건의 당사자인 나와 정여인과의 오고갔던 말만 믿고 참모총장실에서 국무총리가 보낸 전통문에 대한 응신을 생략할 수도 없었다. 국무총리실로서도 일단 육군 참모총장실로 내려 보낸 전통을 상당한 절차 없이 취소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형식과 체면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 내가 정면 돌파에 또 나섰다. 퇴근 후 정복을 입고 정일권 국무총리실로 들어갔다. 비서관들이 나를 힐긋 힐긋 훔쳐봤다. 한 비서관에게 전문의 사본을 내보였다.
“이 전문을 기안하신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얼떨결에 당한 일이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분은 출타중이십니다.”
“저는 내일 아침 결혼식을 합니다. 오늘밤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합니다. 국무총리실이 병사의 구타 사건과 같은 사소한 일을 다루는 곳인지 확인만 하면 됩니다. 어느 분입니까? 이 전문을 기안하신 분이.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는 있을 거 아닙니까? 오늘 밤 그분 댁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어서 알려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떳떳한 공문을 띄워놓고 왜들 주저하십니까?”
막무가내로 다그치자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듯 했다. 나이 든 비서관이 다가왔다.
“아, 대위님, 그 전문 때문이시라면 염려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내일 아침에 취소 전문을 치겠습니다. 취소시키라는 명을 받아 놓고 있었습니다. 약속합니다”
결혼을 하는 이튿날 아침, 나는 전화로 중령 보좌관에게 결과를 설명하고 결혼식에 가기 위해 시간에 쫓기면서 이발소로 갔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이발소가 드물었다. 적당히 깎아 달라고 재촉하며 이발을 마치기가 무섭게 택시를 타고 시계 바늘을 보아가며 남산 드라마센터 예식장으로 달려갔다. 신랑이 나타나지 않아 조바심을 하던 동기생 사회자가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마이크를 잡고 예식을 선언했다. 예식이 아니라 전투였다.
그리고 불과 한 달도 안 돼서 다시 월남으로 갔다. 정인숙 사망 사건은 1970년 3월에 발생했다. 신문지상에 보도된 정인숙은 내가 만났던 정여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채색돼 있었다. 신문은 정인숙을 사리 분별력이 없는 나쁜 여인으로 부각시켰지만 내가 만났던 정인숙은 사리가 분명하고 공정했다. 자기의 피붙이가 관련되면 무조건 팔이 안으로만 굽는 세속인들과는 전혀 다른 깨끗한 여인이었다. 아마도 기사를 만든 기자들이 세속적인 고정관념을 가지고 마음대로 예단하고 각색하여 삼류소설을 썼을 것이다.
2018.11.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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