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왜 '빨갱이'로 불렸나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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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18-02-15 21:59 조회5,655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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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왜 '빨갱이'로 불렸나
1987년 쌀쌀한 겨울 날씨의 평양 주석궁에 김정일, 김용순, 황장엽, 허담, 네 사람이 수구회의를 하면서 허담이 화를 내고 있었다. "그 간나가 양쪽에서 받아먹고도 입을 꼭 다물고 시치미를 떼고 있슴메". 그 때 김일성이 나오면서 이 소리를 듣고는 한마디 한다. "그래, 두 군데서 받아먹고는 이렇게 수염을 씻더란 말이지, 하하하" 김일성은 껄껄거리며 수염을 훑는 시늉을 했다. 수염을 훑는 것은 시치미를 뗀다는 표현으로 돈을 받고도 모른 척한다는 뜻이었다.
독일 통일 후에 동독의 슈타지 문서 때문에 서독에서 암약하던 동독의 간첩들이 밟혀졌던 것처럼, 평양 주석궁 깊숙한 곳에서 일어났던 최고 권력자의 비밀스런 대화들이 햇볕 아래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황장엽의 망명 때문이었다. 위의 대화에서 양쪽에서 돈을 받고 시치미를 떼었다고 거론되는 주인공은 바로 김대중이었다. 양쪽이라는 것은 북측 라인과 조총련 라인, 양쪽에서 모두 돈을 챙겼다는 뜻이었다.
김대중은 '빨갱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던 20대 후반부터, 그리고 국회의원과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그의 이름에는 항상 '빨갱이'라는 접두사나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그리고 그 역시도 정치 생활 내내 정보부로부터 빨갱이 공격을 받고 있는 피해자 역할을 자임했으며, 빨갱이 딱지를 교묘하게 정치의 자양분으로 삼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김대중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시작해서 인민위원회, 신민당 조직부장, 민주청년동맹(민청), 보도연맹, 등의 순서대로 길을 걸었다. 이 코스는 대체로 해방 후 남한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좌익들이 밟아가던 빨갱이 정규 코스였다. 그러다가 6.25 와중에는 국군 현지 사령관이 만든 목포해상방위대라는 친목단체에 몸을 담았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을 증명할 증거는 없었다.
김대중이 참가했던 단체들의 내력은 이렇다. 신민당은 후에 공산당 등과 좌익 3당이 합당하여 남로당이 되는 모체의 하나였고, 민청은 공산 계열의 행동대원이 모인 단체로 대구 10월폭동을 주도하던 극렬 극좌단체였다. 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을 모아 만든 단체로, 6.25가 터지고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이들은 돌변하여 경찰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다가 집단 처형되기도 했던 비운의 주인공들이었다.
김대중의 장인 차보륜은 지역의 유력한 우익인사였지만, 김대중은 좌익정당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과 민청 목포시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아 신입 맹원들을 포섭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교양과 교육을 시키는 직책을 맡을 정도로 열성적인 좌익 골수분자였다. 장인이 그를 호출해 좌익들과 손을 끊도록 수차례 명령하고 호통 쳤지만 김대중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1946년에 좌익들이 일으켰던 10월폭동의 여파는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이 여파가 목포에 도달한 것은 10월 말이었다. 10월 31일 목포에서는 경찰서와 파출소가 습격당하여 파출소가 방화 소실되고 경찰관들이 피살되었다. 안기부의 자료에 따르면 이 때 김대중은 민청 목포시 부위원장으로서 이 폭동을 배후 조종했다. 목포경찰서에 구속 수감되었던 김대중은 우익활동을 하던 장인의 신원보증으로 좌익 활동을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방면되었다.
김대중은 해운업에 손을 댔고 서울에 수금하러 갔다가 6.25를 맞았다. 김대중의 주장에 따르면 서울에 며칠 숨어 있다가 걸어서 목포까지 내려와 공산 치하의 목포에 숨어 있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수감자들이 한 트럭씩 실려 나가 사형을 당하는 혼란을 틈타 수용소를 탈출하였다. 인민군에게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는 주장은 순전히 김대중 버전이다.
그러나 다른 주장도 있다. 1995년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한국어신문 워싱턴투데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김대중을 체포한 것은 인민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이었고, 김대중은 처형 대상자로 분류된 보도연맹원이었다. 위험인물로 분류된 보도연맹원들은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 사살하고 바다에 버려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친구가 빌려준 명찰 덕분에 '호명'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김대중에게 명찰을 빌려준 친구의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김대중과 빨갱이와의 인연은 질기게도 이어진다. 1967년에 국회의원 선거 기간에 정태묵이 그를 찾아와 선거운동을 도왔다. 정태묵은 김대중의 목포상고 1년 선배로 김대중이 신민당 조직부장 시절 공산당원으로 김대중과 함께 좌익 활동을 했던 이였다. 그러나 결국에 정태묵은 목포 앞 임자도를 무대로 지하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간첩단의 주범이었다.
1972년 지병치료차 일본에 왔던 김대중은 배동호, 김재화, 곽동의, 등을 만났고,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다시 만난 이들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회의(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들 재일동포들은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종북인사들이었고, 곽동의는 북한에 입북하여 공작교육을 받은 간첩이었다. 한민통과 김대중은 조총련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았고, 한민통은 대한민국 파괴 활동에 나선 단체로 조총련의 사주를 받는 단체였다. 김일성과 허담이 '양쪽'에서 돈을 받았다고 했던 발언 중 한쪽은 이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다.
1978년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판시했다. 한민통 사건은 중앙정보부에 의한 김대중 납치 사건을 불러 일으켰고, 한민통 사건으로 1981년 대법원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김대중은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였다. 이후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후에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사건의 재심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주사태 건은 전두환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었지만, 한민통 건은 뒤집을 수 없었다. 재판부는 김대중을 '반국가단체 수괴'로 판시하여 사형을 선고했던 1980년의 판결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1985년 2월 동교동의 김대중 자택 지하실에는 두 사람이 마주앉아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대중 앞에 마주앉은 사람은 전 국회의원 이철이었다. 김대중은 이철에게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극심한 계급적 갈등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며 한 시간 동안 이철을 설득했다. 이철은 그 때 김대중이가 자기를 공산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1997년 대선 당시에는 북한 측에서 김대중의 측근들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냈다. 안기부에 신고 된 편지들의 내용은 공통적으로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요즘 테레비젼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꼬 플라자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약소했습니다. 선생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20만 딸라 밖에 보탬해 드리지 못한 것을 지금도 괴롭게 생각 합니다" 이 편지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알아서 하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불륜을 남편에게 폭로하겠다는 사기꾼의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998년 2월 '반국가단체의 수괴'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2000년 6월 15일 김대중은 평양에서 반국가단체의 수괴와 포옹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김대중이가 자행했던 ‘좌익질’ 중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였다.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타고 김정일은 핵을 만들었다. 두 사람에게는 가문의 영광이었지만, 악마를 친구로 사귀었던 대가는 오롯이 남한의 국민들과 북한의 인민들에게 돌아왔다. 남한 국민들은 핵 위협에 시달리며 조공을 끊임없이 바쳐야 했고, 북한의 인민들은 김대중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철조망 안에서 끊임없이 고통의 신음을 토해야 했다.
김대중은 학대 받을수록 쾌감을 느끼는 변태였을까, 그렇게 위협을 당하면서도 퍼주기를 멈추지 못하다니. 뼛속 깊숙이 감춰진 빨갱이 본능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김대중은 전문적인 빨갱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20대에 귓속으로 흘려들은 '진보'라는 말 때문에 좌익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해방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젊은 날의 김대중은 감상적 빨갱이였다.
그러나 감상에서 벗어나 이성적인 인간이 되고 나이가 들어 우익이 되는 시기에도 김대중의 좌익 본능은 멈추지 못했다. 김대중의 수수께끼는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푸는 열쇠는 황장엽이 가지고 내려왔다. '양쪽에서'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 김대중은 김정일의 낚시에 코를 꿰인 것이다. 그 순간부터 김대중은 김정일의 운명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하는 공동운명체가 되었고, 김정일과의 '허수아비'가 되었던 것이다.
종북의 몸통, 종북의 시초가 김대중에게서 출발한다. 북한에는 할 말도 못하고, 북한의 지령대로 움직이는 북한의 꼭두각시들, 그들도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받아먹었기 때문이다. 이석기 등은 김대중의 자식들이었다. 김대중은 '제비'에게 불륜 폭로를 협박당하며 사기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바람난 유부녀였다. 햇볕정책은 북한에서는 태양정책으로 불린다. 남반부로 하여금 민족의 태양을 우러르게 만드는 태양정책, 그 정책을 충실히 받들었던 사람이 김대중이었다.,
우파의 대표논객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게시판에는 '역적 김대중'이라는 코너가 만들어져 있다. 지만원은 김대중을 칭하여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파의 또 다른 대표논객 조갑제는 그의 저서 '김대중의 정체'에서 김대중을 '어둠의 세력'으로 칭하였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자 본색을 드러내 김정일 정권에 이롭고 대한민국에 불리한 일들만 골라서 했다고 평했다. 황장엽은 2001년에 쓴 보고서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김정일과 깊이 결탁한 관계' '김정일에게 발목이 잡힌 사람'이라고 하였다.
2012. 06. 23.
- 拙著 '대한민국의 far and away'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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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true님의 댓글
진리true 작성일
<빛과 흑암>
인간의 존재가 타락하는것은 자신의 마음이나, 타인의 마음에 종살이하는 결과이다.
인간의 속(마음=생존본능)에서 나오는 것은 빛(신의 진리)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일회성 피조물로서, 빛(신의 진리=생명력)을 받아야만 살아가는 존재이다.
신명난다는 말과 같다.
신이 인간에게 "생명의 빛(진리)"를 넣어주어야 생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생각(이념)이나, 타인의 사상을 받아들여,
오히려서 종살이로 살아간다.
그것은 그 사람과 동반 자살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김대중이 만난 사람들은 한국사회를 "붉은 혁명이라는 과격성"에 편승하여 "자신의 세상을 만들려는 야망"이었다.
모든 정치가들이 꿈꾸는 망상이 그것으로, "만인지상-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탐욕과 교만성"이다.
세상의 정복자가 되려는 망상들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생명가치를 달성한다고 주장(왜곡)한다.
그러나, 창조신은 인간의 마음을 "무지(흑암)으로 규정"하였다.
창조신이 넣어주는 빛(진리)이 없다면? 모두가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
박근헤는 자신의 무지로 "창조경제라는 망상"을 정책으로 추진하다가 탄핵되었다.
인간의 정체란, 육체를 가진 본능적인 동물 활동으로 짐승의 속성을 동시에 소유하고 태어난다.
이에 대하여 구원관이 필요한것이며, 진리를 심믄 것이었다.
그래서 물(죄성의 사망세례)와 성령(신의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교훈한 것이 메시아의 복음이다.
인간의 속(마음=생존본능)에서 나오는 것은 흑암(죄성의 창조와 반복성)이다.
매일을 자고 일어나도 여전하다.
평생을 살아도 하늘의 도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탄한 것이 석가모니, 공맹자, 소크라테스였다.
그것을 가장 작은 나라, 유대국가에 나타난 메시아가 단칼에, "인간의 정체성과 구원목적"을 갈파하였다.'
그러므로, 인류는 생명의 빛을 보았고, 죽지않는 구원론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온 것이다.
구원론이 없다면?
인류는 벌써 멸종하고도 남았다.
아무리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병폐가 삶을 제한해도, 소망을 가진 것이 "신의 빛(구원의 진리관)"이다.
김대중은 "신의 빛(진리)" 기독교 종교인들을 통하여 받고도 깨닫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태어나지 않음만 못했다는 저주-에언을 들었던, "가료-유다의 반복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