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서면(피고:방통심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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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8-03 12:14 조회5,4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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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비 서 면
사건 2018가합3064 손해배상
원고 지만원
피고 대한민국(방송통신심의위원회)
2018.7.24.에 접수된 피고측 준비서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1. 피고측 주장의 요지
1) 원고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여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미 증명된 역사관을 왜곡했다. 이는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 제6조 제5호(헌법에 반하여 역사적 사실을 현저히 왜곡하는 정보)에 해당한다.
(1) 5.18은 광주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신군부에 항거한 항쟁사건인 것을 보편적으로 수용돼 있다. 이에 근거해 5.18민주화특별법,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법 등이 규정돼 있고, 매년 국가행사로 기념하고 있다.
(2) 이제까지 책임 있는 국내외의 모든 공적기관들 중에서, 5.18에 북한군 600명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바 없다. 김관진 국방부장관, 정홍원 국무총리, 미국, 전두환, 이순자 모두가 북한군 개입사실을 부인했거나 알지 못했다. 미국 정보기관의 1980.5.9.자 및 동년 6.6.자 문서에도 북한군 개입사실이 기재돼 있지 않다. 오로지 원고 혼자 아무런 근거 없이 이들 모두에 반하는 주장을 갑4호를 통해 공개적으로 펴고 있다.
(3) 2018.2.28.에 국회를 통과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3조6항의 입법목적은 “북한군 개입여부와 관련하여 왜곡된 논란을 해소한다”는 데 있을 뿐, 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부정하거나 북한군이 주도한 폭동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2) 원고의 글은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 제8조 제3호바목(합리적 이유 이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인종, 지역, 직업 등을 차별하거나 이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을 유통하지 말아야 한다)을 위반했다.
(1) 아래 원고의 표현들은 5.18민주화운동 지역-집단-개인을 비하하고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들이다. ‘수백 명의 광주부나비들’, ‘북한특수군에 부역한 20대 양아치급 부나비들’ ‘광주인들이 구성한 시위대는 없었다’ ‘이 작전에 이용된 사회불만세력’ ‘남한에서 부화뇌동한 부나비들’ ‘ 정치인들과 정부관계자들을 끌어들여 불공정하고 비민주적인 파워게임을 하였다’ ‘떼로 몰려다니며 폭력행사를 하는 등 비정상적이고 부적절한 게임을 하였다’ ‘사기놀음을 하였다’ ‘5.18사람들을 포함한 영악한 공산주의자들에게 국민들이 어수룩하게 당해왔다’
(2) 원고는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했다는 표현으로 광주5월단체들에 고발되어 재판을 받았고, 1-2-3심으로부터 모두 무죄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우지만 이는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 판례에 따라 이 표현으로 인해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을 판시한 것일 뿐,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 제8조 제3호바목에 대해 판단한 것이 아니다.
(3) 원고는 광주현장에 찍힌 얼굴들이 북한의 핵심 인물들과 일치하기 때문에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에는 과학적 신뢰가 없다. 따라서 이런 비과학적인 주장은 5.18관련 지역-집단-개인을 비하하는 합리적 이유가 될 수 없다.
2. 원고측 반론
1)-(1) 항에 대하여:인류역사에는 늘 새로운 발명과 새로운 발견이 연속돼 왔습니다. 천동설을 진리로 알고 살았던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한 과학자가 사형을 당했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세계문명을 선도하는 나라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여 당시 미국 일자리의 6%를 제공했고, 사과의 낙하 현상은 누구나 다 보았지만, 오로지 뉴턴 한 사람만이 그로부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물리학의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많은 국민이 믿고 있고, 국가가 주최하여 매년 기념행사를 해온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 5.18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특수군 600명이 소조 단위로 침투하여 광주의 10-20대 젊은이들을 조직하고 선동하여 일으킨 게릴라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해 낸 역사책 ‘5.18분석 최종보고서’가 출판되어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이 내용을 믿는 국민 역시 그 반대의 국민 수에 못지않게 많이 있고 또 그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2018.2.28.에 국회를 통과한 ‘5.18진상규명특별법’ 제3조 6항에, 원고의 주장(북한군 개입)을 국가차원에서 검증하라는 내용이 역사상 처음으로 들어가게 있는 것도 수많은 국민여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갑4의 글은 갑20의 에필로그 입니다. 인터넷에 떠 있는 이 글을 지우려면 갑20의 단행본 내용이 ‘아무런 근거 없이 현저하게 사실을 왜곡하였는지에 대한 검증’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모든 표현들 중에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은 표현은 단 한 개도 없습니다. 피고는 이 책의 어느 부분들이 사실이 아닌지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을 제시하지 못하면 피고의 행위는 불법인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은 공론의 장입니다. 모든 새로운 발명과 발견과 의견은 공론의 장을 통해 각축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공공선 추구의 메커니즘입니다. 피고는 민주주의의 엔진 자체를 파괴한 것입니다.
5.18관련 3개 법률이 제정돼 있고, 1997.4.17.의 대법원 판결이 있고, 1988.의 광주특위, 2005.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 2017.의 국방부 5.18진상규명특위,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5.18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을 했지만, 이들 중 그 어느 것에도 5.18이 북한군 개입 없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는 과학적 결론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정치인들이 흥정하여 1988년부터 부르기 시작한 ‘흥정명’에 불과합니다. 이번 국회를 통과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에도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된 이번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 제3조 6항에는 5.18에 북한이 개입했는지 그 여부를 규명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법의 명칭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인데, 그 속에 ”북한군 개입여부를 규명하라“고 명령해 놓은 것은 역사적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5.18이 북한군의 개입 없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이미 증명돼 있다면 이 특별법 제3조 제6항에 이런 명령이 들어갈 수 없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원고는 이 규명위원회에 핵심 멤버로 참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은 관행이고 습관이지 규명된 사실이 아닙니다. 이처럼 5.18에 북한개입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고, 이에 대해 규명한 바도 전혀 없습니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88년 4월 총선결과 여소야대가 된 상태에서 국회가 1988.7.13.에 광주특위(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설치를 의결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 표현은 정치인들이 그렇게 부르기로 합의한 것일 뿐, 1988.7.13.부터 이렇게 부르기 이전에 그것이 ‘북한군 개입이 없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였는가에 대한 아무런 과학적 조사가 없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오로지 원고 말고는 그 누구도 5.18에 북한군이 개입됐을 것이라는 의심 자체를 공적으로 제기한 바 없습니다. 원고는 북한군 개입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개입사실’을 증명해 냈습니다. 그냥 간단히 제기한 것이 아니라 13년 동안(2002-2014. 갑20을 내는 순간까지) 연구해서 그 연구자료를 가지고 학문적 레벨에서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것을 놓고 “정치인들이 민주화라고 부르기로 의결했는데 왜 원고는 이를 부정하고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느냐” 이런 식으로 입을 막는 것은 정당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닐 것입니다. 원고의 이 학문적 연구가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는 것은 피고의 판단 법위 내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피고가 함부로 삭제처분 한 것은 분명한 월권이요 직권남용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5.18에 대한 진상규명은 세 차례 있었습니다. 1988.의 광주특위, 2005.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 그리고 2017.의 국방부 특조위였습니다. 피고의 주장대로라면 이 세 차례의 과정에서 5.18에 대한 진상규명이 완료돼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 반대입니다. 대법원이 [판시사항]에 대해서만 판단하듯이 518진상규명 팀들도 [규명범위]에 대해서만 규명합니다. 과거의 5.18진상규명위원회들은 [규명범위]에, 오로지 발포명령, 헬기사격, 암매장이 3개 사항만 수용했습니다. 이번 2018.2.28.에 통과된 5.18특별법 제3조 6항에 ‘북한군개입여부’가 역사상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전두환이 헌정질서를 위반했다는 판단과 북한군개입을 규명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사항입니다. 5.18 당시에 전두환도 북한군 개입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과 미국도 알지 못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그 사실이 피고의 연구결과를 틀렸다고 단정할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이 모르는 것을 미국이 알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정보에는 1차정보(First hand information)와 2차정보(Second hand information)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제조해 내는 정보가 1차 정보이고, 이들 중에서 미국이 취사선택하여 가져가는 정보는 2차 정보입니다. 미국이 한국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제1차로 생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표현을 정부당국에서 처음으로 허용한 사람은 노태우입니다. 1990년 당시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였습니다. 위기를 느낀 노태우는 김영삼과 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 합당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민정당으로 흡수되는 정치인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광주사태”의 성격을 “광주민주화운동”인 것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연구 결과를 반영해준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각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타협하고 흥정한 것입니다. 공익적 진리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 팔아먹은 것입니다. 공익적 명분만 매도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까지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를 현실화시켜주기 위해 제정된 법률이 ‘광주보상법’(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이었고,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2004.1.20. “5.18민주화운동”으로 변경됐습니다. 따라서 1990년에 제정된 이 보상법률은 당시 화해와 통합이라는 사회적 명분을 내걸고 그 뒤에서 정치인들이 각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흥정한 결과물이지, 광주시위가 정말로 북한군의 개입 없이 광주시민들 만의 민주화시위였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제정된 법률이 아닙니다. 이 법률의 어디를 보아도 5.18이 순수 광주시민들만으로 구성된 시위대에 의해 발생했다는 증명은 없습니다. 광주시위를 무조건 민주화시위로 간주하고, 이 시위에서 피해를 본 광주사람들에 대해 보상을 해주여야 한다는 정치인들끼리의 합의사항들만 광주보상법에 들어 있습니다.
1995.12.21.에 제정된 “5.18민주화운동등에 관한 특별법”은 특별히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부 통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주도 하에 즉흥적으로 제정된 법률입니다. 이 역시 5.18이 북한군 개입이 없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어떤 과학적 근거나 법률적 판단에 의해 제정된 법률이 아닙니다. 1995.10.19. 박계동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4천억을 폭로했습니다. 당시 중국에 있던 김대중이 이를 기회삼아 김영삼을 공격하였습니다.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을 받았다. 나도 양심 고백했으니 김영삼도 고백하라. 김영삼은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아마도 1조는 받았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당시 원고는 북경 영빈관 조어대에 김대중과 함께 2015.10.25.-31)있었습니다. 이에 코너로 몰린 김영삼이 “저놈들 잡아넣어라. 저놈들 쿠데타로 권력 잡아 광주시민 학살하면서 권력을 잡은 놈들이다” 하고 선동하면서 전광석화의 속도로 제정한 반-헌법적 법률이었습니다. 일사부재리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위반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전두환 등에 돌리기 위해 급조한 부끄러운 법률이었습니다. 이 법률에도 5.18에 어째서 북한개입이 없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증명이 없습니다. 단지 ‘민주화’라는 단어가 오랜 동안 야권에서 ‘군사독재’의 반대개념으로 통했던 용어였기 때문에 붙여진 법률명이었을 뿐입니다. 2002년에 제정된 ‘5.18민주화예우법’은 종래에 지급하던 5.18유공자들에 대한 보상을 2-3배 더 늘리고, 광주민주묘지를 국립묘지(국립5.18민주묘지)로 승격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을 뿐, 5.18폭동이 왜 북한의 개입이 없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인지에 대한 증명이 없습니다.
1997.4.17.의 대법원 판결문에는 20개의 [판시사항]이 있습니다(갑22의 178-184쪽) 그 어디에도 ‘5.18에의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한 판시사항은 없습니다. 5월단체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한결같이 말합니다. 1997년에 대법원이 이미 민주화운동이라고 땅땅 쳤는데 왜 말이 많으냐는 것입니다. 대법원 판결은 [판시사항]에 대해서만 판단합니다. 1997년 대법원 판결문에는 [판시사항]이 20개 있습니다(갑22의 178-179). 그런데 이 20개의 [판시사항] 중에는 5.18폭동이 어째서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냐에 대한 판시사항이 없습니다. 대법원 판결은 “5.18은 민주화운동이다”라는 증명되지 않은 여론에 신성불가침의 법적 권위를 부여했고, 그것을 판결의 대전제로 삼았습니다. 5.18은 순수한 민주화운동이었는데 전두환 등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 내란죄라는 것이 대법원 판결의 중심입니다. 증명이 없는 것을 판결의 대전제로 삼은 것은 법 상식에도 어긋나는 것이며 엄중한 범법행위일 것입니다.
5.18에 북한군이 왔느냐 오지 않았느냐에 대한 판단은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판단한 바 없습니다. 이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의 소관사항이 아니라 행정부의 소관사항입니다. 국정원, 기무사, 검찰, 경찰로부터 대공전문가들을 차출하여 구성하는 합심조에 의해 조사돼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묻어라, 더 이상의 분열은 안 된다” 강력히 지시하는 바람에 합심조가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두환 회고록에 명백히 나와 있습니다. 지난 37년 동안 5.18이 민주화의 성지로 굳어져 온 상태에서, “5.18은 북한특수군이 주도했다”는 명제에 대해 17년씩이나 연구한 사람은 오로지 원고 한 사람뿐입니다. 5.18을 북한이 저질렀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는 매우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5.18에 북한군이 절대로 오지 않았다는 증거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1)-(2)항에 대하여:피고는 국내외 공적 기관들 그리고 전두환 등이 5.18에 북한특수군 개입 사실을 부정했거나 알지 못했다 했기 때문에, 이와 다른 결과를 담은 원고의 연구결과는 ‘헌법에 반하여 역사적 사실을 현저히 왜곡하는 정보’라 취급했습니다. 이런 잣대는 “기존의 인식과 다른 내용을 발표하는 것은 모두 다 이단”이라는 가치관에 연유한 것으로 수용될 수 없는 언어도단일 것입니다. 5.18을 북한특수군이 와서 저지른 폭동이라는 사실은 이 사회에서 오로지 원고 혼자만 밝혀 낸 사실입니다. 피고의 잣대로라면 갈릴레오도 없었어야 했습니다. 이 넓은 대한민국에서 오로지 원고 혼자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해서 그 자체로 ‘원고의 연구는 왜곡’이라고 단정하여 행정처분을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여쭙고자 합니다.
2002년부터 갑20의 책이 나올 때까지 무려 13년이 걸렸습니다. 그 이전에는 7권의 책을 냈습니다. 이 책들의 사진이 갑21 및 갑26의 뒤표지 안쪽에 있습니다. 18만 쪽에 이른다는 수사기록-재판기록들을 모두 첫 4권에 추려 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6년이었습니다. 갑12내지 14의 판결문은 바로 이 4권의 역사책에 대해 5월단체들이 고발한 사건을 판단한 것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남대학 출판부가 발행한 ‘5.18항쟁증언자료집’(갑22의 98-175쪽)을 통해 5.18 최고반열의 유공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했습니다.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광주에는 시위대를 조직한 사람도 없고, 지휘자도 없고, 전남도청은 신원미상의 권위 있는 사람들이 23일까지 점령해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고, 24일 오후부터 전남도청에 모여 최후항전을 선포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었다는 등의 진술들이 증22의 98-175쪽에 있습니다. 이들까지를 종합하여 원고는 “5.18은 추정이 아니라 확실히 북한군 600명이 주도했다”는 사실적 결론에 마침표를 찍었던 것입니다.
갑4호는 갑20호의 에필로그이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광수(광주에 왔던 북한인)즉 영상분석을 다루는 것은 사건의 분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피고가 마치 북한군 600명의 개입 주장을 영상분석 결과 만에 의존한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부분까지가 문헌연구의 결과이고, 어느 부분이 영상분석의 결과인지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문헌들만을 가지고 연구했을 때는 단지 북한특수군이 600명 왔다는 사실까지만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노숙자담요의 영상분석 결과 광수(광주에 왔던 북한인)들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 얼굴들에 대한 관등성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령이 다양하고 사회적 지위들이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광주 현장 사진들을 보면 그들이 무슨 작전을 했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노숙자담요와 원고는 김일성이 특수군 600명만 보낸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골고루 혼합하여 또 다른 600여명의 정치공작조를 별도로 내려 보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행군하는 제20사단을 공격하여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한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향해 몰고 가는 사진, A는 장갑차를 몰고 B는 장갑차를 유도하는 사진, TNT와 수류탄 더미에서 작업을 하는 전문가의 사진, A는 총기의 약실과 노리쇠를 검사하고 B는 방아쇠 기능을 검사하여 군용트럭에 승차한 민간복 입은 군병들에 릴레이로 패스하는 사진, 민간인들이 도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배타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사진, 시체장사를 하는 사진 등(갑25의 10, 11. 16 내지 24쪽)으로부터 그들이 무슨 작전을 했는지 충분히 해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백에 이르는 현장사진들은 주로 노숙자담요에 의해 발굴되었고, 그 사진들은 5.18연구자들에게 두 가지 의미를 선사했습니다. 당시 북한이 어떤 작전을 수행했는지 알 수 있게 했고, 현장 사진 속 얼굴이 북한의 누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아래 사진 몇 개만 보아도 이들 현장의 주역들이 광주의 껌팔이, 구두닦이, 넝마주이, 식당보이, 섀시공, 구두공, 목공, 철공, 자개공 등 광주의 천대받던 계급이 흉내 낼 수 없는 동작들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1980.5.21. 08시, 폭도 30명이 톨게이트에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이동하는 제20사단 현역부대를 습격해 사단장용 지프처 14대를 탈취해 가지고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달려가는 모습
총기의 약실과 노리쇠 기능을 검사하여 릴레이로 차량탑승자들에 전달하는 과정
좌측사진은 카빈총 실탄을 탄창에 장진하고 이를 큰 박스에 차곡차곡 담는 모습이고 우측 모습은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더미 속에서 여름날 방독면을 쓰고 전투요원들에 제공하기 위해 수류탄을 분류 정리하는 모습
좌측사진은 더운 여름에 두꺼운 경찰 방호복을 유니폼으로 입고, 집총한 상태로 명령을 대기하는 모습, 우측은 탱크를 조종하고 이를 유도하는 모습
도청 내부, 우중이 아닌 시간에 총을 거꾸로 메는 것은 북한군의 교범
지휘자가 있고, 조직화돼 있고, 유니폼을 입은 이 모습은 광주사람이 아님. 위 우측 적색 표시 부분은 워키토키
좌측 사진은 광주시민의 접근을 금지사키는 특수요원들, 우측사진은 제1,2,3광수-캐리버50 중기관총으로 무장
시체장사
이런 사진들은 노숙자담요가 새로 발굴해낸 사진들입니다. 이처럼 5.18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내 엮은 책을 놓고 단지 그것이 기존의 세상 인식과 다르다 하여 이를 “헌법에 반하여 역사적 사실을 현저히 왜곡하는 정보”라고 단정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횡포이며, 이렇게 할 권한은 그 누구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원고가 어떻게 해서 ‘북한군 주도’의 결론을 냈는지 증20의 내용 일부를 간추려 보겠습니다.
가. 검찰수사결과보고서 9개 줄에 숨어 있는 북한특수군 600명(증22의 1-21쪽)
1995년 7월 18일자로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 ․18관련사건 수사결과” 제92-93쪽(증22의 제11-12쪽)에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9개 줄로 표현돼 있습니다. 5.18을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바로 이 9개 줄에 표현돼 있었지만 이 9개 줄을 이제까지 제대로 해석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5․18 옹호세력은 북한군 개입설을 한마디로 부정합니다.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면 그 엄청난 권력과 방대한 정보기관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이 어떻게 발견해 내지 못했겠느냐”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 막강한 권력과 그 방대했던 정보기관에 근무했을 수백 명의 분석관들은 이 9개 줄을 해석할 줄 몰랐습니다. 아래는 문제의 9개 줄입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3)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게릴라전, 특수전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를 읽으면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1985년의 안기부가 그랬고, 1995년 검찰이 그랬습니다. 그냥 시위대가 20사단 차량 부대를 공격해 10여대의 지프차를 빼앗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시위대 600명이 모여 장갑차 4대와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해 시내로 나갔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그쳤던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북한특수군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고의 눈에는 아래와 같이 읽혔습니다.
“군부대 이동 상황은 극비 중의 극비정보다. 위 문장에는 이 극비정보가 이들 300여명의 폭도들에 넘어갔다는 뜻이 들어 있1다. 시위의 주역들이라는 10-20대의 양아치 계급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매복 장소를 선택해 사전에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감히 현역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작전능력은 국제수준의 용병 정도나 행할 수 있는 작전이다. 오전 08:00에 정규군을 공격하려면 적어도 06시 정도에는 300명의 시위자들 각자가 집에서 기상하여 최소한 07:00경 공격대기지점(Line of Departure)에 집결하여 실무적 작전점검을 하고, 공격대기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작전을 개시했다는 말이 된다. 10~20대 양아치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단장용 지프차를 위시하여 14대의 지프차를 몰고 곧장 14km 떨어진 군납업체인 아사이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17개 시군에 숨어있는 44개 무기고를 털 군용트럭이 필요해서였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은 요새다. 높고 견고하고, 철조망이 있고, 망루가 있고, 경비병들이 있다. 이런 벽을 뚫고 그 많은 차량을 탈취하려면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경비병을 제압해야 했다. 경비병과 싸우려면 총이 있어야 하는데 폭도에는 총이 없다. 총 없는 폭도 600여명이 총을 가진 경비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발한 작전이 필요했다.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를 구태여 빼앗아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이 거 봐라, 20사단이 다 일망타진됐다, 이미 대세가 기울였으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 또는 “우리가 20사단 지휘부다. 문 열어라”는 식의 위압용이었을 것이다. 시위대 600여명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했다는 말은 경비병력이 순순히 경비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갑차와 군용차를 수백 대 단위로 내주었다는 것은 차량키를 꽂아주었다는 뜻이다. 그 많은 장갑차와 군용차량들을 몰고 시내로 나갔다는 말은 자가운전 시대가 아니었던 시대에 광주에 장갑차를 4대씩이나 운전을 할 수 있는 운전기술자들, 군용트럭을 370여대나 몰 수 있는 많은 운전사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극비의 군사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미리 300명 단위로 매복해 있다가 감히 현역사단 행군부대를 기습하고,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몰고, 군용차량 제조공장으로 달려가 또 다른 300명과 합세하여 4대의 장갑차와 374대의 군용트럭을 탈취해 이를 몰고 시내로 나갈 수 있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600명의 집단이라면 국제 용병 급 집단이 아닐 수 없다, 광주에 이런 맥가이버들이 600명씩이나 있었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상이 원고가 검찰보고에 기록돼 있는 9개 줄을 읽는 독해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원고의 독해에 무엇이 틀렸다는 것인지 피고는 석명할 의무를 집니다. 이 9개 줄을 놓고 군과 안기부와 검찰 및 법관들은 겉만 읽었고, 원고는 속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특수군을 보지 못했고, 원고만 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에 대해 반론을 펴는 사람 원고는 보지 못했습니다. 원고의 600명 특수군 주장을 반박하려면 위 9개 줄이 허위라는 것을 증명하거나 위 원고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증명해야 합니다.
나. 안기부 보고서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 4시간에 턴 사실(증22의 22-64쪽)
1985. 5. 안기부가 발행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갑22의 22-64쪽)에는 1980년 5월 21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서 38개 무기고를 털어 5,403 정의 총기,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이 분산돼 있습니다. 증22의 제33쪽 윗부분에는 “1980.5.21. 09시, 군납업체인 아시자동차공장에서 군용차량 305대, 장갑차 5대, 일반버스 100대, 고속버스 5대가 탈취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갑22의 33-43쪽까지 각 무기고로부터 탈취한 총기 및 다이너마이트 숫자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과거의 분석관들은 자료를 나열만 해놓았을 뿐, 이를 유익한 정보로 가공해 내지를 못했습니다. 원고가 이 내용들을 가지고 처음으로 통계작업을 했습니다. 그 결과 전남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동안에 털어 무려 5403정의 총기를 탈취하였다는 정보를 처음으로 생산해 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8톤분의 폭도들은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해 놓고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놓았습니다(갑22의 185쪽).
갑22의 83-88쪽에는 북한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1985.에 발행한 ‘광주의 분노’ 라는 대남공작서의 일부 내용이 있습니다. 제85쪽 중간에는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룰 기습하여 숱한 무기들을 탈취하였고, . . .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 2,240정 엠-1 보총 1,235정, . .군용차량 400여대, ..수백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 개의 뇌관들도 획득하였다”는 구절이 있고, 안기부 자료에 있는 38개 무기고 이외의 6개 새로운 무기고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안기부 자료와 북한 자료를 합치면 44개 무기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검찰자료와 안기부는 수십 개 페이지에 걸쳐 낱개 항목들만 나열해 놓았을 뿐, 이를 통계적으로 처리하지 못해 의미 있는 정보를 가공해 내지 못한 것입니다. 통계학에 훈련된 분석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공해 낸 위 정보가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는 것이고, 검찰이나 안기부처럼 항목들만 나열해놓고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 원고가 새로 발견한 사실들
검찰 보고서와 안기부 보고서에 들어 있는 기록들은 북한특수군 600명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매우 중요한 정부문서였지만 과거의 재래식 분석관들은 이 중요한 자료들을 체계화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매우 아쉬운 일인데 그들은 아래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발굴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사실의 발견은 5․18을 다시 재판할 수 있는 재심사유가 됩니다. 북한특수군은 수백 개의 현장 사진들을 남겼습니다. 5·18진상규명에 앞장 선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는 2017년 10월 12일, 법정 증언대에 서서 용병과도 같은 몸매를 가진 사진 속 군병들의 모습을 놓고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게릴라)라는 기막힌 변병을 했습니다. 아무리 억지를 잘 쓰는 그들이었지만 국제 급 용병들로 보이는 사진 속 모습들과 용병 급들만이 벌일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해서는 감히 그것들을 광주의 양아치들이 벌인 상황이라고 주장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광주시장 윤장현은 2017년 4월 19일. ‘광주시민은 결코 광주교도소를 공격하지 않았다’며, 광주시위대가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발언한 남재준 대통령 후보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습니다(갑22의 176-177쪽). 하지만 1997년 4월 17일자 대법원 판결서에는 광주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5회나 공격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갑22의 183쪽). 위 판결문에는 광주교도소를 제3공수여단이 방어하고 있었으며, 그 방어 과정에서 공격자들을 살해한 것은 무죄라는 판결까지 있습니다. 광주교도소는 분명히 공격을 당했고, 그 공격자가 광주시민이 아니라면, 그들은 민간복장을 한 북한군인이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18기념재단 공식홈페이지 게시판에는 “5.22.15:08 서울에서 온 대학생 환영식 거행”이라는 글자가 기록돼 있습니다(소장 참조). 광주출신 동아일보 기자 김영택은 검찰진술에서 “복면한 500명”이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계속해서 싸우자고 선동한 사실을 증언하면서 그 500명의 외지인이 전두환이 광주사태를 키우기 위해 위장 침투시킨 정부군일 것이라고 믿는다는 내용을 검찰에서 진술했습니다(갑23). 민주화운동 최고반열에 속하는 5․18유공자들 모두가 그들이 쓴 “항쟁기록”(증22의 98-175쪽)에서 무기는 누가 털었는지 모른다 했고, 5월 24일까지 도청은 위엄 있는 사람들이 점령해서 자기들은 5월 24일 오후에야 비로소 도청에 갈 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5․18유공자 최고 반열에 속한 전 평민당 국회의원 정상용(당시 30세, 무기징역)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항쟁지도부를 새로 구성을 해서 활동을 한게 25일부터 27일새벽 진압이 될 때까지 짧은 기간이었단 말예요” (증22의 131쪽 19-20행) “26일날 우리가 재무장을 하기로 결의를 하고 궐기대회에서 시민들에게 알리려고 그런 조직작업을 했는데, 그날 밤에 계엄군이 진입을 해보ㅓ렸단 말예요”(증22의 132쪽 끝행 내지 133쪽 1행), “윤상원 들 몇 사람은 녹두서점에 모였다가 5.21. 총소리가 나자 보성기업으로 가는 등 각자 도생했다가 22일부터 YWCA를 활용했다”는 취지의 글이 제136쪽 ‘가’에 기술돼 있습니다. 정상용은 투쟁위원회 외무위원이었는데 김종배(투쟁위원회 위원장), 허규정(투쟁위 내무위원장)과는 도청에서 처음 만났다고 기재돼 있습니다(증22의 137쪽 ‘가’)
증 22의 제228-142쪽 정상용의 증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당시 30세로 회사원이었고,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항쟁지도부’의 부위원장 겸 외무위원장이었다. 나와 김종배 허규정은 수습대책위원이었고, 나중에 YWCA로부터 영입된 윤상원 등과 합쳐 ‘항쟁지도부’를 출범시켰다. 김종배가 김창길이 이끌었던 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위원장을 하고 나는 대외관계를 맡는 외무를 맡고 허규정이 내무를 맡았다. ‘항쟁지도부’라는 것은 낯모르는 사람들 끌어 모아 임시방편으로 만든 임시조직이었다. 윤상원, 나, 이강현, 윤강옥 이렇게 넷이서 주로 대책을 의논했다. 25일 이후에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겨우 70-80명 수준이었다. 그나마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온건파인 김창길 등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박남선이었다. 그가 권총을 소며 무섭게 해서 몰아냈다. 19일에 나는 녹두서점에 있었다. 거기서 윤상원을 만나 대책을 의논하다가 21일 총격전이 벌어지자 흩어졌다. 녹두서점에 있었던 사람들이 ‘각자 처신하자’며 다 해산해 뿔뿔이 헤어졌다. 22일 다시 녹두서점에 모였다. 그리고 녹두서점이 비좁아 본부를 YWCA로 옮겼다. 김종배(총사령관역역)와 허규정(내무위원장)은 여기에서 처음 만났다. 이 두 사람은 조선대 학생이었고, 운동권이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거기에서 생전 처음 만난 거다. 윤상원의 투쟁 감각이 나보다 앞서 있었다. 김종배를 찾아낸 것도 윤상원이었다. 27일, 윤상원 등 여러 명이 도청건물 회의실에 있었다. 회의실에 있었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다. 전망이 좋은 2층 복도에 있던 사람들은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다. 계엄군이 의표를 찔러 후방으로부터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5․18유공자 최고 반열에 속한 또 다른 유공자 허규정(무기징역)은 증22의 제143-160쪽에 걸쳐 아래와 같은 증언을 하였습니다. “나는 5월 26일 출범한 투쟁위원회의 내무위원장을 맡았다. 우연히 지나다가 공수부대 요원들이 젊은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가 나도 공수부대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운동권에 속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지격으로 휩쓸렸다. 시민들 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니기만 했다. 그 시위는 누가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리더도 없었다. 어른들은 시국수습대책위원회, 젊은 사람들은 학생수습위원회, 서로 말이 다르고 통제가 안 되었다. 조직이 움직이지 않고 엉망이었다. 그런데 윤석루가 나이도 굉장히 어린데 기백이 있어서 기동타격대를 장악했다. 윤석루는 학생도 아니었다. 특별한 방법은 안 나오고 맨날 회의만 했다. 운동권 간부들은 모두 다 예비검속으로 미리 잡혀 가버렸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개념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23일의 이런 모습을 본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오직 종교지도자들, 교수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태를 여기서 끝내고 시국을 수습하지고 했다. 나도 멋모르고 참여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내무위원장이된 거다.”
폭동의 현장 주역들이 광주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증언한 것입니다. 지휘자도 없고 조직도 없었고 각자 도청에 왔고, 도청에서 처음으로 만난사람들이며, 개념 없는 오합지졸이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통일부 ‘주간북한동향분석’에 널려 있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매년 5월이 되면 전 지역 시-군 단위로 5·18기념행사를 하면서 남조선 파쇼와 미제의 원수를 갚자는 선동전을 벌인다는 것입니다(갑25의 31쪽). 북한에서 최고인 것에는 5·18을 영예의 상징으로 하사합니다. 기차역 사진에는 “5·18무사고 정시견인초과운동”이라는 대형 글씨가 써있습니다(갑25의 31-32쪽). 장거리 유도탄 탄두 피를 압축하는 1만 톤짜리 프레스(룡성기계)에는 ‘5․18청년호’라는 글씨가 있습니다(31쪽). 그 외 ‘5·18영화연구소’ ‘5·18공장’ ‘5·18대형단조공장’ ‘5·18누에고치반’ ‘5·18전진호’ ‘영예의 5·18청년직장’ ‘5·18땅크호’ ‘5·18청년제철소’ 등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갑20과 갑21에 담겨 있습니다. 1989-91. 김일성이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했습니다. 시나리오는 황석영이 썼고, 배경음악은 윤이상이 깔았는데 배격음악의 테마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갑21의 39쪽). 2015년 10월 15일자 연합뉴스는 기사와 방송을 통해 남한의 모든 민주화운동은 김일성 교시에 의해 수행됐고, 그 최고봉이 5.18이라고 명시했다는 사실을 보도했습니다(갑24). 위 모든 것은 갑20과 갑21에 들어 있습니다. 5․18을 북한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면 북한이 왜 남한보다 훨씬 더 방대한 노력들을 5․18을 기리는 일에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까? 2015년5월18일, 광주시 전체가 나서서 “5·18 35주년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매우 놀랍게도 광주시가행진에는 김대중과 김정일이 두 손 모아 주체탑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 대형 조형물이 행군대열을 향도했습니다(갑26의 133.134쪽). 광주사람들의 머리에는 “5․18은 김대중과 김정일의 합작품”이라는 잠재의식이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광주 현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장 사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경찰복을 착용하면 즉시 살해되었는데 발굴된 현장사진에는 경찰복을 입은 사람이 질서를 통제하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갑26의 272쪽). 상황에 맞지 않는 세트장을 만들어 모략용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황장엽과 김덕홍이 1998년에 했던 증언들이 2013년 5월에 기사화되고 방송도 됐습니다. “5·18은 북한 통전부가 주도한 것이었는데 남한에 뒤집어씌운 것이고, 통전부는 사태 직후 성공을 자축했다. 많은 사람들이 훈장을 받고, 술파티를 열었다.”(갑25의 34쪽)
2015년 10월 13일, 원고는 보신각에 무대를 차려놓고 5.18관련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북한 여성 2명이 나와서 매우 귀한 증언을 했습니다. 초등생이었을 때 등교할 때마다 매일같이 학교에서 확성기를 통해 들려주던 노래라며 그 노래를 들려준 것입니다. 키워드는 ‘광주’ ‘무등산’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하나로 잇자’ 등일 것입니다. 북한 여성 2명이 불러준 노래는 동영상으로 보관돼 있습니다.
제1절
광주라 무등산에 겨울을 이겨내고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어나네
동강난 조국땅을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죽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제2절
광주라 무등산에 봄철을 부르면서
새빨간 진달래가 붉게 피어나네
찢어진 민족혈맥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젊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북한이 왜 매일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틀어주겠습니까? 북한이 왜 광주를 노래하고 무등산에 흩어진 넋을 죽어서도 잊지 못한다 슬픈 곡조로 노래하겠습니까? 동강난 조국 땅과 민족의 혈맥을 다시 잇고자 광주에서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음 당한 그들이 과연 광주시민들이겠습니까? 어째서 광주의 천대받던 하층 계급을 위해 북한은 이토록 애간장 녹이듯 슬프게 노래하겠습니까? 무리죽음 당한 이들의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북한에 있다는 것입니까 남한에 있다는 것입니까. 북한이 왜 광주와 무등산과 무리죽음을 이토록 애절하게 노래하겠습니까? 2014.5.13. 청주에 가매장돼 있던 430구가 1미터 지하에 가매장돼 있었습니다. 이 유골들은 칠성판이라는 나무 위에 맨몸으로 올려진 상태에서 하얀 비닐로 둘둘 말아ᆞ 그 위에 일련번호들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이런 포장방법은 많은 수의 시체가 빨리 부식하던 광주에서만 있었던 우일한 포장방법이었습니다. 당국이 이 유골에 대해 처리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라졌습니다. 조달청에 무연고 유골에 대한 입찰공고도 없고 2014.에 충북 전체에게 화장된 무연고 유골은 겨우 18구입니다.(갑26의 34-37쪽). 이에 대한 조사도 이번 특별법의 규명내용일 것입니다.
5월단체들이 가장 난감해 하는 사진들이 있습니다. 10세 전후의 어린 여학생 10여명이 계엄군 아저씨 앞에서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진이 있고, 어지럽게 쌓인 파괴의 잔해들을 땀 흘려 청소해 주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갑26의 제23쪽). 계엄군이 광주사람들, 전라도 사람들을 보는 족족 죽였다면 이떻게 이런 사진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광주의 총상 사망자 116명의 75%에 해당하는 85명이 시민들이 소지한 카빈총 등에 의해 사망했습니다(갑22의 73쪽 상단 및 증22의 57-64쪽)). 당시 폭도들이 M16소총도 다수 소지하고 있었던 사실을 대입하면 총상사망자의 대부분을 폭도들이 죽인 것이 됩니다. 이 모두가 대학생들로 위장한 북한특수군의 소행으로밖에 볼 수 없는 현상들입니다. 증22의 90-97에는 날짜별 사망자 명단과 사망장소가 표시돼 있습니다. 통계를 잡아보면 그 80%가 계엄군이 없는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1)-(3) 주장에 대하여: 을제8호증 제8쪽 제3조 제6항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 개입 여부 및 북한군침투 조작사건”이라 분명히 기재돼 있고, 갑10 및 갑11의 보도내용도 ‘북한군개입설’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는 요지로 보도했고, 피고의 2018.7.24.자 준비서면 8-10쪽 박스 안의 회의발언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법에 의해 5.18에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사실이 2년 또는 연장하여 3년 이내에 증명되면 이제까지의 민주화역사는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피고는 특별법에 의해 구성되는 50명 규모의 규명위원회는 절대로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기존 성역’을 건드릴 수 없다고 명시돼 있기나 한 것처럼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나홀로식 억측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번 인식된 내용에 대해서는 세상이 바뀌어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피고단체인 것입니다.
2)항 전체에 대하여:피고는 제(3)항에서, 원고의 영상분석 자체가 과학적으로 신뢰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영상분석은 5.18관련 지역-집단-개인을 비하하는 합리적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사실 본 사건과 전혀 무관합니다. 영상분석은 갑4 및 갑20호가 세상에 나온 지 6개월여가 지난 다음인 2015.5.5.부터 시작된 연구입니다. 따라서 피고의 이 주장은 이 사건과 무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5.18연구를 지금의 시점에서 이해하기 위해 원고는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석명합니다.
원고가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데까지에는 문헌연구와 영상분석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문헌연구는 2002년부터 2014년까지 13년 동안 이루어 졌고, 영상분석은 2015.5.5.부터 지금까지 40개월 이상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문헌연구는 피고가 직접 주도했고, 영상연구는 노숙자담요라는 필명을 가진 재미교포 영상전문가가 이끄는 영상분석팀이 주도했습니다. 이 팀은 미국 정보기관들에서 영상분석 업무를 수행했던 사람들로 신변보호 상 신분을 공개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팀의 영상분석 기술을 한국사회에서는 따라 갈 사람이 없습니다. 사진 한 장을 분석해 주는데 200만원을 달라고 하는 것이 실력조차 없는 한국 최고라는 영상분석 학자인데 반해 노숙자담요는 수 천 개의 사진들을 오로지 애국심에서 시신경을 파괴당해 가면서 스스로 일감을 찾아 분석해 냈습니다. 이 험한 고생을 3년 이상에 걸쳐 스스로 감당할 사람들이 이 팀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자문해 봅니다.
원고 역시 영상분석기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2015.5.3. 어느 회원이 제1광수(광주에 왔던 북한사람) 얼굴과 2010.5.17. 평양노동자회관에서 거행된 5.18 30돌 기념행사장 로열석에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과 같아 보인다는 글을 쓴 것이 영상분석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갑26의 204,205쪽)
2010년 평양노동자회관5.1830주년 기념식
원고가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에 영상분석 도움을 청하자 필명 노숙자담요가 2015.5.5. 제1광수 얼굴을 과학적 매너로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에 흥분한 네티즌들이 제2광수와 제3광수의 얼굴을 광주현장사진에서 찾아내 분석을 의뢰하면서부터 눈썰미 있는 네티즌들과 노숙자담요 사이에 토스해주고 토스한 것을 분석해주는 과정으로 열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현재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567명을 발견해 냈습니다(갑27).
현 주홍콩 북한총영사 장성철, 그는 전남도청 앞에서 교련복을 착용한 상태에서 혀를 내미는 순간에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혀를 내미는 것은 그의 ‘틱’이었습니다. 그는 2017년 3월, 홍콩 봉황TV와 28분간 인터뷰 하는 데 무려 32번씩이나 혀를 내밀었고, 노숙자담요가 그 32개의 순간 모두를 포착했습니다. 두 얼굴의 뺨에 나 있는 깊고 넓은 흉터도 똑같이 일치합니다. 이를 확대경으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광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제1광수로부터 제567광수까지 모두를 부인한다 해도 제498광수까지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한 광수만 인정해도 광주에 북한특수군은 온 것이 됩니다. 그 어느 누가 이렇게 집요한 매너로 광수분석을 하겠습니까? 이 498광수는 네티즌 세계에 “혓바닥광수” 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광수분석을 쉽게 상식적인 눈으로 함부로 부정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영상분석을 전문으로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육안으로 보아 이 사람의 얼굴은 광주의 얼굴과 최근의 얼굴이 똑같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얼굴들이 갑21의 제62-63쪽과 갑25의 39 내지 46쪽에 걸쳐 많이 나열돼 있습니다. 이 부분을 확대경으로 보면 더욱 선명해 보입니다.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는 부분입니다. 민완형사(민첩한 수완을 가진 형사)는 몽타주만 가지고도 법인을 잡습니다. 사진은 많이 흐리다 해도 몽타주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권에 대한 배려가 없는 중국은 얼굴인식 프로그램을 현실생활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이 얼굴인식 프로그램을 수입한 말레시아 경찰은 13억 인구 중에서 법인 한 사람을 찾아내는데 3초밖에 안 걸린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에서는 25년 동안 숨어온 탈옥수가 차량청(DMV에 가서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려고 사진을 찍는 그 순간 덜미가 잡혔다는 KBS 보도가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ATM에서 현금 거래를 할 때 비밀번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인식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4개의 보도자료가 갑15 내지 18에 제출돼 있습니다. 피고는 얼굴인식 프로그램 자체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인지 노숙자담요의 얼굴분석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그 이유를 석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노숙자 담요가 밝힌 그의 분석방법과 분석요원 분석 시간 등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래 내용대로 실행한 분석 모델이 황장엽과 탈북자 장진선에 적용돼 있습니다. 황장엽의 두 얼굴은 갑26의 제184 내지 188쪽에 자세히 분석돼 있고, 장진성의 두 얼굴에 대한 분석은 갑26의 189 내지 193쪽에 자세히 분석돼 있습니다. 피고는 갑26의 제184쪽 내지 193쪽의 분석 방법에 대해 이것이 왜 비과학적인지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피고는 또한 아래의 분석방법을 읽고, 1) 어째서 아래 내용 자체가 과학이 아닌 것인지, 2) 이래 내용은 과학인데 노숙자담요가 이 과학 내용 그대로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인지 3) 피고집단에 이런 분석을 할 수 있는 인원이 있는지 4) “원고의 영상분석에는 과학적 신뢰가 없다”는 결론은 어떻게 평가한 것인지 그 평가주체와 평가방법에 대해 석명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해 궁서체 내용은 노숙자담요가 제공한 것입니다.
분석방식
1) 얼굴, 지문인식 기하학 분석
2) 법의학적 골상 분석
3) 표면 등고선과 등고면각, 형상방향각 분석
4) 음영픽셀 농담의 차이에 따른 고저, 형상폭, 2차원 평면점과 3차원 입체각점의 길이와 부분각면의 동일점 및 차이점 분석
5) 얼굴의 특징점에 대한 형상조형 분석
6) 3D 입체면상 및 비율 분석
7) 생체인상의 표정에 따른 관상학적 분석
8) 노화로 인한 피부세포의 물리화학적 변화와 위치이동 분석
9) 사진에 나타난 동적상황의 형상과 현재의 정적상황의 형상과의 차이가 두 사진상의 모습과 일치되는지를 판단하는 종합적인 객관성 분석
10) 얼굴각부 형상과 특징점, 개성적인 면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상의 객관성 분석
위 10가지 이상으로 분석하여 수치전환상 95%이상 되면 최종적으로 광수로 명명함.
2. 분석기간
1) 2015년 5월 ~ 2018년 7월 현재
2) 38개월 / 567 = 1광수당 평균 약 2일
3. 구성원
1) 팀장 1인 노숙자담요 (국적: 미국)
2) 팀원 8명 정보분석관 (국적: 미국, 중국)
3) 마약제조범 영상탐색 및 사살, 시체처리
4. 분석에 사용된 프로그램
1) 시중에 용도가 비슷한 분석용 프로그램들이 각 기업체 및 공과대학실험실, 정부기관 등에 부분적으로 산재해 있으나 정보기관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특정용도로 세팅된 전용프로그램으로 공개불가임.
5. 광수분석을 입증할 자료는 분석에 소용된 제반과정이 아니고, 아래와 같은 과학적 일치의 결과가 실체를 입증하는 증명과 증거로서의 명백한 물적증거가 됨. (비유하면, 해상침투한 잠수함간첩선을 발견하여 사진을 찍어 신고하였는데 신고제출된 사진을 배척하고 그 사진을 찍은 사진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증명하라는 주객이 전도된 비상식적이고 위법적인 재판방해 행위로서 국가안보에 관한 중대한 사안을 말단지엽적인 쪽으로 시선을 돌려 적의 전쟁범죄를 감추어 적을 이롭게 하려는 이적성 소송방해행위에 해당됨)
[다음과 같은 과학적 일치의 결과가 실체를 입증하는 증명과 증거로서의 명백한 물적증거가 됨]
1) 광수대조사진으로 1980년 5.18 광주에 침공한 북한게릴라군의 얼굴이 입증된 바로 그 사진들이 명백한 <현장물증>임.
2) 경찰 범죄지문분석이 일치하면 범인으로 특정함 = 광수 얼굴지문분석이 일치하면 광수로 특정됨 (기하학적 분석방법이 동일함)
3) 경찰 생물학적 DNA 분석이 일치하면 범인으로 특정함 = 광수의 얼굴 특징점 즉, 예를 들면 기형적으로 길쭉한 턱의 형상이 일치, 얼굴의 같은 지점에 같은 형상의 점과 사마귀, 각부형상의 특징적인 모습이 일치하면 각 개인만이 보유한 개성적인 특징점이 생물학적으로 일치하므로 DNA가 일치하는 것과 동일함. DNA역시 인간의 세포 속의 핵에 XY염색체로 구성된 핵산의 정보고리로 루어진 정보의 집합체로서 각개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을 형상짓는 A,G,T,C 염기서열정보로서 실제 광수사진얼굴형상의 개성적인 특징점이 일치하는 것이 바로 DNA가 일치하는 것과 생물학적 과학적으로 전적으로 동일함.
4) 경찰 범인의 얼굴몽타주 분석상 개성적인 특징점이 일치하면 본인으로 특정함 = 광수 얼굴의 개성적인 특징점과 얼굴의 같은 장소의 흉터, 동일한 습관적인 형상 등이 일치하면 동일인으로 특정함
5) 광주현장의 한장의 사진에 29명이 동시에 평양의 한장의 사진에 군간부 얼굴이 29명이 동시에 일치하는 수학적 확률이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물증이 됨.
6) 경찰수사상 얼굴의 윤곽만 흐릿하게 나타난 몽타주정도의 사진으로도 범인을 특정하는 물증으로 삼는데, 위와같은 다각도의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분석이 일치되는 현장사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법의학적, 생물학적, 기하학적, 수학적 물증>이 됨.
[결론]
5.18 광주 현장사진들과 평양의 얼굴들과의 대조사진은 1980년 5.18 광주에 불법침공한 북한게릴라특수군의 전쟁범죄를
입증하는 명백한 <물적증거>임.
피고는 제(1)항에서‘수백 명의 광주부나비들’, ‘북한특수군에 부역한 20대 양아치급 부나비들’ ‘광주인들이 구성한 시위대는 없었다’ ‘이 작전에 이용된 사회불만세력’ ‘남한에서 부화뇌동한 부나비들’ ‘정치인들과 정부관계자들을 끌어들여 불공정하고 비민주적인 파워게임을 하였다’ ‘떼로 몰려다니며 폭력행사를 하는 등 비정상적이고 부적절한 게임을 하였다’ ‘사기놀음을 하였다’ ‘5.18사람들을 포함한 영악한 공산주의자들에게 국민들이 어수룩하게 당해왔다’ 는 표현들이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 제8조 제3호바목을 위반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했고, 광주의 기층계급인 10-20대 청소년들이 이에 부화뇌동한 것을 사실로 믿는다면 위와 같은 표현들은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언어들일 뿐, 여기에는 허위도 없고 모욕도 없습니다. 피고가 이 부분 표현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그들이 5.18은 순수-숭고한 민주화운동이라고 믿고 있는 데에서 유발된 시각인 것입니다.
증22의 제78-81에는 광주시위에 참가했다가 1심 집행유예 이상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나이와 직업이 있습니다. 8개 페이지는 생략됐지만 원고는 유죄선고를 받은 283명의 나이와 직업에 대한 통계를 냈습니다. 80%가 10-20대이고, 80% 정도가 59개 직종에 종사하는 하층계급입니다. 이를 놓고 양아치급 부나비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과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들과 정부관계자들을 끌어들여 불공정하고 비민주적인 파워게임을 하였다’라는 의미는 국방장관과 국무총리와 국회의원들을 끌어들여 원고의 연구를 차단했다는 뜻이고, ‘떼로 몰려다니며 폭력행사를 하는 등 비정상적이고 부적절한 게임을 하였다’는 표현의 뜻은 5월 단체들의 폭력이 상습적이라는 뜻입니다. 갑26의 제63 내지 67의 사진들과 설명에 적시돼 있듯이 5월 단체들은 2016.5.19. 그들이 고소한 사건의 첫 재판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자 50여명씩 몰려와 법정을 가득 채웠다가 퇴정하는 순간에 집단으로 달려들어 법정과 법원 복도와 주차장 공간에서 20여분 동안 원고에게 집단폭행을 가했고, 2013.6.10. 5월 단체들이 서울에 몰려와 북한군 관련 보도를 5개월 동안 하고 있던 TV조선과 채널A를 파괴하거나 공격하고 경찰을 폭행하였습니다. 이 장면들이 아래에 있습니다. 이를 놓고 떼로 몰려다니며 폭력행사를 하였다고 표현했는데 무엇이 잘못됐다는 것인지 원고는 알지 못합니다.
<원고가 2016.5.19.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집단폭행당하는 모습>
방송국 지키는 경찰들에 밀가루 세례 방송국 건물 유리벽에 발길질
철물로 방송국건물 유리벽 가격 방송국 지키려는 경찰을 집단 폭행
위 두 가지에 대한 동영상들이 확보돼 있습니다. 피고가 이를 부인할 경우 그 동영상들을 제출하겠습니다. 갑26의 제67쪽에도 두 개의 폭력사실이 적시돼 있습니다. 2010.에는 원고가 안양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50여명의 5월단체 사람들이 안양법원 로비를 선점하고, 70-80대 어른들의 턱을 치며 반말을 하고, 창문을 향해 서 있는 40대 여성을 뒤로부터 공격하여 귀고리에 귀가 찢어지게 했고, 입정하는 원고를 향해 여성들이 달려와 손톱으로 얼굴을 긁어 놓겠다 덤볐습니다. 이런 행동은 문명권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타잔의 세계입니다. 당시 재판장님은 정회를 세 차례나 했고, 주의를 10여 차례나 주었습니다. 2008년에는 서울의 대형교회인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가 5.18에 대한 설교를 마음에 안 들게 했다 하여 버스를 2대씩 몰고 상경하여 술 냄새를 풍기면서 예배를 3주씩이나 방해한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표현을 ‘떼로 몰려다니며 폭력행사를 하였다“한 것이 어째서 5월 단체들을 차별하였다는 것입니까.
‘사기놀음을 하였다’는 표현에 대해 석명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에는 국가유공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5.18유공자들은 국가유공자 훨씬 위에 있습니다. 그들이 받는 대우가 독립유공자나 전상유공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히 높은 데다 유공자 자격증 따기가 매우 쉽기 때문입니다. 1990년에 당시 화폐로 3억 1,700만원의 일시금을 받음과 동시에 매월 당시 화폐로 420만 원씩의 연금을 받기로 책정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대우는 오로지 5.18유공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별도의 “금수저 특혜‘입니다. 모든 국가고시에 본인은 10%, 자식들은 5%의 가산점을 받아 경찰, 교사, 공무원 자리를 원하는 대로 점령해 왔습니다. 의료, 학비, 세금, 시청료, 교통, 주택청약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무료 또는 그에 가까운 혜택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5.18 때 18세의 고교생이었던 윤기권도 1990년, 2억원의 일시금을 받았습니다. 이 엄청난 일시금은 15명의 경찰관들을 닭장차에 가두었다는 공로로 주어진 것입니다. 1990년의 2억 원이면 28년이 지난 지금의 화폐 가치로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큰돈을 받은 윤기권은 다음 해인 1991.3.4, ”위대한 수령님과 참 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습니다.
5.18유공자들이 받는 대우가 이렇듯 엄청난 것도 국민 대부분이 분노하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 보란 듯이 5.18유공자들 숫자가 해마다 늘어납니다. 1990년에 5.18 보상 대상자로 선정된 사람은 2,224명입니다. 이들 중에는 조사관으로부터 뺨을 한 대 맞았다거나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거나 하는 내용 등으로 상호 인우보증을 서서 피해자로 인정된 사람들까지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가 해마다 늘어나 2017년 연말 현재로 5,769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여기에는 5.18당시 광주지역에 살지 않은 사람들도 무수히 많고, 정치인 출신들이 매우 많습니다. 권노갑, 한승헌, 한화갑, 이해찬 등 광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납니다.
5.18유공자가 고무줄처럼 마구 늘어난 이유는 유공자를 선정하는 시스템이 상식 이하이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 바치면서 대한민국에 건설적으로 헌신한 유공자들에 대한 자격심사는 대통령을 대신하여 국가보훈처가 매우 까다롭게 실시합니다. 하지만 광주에서 적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사람들에 대한 자격심사는 광주시장이 합니다. 광주출신 심사위원 10명이 동의하면 선정되는 것입니다. 광주시장이 5.18유공자를 선정하고 급수를 부여한 후, 대통령에 토스하면 대통령이 보훈처를 통해 유공자 혜택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위에 광주가 있다는 사실을 이 이상 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건국절도 박탈당한 대한민국, 해마다 5월 18일이 되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정부요인들이 광주로 내려가 '여적절'을 '민주절'이라며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는 한심한 나라라는 것이 원고의 증거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사기가 아니면 무엇이 사기이겠습니까.
결 론
1.갑12의 1심 판결문에는 원고가 4권짜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역사연구 목적으로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갑26의 뒷표지 안쪽에는 원고가 2014.10.까지 발행한 총 8권의 5.18관련 역사책들의 표지 사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갑26의 화보책은 그야말로 대형 저작물입니다. 이러한 공식적 문헌 밖에도 갑21 갑25와 같은 팸프릿들이 10여 개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에 담긴 내용들과 원고가 이 사건 소장 및 이 준비서면에서 밝힌 내용들을 보고,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 작전이었다”는 연구결과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단칼에 일축할 수 있는 권한은 그 누구에도 없을 것입니다. 이 방대한 역작들을 놓고 그리고 그 누구의 학벌에 뒤지지 않는 분석공학을 전공한 한 인생이 한국 나이 61세로부터 77세에 이르기까지 연구한 결과물을 놓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숙연함을 표합니다. 경의를 표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피고는 원고의 연구내용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평가해야 할 권한도 없으면서, 단지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이 보편화된 인식이고, 원고 이외에는 아무도 5.18과 북한군을 연계지은 사람이 없다는 비상식적인 근거를 이유로 원고의 역사연구가 반헌법적인 역사왜곡이라 단정하고 삭제처리 하였습니다. 이는 월권이고 직권남용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는 마녀사냥입니다.
2. 더구나 2018.2.28.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이 ‘북한군 개입 여부’에대해 규명하라는 제3조 제6항의 명령에 대해서까지 왜곡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해석은 요설의 범주에 속하는 사실의 왜곡일 것입니다.
3. 대한민국 헌법 제5조와 제39조는 국방과 안보에 대한 국민적 의무를 규정 하고 있습니다. 원고의 연구는 이에 부합하는 것이며, 오로지 진실을 탐구하려는 학자적 욕구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잡고 앞으로는 더 이상 북한에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는 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지, 헌법에 반하는 역사왜곡을 한 것도 아니고 5.18관련 존재들을 차별한 것도 아닙니다. 국가의 안보와 올바른 역사 정립을 위해 17년 동안의 노년을 다 비쳐 연구한 내용이 어째서 반헌법적인 역사왜곡이라는 것인지 원고는 알지 못합니다. 역사왜국의 주범들은 5.18유공자들일 것이며,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집단이, ‘북한군이 저지른 게릴라 폭동을 놓고 소통자체가 어려운 광주의 10-20대 기층세력들이 이룩한 숭고한 민주화운동이라 하면서 많은 특혜를 받고 국민세금을 부당하게 챙기고, 사회를 호령하는 5월단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4. 원고의 청구취지를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입증자료갑22. 별책 증거자료 목차
갑23. 원간조선, 김영택 광주 동아일보 기자의 검찰진술
갑24, 2015.10.14.의 연합뉴스 보도
갑25. ‘새로 써야 할 5.18역사’
갑26. 화보책 ‘5.18영상고발’
갑27. 제567광수
2018.8.3.
원고 지만원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8민사부 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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