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사진으로 보는 5.18 현장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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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1-31 12:03 조회6,8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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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 사진으로 보는 5.18현장 역사
1980.5.18. 전남대 공수부대 집결지를 공격하는 순간에서부터 5.24. 사라질 때까지 북한특수군이 남긴 족적)
1980년 5월 18일(일) 오전 10:30분 250명의 날랜 청년들이 대학생으로 위장하여 전남대 정문을 경비하고 있던 공수 제7여단 35대대 장병 20여명을 향해 도서관에 들어가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시비를 걸었습니다. 호남출신 대대장 권승만 중령이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귀가하라 마이크로 종용하던 중 북한특수군은 가방에 준비해온 돌멩이를 던져 7명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당시 전남대학에는 7공수 35대대 병력 400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계엄령과 예비검속, 공기조차 얼어붙었던 그런 날 감히 공수부대 집결지를 찾아가 공수부대를 공격할 250명의 대학생 그룹, 남한에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공수부대가 반격에 나서자 이들은 공수부대 요원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금남로 및 충장로로 달려가 공수부대가 여성의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 청소하러 왔다, 벌써 수십 명 죽었다 등 준비된 유언비어를 살포하면서 군중을 많이 모으기 위해 파출소와 차량들에 불을 질러 연기를 냈습니다.
4명씩 1개조가 되어 골목들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많은 군중으로부터 매타작을 당하자 5월 19일부터는 집단으로 집합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과부적인 군중들을 향해 집으로 돌아가라며 선무 차원의 빈말들만 반복했고, 이에 군중은 막대기와 가위 도끼 등을 든 선동꾼들에 지휘에 따라 공수부대원을 조롱했습니다. 가위 끝을 눈앞에 접근시키기도 했고, 도끼로 철모를 툭툭 내려치면서 머리를 뽀갤까 조롱을 해도 부대원들은 공포감을 삼키면서 눈동자 조차 움직이지 않고 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계엄군을 향해 버스들이 지그재그 돌진을 하여 공수대원을 깔아죽이고 부상을 입혔습니다.
북한특수군은 군중을 선동하기 위해 도끼들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외진 곳에서는 이 도끼로 광주시민을 살해해 놓고 공수부대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는 정치공작을 감행하였습니다. 정부기록에는 자상과 타박상이 22명이나 되었습니다.
5월 20일에는 광주MBC도 불탔습니다. KBS와 세무서도 불탔습니다. 한국 기자들은 촬영취재가 금지되었습니다. 모든 사진들과 동영상들은 북한공작단만 찍었습니다. 인터넷에 나와 있거나 각 언론사에 보관된 사진들은 북한집단이 사라진 5월 24일 오전까지의 사진들입니다. 북한군이 사라지자 사진 찍기도 사라졌습니다. 5월 24일 오후 북한군이 사라진 이후부터 활동한 5.18 최고의 유공자들을 찍은 사진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5월 20일과 23일 2차에 걸쳐 힌츠페터가 광주에 왔습니다. 사진을 쵤영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북한 쵤영진이 찍은 사진들을 가져 간 것입니다. 북한이 쵤영한 사진을 세계에 발표하려면 외국기자의 상표가 필요했습니다. 힌츠페터는 이미 김대중이 결성한 반국가단체인 한민통과 내통돼 있었습니다. 1975.10.3. 포천 역사봉의 장준하 추락장소 부근 산에서 찍은 사진 속에는 힌츠페터, 영화 '택시운전사' 주인공 김사복, 한민통 소속 함석헌이 들어있습니다. 장준하는 여기에서 1975.8.17. 추락해 사망했습니다. 한국기자들의 취재는 철저히 차단됐습니다. 5월 21일부터 벌이는 작전에는 비밀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5월 21일 아침부터는 작전 형태가 100% 군사작전으로 활동개념이 돌변하였습니다. 20사단은 전투력 높은 정규사단입니다. 20사단 차량부대가 08시에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정보는 1급 비밀입니다. 그런데 광주 시위대라는 300명이 그런 비밀정보를 알아냈습니다. 매복을 하고 있다가 정확히 08시가 되지 사방을 가로 막고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했습니다. 이 때 피탈된 장비는 M60 기관총 2정, M16소총 4정, 무전기 16개, 판초우의 16개, 지도 20매, 철모 6개 등 다수입니다. 이들은 이 14대의 지프차를 타고 14km 떨어진 군납업체 아시아자동차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위 사진에서 맨 앞 차량이 9번, 1-8호 차량은 그 앞에서 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9호차량 탑승자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광주의 기층계급(양아치 껌팔이 식당보이 등)이 아닙니다. 광주는 늘 주장합니다. 5.18은 기층계급이 주도했다고.
조직화된 젊은 집단 600명은 21일 09시에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집결했습니다. 또 다른 300명이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이들은 차량키를 빼앗아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몰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의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불과 4시간 만에 5,403정의 총기와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한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습니다.
탈취된 무기는 이렇게 분배되었습니다.
카빈 실탄과 M1 실탄을 탄창에 장입하여 전투준비를 합니다.
한 사람은 약실을 검사하고 다른 사람은 방아쇠 기능을 점검하여 사용가능한 총기를 골라 릴레이로 전달합니다.
사용가능한 총기를 차량에 탑승한 군병들에 릴레이로 전달합니다. 총기에 훈련돼 있고, 지휘체계가 확립돼 있습니다.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 더미 속에서 작업할 사람, 예비역들에서도 없습니다. 두 사람이 사용가능한 수류탄을 골라 다른 용기에 저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5월 21일 밤, 도청에 쌓인 다이너아이트로 2,100발의 폭탄을 조립했습니다. 한국의 군출신들 중 이런 것을 할 사람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합니다. 이를 해체한 사람은 계엄사 5급 문관 배승일인데 당시 전라도 계엄사령부에는 그가 유일한 해체기술자였습니다. 보조원 2명 데리고 해체하는데 이틀 걸렸습니다
총기에 훈련되고 경찰방호복을 유니폼으로 착용한 상태에서 지휘를 받고 있습니다. 광주의 기층계급이 아닙니다.
장갑차를 운전하고 장갑차를 유도합니다. 작전 상황인 것입니다. 역시 광주 껌팔이들이 아닙니다.
총기를 탈취한 다음 차를 타고 작전하러 나가고 있습니다
육중한 M16 유탄발사기를 거뜬히 한 손에 들고 가슴에는 400m까지 날아가는 유탄(수류탄 효과)을 유탄주머니에 가득 넣고 있습니다. 광주의 공돌이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찾아낸 501명의 광수들 중 맨 먼저 찾아낸 제1광수 김창식(북한 농업장관)입니다. 이 자가 낀 장갑은 석면장갑, 붉게 단 기관총 총열을 갈아 끼기 위한 특수장갑입니다. 이런 폼은 흉내조차 내기 어렵습니다,
군용트럭에는 부대 표시가 없습니다. 새 차라는 것입니다. 타이어로 방호벽을 만든 요새 차량입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제1광수입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 고립되어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려다 장갑차와 버스가 돌진하고 전남의대병원 옥상 등에 설치된 캐리버50 기관총을 위시하여 사방으로부터 카빙총 등의 사격을 받고 5월 21일 오후 5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습니다. 5월 22일부터는 그 도청을 북한특수군이 장악하여 작전 지휘부로 사용하였고, 아래 사진에서처럼 광주도청 정문은 시민들의 접근이 금지되었습니다.
5월 22일부터 도청을 점령한 세력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위 사진에서와 같이 숙달된 모습의 북한군이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은 ‘을’의 신세로 밀려났습니다.
붉은 표식을 한 부분은 무전기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날, 이들은 유니폼을 입고 북한식으로 총을 거꾸로 메고 한 사람의 지휘를 받고 있습니다. 도청 내부입니다.
지프차를 타고 작전 나갔다가 도청으로 돌아오는 팀을 향해 무전기를 쥔 손을 쭉 뻗어 지휘를 합니다.
학원 강사 김중식이 도청으로 잡혀 갑니다. 이 사람은 북괴군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경찰이나 안기부 프락치라는 의심을 받은 것입니다. 5월 23일입니다.
해남 농민회 출신 김인태가 황장엽 팀에 의해 도청으로 체포돼 갑니다. 이 사람 역시 머리에 권총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프락치로 의심 받아 도청으로 잡혀 가 살해당한 사람들, 이들 말고도 꽤 있을 것입니다.
모든 시체는 북한군이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도청으로 옮겨집니다. 장성택(제199광수)이 이끄는 5명 1개조가 도청 안에서 북한군 시체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중상을 입고 시내 병원에 실려 간 북한군을 북한군이 집중 보호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체는 일단 도청으로 와서 북한군에 의해 북한군인지 광주사람인지 분류됩니다. 날씨가 더워 부패한 시체에서 악취 액이 흐릅니다. 그래서 모든 시체는 일단 비닐로 감습니다. 여기가 시체 포장 공장인 것입니다.
관에 포장된 시체들은 도청 공간에 집결시킵니다. 시체 창고입니다. 비닐이 많이 널려 있습니다.
시체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광주사람들을 위해 “사망자 명단”을 써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광주사람들이 아니라 다 북한사람들입니다. 붉은 점 표시를 한 사람들은 지금 북한에 살아있고, 노란 표시를 한 사람들은 지금 탈북해서 남한의 유명인들이 되어 있습니다. 이 사진은 모략 및 선동 목적으로 기획된 무대사진입니다. 시체가 너무 많아 명단에 의해 고지하고 있다는 것을 극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광주가 “피의 목욕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기획품인 것입니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시체 장사를 시작합니다. 차량 양편에는 광수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21일 밤 광주교도소를 6회에 걸쳐 공격하다가 대부분의 전투력을 상실한 북한원정대는 마지막으로 시체를 싣고 다니면서 광주시민을 상대로 “싸우자”고 호소합니다
시체를 가지고 거리로 운전해 다니며 선동을 한 후 저녁때가 되자 작전본부인 전남도청으로 돌아옵니다.
도청 일대에서는 관을 놓고 통곡하는 쇼를 벌이고, 그 장면을 촬영하여 내보냈습니다. 이 관들 중에는 북한군의 관도 있을 것입니다.
선동 선전 효과를 높이기 위해 관을 도청 시체창고에서 분수대로 옮깁니다. 여기에 나온 관들은 광주사람들입니다. 북한 시체를 담은 관은 별도 처리되었습니다,
분수대로 나와 진열된 관 앞에 가득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데려온 공작용 인원들입니다. 어린 애도 있고, 안 노인도 있습니다. 기획된 세트사진입니다. 붉은 점이 찍힌 사람들이 광수들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얼굴이 너무 흐려 식별이 불가능합니다. 총알이 날아다닌다는 위험한 광주에 어린애들과 안노인을 데리고 나와 앞에 세우는 행위는 광주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닐 것입니다. 좌측에 양손을 허리에 얹은 사람은 간첩 손성모입니다. 김대중이 그를 감옥에서 꺼내 북으로 보냈습니다.
역시 선동 목적으로 촬영한 세트장입니다, 도청 앞 분수대에 내온 관들은 선동선전 목적으로 진열된 것입니다.
북한 공작단은 복면을 하고 시내에 다니면서 우리처럼 날랜 사람들과 함께 “계속 투쟁하자”고 설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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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광주사람들은 이미 외지인들을 의심하였고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위 사진은 5월 24일 오전 전남도청 정문을 촬영한 것입니다. 광주시민들이 도청에 접근하지 못하게 통제되고 있습니다, 확대경으로 보면 원의 안쪽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청에 남아있던 마지막 관을 어디론가 싣고 갑니다, 중요한 시체는 아마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
살인기계, 맥가이버 능력으로 훈련된 400여명의 특수군을 교도소 공격 과정에서 졸지에 상실한 북한 지휘부가 극장식 강당에 모여 침통한 표정으로 철수 계획을 고지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5월 24일 오전, 모든 관들은 도청에서 상무관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북한 공작단이 철수합니다. 마지막 철수를 누구도 보지 못하게 엄호하기 위해 제1광수 김창식이 기관총으로 광주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2014.5.13. 청주의 깊은 야산 밀림 속에서 공사를 하던 일꾼이 지하 1m 깊이로 파인 넓은 운동장에 군대식 대오를 갖춘 430구의 유골을 발견하었습니다. 이 때는 세월호 사고가 난지 불과 1개월째 되는 시점이라 수많은 보도들이 있었지만 주의를 끌지 못했습니다. 규격이 균일한 나무 판 위에 시체를 놓고 하얀 비닐로 둘둘 말아놓고 그 위에 일련번호를 매겨놓았습니다. 한국에서 이러한 시체는 광주에서밖에 나올 수 없고, 균일한 규격의 나무 판 위에 시체를 놓고 비닐로 돌돌 말은 포장 방법은 오로지 광주에서만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 이들은 컨테이너 박스로 옮겨졌고 그 후로 흔적이 없습니다. 화장 실적도 없고, 무연고 처리를 위한 조달청 입찰공고도 없습니다. 2014.10.4. 황병서, 최룡해 등이 몰고 온 김정은 전용기가 실어갔을 것입니다.
에필로그
가장 강력하고 전달력이 있는 매체는 사진입니다. 위의 사진들을 보고 5 ․18을 북한집단이 주도하지 않았다고 반론할 사람 없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지금 이 시각에도 암매장 장소를 찾는다며 굴착기로 6개월째 광주 땅을 파고 다니는 김양래 5 ․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사진 속 시위 주인공들에 대해“저들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전두환이 투입시킨 게릴라부대”라고 둘러댔겠습니까?
1988년 7월 13일‘광주특위’가 형성되면서부터 지금까지‘5 ․18 진상을 규명하자’주장해 온 정치인들은 오로지 좌익계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좌익정치인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5 ․18의 진실이 규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주장하는 진실규명 작업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1988년의 ‘광주특위 ’, 2005년의‘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그리고 2017년의‘국방부5 ․18특별조사위’가 활동 중에 있습니다. 이에 더해 지금 국민의당 소속 의원 등에 의해‘5 ․18진상규명특별법’이 발의돼 있습니다. 이 법안의 요지는 정부차원에서 5 ․18의 진상을 규명하고 정부보고서를 내놓자는 것입니다.
“5.18진상규명”, 일반 국민들은 제목만 보고 5 ․18에 관한 진실을 모두 파헤쳐보자는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1998년부터 지금까지 좌익 정치인들이 주장해온“진상규명”은“규명범위”라는 것에 국한돼 왔습니다. 좌익 정치인들이 내걸어 온“규명범위”는 딱 세 가지입니다, 발포명령자, 헬기사격, 암매장입니다.“5.18에의 북한군 개입 여부”는 지난 30년 동안“규명범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규명범위에 들어가기는커녕 사법적 물리적 린치와 이지메를 당해왔습니다.5 ․18진상규명 문제는 국회국방분과위 소관입니다.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5 ․18진상규명특별법”의 “규명범위”에도“5 ․18에의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한 규명항목은 넣어줄 수 없다는 것이 발의자들의 주장입니다. 한국당은“5 ․18에의 북한군 개입문제”를 정식으로 법안의“규명밤위”에 추가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는 역사를 바로 잡는 문제를 많이 뛰어넘는 국가안위에 관한 문제입니다.
2018.1.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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