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북한이 주도한 ‘침략작전’임을 증명하는 사실들(나의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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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7-14 14:41 조회7,35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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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북한이 주도한 ‘침략작전’임을 증명하는 사실들
(나의 산책)
검찰수사결과보고서 9개 줄에 숨어 있는 북한특수군 600명
1995.7.18.에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 ․18관련사건 수사결과” 제92-93쪽에 기재된 9개 줄, 이 9개 줄의 문장을 이제까지 제대로 해석한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5.18 옹호세력은 북한군 개입설을 한마디로 내친다.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면 그 엄청난 권력과 방대한 정보기관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이 어떻게 발견해 내지 못했겠느냐” 하지만 그 막강한 권력과 그 방대했던 정보기관에 근무했을 수백 명의 분석관들은 이 9개 줄을 해석할 줄 몰랐다. 그 누구도 이 9개 줄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내공과 관찰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래는 문제의 9개 줄이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3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게릴라전, 특수전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를 읽으면 위 검찰보고서를 읽으면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1985년의 안기부가 그랬고, 1995년 검찰이 그랬다. 그냥 시위대가 20사단 차량 부대를 공격해 10여대의 지프차를 빼앗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시위대 600명이 모여 장갑차 4대와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해 시내로 나갔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그쳤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아래와 같이 읽혔다. 군부대 이동 상황은 극비 중의 극비정보다. 위 문장에는 이 극비정보가 이들 300여명의 폭도들에 넘어갔다는 뜻이 들어 있다. 시위의 주역들이라는 10-20대의 양아치 계급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매복 장소를 선택해 사전에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감히 현역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작전능력은 국제수준의 용병 정도나 행할 수 있는 작전이다. 오전 08:00에 정규군을 공격하려면 적어도 06시 정도에는 300명의 시위자들 각자가 집에서 기상하여 최소한 07:00경 공격대기지점(Line of Departure)에 집결하여 실무적 작전점검을 하고, 공격대기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작전을 개시했다는 말이 된다. 10~20대 양아치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단장용 지프차를 위시하여 14대 의 지프차를 몰고 곧장 14 km 떨어진 군납업체인 아사이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17개 시군에 숨어있는 44개 무기고를 털 군용트럭이 필요해서였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은 요새다. 높고 견고하고, 철조망이 있고, 망루가 있고, 경비병들이 있다. 이런 벽을 뚫고 그 많은 차량을 탈취하려면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경비병을 제압해야 했다. 경비병과 싸우려면 총이 있어야 하는데 폭도에는 총이 없다. 총 없는 폭도 600여명이 총을 가진 경비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발한 작전이 필요했다.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를 구태여 빼앗아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이 거 봐라, 20사단이 다 일망타진됐다, 이미 대세가 기울였으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 또는 “우리가 20사단 지휘부다. 문 열어라”는 식의 위압용이었을 것이다.
시위대 600여명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했다는 말은 경비병력이 순순히 경비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갑차와 군용차를 수백 대 단위로 내주었다는 것은 차량키를 꽂아주었다는 뜻이다. 그 많은 장갑차와 군용차량들을 몰고 시내로 나갔다는 말은 자가운전 시대가 아니었던 시대에 광주에 장갑차를 4대씩이나 운전을 할 수 있는 운전기술자들, 군용트럭을 370여대나 몰 수있는 많은 운전사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런 맥가이버들이 600명씩이나 광주에 있었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상이 내가 검찰보고에 기록돼 있는 9개 줄을 읽는 독해방법이다. 이 9개 줄을 놓고 군-안기부검찰-법관들은 겉만 읽었고, 나는 속을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특수군을 보지 못했고, 나만 보게 된 것이다.
안기부 보고서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 4시간에 턴 사실
1985. 5. 안기부가 발행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는 1980.5.21.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서 38개 무기고를 털어 5,403 정의 총기,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이 분산돼 있는 상태로 널려있고, 북한이 발간한 책 “광주의 분노”(1985)에는 6개의 무기고 이름이 더 표기돼 있다. 그런데 검찰자료와 안기부는 수십 개 페이지에 걸쳐 낱개 항목들만 나열해 놓았을 뿐, 이를 통계적으로 처리하지 못해 의미 있는 정보를 가공해 내지 못했다. 통계학에 훈련된 분석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공해 낸 위 정보가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는 것이고, 검찰이나 안기부처럼 항목들만 나열해놓고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새로 발견한 사실들
검찰 보고서와 안기부 보고서에 들어 있는 기재들은 북한특수군 600명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매우 중요한 정부문서였지만 과거의 재래식 분석관들은 이 중요한 자료들을 체계화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이래의 여러가지 사실들은 그 정보기관들이 찾아내지 못한 사실자료들이다. 새로운 사실의 발견은 5.18을 다시 재판할 수 있는 재심사유가 된다.
북한특수군은 수백 개의 현장 사진들을 남겼다. 5·18진상규명에 앞장 선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는 2017년 10월 12일, 법정 증언대에 서서 용병과도 같은 몸매를 가진 사진 속 군병들의 모습을 놓고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게릴라)라는 기막힌 변병을 했다. 아무리 억자를 잘 쓰는 그들이었지만 국제급 용병들로 보이는 사진 속 모습들과 용병급들만이 벌일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해서는 감히 광주의 양아치들이 벌인 상황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법원은 이 사진들에 대해 판단해야 할 것이다.
광주시장 윤장현은 2017. 4. 19. ‘광주시민은 결코 광주교도소를 공격하지 않았다’ 며, 광주시위대가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발언한 남재준 대통령 후보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1997. 4. 17. 대법원 판결서에는 광주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5회나 공격했다고 기록돼 있다. 위 판결문에는 광주교도소를 제3공수여단이 방어하고 있었으며, 그 방어 과정에서 공격자들을 살해한 것은 무죄라는 판결까지 판시되어 있다. 광주교도소는 분명히 공격을 당했고, 그 공격자가 광주시민이 아니라면, 그들은 민간복장을 한 북한군인이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주시와 5.18 기념재단 등은 2015년 10월부터 2016년 3월까지 6개월 동안 광주의 번화 공간들에 광수 사진들을 크게 확대해 사진전을 열었지만 단 한 사람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5․18기념재단 공식홈페이지 게시판에 “5.22.15:08 서울에서 온 대학생 환영식 거행”이라는 글자가 기록돼 있다. 광주출신 동아일보 기자 김영택은 검찰진술에서 “복면한 500명”이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계속해서 싸우자고 선동한 사실을 증언하면서 그 500명의 외지인이 전두환이 광주사태를 키우기 위해 위장 침투시킨 정부군일 것이라고 믿는다는 내용을 검찰에서 진술했다. 민주화운동 최고반열에 서 있는 5․18유공자들 모두가 그들이 쓴 “항쟁기록”에서 무기는 누가 털었는지 모른다 했고, 5월 24일까지 도청은 위엄 있는 사람들이 점령해서 자기들은 5월 24일 오후에야 비로소 도청에 갈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평민당 국회의원 정상용(당시 30세, 무기징역)은 이렇게 증언했다. “5월 26일 기동타격대가 편성됐다.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도청으로 간 거다. 장악한 사람들은 위엄 있는 높은 관료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인데 우리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광주가 통제해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다.”
허규정(무기징역)은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5월 26일 출범한 투쟁위원회의 내무위원장을 맡았다. 우연히 지나다가 공수부대 요원들이 젊은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가 나도 공수부대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운동권에 속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지격으로 휩쓸렸다. 시민들 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니기만 했다. 그 시위는 누가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리더도 없었다. 어른들은 시국수습대책위원회, 젊은 사람들은 학생수습위원회, 서로 말이 다르고 통제가 안 되었다. 조직이 움직이지 않고 엉망이었다. 그런데 윤석루가 나이도 굉장히 어린데 기백이 있어서 기동타격대를 장악했다. 윤석루는 학생도 아니었다. 특별한 방법은 안 나오고 맨날 회의만 했다. 운동권 간부들은 모두 다 예비검속으로 미리 잡혀 가버렸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개념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23일의 이런 모습을 본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남는 사람들은 오직 종교지도자들, 교수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태를 여기서 끝내고 시국을 수습하지고 했다. 나도 멋모르고 참여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내무위원장이된 거다”.
통일부 ‘주간북한동향분석’에 널려 있는 기재내용들이 있다. 북한에서는 매년 5월이 되면 전 지역 시군 단위에서 시-군 단위로 5·18기념행사를 하면서 남조선 파쇼와 미제의 원수를 갚자는 선동전을 벌인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최고인 것에는 5·18을 영예의 상징으로 하사한다. 기차역 사진에는 “5·18무사고 정시견인초과운동”이라는 대형 글씨가 써있다. 장거리 유도탄 탄두 피를 압축하는 1만톤짜리 프레스(룡성기계)에는 ‘5.18청년호’라는 글씨가 있다. 그 외 ‘5·18영화연구소’, ‘5·18공장’, ‘5·18대형단조공장’, ‘5·18누에고치반’, ‘5·18전진호’, ‘영예의 5·18청년직장’, ‘5·18땅크호’, ’5·18청년제철소‘ 등이 있다. 연합뉴스보도에 의하면 북한 교과서에 5.18은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북한이 주도한 것이라는 요지로 기록돼 있다. 1989년 김일성이 직접 황석영과 윤이상을 데려다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해 1991년부터 주기적으로 상영한다. 2015. 5. 18. “5·18 35주년기념행사” 광주시가행진에 김대중-김정일-횃불 대형 로고가 등장했다. 광주사람들의 머리에는 “5.18은 김대중과 김정일의 합작품” 이라는 잠재의식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광주 현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장 사진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경찰복을 착용하면 즉시 살해되었는데 발굴된 현장사진에는 경찰복을 입은 사람이 질서를 통제하는 모습이 들어 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세트장을 만들어 모략용 사진을 찍은 것이다. 1998년 황장엽과 김덕홍이 했던 증언이 2013년 5월에 기사화돼 있다. “5·18은 북한통전부가 주도했고, 북한이 주도해 남한에 둘러씌운 것이다. 통전부는 사태 직후 승리를 자축했고, 훈장들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술파티를 열었다”는 것이다.
청주에 집단 가매장된 무연고유골 430구가 2014년 5월 13일, 광주로부터 200km 떨어진 청주 흥덕구 깊은 밀림 지대에 1m 깊이로 파인 넓은 공간에 가매돼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이 유골 430구는1980년 5월 21일 밤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발생한 것으로 확신된다. 규격이 일정한 나무판에 두꺼운 비닐로 시체를 감고, 그 위에 일련보호가 매겨진 유골들이다. 비닐로 시체를 감은 것은 5월 더위에 부패한 시체에서 흐르는 액을 긴급히 감싸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체포장방법은 오로지 5.18 광주에서만 딱 한번 있었고,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이렇게 시체를 포장하지 않는다. 이 유골은 2014년 10월 4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날 황병서-최룡해-김양건이 뜬금없이 몰고 왔던 김정은 전용기에 실려 갔을 것으로 확신된다.
광주사람들이 가장 난감해 하는 사진들이 있다. 10세 전후의 어린 여학생 10여명이 계엄군 아저씨 앞에서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진이 있고, 어지럽게 쌓인 파괴의 잔해들을 땀 흘려 청소해주고 있는 사진이 있다. 이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북한은 쇼질을 하고 있는 것이라 비난했다. 통계를 내 보면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의 80% 이상은 10-20대의 양아치들이고, 1심에서 유죄를 받은 182명의 80%가 10-20대이며, 사망한 사람의 80%가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사망했다. 총상 사망자 116명 75%에 해당하는 85명이 시민들이 소지한 카빈총 등에 의해 사망했다. 폭도들에게는 계엄군만이 소지했던 M16소총도 다수 소지하고 있었던 사실을 대입하면 총상사망자의 대부분을 폭도들이 죽인 것이 된다. 이 모두가 대학생들로 위장한 북한특수군의 소행으로밖에 볼 수 없는 현상들이다. 당시 광주에서의 유행어는 “연고대생 600명”이었다. 기록에는 전옥주(본명 전춘심)가 “시민 여러분 서울에서 연고대생 600명이 곧 우리에 가담하려고 오고 있습니다”라는 취지의 방송을 했고, 훗날 이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전옥주는 누군가가 쪽지를 주어서 그대로 읽었을 뿐이라고 답했다는 내용이 있다.
2018.7.1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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