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내란 음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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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7-07 13:16 조회5,1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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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내란 음모 사건
1980년에 단죄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패하자 김대중은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2년10월 유신 계엄령이 선포됐고, 국회가 해산됐다.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및 군사원조를 중단시키고자 노력했고, 망명정부를 수립했고,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감행했다. 1973년 북한을 방문했던 친 북괴 분자들을 미국에서 만나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결성한 데 이어 일본에서도 한민통을 결성하여 의장에 취임했다. 김대중은 그야말로 극렬 좌익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한민통의 핵심 요원은 김종충, 조활준, 배동호, 김재화, 곽동의, 정재분 등 소위 베트콩들이었으며 이들은 조총련과 북한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일본 우익을 표방하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한민통"은 좌익들로 구성된 조직이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사살한 문세광이 한민통의 일원이며, 육여사 저격 직후에 국내에 잠입했다가 간첩으로 체포된 김정사도 한민통의 일원이다. 이로 인해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조총련이 한민통에 매월 1,000만 엔 내지 2,000만 엔씩 자금을 공급했다, 또한 한민통은 광동회라는 좌익단체가 발행하는 공산당 선전지 "민족시보"를 기관지로 활용했다.
1973년 4월, 김대중은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며 미의회 지도자에게 그런 압력을 넣어달라 호소했다. 그의 이른바 반역활동에 분개한 중앙정보부는 1973년8월8일, 그를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하여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했다. 이에 대해 박정권은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했지만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을 해임하고,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사과하는 선에서 86일 만에 마무리됐다. 국제적 비난이 확산된 것만큼 김대중의 자유공간도 넓어졌다. 그는 일본에 있는 김종충, 배동호 등과는 전화로, 다른 구성원들과는 김녹영 및 일본기자 등을 통해 통신연락을 취하면서 반정부 음모를 계속했다.
1974년12월, 가택연금 중에 있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이른바 명동사건을 저질렀다. 1976년 3.1절 기념 미사에서 그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9호를 위반했다는 죄로 구속되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 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 비판이 고조되자 박대통령은 1978년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한 후 가택연금으로 전환했다.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1979년3월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본격적인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동년12월에 그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고, 이어서 1980년2월29일, 그를 포함한 모든 시국사범들에게 사면복권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줬다. 시국사범들은 이를 '서울의 봄'이라 부르면서 마음껏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김영삼, 김종필 등과 나란히 가벼운 몸으로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3김정치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노력했다. 당시 한국사회를 위협했던 학원소요사태를 배후 주동하고 학원소요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최규하 과도정권의 즉각 퇴진을 압박한 것이다.
그는 구심점을 잃고 있던 과도정부의 취약함을 틈타 한국사회를 무정부상태로 만들어 정권을 잡을 욕심으로 그를 추종하는 반체제 집단인‘국민연합회’‘민주헌정동지회’‘민주연합청년동지회’‘한국정치문제연구소’유신체제에서 제적된 복학생 등을 이용하여 과도정부를 전격적으로 붕괴시킨 후 정권을 잡으려는 뜻을 품고 학생소요를 선동했다. 1980년 화염병을 무기로 한 대규모 극렬시위는 김대중의 작품이었고, 그를 따르는 세력은 이를 ‘5월의 봄’이라 불렀다. 신바람 난다는 뜻이었다.
국민회의 지도부 인물들인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열, 한완상, 한승현,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 계훈제 등은 북악파크호텔에서 수차 회동하여, ***와 ***으로부터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민중의 호응을 얻어가지고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여,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를 만들어 김대중의 집권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추인했다. 1980년5월14일 및 15일에 발생한 소요는 극렬함의 정도로 보나 양적으로 보아 경찰력의 한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이 양일간의 학생소요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 산하인 민주청년협의회의(장기표 등 복학생 조직) 사주에 따라 전국 33개 대학총학생회장들에 의해 유도됐다. 5.22일로 계획돼 있던 전국규모의 소요는 국민연합 등 재야정치 단체들과 전국 59개 총학생회장단회의와의 연대 하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민중봉기이기 때문에 군에 의한 대대적인 대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5.16일, 국방장관은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청와대에서 열린 시국대책간담회에 참석하여 이 사실을 보고했다. 5.17 계엄령은 이렇게 해서 선포됐고, 이 선포에 모든 지역이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광주만은 당시 개념으로‘반역구역’이 됐다.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당시37세)은 김대중으로부터 김상현을 통해 자금 500만원을 받아 광주시위를 계획했다. 대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이들은“민주화운동을 구실로 국민연합과 국민연합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단체인 민주청년협의회 등 지지 세력을 동원하여 학생시위를 폭력시위로 조종하고 이에 일반국민을 가세시켜 폭력으로 국헌을 문란하여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12가지의 중대한 행동을 저질렀다.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기소 및 재판
5월17일 19시경 김대중 등에 대한 수사가 착수됐다. 중앙정보부 김근수 안전조사국장은 수사내용을 수시로 이학봉 합동 수사단장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보고했고 5월20일경 중간수사결과 발표 문안을 작성하여 이학봉과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계엄사는 5월22일 중간 수사결과를 이렇게 발표했다.
“김대중이 학생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 선동하여 온 확정을 잡고 연행 조사 중이다. 김대중은 정상적인 정당활동을 통해서는 정권획득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변칙적인 혁명사태를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할 계기를 마련하기로 하고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통하여 5월중순 대학의 교내 및 교외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예춘호, 문익환, 조성우, 장기표등과 회동하여 5월22일 정오를 기해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함으로서 일제히 봉기를 획책하는 등 대중선동과 민중봉기로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
계엄사는 위 발표에서 김대중의 선동 사례로 1980년3월초 서울대생 심재철에게 100만원을 제공하고 심재철이 학생회장에 당선되어 시위를 주동한 사실, 복학생 박계동의 소개로 만난 고대생 박일남에게 45만원을 제공하고 박일남이 고대 총학생회장 심계륜을 조종하여 시위를 벌인 사실, 1980년5월 부산대 복학생 조태원에게 34만원을 제공한 사실,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결성하여 일본본부 의장으로 취임한 사실들을 적시했다. 그리고 5월 하순 이학봉 합동수사 단장은 한민통 관련 부분을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입건하여 수사할 것을 김근수 국장에게 지시했다.
5월31일, 계엄사는 광주사태에 발단이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으나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간 데에는 간첩과 간첩에 협력하는 불순분자들에 책동이 있었고 이와 동시에 학생소요를 배후조종해온 김대중이 전남대 및 조선대의 추종학생 주로 복학생들을 선동하여 온 것이 소요사태의 발단이 되었으며, 사태악화 과정에서 광주시내 골수 추종자들이 이를 격화시킨 사실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여기에서 김대중을 면담하고 그로부터 시위를 일으키도록 조종 받은 복학생 정동년(500백만원 수수)과 조선대생 김인원이 5.18 학생 배후를 조종한 사실, 10.26이후 김대중과 6회에 걸쳐 접촉한 홍남순 변호사가 조선대 교내 시위를 조종하고, 5.23과 5.26사이에 전남도청을 출입하면서 폭도들에게 100만원을 주며 조종 격려한 사실들이 적시됐다.
7월4일, 계엄사는 5.22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혁명사태를 유발하여 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권을 수립하려한 내란음모 사실이 드러났기에 김대중과 그 추종 세력 37명을 계엄보통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계엄사는 또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재일 한민통을 발기-조직-구성하여 북괴노선을 지지 동조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사용한 혐의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합수부 합동수사단은 연행 53일 만인 7월9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구속 영장을 발부받은 다음 7월12일 김대중 등 24명은 육본 계엄 보통군법회의로, 나머지 계엄법 위반13명은 수경사 계엄법 보통 군법회의로 송치했고 군검찰부는 8월14일부로 전원을 구속기소했다. 육본 계엄군법회의는 기소 당일인 8월14일 제1회 공판을 시작으로 9월17일까지 17회 공판을 열었다. 8월14일 오전10시에 개정된 제1회 공판에서는 13만 여자로 된 피고인 24명에 대한 공소장 낭독이 있었다.
이는 역사바로세우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역사바로세우기에서는 공소장 낭독을 공소요지 낭독이라 해서 10분 정도에 걸쳐 간단하게 낭독했다. 이는 1980년의 법정과 1996년의 법정의 진지성을 비교 가늠하는 하나의 요소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하나만으로 전체를 진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김대중은 신중하고 정중한 재판을 받은 반면 전두환 등은 날림재판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 만한 대목인 것이다.
9월11일 결심 공판에서 군검찰은 김대중 피고인에게 사형을 다른 피고인에게는 7년에서 20년 사이를 구형했다. 9월17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김대중에게는 내란 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외국환 관리법위반죄를 적용 하여 사형을 선고했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징역2년에서 20년을 선고했다. 11월7일 김대중 등 12명은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81년1월23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 화합을 위해 김대중을 무기 징역으로 감행하고 피고인 12명 전원에 감형조치를 취했다.
김대중(55,정치인 사형) 문익환(62,목사 15년) 이문영(53,교수 20년) 예춘호(52,전국회의원 12년) 고은태(47,시인 15년) 김상현(45, 정치인 10년) 이신법(30,학생 12년) 이해찬(27,학생 10년) 조성우(30,학생 15년) 이석표(27,학생, 7년) 송기원(32,학생 10년) 설훈(27,학생 10년) 김종환(47,정치인 4년) 심재철(22,학생 5년) 서남동(62,교수 2.5년) 한승헌(45,변호사 3년) 이해동(45,목사 4년) 한완상(44,교수 2.5년) 송건호(52,전동아일보편집국장 2년) 유인호(54,교수 2년) 이호철(36, 소설가 3.5년) 김윤식(66.정치인 집행유예) 이택문(45,전국회의원 집유) 김녹영(56,전국회의원 집유)
국내에서는 그를 즉각 사형시키자는 여론과 재야세력의 끈질긴 구명운동이 한동안 팽팽히 맞섰지만 사형시키자는 쪽이 매우 우세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다는 조건으로 그를 사형하지 않기로 미국과 약속했다. 그 결과 그는 82년2월에 20년으로 감형되었고 82년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옥중에 있던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최고의 존칭을 써가면서 다시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국가안보를 허무는 일을 하지 않을 테니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보내 달라 앙청하는 자필 편지를 보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생활이 2년 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증과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충분한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 가서 2 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치안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12월13일 김대중.
일단 풀려나자 그는 약속을 뒤집었다. 83년7월,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개설하여 반정부 활동을 계속한 것이다. 그 결과 85년2월 귀국과 동시에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됐고,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85년3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어 김영삼과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87년5월에는 사면복권이 됐고, 이어서 87년11월 평민당(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총재로 취임한 후 제13대 대통령 후보에서 3위로 낙선했다.
김대중의 인물 기록
광주사태에 대한 역사적 당사자는 전두환과 김대중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전두환과 김대중이라는 두 인물들을 지켜보았다. 전두환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12.12편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는 김대중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자료를 통해 간단히 정리해 본다. 1980.5.18일자 경향신문은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에서 친 북괴활동까지'란 제목을 단 특집기사를 냈다. 이 기사들과 재판기록, 청문회자료, 월간조선 자료 등을 종합하여 주요한 사항들만 여기에 요약한다.
초기의 좌익 활동
김대중은 80년5월17일 체포되어 수사 받는 과정에서 5월20일과 5월25일 2차례에 걸쳐 자술서를 썼으며 그 일부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1945년 8월 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
2) 8·15해방후 당시 신민당(남로당에 합병, 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있다.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시 김대중은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몰두했다. 특히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로 전남도경에 검거됐다.
3) 목포청년동맹에 가입,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혐의로 구속됐다.
4) 6·25가 발발하여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행위를 관리했다.
5) 1950년9월7일 "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 청원서에 1946년6월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이 나열돼 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동맹 목포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는 대목이 있다. 목포지역에서는 김대중이 좌익계의 거물로 통했다는 뜻이다.
대통령 시절의 이적활동(아주 탁월한 분석과 자료임)
1999년2월, 그는 일본과의 어업협정에 관심조차 없었다. 3,000여 척의 어선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다. 어민들은 슬퍼했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다음날 어선들을 북한에 보내자 했다. 같은 해 3월,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해서 슬퍼했다. 하지만 그는 기계를 뜯어다 북한에 설치해주자 했다. 99년9월, 그는 타임지에 말했다. "식사 때 음식이 남으면 북한 동포들의 얼굴이 떠올라 몹시 괴롭다. 충분히 돕고 싶지만 국민여론이 부정적이어서 애를 먹고 있다."
그는 교묘한 방법으로 일자리를 죽이며 경제를 파괴했다. 취로사업이라는 기상천외의 복지사업을 만들어 상대적 소수의 부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다 상대적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 이른바 공공근로자들에게 돈을 배급해 주었다. 들에 가서 일하면 하루에 2만3천원을 받고, 산에 가서 일하면 3만7천원을 받았다. 술 마시고 낮잠 자는 사람들에게 공돈을 준 것이다. 놀면서 돈을 받는데 누가 밭일을 하고 공장 일을 하겠는가? 근로의식을 죽인 것이다.
그가 쓰러진 중소기업의 기계들을 뜯어다 북한에 설치하자고 하자, 한전이 그의 뜻을 따랐다. 연간 5조의 적자를 내면서도 북한이 그 기계들을 돌려야 한다며 5,000억 원을 들여 발전소를 지어주고, 송전선을 세워, 남한 전기를 보내겠다 했다. 2000년10월. 60만톤의 식량을 북에 날치기식으로 보냈다. 3,120억 원어치였다. 98년4월부터 그의 임기 중에 여섯 차례에 걸쳐 104만톤의 비료가 갔다. 4,660억 원어치였다.
2001년10월, 전국 보건소에 있는 결핵 백신을 한 병도 남기지 않고 싹 쓸어다가 북한에 주었다. 30만 명분이었다. 그리고 보건소에는 입단속을 시켰다. 2000년 러시아 대통령에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에서 받을 14억7천만 달러를 받지 않을 테니, 러시아도 북한에서 받을 50억 달러를 받지 말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이 매년 5,000억 이상이었다. 최초 2년간만 해도 1조864억 원이 집행됐다.
현대에 이어 다른 재벌들도 닦달하여 북한에 투자 명목으로 퍼준 돈이 5,960억 원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북한에 간 돈은 2조5,500억 원이다. 금강산 사업은 사업이 아니라 적장에게 군자금을 대주기 위한 위장사업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임기 중 금강산을 통해 10억 달러 이상이 갔다. 여기에 더해 몰래 준 돈도 있다. 얼마의 돈이 갔는지 누구도 모른다. 단지 미국이 그 중 5억 달러를 찾아냈을 뿐이다. 적장은 이를 가지고 남침용 무기를 구매했다고 미국이 발표했다.
금강산 사업은 김정일에 돈을 대주기 위한 사업이었다. 한 사람이 하루 입산하는 데 100달러를 바치기로 계약을 했다. 더욱 기막힌 것은 관광객이 있으나 없으나 무조건 연간 50만 명이 간 것으로 쳐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99년부터 2004년까지 6년에 걸쳐 '존재하지도 않는 금강산 독점사업권'을 명분으로 하여 9억4,200만 달러를 주기로 했다.
그 돈을 주고 우리 관광객들은 어떤 관광을 했는가? 바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제재를 받고, 카메라도 빼앗기고, 민영미 여인처럼 1주일씩이나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한국"과 "대한"은 북한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이유로 한국일보 기자는 "한국"이라는 낱말 때문에 H일보라는 명찰을, 대한매일은 "대한"이라는 낱말 때문에 D일보라는 명찰을 달아야 했다. 관광이 아니라 굴욕이었다.
관광객이 없어도 북한에는 자동적으로 매년 3억7백만 달러가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관광객이 없는데 이렇게 많은 돈을 주면 비난이 쏟아진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국민 총동원령이었다. 학생도 집단적으로 보내고 노인들도 공짜로 보냈다. 금강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등극하는 반면 설악산과 한라산은 초라하게 허물리고 말았다. 산을 가진 우리 지역경제가 망가진 것이다. 북한 땅이 성지가 되고, 북한정권이 상전으로 탈바꿈했다.
북한은 이 엄청난 돈을 가지고 무얼 했는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신예전투기 50대를 구입했다. 스커드 미사일을 500기에서 600기로 늘렸다. 휴전선 대포를 25% 증강했다. 전차와 화학무기도 전방으로 추진했다. 휴전선에 전진 배치된 군사력을 65%에서 70%로 늘렸다. 10년 이래 최대 규모의 훈련도 했다. 이런 기막힌 정보는 미국이 알려주었고 우리 정부는 쉬쉬했다. 정부가 북한에 남침용 군자금을 대준 것이다.
북한은 또 우리가 퍼준 돈으로 북한강 상류와 임진강 상류에 8개의 댐을 건설했다.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총 100㎞의 "지하수로"를 만들어 우리에게 흘러와야 할 물을 머나 먼 원산 앞 바다로 빼고 있다. 이로 인해 북한강 상류에 유입되는 수량이 5분의 1 정도로 줄었다. 최근에는 임진강 상류인 황강에 5개의 댐을 만들어 그 물을 개성공단으로 돌리고 있다. 이로 인해 경기 북부는 심한 식수난과 홍수에 고통을 받고 있다.
2001년 6월, 북한 상선들이 제주해협을 유린했다. 대통령이 UN사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우리 해군의 손발을 묶었다. 그래서 북한 선박 한 척에 우리 함정 6척이 31시간이나 따라다니며 제발 좀 나가달라고 애걸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에게 무해통항권을 인정해 주자했고, 바다의 휴전선인 북방한계선이 너무 넓으니 일부를 북한에 양보하려 하다가 저항에 부딪쳤다. 1999년6월15일 발발한 연평해전은 우리 해군의 화려한 완승으로 끝났다.
그런데 전투에서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 장군들은 곧바로 천대를 받아 군에서 나갔다. 설욕전을 벼르던 북측은 3년 뒤인 2002년6월29일 서해교전을 일으켰다. 우리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했다. 일방적인 참패였다. 대통령은 국가를 지키다 장열하게 생명을 바친 용사들을 괄시했고 바로 그날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임동원과 함께 일본으로 월드컵 구경을 나갔다.
북한 함정은 구식이고 우리 함정은 신형이다. 북한 함정에 장착된 총포에는 자이로 시스템이 없어 배가 파도에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총 끝이 요동을 친다. 하지만 우리 함정에 장착된 총포는 배가 아무리 흔들려도 총 끝이 목표를 꽉 물고 있다. 이러한 "자이로 조준시스템"은 2001년 12월, 북한 괴선박을 몇 초 이내에 침몰시킨 일본 순시선에도 있었다. 우리 해군 총포의 위력은 이런 순시선이 문제가 아니게 크다. 우리에겐 더 정교한 미사일도 많다. 우리 함정은 북한 함정보다 10노트 이상 더 빠르다. 싸우면 북한 함정은 적수가 되지 않는다.
6.29에서 참패한 것은 김대중이 지휘관의 소관사항인 야전작전권을 박탈한 데서 기인했다. 김대중은 "절대로 먼저 쏘지 말라", "쏘려면 청와대에 보고부터 하라"는 기막힌 명령을 내렸다. 여기에 더해 군수뇌는 매우 이상한 "교전규칙"을 만들었다. 그 교전규칙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해보면 당시의 군수뇌는 한국군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적의 포구에 가슴을 정면으로 대주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제정됐던 아래의 교전규칙은 기존의 UN사교전규칙을 뒤엎은 것이었다.
첫째, 소총 유효사거린인 450m에서 경고방송을 하라는 것이다. 6.29에서 북한이 발사한 85 미리 포의 명중 사거리는 8km나 된다, 450m 앞에까지 다가가서 경고방송을 하라는 것은 아예 얼굴을 갖다 대주라는 것이다.
두 번째 규칙은 200m에서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이다. 아예 맞아 죽으라는 것이다.
세 번째 규칙은 450m에서 차단기동을 하라는 것이다. 적함은 선수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 함정은 기다랗게 늘어진 옆구리를 보이며 적의 앞을 가로질러 가라는 것이다. 심장을 적의 총부리에 내주고 한동안 옆걸음을 해서 통과하라는 것이다. 북한의 처분만 바라라는 명령이다.
6.29당시, 바로 이 제3단계 수칙을 수행하다가 우리 해군은 비참하게 테러를 당한 것이다. 교전규칙은 처음부터 맞아죽으라고 만든 것이었다. 2002.6.30일자 조선일보 3면에 필자는 이런 글을 썼다. “북 경비정이 갑자기 85mm 함포로 불을 뿜었다. 고속정 2척에 타고 있던 장병들은 즉각 총원 전투배치 상태로 돌입했다. 모든 장병들이 화해와 평화만 믿고 전투배치조차 하지 않은 채 접근했던 것이다. 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저들은 우리 장병을 속이기 위해 6.27일과 28일에도 왔다가 포구를 우리 경비정에 조준하고는 씨익 웃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29일에도 포구를 경비정에 조준했다. 장병들은 이번에도 의례히 씨익 웃고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이런 속임수로 저들은 일방적으로 테러를 가한 것이다”
바다에서 대한민국을 지키다가 장열하게 전사한 6명의 전사자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부터 마치 역적이나 되는 것처럼 괄시를 받다가 사건 6년만인 2008년6월29일에야 비로소 국가추모일로 지정됐다.
2000년 6.15일, 김대중은 모든 국민에 말했다. "앞으로 전쟁은 없다". 2002년 4.3-4.6일, 임동원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북한에 가서 5시간동안 김정일과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을 의심하지 말자, 의심하면 될 일도 안 된다". 2002.5.24일, 김동신 국방장관이 주적개념을 땅에 묻겠다고 선언했다. 적을 의심해야 할 위치에 있는 이 세 사람이 국민과 군에게 의심을 풀라고 강조하면서 북한을 적이라 부르지 말라한 것이다. 적을 의심해야 할 지위에 있는 사람이 적을 의심하지 말라 명령하면 그가 바로 의심받아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는 국보법을 철폐하여 좌익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해 주려 했다. 반미. 반일 감정을 선동하여 쇄국주의와 주체사상을 식목했다. 주한미군과 주월한국군을 살인집단으로 매도했다. 용공세력을 비호하고 용공주의자들을 요직에 중용했다. 국가보안법에 걸려 8년간 옥살이를 했던 전직 국회의원이 버젓이 국회에 다니며 무기구매에 간여했다.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옥에 갇혀있던 사람을 끄집어내서 장관을 시켰다. 노동당 창당 55주년 기념행사에 가서 축사를 읽고, 파주에 있는 인민군 묘소에 가서 참배를 한 사람들이 부총리가 되고, 장관이 되고, 대학총장을 했다.
그의 분신, 임동원은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판결난 범민련을 대북 연락창구로 이용했다. 평양에서 열린 적화통일 행사에 311명의 방문단을 날치기식으로 보냈다. 그 중 100여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 그래서 그는 2000년 9월3일, 국회에서 탄핵을 받았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회와 국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과 1주일 만인 9.11일에 직제에도 없는 장관급 자리를 청와대에 만들어 놓고, 그를 앉혔다. 그는 남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의심스러운 행동을 계속했다.
2001년8월부터 전교조가 초-중-고 학생들에게 이념교육을 시키기 위해 불법 교육지침서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을 내놓고 가르쳤다. 책에는 '인민군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통일사회'가 그림으로 영상화돼 있다. 북한은 불쌍한 우리 동포이고, 우리의 주적은 미국과 미국을 추종하는 냉전세력이며 이들 냉전기득권세력은 우리의 적이라고 가르치라 했다. 개인의 삶에 불편을 주는 국가안보는 부정돼야 한다고 가르치라 했다.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경찰관 17명을 불태워 죽인 동의대 사건 등 반정부 데모 사건들은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키는 반면, 정작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정부군을 박대하고 멸시했다. 당시의 군경은 국가폭력배로 규정했고, 군경과 그 가족들을 무참하게 살육한 사람들을 민주화 열사로 규정했다. 어제의 충신이 역적이 되고 어제의 역적이 충신이 된 것이다, 이는 국가가 망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001년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 그는 6.25를 '실패한 통일 노력'이라고 말했다. 한국전 역시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뜻이다. 국가의 정통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반면 북한 정권에 새로운 정통성을 부여하려 했다.
9.11 테러 이후 북한은 미국의 주적으로 떠올라 있다. 북한은 세계에서 테러기술과 테러무기를 가장 많이 가진 불법무기 소지자가 됐다. 미국은 세계 각국을 향해 미국편에 서든지 테러 편에 서든지 태도를 확실히 하라 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주저 없이 북한 편에 섰다. 2001년 4월3일부터 3박4일간 임동원 특사가 평양을 다녀왔다. 갈 때에는 대량살상무기로 인한 미북간의 전쟁을 막으러 간다고 했지만, 돌아온 그는 전혀 다른 것을 내놓았다. 쌀 50만톤, 비료 30만톤을 주겠다 했다. 경원선과 동해선을 개통하여 철의 실크로드로 연결하는 "철로연결"이 평양방문의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전쟁을 막으러 간 것이 아니라 전쟁을 열려고 간 것으로 보였다.
실크로드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2002.4.8일자 도쿄 신문은 러시아철도 기술연구소가 북한 철도의 안전성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보도했다. 두만강에서 원산. 평강을 잇는 동해안철도 700km의 전 구간이 위험한 상태이며 터널 130군데, 교량 742군데의 보수가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원선은 어떤가? 철로지반이 약해 7대의 화차만 다닌다. 전기가 불충분하여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남한에서 1시간에 가는 거리를 3-4일간 간다. 대통령이 그토록 선전했던 실크로드는 어디에도 없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결국 남침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상천외의 생각으로 150조의 공적자금을 만들어냈다. 또 다른 200여조의 국가채무를 졌다, 100여조의 연기금을 마구 풀어헤쳤다. 그는 이런 돈을 풀어 가장 먼저 금융기관을 국유화했다. 은행에 빚을 진 600여 개의 대기업, 중견기업들을 국유화했다. 기존의 공기업이 405개, 중앙정부가 108개, 지방정부가 297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 1,000여 개의 대형 기업들이 한 순간에 정부 소유가 됐다. 국영공화국이 된 것이다.
여기에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정치꾼들이 나가 연봉을 170%까지 올리고, 수당을 올리고, 판공비를 수백 프로씩 올리고, 하청업체 및 조폭들과 야합히여 돈을 털어 갔다. 그리고 또 다시 공자금을 넣어야 기업이 산다며 떼를 썼다. 공자금을 통제하는 부서도 없다. 풀어헤친 공자금은 추종세력에게 알아서 챙겨가라고 내놓은 돈으로 보였다. 전기료를 단 한번에 2배나 올렸고, 농촌 심야전기 시설비를 40만원에서 170만원으로 대폭 올렸다. 그리고 그 돈으로 북한에 전기를 준다고 했다.
기업들이 은행에 담보로 잡혔던 토지와 건물도 정부가 차지했다. 정부는 자산관리공사라는 대형 브로커 기구를 만들었다. 1,600명이나 된다. 이 브로커 기구가 망해가는 기업의 토지와 건물을 헐값으로 인수하여 급매물로 외국에 내놓았다. 골드만삭스, 론스타. 리만브라더스, 싱가포르투자청 등 해외 브로커 업체들에 고물가격으로 마구 팔아치웠다. 그들은 웬 떡이냐 싶어 이들을 사서 곧바로 다른 외국기업들에 되팔았다. 더러는 3배, 더러는 5배의 가격으로 횡재를 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외국 브로커 업체들이 자기 돈은 10-30%만 대고, 나머지는 국내 은행에서 빌려 가지고 샀다는 사실이다. 돈을 빌려줘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폭리를 준 꼴이다. 왜 이런 짓을 했겠는가? 정권에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의도의 60배에 해당하는 금싸라기 땅이 외국인 소유가 됐다. 2000년12월27일자 매일경제신문은 "웬만한 빌딩 치고 외국인 손에 넘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보도했다. 이면계약의 존재에 대해서도 밝혔다. 강남에서 가장 큰 건물인 "현대 I-타워", 서울시청 옆에 있는 "파이낸셜센터", "벽산빌딩", "아시아나항공", "힐튼호텔", SK 증권, 동양증권, 쌍용증권, 고려증권, 대우증권, 여의도 KTB 빌딩, 은석빌딩, 한효빌딩, 대한방적 빌딩, 금호그룹 신사옥, 광주은행 사옥, "시티타워", "현대중공업빌딩" 등, 서울에서 가장 큰 건물들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팔아넘긴 돈은 두 동강으로 나뉘어졌다. 공식계약서에 표시된 돈은 은행으로 들어갔고, 이면계약서에 들어 있는 돈은 저들의 주머니로 갔을 것이다. 공식계약서에 잡힌 돈은 외환보유고로 잡혔다. 정부는 툭하면 외환보유고가 늘어났다고 자랑을 했다. 하지만 그 외환보유고는 바로 이렇게 헐값에 팔아넘긴 잔돈이었다. 이면계약서에 쓰여 진 검은 돈이 얼마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걸고 기업을 요리했다. 빅딜이라는 생소한 낱말로 국민을 혼란시키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마음에 드는 기업에 합쳐 주었다. 워크아웃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을 망하게 하거나, 빼앗았다. 빼앗은 기업은 추종세력에 나누어주었다. 기업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가면서 겁을 주었다. 기업의 운명을 거머쥔 실세들에, 알아서 돈을 바치라는 신호였다. 기업은 앞을 다투며 저들에게 상납을 하면서 저들과 선이 닿는 연줄을 구해서 대표이사 자리에 앉혔다.
불순한 교사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김정일을 우상화시켰다. 청와대 비서가 김정일을 찬양했다. 월간조선 2000년 9월호에는 청와대 여비서가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벌써부터 우리 장관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뵙게 되었으니 저처럼 크나큰 영광을 지닌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2000년 8.11일, 대통령이 46개 언론사 사장들을 김정일에 보냈다. 그들은 국빈대접을 받으며 행복해 했다.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반했다. 더러는 귀국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김정일을 찬양하고 다녔다. 그들은 상호비방 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남북언론합의문'을 교환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보도를 저들의 입맛에 맞추어 주었다. 그때 김정일은 참으로 무서운 말을 했다. "통일은 내가 맘먹을 탓이다", "내 힘은 군력에서 나온다."
그래도 언론사 사장들은 그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정일 이미지를 통 큰 호걸로 부각시켜 주었다. 그래서 김정일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9.7%나 된다고 했다. 초등학생의 90%가 김정일을 김대중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람이라 했다. 부인들 사회에도 김정일 오빠부대가 생겼었다. 남북정상이 만난 직후에 김정일이 지시한 공문 내용이다. "나의 통일관은 무력통일관이다", "인민군대는 반미, 반일, 반괴뢰 구호를 더 높이 들고 계급의 총창을 보다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 "원쑤들과 한 번은 싸워서 결판을 내야 한다."
김대중의 일부 약력
1980.5.18일자 경향신문은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란 제목을 단 특집기사를 냈다. 그 중 심한 부분들은 빼고 극히 일부만 발췌한다.
김대중은 김운식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목포상업을 졸업한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해운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해방을 맞자 그 해운회사를 일본인으로부터 인수했다. 이때가 22세였다. 한편으로는 해운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 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파출소를 공격하는 등 파괴활동에 참가했다.
27세 때, 6.25가 발발하여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전남도경에 검거됐었다. 1956년, 33세가 된 김대중은 목포해운회사 부사장인 나상수로부터 돈 문제로 고발당해 강원도 인제로 피신한 후 민주당에 입당했다. 당시, 군통제지역에서 행정지구로 막 편입됐을 뿐인 강원도 인제 지구는 김대중씨가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다고 한다.
1959년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덕인 관계로 그의 처 차용수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지는 바람에 세상을 비관하고 음독자살을 했다. 1959년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60년, 37세가 된 김대중은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하였던지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순례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장오도 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김운식의 차남으로 하여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분가하여 전적했다.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7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 때 김대중은 상대방 후보를 모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지를 발휘했다.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게 한 후,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낙선 당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였다. 그 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1961년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된 김대중은 1961년 7월부터 민주당 선전부장이 됐다.
2008.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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