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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음모 공소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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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7-07 13:05 조회4,6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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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43862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735630

 

<◇피고인 김대중>

1945년8윌15일 해방직후인 동년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 책으로 일하다가 그 후 남로당 선전 책으로 암약하던 임영춘의 권유로 


동 위원회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선전부원으로 있으면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 활동하다가, 


동년10월경 건국준비위원회와 목포청년동맹이 해체되자 당시 신민당(후에 공산당·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목포시 당위원장이며 


그 후 남로당부위원장으로 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헌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6년10월1일 위지부원 등이 목포경찰서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고, 


파출소를 방화한 폭동사건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다가 당시 한민당 목포시 당 부위원장이던 전처 망 차용수의 망부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고,


1949년1월경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 


동년 4월경 전남 신안군 임자면 출신으로 남로당 섭외부원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 지하에서 암약중이던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사실로 


전남도 경찰국에 체포되어 10여 일 간 구속조사를 받던 중 당시 해군 폭포 헌병대장이던 박성걸(현 김대중 경호담당차장)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고


 1967년5월 일자 미상경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여관 등에서 북괴로부터「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야당인 신민당 입후보자가 다수 당선되도록 김대중 등을 지원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의도적으로 접근해온 소위 임자도 거점 간첩 정태묵(1972·12·8·대법원에서 간첩죄로 사형판결을 선고받아 집행된 자)을 2회에 걸쳐 접촉하여 


그로부터「6·8선거는 관의 금력에 의한 관제 선거가 예상되므로 투표직전까지 선거조직을 노출시키지 말 것」 


「여담이 금력공세를 가하면 효력이 감소될 때까지 방임할 것」 

「선거시에는 관을 자극하는 언동으로 탄압을 유도하여 동정표를 얻도록 할 것」 

「선거운동을 도심지보다 변두리에 집중할 것」

 「여당의 금력공세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거를 포착하여 여론에 호소할 것」 

「지방발전만을 외치는 여당의 전략에 말려들지 말 것」등 


선거전략을 교도 받는 동시에 목포 산정초등 학교에서 교사로 종사하던 위 정태묵의 처의 동료교사인 임자도 출신 성명 미상을 그 운동원으로 소개받고 동 선거전략에 따라 선거운동을 하여 당선되고, 1970년9월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제7대 대통령후보로 지명 받게 되자 시국관을 표명한다는 구실로 지방대도시를 순회하면서 사전선거유세를 통하여 


『정부는 남북 간의 군사적 우열에만 집착하여 의도적으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있다.』


『향토예비군을 조직하여 수백만 국민을 정치적 군사조직으로 묶어 놓았다』


『남북간 긴장완화를 위하여 김일성과 대담할 용의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등 북괴의 위장평화통일선전활동에 동조하고,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낙선되자 시국을 관망하다가 1972년10월11일 지병인 관절염치료를 구실로 도일체류 중, 동월 l7일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정부에 대한반감을 갖고, 반한·반정부 교포 및 미·일 조야의 용공인사들의 지원으로 소수교포의 불만을 마치 대한민국국민의 의사인양 선전하여 미국·일본 등 우방국들에 반한 여론을 불러일으켜 우방정부로 하여금 반한 정책을 쓰도록 유도하여 대한민국용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국내반정부세력을 육성, 강화한 후 이를 상호 연계시켜 외세의 압력과 내부봉기에 의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쟁취한다는 목표 하에 귀국을 포기하고 1973년8월 귀국 시까지 5회에 걸쳐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각종 강연과 출판 또는 기자회견 등을 통하여 국제적으로 반한 여론을 조성하기로 하고.




1972년11월10일 동경외신구락부 연설을 통하여 


『나는 이 자리에서 경고하고자한다. 만일 지금에 와서 미국, 그리고 아세아의 강대국으로 등장한 일본이 종래의 무기지원에 있어서의


 정책적 과오에 대하여 일대 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자유도 빵도 없는 아세아 각국의 인민은 빵이라도 보장되는 공산주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고하고


 1973년2월23일「뉴욕·타임스」지와의 회견을 통하여『한국이 자유도 빵도 없는데 반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고 해도 빵이 보장된다. 나의 이러한 입장은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인정하고있다』고 하고 동년3월21일 일본「하꼬네」에서 개최된 민족통일협의회 등 소위「베트콩」파단체간부들의 입관법 연수회에서의 강연을 통하여 


『나는 결코 통일하면 공산당을 죽이는 그러한 반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오, 승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공산당의 존립을 보장해 주어야하며 이북에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엄연한 정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고 


동년4월24일 미국「시애틀」소재「워싱턴」대학에서의 강연 및 1973년7월6일 미국 「워싱턴」소재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개최된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발기대회 강연을 통하여『괴뢰, 괴뢰 하는데 무슨 놈의 괴뢰냐. 공산주의란 기정사실을 우리는 27년 간이나 무시해왔는데 이북은 공산당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이남은 민주체제도 안정되지 못했고 오히려 혼란과 불안, 민생고만 극심할 뿐이다. 또한 김일성이 주체성 등을 확립시킨 것은 잘한 일이 아니냐. 한국의 6·23 평화통일 외교선언은 동·서독처럼 남북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 고하고 동년 5월18일 미국「샌프란시스코」국제학생회관 강연을 통하여 『내가 집권하면 남북 연방 체와 대중경제를 실시하겠다. 교포들은 앞날의 수권태세를 확립하여야하며 그 방법으로는 청와대와 백악관에 계속 편지를 내어 합의하여야 하고 특히 경제원조의 부정사용에 대하여는 백악관에 이를 협의하여 중단하도록 주장하여야한다』고 하고.

동년5월21일 재미교포신문「크리아·저널」지 및 동년 7월1일 「한민신보」 기자와의 대담을 통하여 『남북은 한반도에서의 외군철수, 쌍방정권의 인정, 정치·경제분야의 전면적 교류를 통하여 급속한 동질성을 회복하고 연방제롤 만들고 통일후의 5년 간은 거국정부를 세워야 한다』 고 하고,


동년7월경 일본에서 발간된「독재와 나의 투쟁」이 책자에서『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하며 북한이 종래부터 주장해 온 남북평화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화해주장 등은 나의 통일 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고 하는 등 각종 기자회견·시국강연·책자출판 등을 통하여 북괴의 통일전선과 선전선동에 동조 찬양하는 주장을 하는 등 반국가 활동을 하여 오다가, 1973년7월6일 위 「메이플라워· 호텔」회의실에서 재미 반한 교포 임창영·안범국·동원모·김성동·정기용 등 30여명과 회합하여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미국본부」를 결성, 명예회장이 된 다음 지리적으로 대한민국과 인접되어 있고, 북괴 및 조총련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반한 세력이 준동하는 일본을 자신의 집권투쟁의 근거지로 하기로 결심하고,


<남파간첩과 2회에 걸쳐 접촉>


북한 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반국가 단체이며 재일 조선인 총연합도 북한공산집단의 지령에 따라 대남 적화통일을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활동하는 반 국가단체라는 점을 알고있음에도 1973년7월8일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이하「한민통」이라 약칭함)를 결성하기 위해 미국에서 도일하여 동일부터 동향출신인 동경거주 재일 교포 김종충의 주선으로 동경「신쮸꾸」호총 정2정 목105, 원전「맨션」809호실에 한국민주제도 통일문제연구소 동경사무소라는 명칭의 사무실을 개설하고 한민통 결성준비에 착수하여 동조자를 물색함에 있어, 재일교포 배동호는 1971년1월31일경 조총련의 지령에 따라 일본유학생 이동일을 포섭, 시도하다가 동인의 정체가 탄로되어 동년7월경 민단에서 제명되고1972년8월2일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소위남북연방제 방식에 의한 남북통일 실현을 반대하는 세력과 투쟁할 목적으로 조총련과 야합, 민족통일협의회를 결성하여 수석의장으로 활동하면서「베트콩」파 단체들을 규합, 반 국가·민단파괴 활동을 주도한 자이며,

동 김재화는 1967년5월경 제7대 국회의원 선거시 신민당 전국구후보로서 조총련 자금을 반입한 혐의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조총련과 공동으로 한일회담 및 월남파병을 반대한 자이고,

동 곽동의는 김재화의 사위이고 1971년8윌경 동 김상현으로부터 조총련의 배후조종을 받아 활동한다는 사실과 1972년2월경 방일시 주일한국대사관 성명 미상직원으로부터 북한에 왕래한 사실이 있어 사상적으로 불순하니 접촉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사실이 있는 자이고,

동 정재준은「베트콩」파 조직자금 지원자로서 민단구 동경본부 단장으로 반 국가활동 및 민단파괴공작을 주도하고 7·4공동성명 이후 조총련 동경본부 위원장 한익수와 연계 활동한자이고,

동 김종충·조활준·김은택·김군부 등 역시 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재일 거류민단 조직을 파괴하고 북괴선전활동을 하다가 그 정체가 탄로되어 1971년7월경 민단에서 축출된 소위「베트콩」파 등과 일원으로서 반 국가활동을 주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7·4공동성명 이후에는 8·15광복절 3·1절 등 국경일 기념식과 신년하례행사 등을 조총련과 공동개최 하는 자 등임을 확인하였음에도 동인 등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기로 하고, 위 배동호·김재화·곽동의·정재준 등이 모금한 일화1천7백40만「엔」이 조총련 등으로부터 염출된 불순한 자금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이를 제공받아 한민통을 결성하기로 하고,

그들이 운영하거나 관계하고있는 민족시보는 위 배동호가 의장인 민족통일협의회의 기관지로서『조국통일의 전망』 이라는 제하에 『김일성 수상은 독재자 박○○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갈 알았을 것이다』등을 운운하여 북괴를 선전하고 『개정된 북괴헌법 전문』재개 등의 방법으로 북괴정치 노선을 선전·찬양하며 한국의 6·23외교선언을 비난하고 『남북분단 고정화에 절대 반대』라는 북괴노선을 지지하고 『고려 연방공화국으로』라는 제하에 김일성 사진과 연설내용을 일면에 기재하는 등 북괴정책서전 등으로 북괴 및 조총련의 활동을 비호하고 이들의 서전, 선동에 동조하는 한편 민단활동과 대한민국 정부 시책을 극렬히 비판하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반 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위 민족시보를 한민통의 기관지로 채택할 것을 결의하고,

1973년7월13일 하오2시경 동경 소재 「프라자·호텔」에서 위 배동호·김재화·조활준·김종충·김군부 등 통하여 미국「메릴랜드」주 거주 피고인의 처남 이성호로부터 대외지급수단인 미화 1만「달러」를 교부받아, 이를 각 취득한 후 그때부터 10일 이내에 한국은행·외국환 은행·환전상·외국환 평형기금·기타정부기관 또는 금융기관에 매각하지 아니하여 거주자의 외화매각 집중의무를 각 위반하고,


3, 1973년8월13일 귀국 후 반정부투쟁을 강화하여 오다가 1976년3월1일 현실비판세력인 상피고인 문익환·이문영·서남동 및 공소 외 윤보선·함석헌 등과 야합하여 명동성당에서 『정부를 축출하기 위하여는 온 국민이 3·1운동과 4·19에 쳐들었던 횃불을 다시 쳐들어야 한다』는 등 내용의 소위『민주구국 선언문』을 발표하여 그 사건으로 1977년3월23일 대법원에서 징역5년·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78년12월27일 형행 정지결정으로 석방되고, 


기회만 있으면 정부를 비판하여 국민들에게 대정부 불신감을 조장하여 반 정부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1979년3월4일 명동사건 관련자들을 중심으로 재야 정치인·종교인·해직교수·제적학생 등 반정부 투쟁의식이 강한 자들을 규합하여 기존의 민주주의 국민연합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이라 칭함)으로 개편 동 연합 공동의장에 취임하여 시국선언 등을 통하여 모든 민주세력은 민주회복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하여 일어서야 한다고 선동하면서 반정부투쟁을 하여오다가 10·26사태가 발생하여 정국이 불안하여지자 민주회복을 구실로 자신이 정권을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으로 판단하고 정권장악 기반구축의 일환으로서, 사조직으로 상피고인 예춘호 및 공소외 박성철이 이끄는 비서실, 위 이문영이 주도하는 정책연구실들 두고, 동 연구실장인 이문영에게 동인의 월급 및 운영비 조로 8백만 원을 지급하고, 자신의 장남 김홍일로 하여금 1980년3월18일 공소의 송창달·권혁중·배기선 등을 간부로 하는 청년비밀결사인 『민주연합 청년동지회』를 조직하게 하고 운영비로1백50만원을 지급하고, 동년 3월 중순경 상 피고인 김상현으로 하여금 청년정치지망생을 규합하여 「한국 정치문화연구소」를 조직하게 하고 그 운영비조로 수회에 걸쳐 금1백50만 원을 지급하고, 동년1월경 위 예춘호로 하여금 이미 조직되어있던「민주 헌정 동지회」의 조직을 개편, 위 예춘호, 김운식, 김종완 등을 공동대표로 하여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 정비하는 등 김종완에게 그 운영비 조로 2회에 걸쳐 금 50만 원을 지급하는 한편,


<반 국가단체인 한민 통에 간여>


정치활동의 전제인 복권실현을 위하여 동년2월초 신민당내 자신의 지지자인 국회의원 박경록·이용휘 및 신민당 부총재의 공소 외 조윤형 등으로 하여금 신민당내 복권투쟁 위원회를 구성, 복권투쟁을 하게 하고 동월 29일 복권이 이루어지자 동년3월 초부터 신민당에 복귀하여 동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 위하여 당권쟁취에 주력하기로 하고, 예춘호에게 금1천만 원, 전시 이용희에게 금5백만 원을 주어 신민당 국회의원과 77개 지구당 위원장들에 대한 성분분석 및 포섭공작을 하게 하는 등 원내 외의 지지세력확충에 진력하는 한편, 동년 2월20일10시경 위 자가에서 자신의 심복 사조직원 부산거주 공소의 노경규의 안내로 자가를 방문한, 부산대학생 조태원 정관민·이호철·신재익·이주홍 등과 만나 노경규로부터 『이들은 부마사태를 주도한 부산대학생 들이다』라고 소개를 받고 동인들에게『부마사태는 학생·시민들의 영웅적인 거사이며, 10·26사태는 부마사태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한국역사에 있어서 3대 민중운동을 꼽는다면 동학혁명, 4·19의 의거·부마사태다』라고 말하며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이라고 새겨진「볼펜」·사진·책자를 준 후 기념촬영을 하는 등 정치적 세력확장 운동을 하여 오던 중,


가, 동월 20일18시경 자가에서 상피고인 이호철, 한승헌, 공소외 정을병, 양성우, 김병걸 등 문인 20여명과 회합, 동인 등에게 『나는 민주주의를 위해 죽을 때까지 투쟁할 각오로 있는데 문인들도 글만 쓸 것이 아니라「프랑스」의「앙드레·말로」가 제5공화국「드골」정권을 지지하고 입각하여 정치활동을 하였듯이 우리나라 문인들도 정치에 적극 참여해달라』 고 권유하고,

나, 동년 3월1일· 복권을 맞이하자 상피고인 한완상의 협조를 얻어『7년 만에 국민 여러분을 대하면서』제하의 성명서를 작성한 후 자가에서 기자들에게 동발표를 통하여『유신체제의 주역들이 국민과 역사 앞에 반성하고 자숙하는 겸허한 태도를 조금도 보이지 않고 그들은 오히려 과거를 합리화시켜 기득권을 계속 유지시키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있다.』 『심지어는 그들이 계속 집권하지 않으면 중태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국민 여러분을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발전을 저해하는 세력이 아직도 있다고 볼 때 우리들은 힘을 합쳐 그들의 기도를 봉쇄하여야 한다.』『80년대는 국민여러분이 참으로 나라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바이다』라는 등 국민을 선동,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는 등 각 허가 없이 정치적 집회를 하고,


4, 1980년3월21일 21시경 자가에서 전화로 상 피고인 고은태에게『오는3월26일「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수요강좌시간에 「민족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게 되었으나 우리나라 민족혼 개념에 대한 원고를 작성해달라』고 요청하여 다음날인 3월22경 10시경 자가에서 동 고은태로 부터『민족혼은 전투적·적극적 의거의 경험에서 과시된다. 억압자와 싸워야 한다. 침략자와 싸워야 한다. 모순과 싸워야 한다』는 등 내용의 강연 원고를 수교 받음과 동시에『중앙대학에 영향력 있는 인재 하나가 저의 후배로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저의 문단 후배로서 이번에 복학하여 학내에서 영향력이 있고, 최근에는 총장사퇴 요구를 주장하고 있으며 장차 학원사태를 유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동인에게『나는 고 선생을 믿으니 고선생이 나을 위해 책임지고 수고해 주시오』라고 하면서 금50만원을 제공하여 동 고은태로 하여금 상피고인 송기원에게 전달하고 문교부 요직을 약속하게 하여 「데모」를 선동하고, 동월 26일 19시5분경 서울중구명동1가1「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정기 수요강좌를 통해『민주주의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은 결코 하나의「슬로건」이 아니라 진실인 것이다』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는 등 반 정부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정권장악을 위한 방법을 구상함에 있어서 신민당내 지지기반 확보를 위해 동 예춘호와 신민당 국회위원 이용희 등 자파의원들을 총동원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신민당 원내세력 및 정당대회 대의원 포섭에 주력하였으나 대통령후보지명을 위한 김영삼과의 표 대결시 열세를 면할 수가 없고, 한편 동년 3월 중순경부터는 신현확 국무총리의 유신비호발언, 정부의 이원집 정부제구상설, 계엄의 장기화 등 과도정부가 기득권을 이용,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으로 전망.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권장악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동년4윌7일 신민당입당을 포기하고 민주화운동을 구실로 국민연합과 동 연합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단체인 민주청년협의회(이하「민청현」이라 약칭함)등 지지세력을 동원, 학생시위를 폭력시위로 조정, 일반국민을 가세시켜 폭력으로 국헌을 문란케 하여 정부를 전복케 할 목적으로,

<허가도 없이 정치집회를 열어>

가, 1980년4월10일 17시경 종로구안국동8의1 윤보선 가에서 윤보선·상 피고인 문익환·예춘호·이문영·고은태· 공소의 심재권 등과 회합하여, 동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하여 발표한 신민당 입당 포기선언의 동기를 설명함에 있어 『작금의 국내정국추세는 3월11일 신현확 총리가 일본「산께이」신문기자와의 회견을 통해 유신체제를 비호한데 이어 지닌3월15일 최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의 이원집 정부제 구상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점등을 미루어 볼 때 앞으로의 정국이 매우 불투명하므로 이 같은 상황 하에는 무엇보다 계엄의 신속해제, 유신잔당 제거, 정부개헌심의기구 해제, 정치일정단축, 구속자 석방·복권 등을 위한 투쟁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재야인사를 영입함에 있어 문호개방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국관에 있어서도 안일만 생각으로 나와의 견해차이가 있고 내가 더 이상 신민당입당문제로 당권파와 대립시 국민들에게 대통령후보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추는 결과가 되므로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고 국민연합에 복귀하여 민주회복 투쟁에 전념하기로 했다』고 설명하자 윤보선은 피고인의 신민당입당포기선언에 대하여 성급한 처사라고 비판하였으나, 고온태 등 참석자 전원이 피고인의 신민당 입당 포기 및 국민연합복귀를 환영하면서 국민연합 명으로 신민당결별지지 및 국민연합 복귀 환영성명을 발표하자고 합의하고.


나, 동일20시부터 종로구 평창동131의1 북악「파크·호텔」 501호실에서 장 피고인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김종완, 한완상, 공소의 심재권 등 10여명과 재차 회합하고 국민연합이 계엄령해체, 정부주도 개헌포기, 유신잔당 퇴진, 정치일정 단축, 구속자 석방·복권, 학원자유, 자유언론실천 등을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전열을 정비, 강화하기 위하여 국민연합의 규약을 개정, 기구를 개편 보강하고, 규약은 종전 3인 공동의장단 중심제로 운영하던 것을 중앙상임위원회 중심제로, 집행위원회를 중앙위원회로, 소위원회를 상임위원회로, 각각 변경, 보완하고 이에 따라 임원구성은, 중앙상임위원장에 위 문익환, 동 부위원장에 공소외 함세옹, 위 고은태, 중앙상임위원에 예춘호, 이문영, 공소외 계훈제 등 김승훈 등을 각 선임, 위 문익환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이 용이하게 국민연합을 조정할 수 있도록 대폭 개편하고, 국민연합의 조직확대 및 본격적인 투쟁전개를 위해 서무·기획·인사·자금을 담당할 총무국과, 기간조직관리 및 재야·종교·학원 등 특수조직 활동을 담당할 조직국 및 각종 성명입안, 제반 선전업무를 담당할 홍보국을 총괄하여, 과거 투쟁경력이 풍부하고 현재 각 대학학생지도부와 연계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복학생 이현배를 총무국장에, 장기표를 조직국장에, 심재권을 홍보국장에 각 입명하기로 결정하는 동시, 이들3인에게 학원 시위 선동임무로 부여하고 동 활동비 조로 매월 금20만원씩 지급하기로 합의한 후, 위 참석자들에게『작금의 국내 정치정세를 분석하여 볼 때, 나로서는 신민당내 당권파의 강력한 반발로 지지기반 확장이 어렵고, 군부의 지지기반이 없고, 동월11일 신 총리와 동월15일 최대통령의 발언 등을 종합해 볼 때 선거로써는 차기대통령에 당선을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영원히 바라볼 수 없으므로 정당활동보다는 국민연합을 위시한 민주 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등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내세워 학생시위 분위기가 고조되면, 교외로 유도하여 시민의 호응을 촉구하고 아울러 우리조직을 가세시켜 대대적인 본격적 시위를 전개하면 현정부는 궁지에 몰려 우리의 민주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 여론을 환기시켜야 한다』고 하여 반정부 투쟁의 시기를 고취하고,


<복학생 동원 폭력시위를 유도>


다, 1980년4월11일14시15분 대전「가톨릭」농민회관에서 한국 「가롤릭」 농민회 중앙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민주농정』 이란 제하의 강연을 함에 있어 『유신 체제 하에서 신부·목사·재야인사가 감옥에 가서 국민의 인권, 농민의 권리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10·26사태가 발생했다』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고 복권시켜야 하며 김지하· 양순직 동지 등이 감옥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등 내용의 강연을 하고,

DA 300



1980년4월16일 11시40분경 도봉구 수유리 산129한국신학대학에서『도덕정치의 구현』이란 제하의 강연을 함에 있어 청중동원을 위하여 자신의 사조직인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민주헌정동지회· 민주연합 청년동지회원 등으로 하여금 강연선전 전단 10만 매를 대학가 및 시내중심지에 살포하게 하여 3만여 명의 청중을 모아 옥외 확성기를 설치하고, 상 피고인 김상현으로 하여금 정혜원 등 소위 박수부대를 동원하게 한 가운데 『박정권은 반대자를 억지로 빨갱이로 몰고 민주인사들을 나라사랑, 자유 사랑한 죄로 공산당으로 만들었다. 특권층은 수억 혹은 수십억 원 이상의 호화주택에 살며, 기천만 원짜리 비단잉어를 기르고 고래수염으로 이쑤시개를 한다. 독재 하에서 감옥에 기고, 고문·연금·공민원 박탈을 당하고, 학원·직장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민주정부의 횃불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다』 라고 하는 등 청중들에게 반정부 투쟁의식을 고취하고,

라, 동일 14시경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봉구 수유동 소재「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상 피고인 문익환, 동 예춘호, 동 이문영, 동 고은태, 동 한승헌, 동 김총완 등과 회합하여 『한국민주제도 연구소』를 설립하여 자신의 사조직을 통할하고 집권목적을 위한 제반 전략지휘본부로 활용하기로 합의하는 등 집권준비를 위한 조직구성을 모의하고, 동일 17시30분경 귀로에 기독교회관에 가서 예춘호, 고은태, 문익환, 한승헌, 김종원 등과 같이 양심범 가족협의회 회원 조정하 등 15명이 『유신 잔


[출처: 중앙일보] 김대중 등 24명 공소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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