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 불던 계절(나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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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7-10 16:57 조회5,0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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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 불던 계절
-나의 산책-
사회를 놀라게 한 처녀작 “70만 경영체 한국군. .”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했던 내용들과 미국에서 꾸준히 연구했던 세계 방위산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고를 써서 김영사에 넘겼다. 각 주제마다 처음부터 본질을 향해 곧장 치고 들어가는 것이 신선하고, 문장이 간결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1991년 나의 처녀작이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제목을 달고 탄생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대단했다. 소설을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를 7주간 연속 차지했다. 사회적 인기가 한 순간에 급상승했다.
반면 군대 내 장군세계에서는 비밀이 노출되었다며 나를 배신자로 성토하는 분위기가 일었다. 나이 든 하사관 정도로 생각되는 걸쭉한 목소리를 가진 보안사 직원으로부터 끈질긴 전화폭력을 당했고, 머리를 짧게 깎은 3-4명의 청년들이 한동안 집 근처를 맴돌며 은근히 공포분위기를 연출했다. 때로는 밤중에 문고리를 잡아 흔들기도 했다.
한번은 지방에 갔다 밤중에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오는데 갑자기 시동이 꺼졌다. 동네 자동차 수리공장이 원인을 찾지 못해 연료 탱크를 절단했다. 설탕이 탱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설탕이 연료 순환 파이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내 차량의 앞바퀴 나사를 다 빼놓고, 붙어 있는 시늉만 남겨놓았다. 아침에 운전을 하기 시작하는데 집사람이 갑자기 ‘스톱!’ 하고 소리를 쳤다. 앞바퀴가 지그재그로 덜렁거린다는 것이다. 자키로 차를 올려보니, 나사가 거의 다 빠져 있었다.
나는 이런 연속적인 위협 행위들에 대해 당시 몇 몇 기자들에 호소했다. 기자들이 보안사에 경고를 했다고 한다. 이후 테러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당시 군의 보안사와 정보사는 군에 대해 비판기사를 쓰는 기자에 칼침을 놓는 등 나쁜 행위들을 가끔 했다. 나중에 LA 랜드 연구소에 들렸더니 오공단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 “보안사가 박사님을 체포하려 했는데 인기가 원체 높아서 실행하지 못했다 하더라.”
경영책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
1992년 나는 “멋”(A Grace Inside)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나의 산책세계 1,2권을 통해 지금은 뚝섬무지개로 발간돼 있다. 언론들이 이 책도 대서특필해 주었다. 이 책에는 사관학교를 지망하면서 키가 모자랄 때, 키를 합격시켜준 소령 이야기, 몸무게가 모자랄 때 물을 먹여 합격시켜준 대령 이야기, 육사 생도시절 위인전과 영웅전 그리고 고전 소설을 많이 읽어서 가슴을 가꾸라는 지도를 해준 육사 선배 교관, 베트남에서 나를 신임해준 대대장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1993. 나는 현암사를 통해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라는 책을 냈다. 기업경영은 시스템에 의해 한다는 요지의 책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시스템이 무엇이냐, 생소하다” 이렇게 물었다. 이리 저리 사전들을 찾아보면서 나름대로 시스템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상들을 했다. 이 책이 또 대서특필되자 KBS의 어느 한 부장이 나를 한 시간짜리 프로인 “인생 이 얘기 저 얘기”에 초청했다. 거기에서 시스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게 했고, 옛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분들도 초청 해무대 뒤에 숨겨놓았다가 깜짝 이벤트를 연출했다. 이것이 오늘날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로 발전하게 된 효시가 되었다.
KBS프로 '인생 이 얘기 저 얘기'
옛날에는 은행객장에 순번대기표 시스템이 없었다. 그래서 은행객정에는 창구마다 긴 줄이 생겼다. 차례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로 다투었다. 흰 장갑을 낀 직원이 질서를 통제했다. 은행객장은 불쾌감들이 교차하는 무질서의 공간이었다. 이 무질서를 놓고 식자들은 한탄하는 글들을 썼다. “한국 사람들은 안 돼, 엽전 근성을 못 버린다니까~ 일본을 봐, 미국을 봐, 의식이 바뀌어야 해, 의식을“ 1993년 김영삼은 한국병을 고친다며 의식개혁을 강조한 바 있었다. 1990년 어느 날 국민은행을 시발로 은행객장에 순번대기표가 등장했다. 그 간단한 시스템이 등장하자 은행객장 질서가 일본과 미국만큼 좋아졌다. 시스템 병을 의식 병으로 오진한 것이다.
프리랜서의 조촐했던 황금시절
이 이후 나는 방송에 많이 불려 다니고. 칼럼을 많이 쓰고, 대기업, 공무원 조직, 로타리클럽, 라이온스클럽 등을 상대로 시스템강연을 했다. 당시 경영 잡지와 신문에는 내가 5대 강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는 이야기, 내가 두뇌활동으로 연간 1억 이상 버는 열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는 기사들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온 것이었다. 내가 지방에 강의를 하러 갈 때면 집사람과 아이들이 다 같이 갔다. 강의를 할 동안 식구들은 근처 그늘에서 야외시간을 즐겼다. 운전을 하다가 사과밭이 있으면 주인과 함께 사과를 따는 즐거움도 가졌다. 1990년대의 한동안이 나와 내 가족들에게는 참으로 행복한 계절이었다.
일간지 칼럼을 읽는 사람들은 내가 “장안의 지가를 높인 사람”이라 칭찬들을 했고, TV나 라디오 방송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나를 “땅땅이”라고도 했다. 아무리 복잡해도 명쾌하게 생각을 정리하여 땅 땅 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강릉 스타
1996년 9월 18일,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강릉 해변에 좌초되는 매우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수중 배수량 370톤급의 잠수함이었다. 여기에 승선한 북한군은 모두 26명, 조장이 인민군 대좌 즉 대령이었다. 이 좌초 사건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방송들은 연일 사회 저명인사들과 군 정보부대 장군 출신들을 불러 침투의 목적을 진단했다. 모든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내용의 진단을 했다. 사회교란과 요인암살이 침투목적이라고들 했다. 나는 문화일보에 “강릉에 무슨 요인들이 그렇게 많으냐”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우리는 북한의 군사 시설 정보를 미국에 의존한다. 미국은 공중사진을 찍지만, 북한은 간첩들을 통해 입체적인 정보를 얻는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약도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설물 콘크리트 조각을 깨서 비닐에 담아 북으로 보낸다. 강릉지역에는 중요한 군사시설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밀집돼 있는 지역이다. 좁은 반경 내에 군사시설이 8개나 들어 있었다. 인민군 대령이라는 높은 계급이 직접 내려온 것은 정보를 수집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보를 판단하러 온 것이라 했다. 요인을 암살하고 사회를 교란시킬 목적이라면 대령이 오지 않고 살인기계로 훈련된 특수 행동요원들이 온다. 대령급이 직접 왔다는 것은 간첩들이 보낸 첩보자료들이 정확한 것인가를 판단하러 왔을 것이다. 나의 이런 진단은 너무 구체적인 데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내 칼럼을 읽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참으로 생소하고 엉뚱하고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했다.
그런데 이광수라는 북한병사가 생포됐다. 정보기관이 그에게 침투목적을 물으니 그는 정확히 내가 진단한 내용 그대로를 실토했다. 언론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경악했다. 나에게 경악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강릉스타”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군에 문제가 발생하면 언론들은 꼭 나만 불렀다. 40대 후반이었던 나에 대해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사나이” “선진국에서도 있기 어려울 군사평론가가 한국에도 생겼다” 이런 평들을 했다. 하지만 이런 황금기는 1998년 김대중이 이끄는 빨갱이들의 출현과 함께 한순간에 부서져 내렸다.
2018.7.1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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