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 김현정에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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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5-17 12:39 조회7,5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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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김현정에 충고한다
5월 17일, 노컷뉴스에는 김현정과 민정기 전비서관 그리고 이번에 새로 뽑힌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조진태 사이에 전화 인터뷰가 소개됐다. 잊기 전에 제안할 것은 광주 인간들만 인터뷰 하지 말고 나와 인터뷰 하자는 것이다.
제목: 전두환 측 "광주가 왜 내 책임?" vs 5.18재단 "가소롭고 뻔뻔"
http://www.nocutnews.co.kr/news/4971152#csidxdd8791468ad0d0e9c1420db06a6b357
그녀가 청취자들에게 주입시키고자 했던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5.18은 전적으로 전두환이 주도했다.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도 그렇게데 말했다,
2. 헬기사격을 했다는 미국 보고서가 있다. 세계 최고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미국 문서의 권위도 부정할 것인가?
3. 지만원의 얼굴 영상 분석은 터무니없다. 지만원이 박남선 얼굴을 황장엽이라 해서 벌금 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제1항에 대해서는 김현정이 거짓말을 했다. 아래에 조선일보 최보식이 2016.5.16.에 이희성을 인터뷰 한 기사를 냈다. 전두환은 5.18 작전과는 사돈의 팔촌도 안 된다고 했다.
제2항에 대해 나는 김현정의 무식함부터 지적하고자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가방끈이 짧아 패러다임 학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Firsthand Information이고 다른 하나는 Secondhand Information 이다. 미국기관들이 한국에 와서 본국에 보고하는 내용들은 미국사람들이 현장에 가서 직접 습득한 정보 즉 Firsthand Information이 아니라 듣거나 읽어서 종합한 Secondhand Informatio이다. 미국이 터득한 휴전선 일대에 관한 정보는 주로 한국정부가 생산한 정보를 나름 분석하여 보고하는 것이다. 미국을 그토록 증오하는 인간들이 툭하면 기승전결도 없는 쪽지 하나를 구해 영문문서 자체를 발표하지도 않고 국민을 무시하면서 “이게 영어글씨다” 눈 앞에 슬쩍 대주고는 아전인수로 해석한다.
제3항에 대해 김현정의 유도에 따라 새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로 선출됐다는 조진태가 말했다. 내가 박남선 얼굴을 황장엽 얼굴이라 발표해 벌금을 받았다고 했다. 광주판사들은 공정한 판사가 될 수 없다. 떳떳하면 법에 명시된 관할권을 짓밟으면서 재판을 광주법원에서 하는가? 박남선의 엉터리주장을 인용한 법원은 광주법원이지 서울법원이 아니다. 민사재판은 광주가 불법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형사는 서울법원에서 한다. 마치 전두환 회고록을 막무가내 식으로 판결했듯이.
그러나 5.18기념재단이 박남선을 포함해 서울지법에서 진행하고 있는 형사소송에 고소자들로 내보낸 14명은 지금까지 모두 사기소송으로 밝혀지고 있다. 특히 박남선은 나로부터 사기소송 혐의로 고소를 당할 것이다.
아래는 김현정이 5.18작전 지휘를 전두환이 지휘했다는 데 대한 민정기 전 전두환 대통령 비서관과의 인터뷰 한 토막이다.
김현정:“그런데 그 당시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말이 있습니다. 이희성 씨는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 '법적으로 본다면 맞다. 명령권자는 대통령, 그러니까 최규하 대통령이고 계엄사령관 나로 이어지는 게 맞지만 그 당시 역학관계로 본다면 실력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고 모든 힘은 그로 집중돼 있었고 모든 눈이 그쪽의 시각에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전두환 씨의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라고 이분이 증언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세요?
민정기:가장 최근에 한 것이 2년 전, 3년 전에 각각 동아일보하고 조선일보에서 대문짝만 하게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는 분명하게 단호하다는 말을 몇 번 썼어요. 단호하게 내가 말한다. 전두환 사령관은 광주 사태에 전혀 책임이 없다. 그것이 지금 언론, 언론 하는데 대문짝만 하게 한 페이지 전체에 거쳐서 이희성 사령관 인터뷰 기사가 나왔어요. 거기 분명히 있는데 그런 건 안 보시고 그런 얘기는.
김현정:그분이 그러면 말씀이 그러면 이런 말씀도 하고 저런 말씀도 하셨나: 봅니다. 그렇다면 민 선생님. 선생님 보시기에는 옆에 계속 계셨던 분이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아무 책임이 없다. 정말 경험하거나 목격하지도 않은 일이다.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아래는 조선일보 최보식이 2016.5.16.에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잠시 게재됐다가 조선일보가 삭제한 글이다. 김현정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의식화된 존재인지 소름이 끼친다. 아래에 그 내용을 전재한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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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 수습되고 3개월 뒤 전두환이 대통령 돼… 안 그랬으면 光州 문제에 전두환 이름 안 나왔을 것."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1996년 재판 당시 광주 현지까지 내려가 조사를 벌였으나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없었어요." "(재판은) 내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게 진행됐소. 공판 과정에서 내게는 질문이 거의 없었소. 오직 전두환에게만 하고. 당시 정국을 총괄한 계엄사령관에게는 별로 질문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8에 대한 유감 표명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설(說)이 보도됐을 때, 그쪽 관계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광주 방문은 와전된 것이다. 5·18에 본인 책임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당시 희생자가 있었고 대통령이 된 뒤로 충분히 수습을 못 한 데 대해 아쉽다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그는 광주의 가해자로 잘못 인식돼왔다. 이는 사실관계에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본인이 가장 억울해하는 대목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광주 학살 주범'인데, 반성 없이 억울해하니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판단과 해석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 문제라면 기자(記者)로서 한번 확인해볼 필요성은 느꼈다. 1980년 당시 정국을 관장한 李熺性(92)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첫인상이 단아했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이 궁금하오? 하나하나 질문하면 답변 드리지. 늙어서 생각이 잘 날지는 모르겠소.'
나는 곧바로 본질로 들어갔다.
―당시 계엄사령관이라면 5·18 상황을 전체적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국방장관과 대통령께 주요 사안은 보고했지만 내가 全權을 쥐고 통괄했다고 할 수 있소.'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5·18과 관련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렇소. 계엄사령관이었기에 책임을 진 거요. 5·18을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 결과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소. 희생자와 유족이 많이 생기지 않았소. 국가적으로 이를 추스르는 차원에서 이들의 요구와 주장을 감안해야 하는 거요. 내가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그걸 피할 수는 없는 거요. 도의적 책임을 진 거요(8개월 복역하고 특별사면됨).'
―당시 국정 수반인 최규하 대통령도 도의적 책임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오. 군의 작전 상황이니 계엄사령관과 국방장관에게 있지, 군을 잘 모르는 대통령께서야 책임질 일이 아니오.'
―도의적 책임은 그렇고, 실제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5·18 당시부터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 주범'으로 전두환을 특정했습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계엄군 출동과 발포 명령을 그가 배후 조종했다는 게 통설입니다.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그렇다면 5·18에 전두환을 지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봅니까?
'광주가 수습되고 3개월 뒤 그가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오. 대통령만 안 됐으면 전두환 이름이 그 뒤로 나오지 않았을 거요.'
―전두환이 아니라면, 누가 5·18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겁니까?
'지휘 계통의 최고위에 있는 계엄사령관인 나와 국방장관(周永福)이오. 그래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소. 전두환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는 보안사령관이었고, 내 참모에 불과했소. 참모로서 내게 건의할 수는 있었겠지만, 작전 지휘 체계에 있지 않았소. 진압 작전에 개입할 수 없었소. 그는 광주에도 내려간 적이 없소.'
―적극적인 스타일인 전두환이라면 광주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오히려 한번 내려갈 만하지 않았습니까?
'현지 보안 부대를 통해 보고가 올라오니까 그도 광주 상황을 알고 있었소. 내려가 본들 뭘 하겠소. 부대장에게 격려금이나 건네주는 게 고작이잖소.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내게 보고하고 광주에 내려간 적 있소. 광주 현지 부대에 배속시킨 공수여단 격려차 간 것이오.'
―전두환이 육사 동기생 정호용을 통해 작전 지시를 했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데, 정말 군대 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요. 특전사령관도 광주에 파견된 자기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소. 작전 책임과 지휘권은 배속된 부대 지휘관에게 있소. 조언은 할 수 있겠지만, 이래라저래라 작전 지휘를 하는 것은 군법에 어긋나는 거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1980년 5월 21일 '자위권(自衛權) 보유 천명' 담화를 발표할 때 보안사 참모가 초안을 건네줬다'고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전두환의 5·18 개입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검찰 조사를 서너 번 받았어요. 꼭 밤중에 잠 안 재우고 심문을 했어요. 졸려서 정신이 몽롱해질 새벽에 진술서 서명을 받아요. 검찰이 신사인 줄 알았는데 그런 트릭을 써요. 그래서 보안사 참모인지 계엄사 참모인지 헷갈렸던 거요. 계엄사 참모였다고 하더군요. 설령 보안사 참모라고 해도 그런 건의를 해올 수 있는 거요.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오. 애초에 담화 발표 구상은 나 혼자서 한 거요.'
―왜 그런 구상을 했습니까?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다만 담화 내용에 대해 신경을 썼어요. 장차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봤으니까. 그래서 참모들을 불러 문안을 검토한 뒤 발표했소.'
―장차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예상했다는 건가요?
'재판 과정에서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은 자위권을 발포 명령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소. 그런 해석은 오버요. 공격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개인마다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권'이 있다는 것이오. 피동적인 것이오. 발포 명령과는 다르오. 더욱이 담화문에서 '자위권이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자위권이 있음을 경고한다'고 했소. 예방 목적이지, 자위권을 적극적으로 발동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소.'
―자위권을 천명한 담화 발표 뒤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됐습니까?
'실탄 지급은 일선 부대 지휘관 차원에서 이뤄지는 거지, 계엄사령관이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오.'
관련 재판 기록을 보면 '자위권 담화'가 있기 전에 실탄 발사가 이미 있었다. 5월 19일 시위대에게 포위된 계엄군 장교가 위협사격을 한 게 첫 발포였다. 20일 밤 광주역에서는 실탄 사격으로 4명이 숨졌고, 21일 담화 발표가 있기 전에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누가 발포 명령을 한 겁니까?
'1996년 재판 당시 광주 현지까지 내려가 조사를 벌였으나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없었어요.'
―총 맞은 시민들이 있는데 발포 명령자가 없다는 게 과연 말이 됩니까?
'전투라는 게 우발적이고 부화뇌동해서 일어날 수도 있소. 겁에 질려 있는 사병들이 막 쏘고, 어디서 날아온 총알에 누가 맞았는지도 가릴 수 없었소. 한밤중에 아군끼리 교전도 있었소. 다만 5월 27일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은 적극적이었소. 도청 지하실에 TNT와 수류탄 등 무기가 있었고 무장한 주동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당시 북에서 이를 이용 안 할 리가 있었겠소.'
―당시 담화문에 '상당수의 다른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광주에 잠입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근거가 있는 겁니까?
'첩보는 있었지만 확증을 잡지 못했소. 확증이 없는데 어떻게 얘기하겠소. 다만 무기고를 털고 시위대를 조직적으로 이끄는 등 민간인이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었소.'
―광주가 수습된 뒤 왜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뒤처리와 민심 위무(慰撫)가 시급해 그런 조사에 착수할 수 없었소.'
―공수부대를 투입해 초기에 과잉 진압을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요?
'당시 공수부대는 소요 진압 임무가 있었소.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져 있는데 학생들이 들어가겠다며 전남대 정문에서 군인들과 충돌한 게 발단이었소. 학생들은 가방에 넣어온 돌을 던졌고 군인들이 무방비로 맞은 거요. 그 뒤 시내에서 학생들이 집결하자 군인들이 뒤쫓아가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소. 이를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하다고 흥분한 거요. 어떤 세력이 '경상도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며 악성 루머를 퍼뜨렸소.'
―광주가 수습된 뒤인 6월 초 정부 합동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마치고 '초기 진압 작전의 과오 책임을 물어 당시 현장 지휘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게 맞습니까?
'그건 맞소. 하지만 내가 반대했소. 현장 지휘관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피해자가 생겼으나 그건 앞서 말한 대로 불가피한 상황도 없지 않았소. 나는 지금도 작전 실패는 아니라고 봐요.'
―숱한 사상자를 낳은 국가적 비극을 초래했는데?
'한 사건을 이쪽·저쪽, 위·아래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오. 광주 사태가 불처럼 타 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습니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그 나름대로 진실 규명이 이뤄졌다고 봅니까?
'내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게 진행됐소. 공판 과정에서 내게는 질문이 거의 없었소. 오직 전두환에게만 하고. 당시 정국을 총괄한 계엄사령관에게는 별로 질문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오
최보식의 李熺性(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全斗煥은 12·12와 상관있고 5·18과는 無關"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6722&C_CC=AZ
2018.5.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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