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82)] 지만원 족적[2] 3~5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5-12 14:56 조회7,99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지만원 메시지(82)] 지만원 족적[2]
3. 연구소의 전라도 박사들
전라도 3총사가 지배하는 오웰 연구소
1981년 9월, 나는 국정원에서 곧장 홍릉에 있는 국방연구원으로 부임했다. 주거지는 전 카이스트 바로 옆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있던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지어주신 32평 아파트였다. 나는 연구소가 평화롭고 학구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양지의 마을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살벌한 독재 문화가 전개되어 있었다. 전라도 출신 3명이 통치하는 조지 오웰 공화국으로 이들의 눈 밖에 나면 끝이라는 공포감이 서려 있었다.
이 세 사람은 ‘오황차’로 불렸다. 오 씨, 황 씨, 차 씨 성을 가진 이 3총사는 모두 육사 출신이었다. 육사 교수부 출신으로 육사를 졸업한 이후 실무 부대 근무하지 않고 공부 계통으로만 돌다가 연구소로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오 박사는 나보다 1년 선배로 경제학 전공, 황 박사는 나보다 2년 후배로 경영학 전공, 차 박사는 4년 후배로 정치학 전공, 연구소의 호봉은 교수와 연구 경력만 인정해 주기 때문에 이들은 매우 높은 호봉을, 나는 야전 근무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들에 비해 매우 낮은 호봉을 부여받고 있었다. 호봉에 따라 봉급 역시 차이가 크게 났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에 마음을 쓰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연구소가 정치 공간
이들은 연구자라기보다는 정치인들에 가까웠다. 똘똘 뭉쳐 그들의 영역을 지키고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연구소를 사무적으로 관리·통제하는 국방부 실무자들로부터 보안사령관과 국방부 장관에 이르는 요직 인물들과 매우 가깝다는 소문을 퍼뜨려 그들의 성이 난공불락이라는 점을 확산시켜 놓았다. 연구소장이라는 직책은 2성 장군으로 예편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직책이었다. 연구소장이 새로 부임하면 이들은 술자리를 만들어 주눅 들게 할 목적으로 영어 단어들을 섞어가며 대화를 이끌어 갔고, 그들의 존재감을 과시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연구소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공붓벌레들의 인간성
연구소에는 박사 학위를 갖지 못한 각 군 선배 장교 출신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은 그야말로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할 만큼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들에 찍히면 끝이라는 정서 때문이었다. 나와 그들이 다른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들은 사관생도 시절 점수 따기 공붓벌레였기 때문에 독서를 통한 인격 부양 과정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겪은 세상이 육사 교수부에 국한됐던 반면 나는 전방 근무, 베트남 참전, 육군 본부, 주월 사령부, 합동 참모부를 거치면서 기본 매너가 나름 가꾸어져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틀린 이론으로 큰소리쳐
이들은 군을 향해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다며 큰소리를 쳤고 큰소리를 칠수록 이들의 막연한 주가는 상승했다. 그런데 가장 목소리가 높은 2년 후배의 큰소리가 무엇인가 알아보니 그 대표적인 것이 수리 부품의 소요 예측에 대한 것이었다. 군 전체가 각 수리 부품에 대해 내년에 각 몇 개씩을 구매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제였다. 황 박사의 이론은 이러했다.
“모든 중대 단위에서 정확한 소요량을 예측해야 한다. 군은 이 모든 중대 단위가 제출한 정확한 소요량을 더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지 않고, 군 전체가 지난해에 구매한 양을 기준으로 삼아 구매량을 정당히 확정하려 하느냐. 대단히 잘못하고 있다. 이게 바로 주먹구구라는 것이다. 시정하라.”
하지만 이는 통계와 확률 이론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무식의 산물이었다. ‘예측량’이라는 앞에는 ‘불확실성’이 내포되어 있다. 불확실한 숫자를 어떻게 ‘정확’하게 짚어내라는 것인가! 경영학에서도 이 정도의 이론은 배운다. 소요량 산정 과정은 더하기라는 ‘산수’가 아니라 ‘확률과 통계’다. 소요량을 예측하는 데에는 편차(Variance)가 존재한다. 실제 소요량이 예측한 평균치로부터 얼마나 분산되느냐에 대한 수치인 것이다. 이 ‘편차’는 n 자승에 반비례한다. n 제곱분의 1인 것이다. 중대 단위의 n은 10 미만의 수이고, 군 전체의 n은 수십, 수백만이다. 만일 황 박사 주장대로 모든 중대가 소요량을 예측해 제출하고 군이 이 모든 n을 더하기 한다면 군 전체의 소요량은 전년도 소요량의 수백 배는 될 것이다. 군의 방법이 옳고 황 박사의 이론이 엉터리인 것이다. 엉터리 이론을 가지고 군을 호령한 것이다.
야합적 회의
연구소에는 연구소장이 있고, 행정실장과 연구단장이 양분되어 있다. 연구 단장 아래는 8개 분과를 각각 담당하는 책임 연구원들이 있다. 이 연구 단장직을 나보다 1년 선배인 경제학 박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이 8개 분과 중 하나인 국방 자원 관리 분야를 담당하는 책임 연구위원이었다. 하루는 단장인 오 박사가 정식 회의 시각 30분 전에 육사 출신 후배 3인을 호출했다. 가 보니 30분 후에 의사 결정 사항이 이것인데 여기 있는 우리 네 사람만 찬성으로 몰고 가면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얻어 낼 수 있다면서 지침을 주었다. 의사 결정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는 정상이 아니라 부당한 야합이었다.
나는 베트남 전쟁터에서도 표현 능력이 부족한 병장과 하사관들을 데리고 자유롭게 토의시켜 아이디어를 창출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단장의 이 행동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리고 30분 후에 8명의 책임 연구위원이 모두 회의장에 모였다. 나는 기권을 했다. 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낮에는 국방부 청사에 가서 하루를 보냈다. 퇴근할 무렵 연구소 건물에 들어서자 단장과 마주쳤다. 단장의 얼굴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얼굴이 좌로 일그러졌다 우로 일그러졌다가 하면서 옥니를 악물고 내게 말했다. “너, 이 새끼 어디라고 내 명령에 거역해, 너 당장 내 방으로 와!” 이런 모습은 젠틀맨 사회에서만 살아온 내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세상에 뭐 이런 개 같은 자식이 다 있어. 가족이 있고 인격이 있는 사람한테 단지 사관학교를 1년 먼저 나왔다는 이유로 이런 웃기는 짓을 해?” 계단을 올라가면서 이 인간을 막돼먹은 인간이라 선배는커녕 인간 대접 자체를 해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우장창, 거울 깨지는 소리
나는 2층 사무실에 잠시 들렀다가 숨을 몇 번 고른 후 바로 이웃에 있는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서는 순간 그는 옥니를 갈면서 “이 새끼” 하면서 멱살을 잡았다. 합기도 하는 사람의 멱살을 잡는 것은 자살행위다. 팔목이 꺾이는 것이다. 나도 만만치 않았다. “뭐 이런 개 같은 새끼가 다 있어” 하면서 팔을 꺾었다. “아~” 외마디를 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야 이 새끼야, 너 어디서 배워처먹은 버릇이냐, 임마 너나 나나 가족이 있고 인격이 있는데, 이게 무슨 더러운 짓이야, 이 새끼 너 오늘 나한테 얼굴 한번 터져 볼래” 하면서 두꺼운 유리 재떨이를 들어 벽에 걸려 있는 대형 거울에 던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온 연구소를 울렸다. 이 싸우는 소리를 들으려고 2, 3, 4층 사람들이 다 2층 복도로 몰려왔다. 그 인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람들이 들어와 말려서 그날은 그것으로 마감됐다.
연구소를 완전히 장악했던 폭군이 나에게 망신을 당하자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로서는 연구소에 더 있기가 창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3악당은 그대로 주저앉을 인간들이 아니었다. 밤에 연구소장을 찾아가 지만원을 추방할 것을 설득했다. 이튿날 예상대로 2층에 자리 잡은 연구소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연구소장실로 오라.”
연구소장과의 담판
내가 첫 연구로 국방부에 가서 홈런을 치고, 국방부 장관이 알아주고 할 때는 나에게 수고했다는 격려를 해주었던 연구소장이, 그날은 얼굴이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됐다. 내가 그의 맞은편에 앉자 그는 말을 빨리 꺼내지 못하고 몸만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커피 한잔 달라고 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딴청을 했다. 드디어 그가 말문을 열었다. “말야 말야, 어이 지 박사, 하극상이야. 연구소에서 좀 나가줘야 하겠어.”, “어디로요”, “생각해 봤는데 국방 대학원 교수로 보내줄 테니 그렇게 하지”,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버티면 어떻게 하시게요!”, 그의 낯빛이 갑자기 창백해지고 손이 벌벌 떨렸다. 사실 내가 버티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소장님, 그 세 사람과 저는 연구소장님의 막냇동생들 뻘입니다. 새까만 후배들이 서로 싸우면 말리셔야지 어느 한 편을 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소에서 오황차의 행패가 어떤 것인지 진정 모르십니까? 오황차에 걸리면 끝장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소장님에 대해 뭐라고들 하는지 아십니까? 오황차의 로봇이라고 비웃습니다.” 소장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분노를 참느라 몸이 떨렸다.
“저와 소장님 가운데 한 사람이 나가야 한다면 제가 아니라 연구소장님이 나가셔야 합니다.” “흠흠, 말야 말야” 소장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저는 이 두 손에 군을 현대화시키기 위한 연구 과제를 잔뜩 들고 왔습니다. 소장님의 연구 과제는 무엇입니까? 소장이라는 자리를 맡을 사람은 많지만 제가 두 손에 들고 온 과제는 저 말고는 수행할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못 나가겠다는 것은 대의명분이 있는 것이고, 저보고 나가라 하시는 것은 대의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이 연구소가 소장님 사유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연구소장이 오히려 문초당하고 있었다. “말야 말야, 알았어. 오늘은 그만하지.” “앞으로 편들지 마십시오.” 소장실을 나왔다. 오황차는 내가 소장실을 나올 때 풀이 죽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이후 그들은 소장실로 찾아갔을 것이다. 소장이 기가 죽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들의 풀이 죽었을 것이다. 내가 나갔더라면 연구소는 다시 그들의 천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꼿꼿하게 살아 있어서 오황차가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어느 경제 연구소 부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가 맡아왔던 연구단장 자리는 2년 후배인 황 박사에게 넘겨졌다.
2년 후배의 또 다른 행패
나는 연구에만 관심이 있었지, 봉급이나 직책 같은 것에는 조금도 마음 쓰지 않았다. 황 박사는 중령이었고 나는 대령이었지만, 그가 연구 단장이 된 것에 전혀 관심 쓰지 않았다. 그리고 1년 가까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2년 후배인 단장이 여비서를 내게 보냈다. “지 박사님, 단장께서 오시라는데요~.” ‘만나려면 지가 내게 올 것이지, 이 인간 간이 아주 부었구먼’ 나는 순간 화가 났다. 그리고 단장실 문을 열었다. 내가 들어갔는데도 일어서지 않고 거만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더러 오라고 했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앉으세요.”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그가 앉아 있는 앞에 놓인 탁자를 발로 차서 그에게 부딪히게 했다. “야, 황 아무개, 너 눈에 뵈는 게 전혀 없구나.” 하면서 유리 재떨이를 땅바닥에 패대기쳐 버렸다. 유릿가루가 방 안에 가득했다. 그 녀석은 단 한마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떠밀어 버리고는 나와버렸다. 또 많은 사람이 복도로 모여들었다.
그날 밤, 아마 연구소를 나간 오 씨까지 합쳐서 연구소장 공관에 찾아갔을 것이다. 이튿날 연구소장이 나를 다시 불렀다. “말야 말야, 지 박사 이번에는 꼭 나가줘야 하겠어.” 나는 그를 대책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이런 인간과는 여러 이야기 나눌 필요가 없었다. 할 이야기를 지난번에 다 해주었기 때문이다. “알았습니다. 그동안 소장님을 잘 모시려고 노력했는데 할 수 없군요. 소장님과 저는 아무래도 한 연구소에 있을 수 없게 됐네요.” 이 말에 연구소장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내가 나가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소장님, 제가 소장님을 내보내 드리겠습니다. 저 함부로 보지 마십시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입니다. 저 장관님한테 갑니다. 장관님 명령 기다리세요.”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를 뒤로하고 나와버렸다. 그리고 곧장 국방부 장관 비서실로 전화했다. 장관을 뵙고 싶다고, 소요 시간은 1시간 미만이라고. 금요일에 전화했는데 토요일에 연락이 왔다고 한다. 즉시 들어오라고. 그런데 나는 차마 장관실 반응이 그렇게 빠를줄 모르고 토요일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월요일, 을지훈련 도중이었기에 남태령 깊숙한 벙커 안으로 안내되어 국방부 장관을 만나 뵈었다.
국방부 장관과의 독대
“지 박사 욕 많이 먹더구나. 나도 욕 많이 먹는다. 욕을 많이 먹는다는 건 일을 많이 한다는 거야. 난 욕 안 먹고 적당히 지내는 사람들 아주 싫어한다. 그래, 왜 날 보자고 했니?”
“장관님, 연구소 내부의 작은 일입니다. 연구소에는 연구 호봉제도가 있습니다. 육사에서 교수를 하면 그 기간이 모두 호봉 계산에 높은 점수로 계산이 됩니다. 저는 야전 생활을 하고 베트남전에 오래 참전하다 보니 호봉 계급이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이는 제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구 단장을 육사 2년 아래인 황 아무개 박사가 맡고 있습니다. 호봉이 높아서 맡는 일이라 저는 괘념하지 않습니다. 단장직을 봉사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후배는 그 단장이라는 직책을 상명하복의 지휘용으로 악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군의 계급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후배인 연구 단장은 중령입니다. 저는 대령입니다. 중령이 대령에게 오라, 가라, 보고하라 합니다. 제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랬더니 연구소장이 저를 불러 연구소에서 나가라, 국방 대학원 교수로 보내겠다, 압박합니다.” 윤성민 장관의 얼굴에 노기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청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어서 할 말 다 해 보라는 눈치였다.
“제가 대령을 달고 중령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군기 문란 행위가 됩니다. 연구소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한다면 육군 인사 규정에 연구소에 관한 한 대령도 장군도 중령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예외 규정을 넣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떳떳하게 중령 명령에 복종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한 이 대령의 계급은 영예의 계급이 아니라 치욕의 계급이 됩니다. 장관님께서는 제게 대령 계급을 달아 주셨습니다. 달아 주셨으니 떼어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나는 퍼붓는 식으로 말했다. 끈적거리며 고자질하는 식의 매너로 보이는 게 싫었다. “너 고생 참 많았구나. 언제부터 그랬니?” “1년쯤 됐습니다.” “너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니? 알았다. 내가 알았으니 내가 처리하마. 나가봐라.”
다음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장관님이 그렇게 역정을 내시는 모습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명령이 떨어졌다. 연구소장과 2년 후배 모두 연구소에서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황 박사는 기획 관리 실장의 배려로 해외 연수를 나갔고, 4년 후배도 눈총을 받아 몇 달 후 해외 연수로 나갔다. 그리고 추운 겨울 연구소장은 새벽 7시, 장관님의 출근 전에 장관실 문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다리면서 용서를 빌었다. 무시당하면서 7일간을 빈 것이다. 그는 결국 용서받았고 간도 쓸개도 없이 나에게 고분고분했다. 연구소는 1987년 2월 말 내가 예편하고 도미하는 순간까지 행패로부터 한동안 해방됐다.
우덜끼리의 추대
산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전라도 여성들이 홀아비 등쳐먹고 훔쳐 갔다며 전라도 욕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육사에서는 여러 명의 전라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전라도에 대한 선입관이 없었다. 그런데 연구소에 와서 전라도 맛을 된통 보았다. 연구소를 나간 오 박사는 다른 연구소에 가서까지 편 짜기 행세를 보이다가 말썽이 있었다는 말이 돌았다.
‘우덜끼리’ 똘똘 뭉쳐 저질적, 비도덕적 갑질과 육갑질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준 사람들이 오황차였다. 그리고 그 확대판이 전라도 사람들 집합소인 민주당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현상은 많은 비전라도 사람들이 이들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신사이고 지식인이라 말하며 설익은 도덕 군자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에는 피 맺힌 ‘한’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목에서 피를 토해내는 판소리가 전라도 소리라 한다. 그 ‘한’은 다른 지역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차별받는 모멸감에서 자란 ‘적개심’이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 앙갚음하는 일이라면 북괴와 손을 잡지 못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전라도 주역들이 북괴를 빠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4. 연구소 토의
회의는 왜 하는가?
회의는 왜 하는가? 힘 있는 사람의 생각을 ‘다수결’이라는 도장을 찍어 통과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의 지혜를 뽑아내 업무를 개선하기 위해 하는 것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늘 그런 식으로 회의했다. 소위 때는 대대장님으로부터 지시받은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 분대장급 이상의 포대(포병 중대) 간부들에 “이러이러한 지시사항을 필기해 왔는데 나는 육사에서 공부만 하다가 와서 잘 모른다.”라고 깨 놓았더니 그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아이디어들이 서로 경합하면서 최선의 아이디어를 생산해 냈다. 베트남에서도 매일 분대장급 이상을 모아 놓고 그렇게 했다.
최상의 지혜는 각자 머릿속에 ‘준비’돼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혜가 각축하고 상응 효과를 내는 과정에서 ‘현장 생산’되는 것이다. 회의나 토의는 바로 아이디어를 생산해 내는 공장이다. 홍릉 연구소에서 나는 언제나 군은 환자로, 나를 의사로 생각했다. 아픈 곳을 찾아내 처방을 내리는 것을 나의 연구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과제를 정하면, 바로 연구원들을 모았다. 커다란 탁자에 둘러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리라고 했다. 그리고 뒤로 눕듯이 기대앉으라 했다. 아이디어와 창의력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만 발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리를 올리는 연구원은 없었다.
과제 수행 회의
과제에 대한 개념은 있지만 과제에 대한 구체적 스펙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창의력이 필요했다. 아이디어들이 농담 분위기에서 나왔다.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촉발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막연했던 코끼리가 코, 다리, 꼬리, 귀 등으로 구체화 되었다. 모든 연구원이 참여해 창출해 낸 스펙이기 때문에 올 코트 프레싱이 가능했다. A가 받은 부분에 B, C, D가 아이디어를 보탠 것이다. 이러하기에 A, B, C, D 연구원이 각자 작성한 내용은 일사불란했다. 그것을 보고서에 문장화시키는 일이 바로 내가 할 일이었다.
반면 다른 연구 책임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과제 책임자가 장·절 리스트를 나눠주고, 각자 한 분야씩 맡으라 했다. A, B, C, D 연구원들은 각자 칸을 막고 연구했다. A가 하는 일은 B, C, D가 몰랐다. 시간이 되면 책임자가 A, B, C, D의 연구 내용을 한데 묶었다. 일관성이 없었다. 그래서 소장에게 과제 수행 내용을 보고하면 소장은 늘 짜증을 냈다. 불합격! 그다음부터 연구원들이 밤늦게까지 일을 하지만, 그래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마감된 보고서들이 비일비재했다.
호봉 회의
서울대를 졸업하고 텍사스 대학에서 재무 분야 경영학을 가르치고 있던 교수를 내 팀으로 초빙했다. 그에게 호봉을 부여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때는 오황차가 물러나고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육사 4년 선배가 연구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신사답고 남들을 많이 칭찬해주는 인격자였다. 회의장에 가니 총무과에서 규정에 따라 산정한 호봉 계산서를 나누어 주었다. 그의 계산된 호봉은 7.2호봉이었다.
8명의 팀장이 소파에 앉았다. 단장이 사방을 둘러보며 호봉 산정에 대해 회의하겠다고 선언했다. “총무과 계산으로는 7.2 호봉이 나왔네요. 어떻게 회의를 진행할까요? 좌로부터 우리 김 박사님부터 말씀해 보실까요?” 김 박사, 약간 망설이다가 “네, 7호봉이 좋겠네요.” 물꼬를 텄다. 이후 나머지 6명이 미투를 했다. 사사오입이었다. 사사오입하려고 회의를 소집하는 건 난센스였다. 맨 마지막에 내가 이의를 달았다. “단장님, 호봉 산정도 의사결정인데요, 학술적으로 배우기는 의사결정의 질이 정보의 양에 비례한다고 배웠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총무과가 발행한 종이 한 장뿐 아닌가요? 그 외 다른 정보가 있나요?”
연구 단장이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듣고 보니 지 박사님 지적이 맞는 말씀이네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사람을 채용할 때 인터뷰를 매우 중하게 여깁니다. 여기 새로 뽑는 이 박사를 보신 분 계시는가요?”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이 박사를 여기로 오라 하여 차를 한잔하시지요. 그리고 묻고 싶은 것들을 물어보시지요.” 이에 모두가 찬성했다. 그를 불러 2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후 보냈다.
이 박사가 나간 후 연구 단장이 나를 보며 말했다. “자, 이제 만나 봤으니 그다음 어떻게 할까요?” “단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칠판 앞에 나가 회의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반기듯 “아, 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새로 오는 이 박사를 만나 보셨으니 각 팀에서 이 박사와 동급이라고 생각하시는 연구원 이름을 한 사람씩 대 주십이오.” 각 팀장은 자기 팀에서 한 사람씩 이름을 댔다. 모두가 다 아는 연구원들이었다. 나는 기조 A 연구원 A V.S 이 박사를 한 차례씩 써 놓고 누가 더 위고 밑인지에 대한 의견을 브레인스토밍시켰다. 결국 8호봉보다는 높고 10호봉보다는 낮았다. 이 박사는 9호봉이 되었다. 7 호봉과 9호봉은 3년 경력의 엄청난 격차였다.
만일 그에게 현격히 낮은 호봉이 부여되면 그에게 일할 맛이 떨어질 것이고 그에게 현격히 높은 호봉이 부여되면 다른 여러 명의 기존 연구원들이 일할 맛을 잃을 것이다. 다 같이 학문을 했지만, 이론을 실무에 응용하는 사람들이 드문 것이다.
5. 강릉 스타 지만원
이웅평과 신중철
이 두 사람은 다 인민군 대위로 1983년 귀순했다. 이웅평 대위는 MIG-19기를 몰고 귀순했고 신중철 대위는 철책선을 넘어 귀순했다. 두 사람은 국군 정보사령부에 소속되어 있다가 이웅평은 1990년을 전후해 병으로 사망했고, 신중철은 2001년 김대중 시대에 대령으로 진급한 후 북으로 갔다. 신중철은 위장이었다.
1985년 나는 이 두 사람을 각 3일씩 연구소로 보내달라고 정보사령부에 요청했다. 문서로 한 것이 아니라 전화로 합의가 되었다. 당시 나에 대한 군 내의 공신력은 상당했었다. 군부대 어느 곳을 방문하든 모두 전화로만 합의 됐다. 이웅평과 연구소에서 첫 3일을 보냈다. 3일 내내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웅평에게 북한 조종사들의 일과를 말해달라 했다.
인민군 조종사들의 일과
“자고 나면 매일 토의합니다. 토의하니 순발력이 생기고, 관찰력이 생기고, 말솜씨가 향상되지요. 북 조종사들은 한강교를 눈감고 다 파괴할 정도의 요령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군의 주요 시설에 대해서도 공격 요령이 다 빠삭하게 파악되어 있습니다. 간첩들이 한강교나 군 시설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보냅니다. 시설 사방에 대한 설명과 요해도 자세히 그려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교각에서 콘크리트 조각을 떼어내고, 군 시설의 콘크리트 조각을 떼어내 비닐에 싸서 보냅니다. 그것으로 시설물의 강도가 계산됩니다. 이러한 자료가 조종사들에 제공되고 조종사들은 한강의 각 교량 하나하나에 대해 공격 방법을 연구해 발표하고 그에 관한 토론을 열나게 합니다. 남측 데이터와 방공포를 회피하면서 접근하는 경로, 어떤 폭탄을 어느 부분에 어떤 각도로 접근해 투하할 것인지 열나게 토론합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이웅평 대위와 신중철로부터 하루 종일, 3일간씩 들었으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들었겠는가? 이 두 대위는 내가 묻는 말을 남측 정보기관 사람들이 물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강릉에 좌초된 북 잠수함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릉에 북괴 잠수함이 바위에 좌초된 것을 택시 기사가 발견했다. 대좌를 대장으로 하여 26명이 타고 왔다. 그중 대좌를 포함한 11명이 산에서 자살했다. 나머지 15명을 찾느라고 여러 달 동안 대규모 작전을 했다. 그만큼 나라도 시끄러웠다. TV 매체들은 그들이 강릉에 침투한 목적에 대해 여러 전문가를 초청해 방송했다. 국방 정보국장 출신, 동아일보 사장 김학준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초청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요인 암살과 사회 교란“이 침투 목적이라고 진단했다.
나는 문화일보에 전화를 걸어 ”강릉에 무슨 요인들이 그렇게 많으냐“고 했다. 그랬더니 칼럼을 써 보내 달라고 했다. “강릉에는 좁은 지역에 중요한 육해공 시설이 8개나 있다. 대한민국에서 군 시설이 가장 밀집된 곳이다. 간첩들은 이 군사 시설에 대한 사진, 요해도, 접근로, 콘크리트 조각들을 북으로 보냈다. 요인 암살과 사회 교란이 목적이라면 김신조 팀이나 울진 삼척에 투입한 것처럼 살인 조를 보낼 것이지 왜 북에서도 귀중한 대좌급을 보냈겠느냐, 대좌는 우리나라 대령보다 한 단계 높은 계급이다. 그런 두뇌를 보냈다는 것은 그동안 간첩들이 수없이 보낸 자료들의 신빙성을 최종 점검·확인하려고 보낸 것이다. ‘암살’ 목적이 아니라, ‘판단’ 목적으로 온 것이다.“
내가 쓴 이 칼럼이 인쇄돼 나갔다. 원체 구체적인 내용인 데다 국민 상상력 밖에 있는 내용이라 많은 사람은 나를 의심했다. “유능한 군사 평론가인 줄 알았더니 좀 맛이 갔구먼~“ 이런 분위기가 일고 있던 찰나에 ‘이광수’가 생포됐다. 군이 이광수에 ‘침투 목적’을 물었더니, 바로 내가 쓴 칼럼 내용 그대로였다. 이광수로 인해 한동안 나는 ‘강릉 스타’로 불렸다. 만일 이광수가 생포되지 않았다면 지만원은 ”맛이 간 군사 평론가”로 좌초됐을 것이다. 내가 이웅평을 3일씩 빌려 남이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타인들의 상상력 밖에 있고, 내가 들었던 말에 근거하여 군사 평론을 한 내용도 타인들의 상상력 저~ 밖에 있었다.
2023.05.07.
지만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