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뚝섬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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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7-26 16:51 조회4,6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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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뚝섬 무지개)
1991년, 나는 ‘멋’(A Grace Inside)이라는 책을 냈다. 주로 사관학교와 베트남 전쟁터 그리고 미국 이야기들이었다. 2005년, 버리기에는 아까운 내용들을 더 추가해서 “나의 산책세계” 1,2권을 냈다. 이 책을 읽은 연배의 지인들이 “매우 특이한 자서전이다, 어떻게 이런 형태의 특이한 자서전을 낼 수 있을까” 하면서 출판기념회를 공동으로 주선하겠다고 제의하셨다. 2005년이면 내 나이 63, 그때까지 나는 베스트셀러 책들을 여러 개 냈고, 수많은 칼럼들을 썼지만 출판기념회를 갖는다는 것이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더해 남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났다. 2009년, 나는 앞 책들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일부 내용들을 추가하는 등 다시 편집하여, “뚝섬 무지개”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었다. ‘뚝섬 무지개’라는 제목은 이 책의 앞부분에 수록된 ‘지상에서 만난 천사’의 이야기에 상징돼 있는 낱말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1990년까지 내가 걸었던 목가적인 산책로들이 그려져 있다. 따로 회고록을 남긴다는 것은 멋쩍은 일이라, 1990년 이후에 걸었던 여로를 가급적이면 짧게 압축해 여기에 보태기로 했다. 후반의 내용들은 내가 몸으로 체험한 현대사, 내 몸이 그 일부로 용해돼 있는 현대사의 일각들이며, 그래서 이 책은 아마 이 시대에 누구도 쓸 수 없는 생생한 역사책일 수 있다.
이 에필로그 공간은 내가 나를 정리해 보는 마지막 공간일 것이다. 나는 1942년 음력 11월 20일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도곡리 271번지, 호랑이 나오는 높은 산 중턱에서 태어나 강보에 싸인 채 경기도 양평군 영화마을 구둔으로 왔다.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13세 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고학하느라 고생을 했지만 부모에 대해서는 보고 싶어 하는 마음만 있었지 원망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릴 때 잠시라도 헤어졌다 만나면 어머니의 눈매는 온통 나를 빨아들이려는 듯 해보였다. 정을 듬뿍 주시고, 어디를 가나 귀염 받게 낳아주신 것만으로 나는 늘 부모님께 감사한다. 지금의 안사람 역시 그런 식으로 나를 사랑한다. 내 주위의 사람들도 나를 사랑한다. 이렇게 보면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와서 나는 무엇을 남겼는가? 가장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박사논문이다. 기나 긴 수학공식 2개가 들어 있고, 수학정리가 6개가 있고, 미해군에 선사한 ‘함정수리부속별 수량’을 계산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남긴 것이다. 만일 내가 장교가 아니었다면 나는 수학의 새로운 경지들을 개척하는 일에 생을 묻었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수학을 좋아했다.
그 다음에 내가 남긴 것은 1981년부터 5년 동안 윤성민 국방장관과 함께 국방예산개혁을 주도한 일이다. 이 개혁으로 인해 군수물자는 자유재가 아니라 각 관리 책임자에게 계산되는 회계항목이 되었다. 사단과 같은 독립 부대들에는 자원관리 참모가 새로 생겼고, 비용을 계산하는 전산시스템이 새로 생겼다. 이 개혁은 지금까지의 국방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내가 남긴 가장 큰 것은 ‘5.18의 진실’을 담은 9권의 책일 것이다. 나는 이 나라를 완전 장악한 빨갱이 세력, 이 땅 전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빨갱이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 무기는 쿠데타 식 권력이 아니라 오로지 5.18의 진실을 전 국민에 알려 모든 국민들을 5.18사기극에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가 만들어 낸 결론은 5.18을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 이 결론은 다윗의 무기다. 이 무기를 만들어 내는 데 무려 18년이 걸렸다. 사랑하는 아사녀를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다보탑 조각에만 몰두했던 아사달의 모습이, 아마도 세상의 부귀영화를 등지고 오로지 매 맞고 감옥에 가면서 가족들 가슴에 쓰라린 상처를 안겨주면서 20년에 가까운 황혼의 나이를 쏟아 부은 나의 모습 정도 가 될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998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만 20년 동안 120개 내외에 이르는 소송을 하면서 빨갱이들과 싸웠다는 사실이다. 지금 나는 5.18 반역자들과도 10개의 재판을 벌이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청와대 비서실장 임종석을 주사파라 했다 하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418호 검사 홍성준이 뉴스타운과 함께 나를 기소했다. 위안부를 내걸고 반국가활동을 하는 정대협과도 2개의 소송을 벌이고 있고, 내 글을 함부로 검열하고 삭제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소송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이외수라는 이상한 소설가도 자기를 빨갱이라 했다며 소송을 걸어왔다. 김대중 이전에는 기득권들과 국가경영이라는 전문분야를 놓고 싸웠지만, 김대중 이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느냐 마느냐에 대한 이슈에 매달려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여왔다.
사람들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한다. “일생에 단 한 개의 재판사건만 걸려도 머리가 아프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20년 동안 그 많은 재판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인생은 수없이 발생하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존재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고민하는 사람이 있고, 수학문제를 풀듯이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사람이 있다. 고민을 하면 몸이 망가지고, 문제를 풀면 건강이 증진될 수 있다. 나는 늘 재판을 문제 풀듯이 대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판사들이 다 빨갱이들일 텐데 싸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런 말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싸울 힘이 사라진다. 나는 언제나 내가 만나는 판사는 공의로운 판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의 머리를 논리적으로 점령하기 위한 글을 쓴다. 이것 자체가 많은 노력을 요하긴 하지만 일종의 창작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심정으로 세상을 산다.
나는 군사평론가, 시스템전도사 그리고 ‘극우-또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시스템 전도사를 하면서 나는 시스템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를 만들어 냈다. “시스템이란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밖에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과거 은행객장에는 질서가 없었다. 이를 놓고 사람들은 한국인들의 의식이 잘못돼서 발생하는 병리현상이라고 진단했다. 1990년 은행객장에 순번대기번호표 시스템이 등장했다. 그 간단한 시스템 하나 생기니까 은행객장 질서가 선진국처럼 좋아졌다. 그것은 의식 탓이 아니라 시스템 탓이었다”
나에게는 특기가 두 개 정도 있다. 토의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토의주도 능력과 경영진단 능력이다. 국가든 기업이든, 발생하는 모든 병리현상은 시스템의 산물이다. 그래서 시스템적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낸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걷던 길에서 일부 내가 남보다 앞서 갈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조각난 시간을 이어 쓰는 것이다. 길을 걷는 순간, 차를 모는 순간에도 나는 늘 생각할 거리를 마련한다. 조깅을 하면서도 수학문제를 머리에 담고 다니면서 풀었다. 나는 늘 자극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 사람이나 조직은 자극이 없으면 나태해 지고, 나태함은 퇴화의 병균이다. 늘 채찍을 만들어 자신에게 채찍을 가해야 한다. 그 다음은 목표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오로지 내 길을 곧장 가는 것이다. 내가 매 열흘 동안 걸어온 길은 목표를 따라 걸어 온 길인 것이다.
나에게는 인간적 속성이 있다. 인습과 통념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분방하며, 몰두하는 시간들로 삶을 채웠다. 무엇이 내게 이로우냐를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 정의냐에 따라 몸을 던졌다. 내가 전자의 잣대로 길을 걸었다면 그 많은 소송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걸었던 길들은 넓고 편한 길,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았던 가시밭길이었다. 나는 왜 이랬을까. 절대자가 내게 짜준 ‘팔자의 길’을 걸었다고 밖에는 달리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2018.7.2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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