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82)] 지만원 족적[2]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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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5-17 00:36 조회7,94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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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82)] 지만원 족적[2] 9~11
9. 미국의 연구소들
순환도로 산적들
1983년 나는 미국의 연구소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 알고싶었다. LA에 있는 RAND연구소, 워싱턴D.C에 있는 부루킹스 연구소, 국방연구소, 해군연구소, 헤리티지재단 연구소를 차례로 찾아갔다. 이 5개의 연구소는 미국 연구소들 중 일부였다. 워싱턴D.C의 순환도로에는 700여개의 연구소가 들어 차 있다. 이들은 일명 ‘순환도로의 산적(Beldway Bandit)’으로 불렸다. 행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뜯어간다는 의미로 붙여진 조크식 별명이었다. 예를 들면 BDM연구소, 서울역 앞 대우빌딩과 같은 규모의 빌딩이 10여개나 되는 매머드 연구소다. 이 700여개의 연구소들이 미국의 모든 정책과 시스템을 개발한다.
미국 국방성에는 1개과가 5명 정도 되었다. 이렇게 적은 수의 공무원들이 어떻게 넓은 나라를 관장하고 세계를 지배하는가? 이들은 모든 정책과 시스템을 연구소를 통해 수행한다. 이들은 정책에 필요한 과제 예산을 할당받아 1개 과제당 2개 연구소에 연구를 맡긴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설계다. 설계에 돈을 많이 쳐 주어야 양질의 건물을 지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설계에 돈을 쳐주지 않지만 선진국일수록 설계에 돈을 많이 쳐준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은 연구에 돈을 많이 쓴다. 1개 연구소가 연구를 잘못하면 정책과 시스템이 불량하게 도출되고, 이 불량정책이 시행되면 엄청난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보험을 드는 식으로 연구를 2개 연구소에 배당한다.
한국에서는 행정 사무관들이 산하연구소에 과제를 주면, 연구가 다 끝난 다음 결과만 60분 이내의 시간만 할당해 브리핑 받지만, 미국은 1주일에 한 차례씩 꼭 토의를 한다. 이렇게 하니까 과장 등 공무원들은 하루에 5-6시간씩 연구원들과 토의를 한다. 이런 식으로 공무원 생활을 10년을 하면 그 공무원들의 두뇌가 얼마나 개발이 되겠는가? 반면 한국 공무원들은 산하 연구소를 심부름꾼으로 여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박사의 도장으로 합법화시키는 수단으로 연구소를 운영한다. 이래서 한국정책이 조삼모사가 되고 공무원의 두뇌가 해가 갈수록 퇴화되는 것이다.
미국 연구소의 경쟁력
미국 연구소에는 고용안정이라는 개념이 없다. 연구소의 중진들이 해마다 행정부에서 연구 과제를 따오면 그 과제를 연구시킬 연구원들을 지정한다. 연구소 내에 인력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아무 중진에게도 발탁되지 않으면 그 연구원들은 연구소를 나가야한다. 그래서 연구원들은 일반 교수들보다 연봉을 많이 받는다. 왕성하고 창의력 있는 연구원들만 살아남는다.
연구소 운영의 투명성
우리나라에는 정부 정책을 연구하는 사설연구소가 없다. 모두 정부출연 연구소들이다. 경쟁력이 없고 놀고 먹는 학자들이 많다. 우리나라 대학들, 특히 공과대학에는 실험시설이 열악하다. 기부문화가 열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대학에 기부를 하지 않는가? 재단의 투명성이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단을 족벌들이 소유하고 있는데 누가 기부를 하고 싶겠는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나 적십자사 같은 경우도 비리가 많은 것으로 보도돼 왔다. 이 불투명성이 문화로 정착돼 있는 한 기부문화는 꽃을 피울 수가 없다.
1983년 나는 위 5개 연구소에서 투명성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그 해답은 BOT와 공인감사에 있었다. BOT는 Board of Trustee의 약자로 사회적 신뢰를 받고있는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로 15~20명으로 구성됐다. 야합할 수 없는 다수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사회’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이사회는 언제나 한 사람의 영향력이 지배한다. 나머지는 돈만 받고 들러리를 서주는 시스템이다. 형식은 미국과 유사한데 사실은 1인 독재가 가능한 존재가 이사회다.
미국 연구소의 소장은 BOT에서 호선한다. 15~20명 모두가 연구소장 자격을 갖는 굵은 사람들이다. 한국의 이사회는 알음알음으로 뽑힌 사람들이지만 미국 BOT는 공개적으로 선발한다. 그리고 외부감사가 상시화 되어있다. 미국의 공인회계사(CPA)는 미국사회에서 매우 엄격한 도덕율에 의해 자체 통제되는 집단이기에 미국사회의 신뢰가 대단하다.
엘리트 국가에 대한 꿈
극히 소수의 공무원과 많은 수의 두뇌 엘리트에 의해 국가가 경영된다면 오늘날과 같은 포퓰리즘 공화국이 탄생할 수 없다. 현재의 정부산하 연구소들은 모두 독립시켜 정책과 시스템 개발 사업들을 수행하도록 경쟁시켜야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 수재들이 해외에서 돌아와 너도 나도 사설 연구소들을 차릴 것이다. 국가를 엘리트 두뇌들로 경영할 것인가 아니면 날이 갈수록 두뇌가 퇴화돼 가는 공무원의 두뇌로 경영할 것인가? 누군가는 국가경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것이다. 국가 경영의 엔진을 바꾸지 않으면 고급국가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10. 미국식 감사(Audit)
1달러 소비에 대한 1달러 이상의 가치 창조
미국 군의 자원관리는 국방성 관리차관보실과 군 감사국이 주도한다. “1달러 사용에 대한 1달러 이상의 가치창조” 이것이 미군의 신조였다. 1983년 당시 국방예산 관리 참모부 장군은 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Colored Money, 자금을 그냥 할당하지 않고, 색깔을 칠해 색깔별로 자금을 분배한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쓰다보면 노란 돈은 남고, 빨간 돈이 모자라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를 바꿔쓰기가 행정적으로 까다로워 많은 낭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칼라가 없는 자금을 책임자별, 목적별로 쓰게 하고 회계를 철저히 한다고 했다. 이 Colored Money 현상은 지금도 우리나라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구시대에 제정된 예산회계법이 ‘목’으로 품목과 비용을 분류(목 분류)하여 ‘목’별로 예산을 청구케하고 집행케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페인트라는 ‘목’에 예산을 청구해서 그대로 집행했는데 페인트가 아주 많이 남아서 이듬해에 페인트 예산을 신청하지 않거나 적게 신청하면 그 다음부터 예산이 취소되거나 깎인다. 이것이 무서워 페인트가 남아돌아도 다음 해에 그만큼을 또 신청하고 있었다.
미국감사 한국감사
미국의 감사관들은 분석가들이다. 반면 한국의 감사관들은 법학도들이다. 준법검사들인 것이다. 미국의 감사 목적은 효율성 제고이고, 한국의 감사 목적은 적발과 처벌이다. ‘1 달러 소비에 대한 1달러 이상의 가치 창조’라는 개념, 미국에만 있고 한국에는 없다. 미국 감사의 중점은 ‘효율’이지만 한국 감사의 중점은 ‘법대로’이다.
미국 감사의 목적은 국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 저해가 되는 정책, 규정, 리더십상의 문제를 발굴하는 것이고 처벌은 효율 감사의 부산물(Byproduct)이다. 반면 한국 감사의 목적은 공무원 취조다. 연연세대 물려받은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OX 표식을 한다. 판단도 없고 응용 능력도 없다. 공무원 취조관인 것이다. 효율성을 증대시키려고 창의력을 발휘하는 공무원은 100% 감사에 걸린다.
공무원은 밥통을 지키기 위해 감사에 걸리지 않게 일해야 한다. 일을 많이 하면 감사를 많이 받아야 하니까 가급적 일을 축소해야 한다. 애국 하려던 공무원이 피를 본다. 밖에서는 공무원들을 향해 “무사안일”, “복지부동”이라 손가락질을 하지만, 그 주범은 감사원이다. 감사원 구성원들을 경영학도, 분석학도로 바꾸고 ‘효율성 제고’라는 문화를 공무 사회에 주입시켜야 한다.
‘낱개 감사’를 하지 말고 시스템 감사’를 하라. ‘사후 감사를 하지 말고 사전 감사’를 하라. 이렇게 외치면 그들은 반문한다. “집행을 해 봐야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할 것이 아니냐?” 그러나 집행하고 나면 쏟아진 물이 된다. 댐을 건설하는 계획이 잡혀 있으면 사전에 시뮬레이션을 해야 한다. 댐을 건설하면 그 상류에 있는 철교와 교량이 수장된다. 수장된 다음 감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미국에서,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워 전파했지만 이는 외상외과에서 약을 쓰다 나간 이국종 교수의 경우처럼 언제나 이방인의 외침이었을 뿐이다.
11.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
1993년 김영삼의 제1성, 한국병
김영삼, 취임하자마자 세계화의 기치를 내걸면서 한국병을 문제 삼았다. 한국 사람들의 의식을 탓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지적한 한국병이 질서가 없다는 것이었다. 질서가 없는 것이 의식 탓이기 때문에 의식 개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합작품이 불량품이었다. 여기에 내가 반발하고 나섰다.
은행 객장 대기 번호표 시스템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인에게 질서가 없는 것이 의식 탓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질서가 없는 것은 의식 탓이 아니라 시스템 탓이다. 은행 객장을 보자. 과거에는 질서가 없었다. 그런데 1990년 국민은행을 선두로 은행 객장에는 순번 대기표 시스템이 가동됐다. 그 간단한 시스템 하나가 설치되니까 우리의 질서가 선진국 질서와 똑같이 좋아지지 않았느냐? 무질서는 시스템 탓이지 의식 탓이 아니다. 의식 역시 시스템의 산물이다. 세 대의 공중 전화기가 있다. 한국인은 세 줄을 서지만 선진국은 한 줄을 선다. 줄이 짧은 곳에 섰더니 앞 사람들의 전화가 길어져 자기보다 늦게 온 사람이 줄을 잘 서서 먼저 전화기를 사용했다. 이 때 줄을 잘못 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는가? 에이, 재수없네. 줄을 잘 서야해. 재수가 좋아야해. 운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운이 차례를 좌우하기 때문에 점쟁이를 찾는다. 반면 한 줄을 서는 선진국 사람들은 세 대의 전화기 중 맨 먼저 끝난 전화기를 먼저 온 사람이 차지한다. ‘운’이 아니라 ‘논리’가 차례를 지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선진국 국민들에는 논리 의식이 자란다. 의식이 시스템의 산물이 아니냐? 우리나라 모든 분야에서 질서가 없는 것은 의식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개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시스템 황무지다. 많은 싱크탱크로 하여금 각 분야에 시스템을 개발시켜야 한다.” 설명이 길기 때문에 TV가 아니라 주로 라디오 방송을 많이 이용해 전도사 역할을 했다. 오늘의 “시스템 클럽”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이후 나는 한동안 ‘시스템 전도사’로 불렸다.
싱가포르 공항의 택시승차 시스템
1983년,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응용수학 국제 세미나에 발표자로 출장을 갔다. 창이 공항에 내리기 전에 기내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공항이 시내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택시를 탈 경우 미터기 요금에 싱가포르 돈으로 8 달러를 더 보태서 지급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공항 택시 요금 문제로 불미스러운 보도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도 시스템이었다.
창이 공항에서 택시를 타려고 줄을 서니까 뱀처럼 지그재그로 줄을 섰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줄이었다. 땅에는 꾸불꾸불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것도 시스템이었다. 택시가 1 열로 들어오다 도끼 빗처럼 7개의 승차대로 갈라져 정차 했다. 한 번에 7명 씩 타고 나가는 것이었다. 이 때 한국에서는 승객도 1열, 택시도 1 열로 늘어서 있었다. 김포 공항의 이런 답답한 탈 시스템 현상은 그 후 20년 정도 더 계속됐다.
백화점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손님이 있는 한 택시가 중단 없이 들어왔다. 옆을 보니 한 젊은이가 카운팅 기계로 손님 수를 입력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손님 수를 택시 회사에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1983년, 싱가포르의 시스템이었다. 아마 모든 분야에 시스템이 개발되고 설치되고 있었을 것이다.
1993년의 한국 국민, 시스템이 무슨 말인지 몰라
1993년 서울 공대 산업공학과의 실력자 이면우 교수가 [W 이론을 만들자]는 책을 써서 많은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W이론이란 신바람 운동이었다. 리더십 이론에는 X이론, Y이론, Z이론이 나왔었다. X이론은 미국에서 1950년대 테일러 생산 방식에 어울리는 이론이었다. “경영은 경영자가 하니까 근로자는 근로만 하라.”는 것으로 이는 근로자의 창의력을 무시하는 리더십이었다.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채찍과 기율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으로 성악설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 후 Y이론이 나왔다. 성선설에 의해 사람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루살이로 끝난 신바람 운동
Theory X와 Theory Y는 미국에서 출생한 이론이고 Theory Z는 일본에서 탄생했다. 인간에게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이 곧 자아실현의 길이라고 인정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면 스스로 열심히 일을 할 것이라는 전제에 근거한 이론이었다. 일본은 이 이론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왔다. 파나소닉(송하전기)의 전설 아키오 모리타는 Z이론의 상징이었다. 1993년 초, 이러한 리더십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서울 공대 산업공학과 이면우 교수가 W 이론을 들고 나왔다. 그의 저서 [W 이론을 만들자]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근로자에게 신바람을 넣어 주어야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언론을 타자 많은 경영자들이 근로자들의 신바람을 일으켜 준다며 많은 비용을 썼다. 나는 이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1993년 그 해에,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라는 책을 현암사를 통해 냈다. “신바람을 1년 365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신바람으로 하루에 10개를 제조하는 사람이 신나 봐야 12개 정도밖에 더 만들겠는가? 설사 10개 만들던 사람이 20개를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기업의 이윤과 직결 되겠느냐? 미처 팔리지도 않는 제품을 많이 만들어봤자 재고로 쌓이면 자금이 사장되어 이자만 나가는 것이 아니냐.” 이정도 까지만 반박했는데도 신바람이론은 허망한 것이 됐다.
“12대의 기계가 한 공정을 이루고 있다. 12사람 앞에는 재고가 쌓였다. 열심히 일할수록 더 많은 재고가 쌓였다. 1개월 후에 만들어도 될 것을 미리 만든 것이다. 재고가 쌓인 것만큼 자금이 사장되고, 이자가 발생했다. 열심히 만들수록 더 많은 재고가 각자 앞에 쌓였다. 기업의 이윤이 내려갔다. 그래서 일본 도요타는 전 공정을 후 공정에서 가져가는 것만큼만 만들고 시간이 남아도 일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JIT(Just In Time) 시스템이었다. 시간이 남으니까 12사람이 다루던 기계를 한 사람이 다뤘다. 행동반경을 고려해 12대 기계를 U자형으로 배치했다. 이것이 시스템이다. 이로써 신바람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그해인 1993년 KBS가 나를 초대해 시스템이론 소개를 부탁했다. 그때 우리사회에서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시스템이요? 사전을 보니 체계라 돼 있던데 체계가 무엇이에요? “
‘TV는 사랑을 싣고’의 효시
나를 초대한 사람은 KBS의 김상근 부장이었다.”인생 이 얘기 저 얘기“라는 60분짜리 프로에 나를 초대했다. 진행은 안정효, [하얀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베트남전을 소설로 쓴 작가가 보았다. 시스템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낯이 설다고 했다. 이론부터 말하면 다들 재미없어 할 것 같아 ‘은행 객장에 순번 대기 번호표 시스템’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러자 청중석에서 금방 ”아~ 그런 거구나“라는 식의 반응들을 보였다. 당시 사회에는 ‘시너지 효과’라는 말이 일부 떠돌았다. 막연히 두 개 이상을 합하면 시너지 효과가 난다는 저도로만 이해하고들 있었다.”진행자님 혹시 시너지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 그는 잘 모른다고 했다.
나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설명한 내용이 몇 개월 후 삼성 오리엔테이션 비디오에 떠 있었다. 삼성의 모기업에 강의를 하러 갔다. 중역들이 도열하더니 브리핑룸으로 안내했다. 육중한 커튼이 열리더니 내가 KBS에서 했던 설명이 그대로 화면에 문자화 돼 있었다.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신발가게가 하나씩 있었다. 하루에 열 켤레씩 팔렸다. 두 가게를 한 곳에 모았다. 하루에 백 켤레씩 팔렸다. 갈라져 있던 것을 단지 한 곳에 모았을 뿐인데 어떻게 10배나 더 팔렸는가? 가게가 떨어져 있을 때는 낱개의 가게였지만 한군데 모이니까 신발 촌이라는 시장 시스템이 형성된 것이다. 10배의 효과를 낸 것은 바로 시장이라는 시스템이 낸 효과다. 시스템 에너지를 줄여서 시너지 효과인 것이다. 시스템박사 지만원“ |
시너지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갑자기 장면이 바뀌었다. KBS 김상근 부장이 [뚝섬 무지개]의 초기 버전인 [멋]을 읽고, 키를 합격시켜준 소령, 물을 먹여 몸무게를 늘려준 대령, 생도 생활 중 독서를 많이 하라고 조언해준 교수, 베트남전에서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주었던 대대장을 수배했다. 소령 한 분만 해외로 나가셔서 찾지를 못했다. 진행자는 ‘서프라이즈’ 매너로 한 분씩 무대 위로 등장시켰다. 청중들이 매우 즐거워했고, 신기해했다. 그 후 이런 ‘서프라이즈’ 방송은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로 발전했다. 이 프로의 효시가 바로 내가 출현했던 ‘인생 이 얘기 저 얘기’ 프로였다. 94년 정월, 삼성그룹의 모든 국내외 간부들이 모이는 행사에 내가 초청되어 시스템 강의를 했다. 이후 나는 거의 모든 대기업들에 단골 강사가 됐다. 방송에도 자주 나가고, 신문 칼럼과 책을 많이 쓰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1999년 김대중의 햇볕 정책에 정면 도전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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