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축에도 못 드는 이명박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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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3-26 00:39 조회7,88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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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축에도 못 드는 이명박의 최후
전두환 인격과 이명박 인격
사라져 가는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욕을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은 자연인이 아니라 공적 존재이고, 그 중에서도 국가의 운명을 5년 동안이나 주물렀던 최고급 공인이었다. 그가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감옥에 끌려가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지만 그 개인이 감옥에 끌려가는 것은 정해진 업보일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가장 쉽게 표현하려면 전두환과 대조해보면 된다. 전두환은 47세의 젊은 나이로 4성 장군들도 다루지 못하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1979년 10월 26일 밤 11시, 그가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김재규의 혁명이 성공했을 것이다. 그가 12월 12일 정승화를 잡아넣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그 두 사람에게 넘어 갔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바로 그 순간 대한민국은 무주공산이었다.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해 모든 각료들이 누구에게 권력이 쥐어져 있는가에 대해 눈알만 바쁘게 돌리고 있었다. 아무도 구하려 하지 않은 국가를 전두환 혼자서 구한 것이다.
측근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자의 말로
전두환은 그래도 선배 장군들에게 예의바르고 깍듯했다. 후배 장교들의 입장도 자상하게 살폈다. 선배장군들이 끌어주고 후배들이 추대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통령이 됐다. 그는 재벌들의 비자금을 통치자금으로 떳떳하게 받기는 했어도 이명박처럼 몰래몰래 숨어서 생쥐처럼 도둑질은 하지 않았다. 퇴임해서도 그는 아랫사람들을 자주 불러 모아 정을 나누었다. 부하들을 서운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배신하는 부하들이 없었다. 그에게 비자금을 주었다고 폭로하는 사람도 없다.
거짓과 사술의 화신 이명박
반면 이명박은 온갖 사술과 거짓말로 국민을 속여 대통령 자리를 쟁취했다. 다스와 BBK는 그의 것이라는 증거들은 2007년 경선 시기에 다 들어났었다. 그런데 검찰도 그를 호위했고, 특검 정호영도 그를 호위했다. 그렇게 숨겨준 비밀이 어째서 12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들통이 났는가? 그의 가신들로 알려졌던 사람들이 적극적인 방법으로 검찰에게 제보를 했기 때문이다. 영포빌딩 지하에 비밀자료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가신의 제보 아니면 검찰이 알 수 없었다. 그 수많은 가신들이 왜 이명박을 해코지했을까? 이명박이 의리라고는 눈 꼽 만큼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써먹히고는 소모품처럼 버림당했기 때문에 인간적 배신감을 느껴서일 것이다.
최측근 핵심참모조차 배신하는 인생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이명박은 종로에 출마해 이종찬, 노무현을 제치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런데 그의 선거 핵심 참모인 김유찬이 이명박의 불법선거자금을 폭로했다. 이명박 측근들이 김유찬에게 돈을 주고 해외로 내보냈더. 그리고 이명박은 김유찬으로부터 받은 문서를 흔들어 보이면서 “국민 여러분 저는 하나님을 믿는 장로입니다. 저는 깨끗합니다” 이렇게 쇼를 하고 눌러앉았다. 그런데 해외로 도피했던 김유찬은 무엇이 불만이었는지 귀국해서 다시 폭로했다. 이로써 이명박은 1999년 대법원에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고 미국으로 갔다.
이명박의 병역면제 기록은 코미디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은 그야말로 거짓 수법으로 승리했다. 당시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병역의혹과 출생의혹 그리고 다스 및 BBK였다. 그의 병역비리는 의혹을 넘어 확실해 보였다. 1961년 그는 고대 1학년생이었다. 그때 그는 신체검사에서 갑종 판정을 받았다. 1963년 3학년 때 그는 학생회장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고, 당선되었다. 그 왕성했던 시기에 어쩐 일인지 그는 기관지확장증 고도와 축농증 판정을 받았다. 2년의 시차를 두고 갑종에서 중환자로 돌변한 것이다. 그의 왕성한 활동과 기관지확장증 고도 판정은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다. 기관지 확장증 고도면 해소기침으로 인해 정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정주영을 이긴 술의 천하장사가 기관지확장증 고도 및 폐결핵 판정을 받다니
1964년 그는 한일국교 수교를 반대하는 6.3사태의 한 주모자였다. 6.3사태는 당시 인혁당을 결성한 간첩 김영춘이 배후조종했다. 그는 도피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3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가난하다면서 어디에서 났는지 비싼 공탁금을 걸고 출소했다. 1965년 그는 다시 기관지확장증 고도와 폐결핵 판정을 받고 군입대를 면제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현대건설에 취직했고, 강릉에서 있었던 신입사원 환영파티에서 정주영을 제치고 술의 장사가 됐다. 술의 천하장사와 기관지확장증 고도 및 폐결핵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해와 달은 그를 중심으로 돌았다. 거짓으로 쓴 ‘신화는 없다’라는 그의 책에 모두 다 매료된 탓이었다.
‘신화는 없다’는 거짓투성이, 책 읽는 실력들이 왜 그런가?
사람들은 그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 매료되어 그를 신으로 여겼지만, 내 눈에는 그 책이 졸렬한 거짓말들로 가득했다. 2009년, “내 딸을 100원에 팝니다”라는 시로 일약 유명해진 위장 탈북자 장진성이 2011년에 그의 탈북스토리가 담긴 “시를 품고 강을 넘다”(출판사: 조갑제닷컴)를 냈다. 그 여파로 그는 일약 세계적인 문호로 수직상승했다. 많은 국민들이 그 책을 보고 감탄하고 감동을 받고 눈물도 흘렸다하지만 내가 보니 그의 탈북스토리는 물론 그의 학력과 이력 모두가 허위였다. 이명박의 경우도 장진성 케이스와 흡사했다.
노비 이름으로 기록된 호적 없애고 호적 세탁해 양반이라 선전
그는 ‘신화는 없다’에서 아버지 이름이 이충우이고, 유교풍의 양반 스타일이라고 자랑을 했다. 아버지 이충우는 포항의 땅뙈기를 두 큰 아버지들에 내주고 혼자 1935년 일본으로 갔다가 잠시 와 어머니 반야월 채씨와 결혼을 해서 일본에 간 후 6남매 모두를 일본에서 낳아 해방이 되자마자 귀국했다고 썼다. 그런데 그가 없애버린 구호적을 보니 이 모두가 거짓말이었다. 아버지 이충우의 본명은 덕쇠(떡쇠의 표기말)였고, 1939년에 일본에서 이충우로 개명했다. 그의 큰 아버지는 차례로 경특(경디기의 표기말), 무특(무디기의 표기말)이었고, 이런 이름은 일본이 노비를 해방시켜 호적을 만들어 줄 때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노비신분 자체가 문제될 수는 없다. 문제는 자기측 가문이 유교풍의 양반이었다고 강조한 데 있다. 일본에는 1935년에 간 것이 아니라 1927년에 갔다. 이덕쇠는 1907년생이다. 이명박은 아버지가 1935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썼지만 1935년에는 이미 아이가 셋이었다. 이명박은 아들의 이름은 ‘상’자 돌림이고 딸의 이름은 ‘귀’자 돌림인데 유독 자기 혼자만 태몽 꿈에 따라 ‘명박’이라 했다 하지만 이명박의 여동생 이름은 “말분”으로 기록돼 있다. 6남매의 이름은 ‘귀선’(1930), ‘상은’(1933), ‘상득’(1935), ‘귀애’(1938), 명박(1941) ‘말분’(1945) 이다.
막내 남매 취급 못 받고, 돌림자 부여받지 못한 이단 가족
그런데 호적을 보면 4째인 ‘귀애’는 포항에서 출생했고, 명박과 말분은 일본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포항에서 넷째 아이를 분만했을 때, 귀선은 9살, 상은과 상득은 각각 6살, 4살이었다. 귀선이와 상은이가 학령기였던 것이다. 아마도 첫째와 둘째를 포항 학교에 다니게 하기위해 포항에 눌러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은 자서전에서 ‘말분’을 ‘귀분’이라고 속였다. 이명박과 막내인 그와 여동생만 ‘상’자와 ‘귀’자 돌림자를 부여받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신화는 없다’를 보면 그의 어머니 채태원씨는 두 막내들을 잔인할 정도로 천대했다. 이 두 이이들은 학교도 가지 못하게 하고 이 둘만 포항에 남겨두고 위의 네 아들 딸만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던 것이다. 이명박은 ‘신화는 없다’에서 배를 너무 곯았고, 견디다 못해 여동생을 데리고 서울 어머니에게 찾아왔다고 썼다. 제 속으로 난 막내 남녀라면 이렇게 천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일 것이다.
걸림돌은 모두 감옥 보내
여튼 이명박은 이러한 사실을 폭로한 나를 제물로 하여 두 개의 의혹을 세탁했다. “유명한 군사평론가가 이런 말 했다가 감옥갔다”는 반복적 보도는 그의 몸에 달라붙은 먹물을 세탁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4개월 반 구치소에 있다가 투표 다음날 출소했다. 그를 괴롭힌 김경준은 8년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또 다시 그의 비리를 폭로했던 김유찬 역시 대선기간에 구치소에 들어가 1년 2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를 괴롭힌 모든 사람들이 감옥에 간 것이다. 이것이 당시 이명박의 힘이었다.
이명박은 광운대학교에서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는 첨단산업으로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랑했고, 당시 명함에도 이명박은 BBK 회장으로 기록돼 있었다. 2007년 나는 당시 검찰 특수부에 DAS와 도곡동 땅과 가평별장이 이명박 것이 맞다고 고발하여 고발인 조사까지 받았고, 이명박 자서전 ‘신화는 없다’가 순 거짓으로 쓴 책이라며 발행-배포 중지 가처분신청을 냈었다. 이명박의 학교 후배라는 검사 두 사람, 서울중앙지검의 윤웅걸 부부장 검사 그리고 성남지청의 최재혁 검사의 협공으로 나는 4개월 반 동안의 옥살이를 했다. 그런데 그들이 트집잡은 이 자료는 선관위의 자문과 사전 검사를 받은 것이었다. 선관위는 사실에 입각하여 6하 원칙에 의해 쓴 것이기 때문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이명박의 힘은 법 위에 있었다. 그리고 언론은 이명박에 쏠려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그토록 열성이었던 사람들의 간교한 얼굴들이 새삼 이명박 얼굴에 오버랩 된다.
‘인두겁을 쓰고 이럴 수가 있느냐’ 울부짖던 김경준 모친
이명박은 미국에서 김경준 집에서 먹고 자고를 식구들처럼 오래 했다고 한다. 김경준 모친이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내 식구처럼 한집에서 오랫동안 숙식하였으면서 짐승이 아닌 이상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이명박의 아들이 아버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울었고, 그 부인도 울었다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보았을 김경준, 에리카 킴 그리고 김경진 모친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07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의 변을 당해 주위로부터 따가운 시선들을 받았던 내 아이들과 내 가족의 반응은 매우 싸늘했다. 단지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명박의 비도덕성을 문제 삼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던 이명박이 잘사는 모습을 보고, 나는 하늘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2018.3.26.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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