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성 정체 밝히기 위해 130여 시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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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1-14 15:23 조회8,0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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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성 정체 밝히기 위해 130여 시간 썼다
국정원이 키우는 장진성의 정체, 왜 개인이 밝혀야 하나
이 대한민국 땅에서 한 탈북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130여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눈을 짓무르게 한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원래 탈북자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그 일로 봉급을 받는 국정원 직원들이고, 특별히 장진성을 관리해온 국정원 특별담당자다.
그런데 그 국정원 담당자는 장진성을 국정원 산하 연구소인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7년 동안 취직시킴으로써 모든 의혹들을 세탁해 주었다. “나에게 의혹이 있다면 국정원이 나를 7년씩이나 국정원 연구소에 중용해 주겠느냐?” 실제로 장진성이 법정에서 한 말이다. 지금도 국정원은 장진성을 포함해 12명의 탈북자들을 이 연구소에 취직시켜 돌출될지 모를 모든 의혹을 세탁시켜주고 있는 중이다.
국제적 문호, 국제적 교수, 애국시인으로 분장된 장진성
국정원은 장진성을 국제 유명대학의 교수라는 직함을 갖게 했고, 영국 랜덤하우스로 하여금 그가 썼다는 『Dear Leader(친애하는 지도자)』를 발행하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프로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이 간판학력으로 부각돼 있고, 북한 대남사업부인 통전부 산하 101연락소에서 근무했다는 것을 간판 경력으로 내세우게 했다. 나무위키 등을 보면 그는 세계적인 문호 급으로 분장돼 있고, 인터넷에는 그가 최고의 애국자요 애국시인으로 칭송돼 있다.
2015.5.5.부터 시스템클럽 회원들과 노숙자담요가 혼연일체가 되어 광수를 찾아냈다. 장진성이 제382광수로 판독되었고, 그의 얼굴과 황장엽의 얼굴이 영상분석 기법의 모델로 선택되어 상세하게 분석된 결과가 ‘영상화보’ “5.18영상고발” 화보책에 실렸다. 그가 신동아에 김대중의 아바타 오익제에 대해 색깔있는 증언을 하자 나는 “국정원은 장진성을 위장 간첩혐의로 조사하라. 장진성의 전형적인 트로이목마의 행적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거짓 증언을 분석했다. 그 거짓증언은 김대중의 색깔을 세탁시키려 한 것으로 읽혔다.
장진성의 포섭 능력
이에 노숙자담요가 장진성을 제382광수로 분석하자 장진성은 “지만원은 정신병자다. 9살짜리 특수군이 어디 있느냐”며 우익진영 인물들을 포섭했다. 차기환이 노골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오랜 동안 장진성의 선동을 대변했다. 차기환 변호사는 “지만원의 광수는 너무 나간 것이다” 이런 말들을 수많은 공식석상에서 했다. 이는 개인의 단순 의견의 피력행위가 아니라 작정하고 반복하는 행위다. 애국자로 의심치 않는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 그는 2017년 4월 장진성 저 “수령연기자 김정은”이라는 책을 비봉출판사를 통해 내주었다. 그 책의 요지는 “지금의 김정은은 사실상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꼬붕이다. 김정은을 제거한다고 해서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김정은 참수작전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화에서 장진성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법정에 선 장진성의 매너는 양아치급 매너
노숙자담요의 판독으로는 1980년 광주에 왔던 광수들 중에는 10대가 10여 명 있다. 특히 박상학, 강철환, 정성산은 12살이었다. 장진성이 가장 어린 9살이었다. “9살 백이 아이가 무슨 특수군이냐”라고 하소연한다면 12살 백이 세 사람도 “12살 백이 아이가 무슨 광수냐” 이렇게 주장해야 할 것이다. 나는 현재 서울에서 이름을 날린 50명의 탈북자들을 광수라고 발표했고, 2015.10.30.에는 이들을 국정원에 간첩혐의로 신고까지 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나를 고소한 사람이 장진성이다.
지난해 11.30. 장진성이 고소인 자격의 증인으로 법정에 나왔다. 2시간 40분 동안 그에게 쏟아진 질문은 260개 정도였다. 이 질문들을 마련하는데 나는 100시간 이상을 썼다. 그는 증인석에 비스듬히 누워 턱을 주먹에 괴고 입만 벙긋거리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판사에게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느냐?”며 대답하기를 거부했고, 그때마다 판사는 대답하라고 했다. 그의 법정 태도와 발언 내용들을 보면 그는 양아치급 매너에 길들여 져 있었다. 4년제 정규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서의 기본 소양이 안 돼 있었고, 둘러대는 대답이 기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으로 창작해내는 답들이었다. 법정에 나왔던 방청객들은 “장진성은 거짓으로 똘똘 뭉친 위선자”라 입들을 모았다.
남한에 선전된 장진성의 거의 모든 것이 가짜
아래의 글은 지난 해 11.30. 피고인측과 장진성 사이에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담은 녹취서를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을 정리하는 데에만 아마 20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남들은 내가 발표하는 내용들이 어디서 쉽게 나오는 것 정도로 가볍게 생각들 하겠지만 이런 일을 정리하는데 나를 도와주는 참모는 없다. 도와줄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남들처럼 과거에 있었던 역사들을 재편집해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정보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소송 당할 각오로 쓰는 역사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내가 생각해도 내 팔자는 참으로 더럽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이런 지저분한 일을 철저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나는 감옥에 간다. 그래서 주말도 밤도 없이 워낭 소리 울리며 황소처럼 일하는 것이다. 무슨 인생이 이렇게 더러운가?
녹취서 내용은 법정공방에서 사실로 인정된다. 그 사실들을 놓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각자마다 다르고, 그 다른 것은 표현의 자유공간에 속한다. 아래는 카테고리 별로 정리 발췌한 내용을 놓고 내가 분석한 평가내용이다.
나의 판단을 요악하면 크게 세 가지다.
1. 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왔다는 것도 가짜
2. 통전부에서 대남문화공작을 했다는 것도 가짜
3. 탈북스토리 자체가 가짜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이 가짜인 이유
"내가 근무한 101연락소는 시와 소설을 써서 남한의 민중작가의 이름으로 대학가와 운동권에 내려보내는 문화공작을 하는 부서다. 나는 김경민이라는 남한의 민중작가 이름으로 시를 써 보냈다. 이런 작가로 근무하려면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해야 한다, 나는 음대를 나왔고, 음대출신은 101연락소에 갈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시를 잘 써서 여기에 왔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101연락소가 나에게 김일성대 졸업장을 만들어 주었다. 1997.부터 1999.까지 3년 동안 위탁교육을 받은 것으로 해주었다. 위탁교육이지만 한국의 대학원처럼 했다. 학교에 나간 것이 아니라 어침 8시부터 밤 7시까지 줄곧 101연락소로 출퇴근한 것이다."
"2002년부터 김장일의 지시로 모든 일군들은 군복무를 필해야 한다고 강제해서 나는 2001년부터 탈북시점인 2004연 1월 22일까지 해군 협주단 기자로 일했는데 그 협주단 기자생활은 군복에 중위 계급을 달고 1주일 중 6일은 101연락소에서 근무하고 하루는 해군협주단에 나가 당 생활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상을 요약해 보면 장진성은 101연락소에 근무하면서 군복무도 거져 필했고, 김일성종합대학의 졸업장도 거져 얻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한 이력이 아닐 수 없다.
통전부 대남공작 실적 없어
장진성은 남한에 와서 말하기를 그는 1994년 음대를 졸업하자마자 김정일이 “그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가게 해주라”는 특명을 내렸고, 이에 장진성은 그의 소원에 따라 조선중앙방송 기자로 갔다고 했다. 그리고 1996년부터 101연락소에 갔다고 했다. 여기에는 어떤 절차로 갔는지 그에 대한 설명이 없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101연락소에서 탈북할 때까지 무려 8년이나 일했다. 그가 8년 동안 한 일은 남한의 민중작가인 김경민 이름으로 시를 써서 남한에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11.30. 증인석에 나온 그를 향해 피고인측이 질문을 했다. “증인이 써서 남한에 내려보낸 시가 무엇이요, 제목을 대시오” 이에 그는 당황하면서 “나는 그런 일 한 적 없다. 선배들이 했다는 말이었다”고 답했다, 대남공작 실적이 없는 것이다. 인터넷에는 한 탈북자가 장진성의 정체를 밝혀놓았다.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이 가짜이고, 대동강구역 문수동에는 부인과 아들 위금성이 있고, 본명은 장철현이 아니라 위철현이라는 것이다. 장진성에 그날 확인한 결과 이인터넷 폭로의 내용은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폭로내용에 의하면 장진성이 근무한 곳은 101연락소가 아니라 해군 협조대라 한다,
탈북 스토리 전체가 가짜
탈북스토리의 구성요소는 탈북동기, 친구 황영민 이야기, 지참금 3,000달러의 미스터리, 위조했다는 특별통행증 이야기, 두만강변 이야기, 연길에서 만난 사람들, 연길의 공안부 이야기, 달러 방치 이야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짜로 판단된다. 그는 2004.1월 탈북 전에 평양역을 출발하지도 않았고, 그가 설명하는 식으로 두만강을 건너지도 않았다. 그의 탈북스토리는 코미디이고, 그의 글 솜씨는 구성면에 있어서나 표현능력에 있어 3류 작가 그 이하라고 생각한다. 법정에서 피고인측은 얼굴의 부분부분에 대해 특징점들을 설명해 주었지만 그는 “지만원은 또라이 정신병자다. 그런 병자가 하는 이야기 듣고 싶지 않다”며 귀를 막다시피 했다. 아래는 이상을 뒷받침할 “정리 발췌된 녹취서” 내용이다.
장진성(본명 위철현) 파일
2017.11.30. 피고인측이 장진성에게 한 질문과 장진성의 답변내용(녹취서) 정리
군 복무에 대한 궤변
문: 증인은 북한에서 군복무를 했는가요?
답: 군복무라기보다도 북한이 2002년부터 의무병역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래서 행정부 현직에 있는 상태에서 군복을 입고 잠시 가 있었던 적은 있습니다.
문: 잠시라는 것은 얼마동안을 이야기하는가요?
답: 3년 동안은 의무적으로 무조건 군복을 입어야 된다고 해서 1년 반 정도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문: 증인은 북한에서 군 생활을 하였는가요?
답: 예
문: 몇 년간 하였는가요?
답; 1년 반 정도 하였습니다. (녹취서 3쪽 12행 내지 4쪽 1행)
문: 인터넷을 보니 2001.부터 2004.1.까지 증인은 인민군 해군협주단 배우를 했다고 하던데. . (동 10쪽 3행)
답: 배우가 아니라 해군협주단 작가로 있었습니다. . .(동 10쪽 7행)저는 중위계급의 작가로 배치를 한 것입니다(동 10쪽 13행).
동 10쪽 16행 내지 11쪽 11행까지의 요지: 2001부 터 2004.1.까지 해군협주단 작가로 근무하였다. 2002.부터는 협주단 군복에 중위 계급을 달고 101연락소에 출퇴근하면서 1주일에 한번 씩 해군협주단에 가서 자신의 당위원회 당 생활을 따로 보고하였다.
이력서 맨 앞에 내세운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 가짜
문: 증인을 취재한 언론들의 기사를 보면 증인이 나온 학교는 “평양음악무용대학교’로 소개돼 있는데 어떤가요?
답: . . 통전부는 대남공작부서이고 그러한 특수성 때문에 음악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통전부에 김일성종합대학 위탁교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탁교욱은 종합대학을 졸업한 것과 똑같이 취급해 주어서 그 위탁교육으로 종합대학교를 졸업한 것입니다.
문: 그런데 증인의 책에는 김일성 종합대학으로만 기재돼 있는 데 어떤 것이 사실입니까?
답: 위탁교육이 졸업장과 같습니다. (동 5쪽 4-15행).
문: 김일성종합대학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다녔습니까?
답: 1997.부터 1999사이에 3년 동안 다녔습니다. (동 9쪽 3-4행)
문: 북한에서는 평양음악무용대학과 김일성종합대학이 쌍벽을 이루는 명문대로 알려져 있고, . . .증인이 어떻게 그 두 개의 명분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인가요?
답: 다니지 않았으니까. (동 9쪽 5-11행)
문: 예술대학 5-6년 과정에서 음악-무용공부를 한 사람이 김일성종합대햑 어문학부를 졸업한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시를 썼고, 조선중앙방송국 기자로 특채되었다면 증인은 이미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고, 수습과정도 생략한 천재라는 결론인데, 이러한 천재가 단지 시를 쓰기 위해 구태여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또다시 4년 동안 다닌 것인가요?
답: 제가 원해서 다닌다기보다는 통전부는 음악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심리전을 하는 부서이기 때문에 북한은 자격을 매우 중요시해서 자격증 획득을 위해 위탁교육을 시켜서 위탁교육으로 간 것입니다. (동 11쪽 하 5행 내지 12쪽 3행)
통전부 산하 101연락소 근무경력, 업적 없어 신뢰 불가
2012.5.7. 중아일보는 장진성에 대해 기사를 썼다.“장씨는 평양음대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 평양음대 시절 썼던 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눈에 들어 1994년 조선중앙방송 기자로 특채됐다. 96년부터는 노동당 통일전선부(통전부) 소속 시인으로 일했다. 대남 심리전 담당이었다. 그는 ‘김경민’이란 가명으로 활동했다. 남한에선 민중시인으로 알려진 이름이다. . .한국 대학가에 떠돌던 상당수 민중시가 통전부 시인들의 작품이었다” 이 기사 내용으로 보면 장진성이 가명 김경민으로 써 내려보낸 시가 한국 대학가에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법정에서 장진성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문: 증인은 탈북스토리에서 “한국 대학가에 떠돌던 상당수 민중시가 통전부 시인들의 작품이었다”고 말했지요?
답: 예
문: 탈북을 하여 남한에 와서 보니 증인의 시들이 한국 대학가나 운동권에 얼마나 퍼져 있던가요?
답: 제가 쓴 시가 아니라 101연락소는 남한의 문화침투연락소입니다. . . 저의 시가 아니라 선배들의 것입니다. (동13쪽 하 2-10행)
문: 101연락소에는 매일 출퇴근했었나요?
답: 예
문: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은 언제였는가요?
답: 아침 8시부터 저녁 7까지입니다, (동 16쪽 하 1-4행)
장철현으로 등록된 장진성의 본명도 가짜. 진짜는 위철현
문: (북한에 있을 때의 본명은 무엇인가요?
답: 답변하지 않엤습니다.
문: (증인의 본명은) 장철현이 아니라 위철현이 아닌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본인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라 숨길 것이 없을 것 같은 데 왜 위철현이라는 본명을 숨기고 장진성 또는 장철현으로 활동하는 것인가요?
답: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문: 본 법정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가요?
답: 예
문: 증인이 이곳에서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 위철현이 탈북한 것을 모르는가요?
답: 압니다.
문: 대동강 구역에 문수동이 있는가요?
답: 답변하지 않엤습니다.
문: 증인과 연관이 있는 지역인가요?
답: 예
문: 증인은 그 문수동에서 처와 아들 위금성이란 결혼생활을 했었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동15쪽 11행 내지 16쪽 4행)
장진성이 가지고 탈북한 3천 달러의 미스터리
문: 101연락소에서는 당시 달러로 환산해 몇 달러의 월급을 받았습니까?
답: 북한 원화를 받았고, 그 당시에 제가 받았던 월급은 2,500원 정도 됩니다.(주: 10달러 정도)
문: 증인은 2011.3.28. 자유아시아방송에서 탈북당시 미화 몇 천 달러를 가지고 출발했고 그 중 700달러를 증인에게 처음 도움을 준 중국 국경지역에서 처음 만난 찬용-아저씨에게 주었다고 말했지요?
답: 예
문: 가지고 있던 달러는 정확이 얼마인가요?
답: 2,000-3,000달러 되었습니다.(주: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20-30년 동안 모아야 할 돈, 탈북할 때 68세 난 부친과 모친 모르게 탈출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얻은 돈도 아님)
문: 어떻게 구하였는가요?
답: . . 시장에서도 그렇게 통용되었기 때문에 달러로 구할 수 있도 있고 가능합니다. (동 17쪽 14행 내지 18쪽 3행)
장진성과 공동 탈북했다는 친구 황영민의 존재, 소설 같아
문: 증인은 황영민을 언제부터 친구로 사귀었는가요?
답: 답변하지 않엤습니다.
문: ‘나의 탈북스토리 제8쪽에 증인 등이 살인혐의로 수배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한 창용아저씨에게 증인은 “나는 중앙기관에서 근무했고 친구 같은 경우 김정일 가까이서 10년을 근무했다는 점, 체제를 비관하고 남조선으로 갈려고 한다는 것까지 솔직히 말했다” 라고 썼는데 황영민이 근무한 기관은 무슨 기관이었는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황영민은 무엇을 담당하였나요?
답: 김정일 기쁨조 악단의 왕재산 경음악단이었습니다.
문: 증인은 황영민의 조부가 김일성 최측근 동지라 북한에서는 물론 중국 교과서에까지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 했는데 그 이름은 무엇입니까?
답: 북한주민이라면 다 아는 9살짜리 아동단원 김금순입니다(주: 아마 예명인 듯 함).
문: 증인은 나의 탈북스토리 제16쪽에서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사람이 황영민의 장인이라 했고, 책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제70쪽에서는 심화조에 관련해 희생된 사회안전성(경찰청) 참모장 3성장군이 황영민의 아버지라 하였지요?
답: 예
문: 사회안전성 참모장을 놓고 2009년에는 친구의 장인이라 했고, 2011년에는 친구의 아버지라 한 것인데 어느 것이 맞는가요?
답: 그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제가 같이 오다가 잘못된 친구(주: 중국에서 사망)이기 때문에 그 친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아버지 혹은 장인이라 바꿔서 이여기 하였습니다.
문: 남한에 와서도 그렇게 두 가지로 다르게 이야기해야 보호가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요?
답: 그 당시 황영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제가 그냥 돌려서 이야기했는데 잘못된 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 . (주: 황영민이 죽었다는 사실은 2004년 중국에서 이미 알고 있었음. 지금은 2009년의 증언과 2011년의 증언이 왜 다르냐 하는 것임)
문: 어느 것이 진짜인가요?
답: 사실은 아버지입니다.(동 18쪽 13행 내지 19쪽 하 5행)
문: 어찌 됐던 기록에 의하면 (황영민의 아버지) 황윤모는 2000년에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습니다. 그의 아들 황영민은 물론 그 가문은 2,000년에 멸족되었어야 했는데 그 사건이 종결된 이후 탈북할 때까지 무려 4년 동안 황영민은 어떻게 해서 김정일 가까이에서 근무하면서 건재했지요?
답: 예
문: 어떻게 그와 같이 될 수 있는가요?
답: 황진택(주: 황윤모의 오기로 보임)은 심화조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서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조사를 받았고 그 도중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수용소로 끌려간 것이 아닙니다. (동 21쪽 12행 내지 20행)(주: 문제는 아버지 황윤모가 2,000년에 간첩혐의로 숙청되었는데 3족을 멸하는 북한에서 그 아들이 어떻게 2004.1.까지 김정일 기쁨조 악단에 건재했었느냐는 것임. 기록들을 보면 황윤모는 2000년 간첩으로 숙청당했음)
탈북시 사용했다는 특별통행증 가짜로 꾸민 이야기
문: 2011.2월에 증인이 쓴 책 ‘시를 품고 강을넘다’의 제14쪽에서 증인은 통행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일반통행증’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통행증’이라 했고, 일반통행증은 내륙에서의 통행증이고, 특별통행증에는‘평양행’ ‘DMZ지구행’‘국경연선지구행’이 있다 하였고, “국경지역 특별통행증에는 빨간 줄 두 개가 가로 질러 있다“고 했지요?
답: 예
문: 여기에 더해 DMZ지구행 특별통행증도 있는가요?
답: 예
문: 인터넷과 탈북자들에 확인한 결과, 북중국경선에 접근하는 통행증은 빨간 줄이 아니라 푸른 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뒷밭침하는 언론기사가 있습니다(증114). 증인이 말한 빨간 줄 두 개가 그어진 통행증은 DMZ 방향으로 가는 통행증이라 하는데 어떤가요?
답: 그렇다면 제가 혼돈했을 것입니다.
문: 빨간 줄과 파란 줄에 대해서 귑게 혼돈을 하는가요?
답: 저는 통행범 위조범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문: 중인은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제15쪽에서 “평양시 보위원에서 백지통행증 2장을 100달러를 주고 불법으로 샀다” 라고 하였지요?
답: 예
문: 다른 한 장은 황영민을 위해 산 것으로 짐작이 되는 데, 그 많은 돈을 주고 두 장을 사서 왜 한 장은 사용하지 않았는가요?
답: 책을 보면 있습니다.(주: 책에 없음) (동 22쪽 11행 내지 23쪽 10행)
문: 통행증에는 ‘통행목적지’와 ‘통행목적’ ‘동행인원’을 쓰는 난이 있고, 증인은 거기에 증인의 필적으로 통행목적은 ‘출장’ ‘동행인원’란에는 ‘외 1명’으로 기재했다 했는데 통행목적지는 무엇으로 기재했는가요?
답: 무산이라고 썼습니다.
문: 책에는 '무산시'라고 기재돼 있는데 어떤가요?
답: 시든 군이든 그냥 무산으로 썼습니다.(주: 탈북스토리와 상이함)
문: 무산은 ‘무산시’가 아니라 2004년에도 지금에도‘무산군’이 아닌가요?
답: 출판사에서 난 오타입니다.
문: 만일 ‘무신시’라는 글자가 통행증에 있었다면 증인은 즉각 의심 받았을 것인데요, ‘출장’은 통행목적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통행목적에는 용무를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기재해야한다고 탈북자들이 말하는데 특별통행증 발급이 “출장” “외 1명” 이렇게만 기재해도 될 정도로 허술한 것인가요?
답: 예
문: 황영민이 증인처럼 독립객체의 자격으로 따로 통행증을 마련하지 않고 동행인으로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같이 가기 위해서 설정하였습니다.
문: 통행증을 검문하는 보안원, 보위원 등이 “외1명‘ ”외3명’ 이런 식으로만 쓰인 통행증을 보면 증인 한 사람의 신분만 확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통행증에 이름이 특정돼 기록되지 않았는데도 통과될 수 있는가요?
답: 예
문: 피고인 지만원이 여러 탈북자들로부터 얻은 지식에 의하면 황영민의 경우에는 직장이 다르기 때문에 황영민이 속한 기관에서 중앙당을 통해 ‘동행자 의뢰서’를 발행해야 하고, 그것에는 동행자 명단이 기록되어 통행증에 부착되어야 하는데 그 의뢰서에는 아무나 함부로 위조하지 못하게 중앙당 직인을 찍어주는데, 이는 위조가 불가능하고, 거래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중앙당직인이 통행증에 찍히는 것은 없습니다(주: 동문서답)
문: ‘외1명’이면 그 1명의 이름인 황영민이라는 글자가 특별통행증에 기재돼 있어야 하고, 황영민을 증인과 동행하도록 허가한다는 중앙당 의뢰서가 필요할 것이란 것쯤은 누구나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증인은 그렇지 않은가요?
답: 그러한 중앙당 의뢰서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앙당직인이 찍힌 국경통행증이 북한에 없습니다.(동 23쪽 11행 내지 25쪽 2행)
탈북동기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가공 스토리
문: 나의 탈북스토리 제16쪽을 보면 나는 그날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친구의 장인에 대해서 남한 서적들을 친구들에게 몰래 돌린 혐의로 국가보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았던 자신에 대해서 김광선에게 이야기해주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무슨 서적들인가요?
답: 월간조선, 한겨레, 신동아, 말 잡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문: 그 엄격한 조사를 받고 탈출을 결심하였는데 그렇게 중한 죄였다면 조사당국에서 조사 직후 증인을 풀어주지 않고 곧바로 구속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답: 북한도 증인 증거가 있어야 형사집행을 할 수 있습니다.(동 25쪽 8-15행)
문: 증인은 증인이 쓴 이 책(증113) 제72쪽에서 보위당국이 증인을 빨리 체포에 나서지 않은 이유를 증인이 김정일과 두 차례 20분 이상씩 만났기 때문에 ‘김정일 접견자’로 분류돼 증인을 체포하려면 김정일의 서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라 했는데, 탈북자들에 물어보니 이는 일반범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반역 반동 배신으로 확인된 범죄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합니다. 더구나 중앙당 핵심층 일꾼이 아무런 허가 없이 결근할 때에는 즉시 전국에 수배령을 발동하고, 가장 먼저 전파되는 곳이 열차, 10호초소, 국경연선지대’ 경비총국이라고 하는데 맞는가요?
답: 예
문: 증인의 경우에는 설사 김정일 접견자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황영민에게는 그런 대우가 없습니다. (함께 탈북한) 황영민이 속한 기관에서도 비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황영민은 김정일 측근에서 일한 사람이고 집안 성분이 원체 굵기 때문에 결근한 사실이 발견되면 그 즉시 전국 수배령을 내렸을 것이고, 그가 잡히면 증인도 잡히는 것 아닌가요?
답: 그 내용은 책에 다 있고, 북한이 한국과 같이 통신이 발달하여 바로 연락하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문: 통신문제가 아니라 증인은 그러한 대우를 받고 있지만 황영민은 그러한 대우가 없기 때문에 둘이 같이 다니면 이 사람이 잡히면저 사람이 잡히지 않느냐는 취지인데 어떤가요?
답: 그러한 것을 다 감안하고 움직였고, 그 내용은 다 책에 있습니다.(주: 책에 그런 내용 없음).(동 26쪽 6행 내지 27쪽 5행)
장진성은 2004.1.에 평양역에서 무산역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문: 증인은 증인의 위 저서의 제11쪽에 무산역에 기차가 도착한 시각은 2004년 1월 25일 아침 6시였는데 그 시각은 기차가 3일 연착한 결과였다고 했습니다. 제 시간에 도착했다면 1월 22일, 오후 7시 15분이었을 것이 했습니다. 그러면 평양은 언제 몇 시에 출발했지요?
답: 예
문: 그러면 평양은 언제 몇시에 출발하였는가요?
답: 3일전에 떠났고, 시간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문: 그렇게 해서 25일에 도착했으면 연착되지 않는 차 아닌가요?
답: 그렇지 않습니다.
문: 3일이 연착되어서 25일이라면 22일일에 도착할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평양도 22일에 출발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요?
답: 22일인지 21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 무안역 실제 도착시각과 정시도착시각은 분 단위로 기억하면서 그 중요한 평양출발시각에 대해서는 개념 없이 오락가락함)
문: 탈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탈북이야기 중 평양역에서 표를 끊을 때, 동행자가 제대로 된 증명서를 안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될 때가 가장 잊을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가장 관심이 많이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기록될 부분이 아닌가요?
답: 그렇다면 언제 한 번 다시 쓰겠습니다.
문: 나무위키와 언론기사들을 찾아보면 평양에서 라진까지 가는데 23일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런가요?
답: 예, 연착이 되었을 때 그렇게 됩니다.
문: 회령에까지 가는 데에는 빨리 가야 열흘이 걸린다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차의 80%가 전기차이고, 전기는 증인이 책에서 말했다시피 평양에도 하루에 4시간 밖에 흐르지 않을 정도로 열악하여 기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어떤 때는 며칠씩 정차하는 때가 있어서 차안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기도 하고 굶어죽기도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빨리 달리면 노후된 궤도가 휘어지고 나무를 베어 4각으로 다듬지도 못한 채 레일침목에 사용하기도 하고, 철로 자갈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철로가 뱀처럼 꼬불꼬불하여 시속 20km 이상의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증인 역시 책의 11쪽에서 “단선레일, 견인차 부족, 고장, 잦은 정전, 낮은 전압”이라는 단어들로 북한 기차의 열악성을 강조하였지요?
답: 예
문: 그런데 탈북과정에서 만일 증인이 증언 그대로 기차를 타고 무산역까지 갔다면 기차가 어떻게 달렸는지, 몇 번, 몇 시간씩 레일 위에서 정지해 있었는지, 기차 안에서 어떤 검문들이 있었는지, 기차를 탄 이웃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백미였을 터인데 증인이 작성한 책에는 그러한 것들이 없지요?
답“ 예
문: 왜 그러한 것을 못 썼는가요?
답: 제 이야기에 충실하고 싶어서 생략을 하였습니다.
문: 증인이 탄 기차 내에서 검문은 몇 번 정도 있었습니까?
답: 경계를 지날 때마다 있었던 것 같은데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문: 검문은 어떤 식으로 했는가요?
답: 지나가면서 한 명씩 일일이 검사합니다
문: 황영민은 검문을 받을 때 아무 문제가 없었는가요?
답: 예
문: 기차가 가는 동안 대지에는 눈이 얼마나 쌓여있었는가요?
답: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눈이 내리고 있는 지역도 있었습니까?
답: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두만강 지역의 기온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억 나는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1월이면 영하 20도 35도 왔다 갔다 하는 것 아닌가요?
답: 예, 그런데 재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동 27쪽 6행 내지 29쪽 하8행)
2004.1. 장진성은 두만강 건너지 않았다
문: 증인은 책의 12쪽에서 무산역에서 내리자마자 눈보라가 확 휘몰아쳤다고 날씨가 사나웠다 하였습니다. 그 지역에 눈은 얼마나 쌓여 있었는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눈보라가 친 것은 기억이 되면서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는 기억이 없는가요?
답: 그 당시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경치를 구경할 상황입니까?
문: 눈이 있었는가요 없었는가요?
답: 있었습니다.
문: 내렸을 때 기온이 영하 몇 도나 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가요?
답: 예
문: 그 무산역에 오전 6시에 내렸다면 어두웠을 때인데, 그 사나운 눈보라를 맞으면서 걷기 시작해 하루 종일 100리 정도를 걸었다면, 발지국도 남기게 되고 눈 딛는 소리도 꽤 났을 텐데, 맞는가요?
답: 예
문: 무산역에서 백두산 쪽 상류를 향해 걸었습니까, 아니면 동해 쪽 하류를 향해 걸었습니까?
답: 제 기억으로는 하류 쪽으로 갔던 것 같습니다.
문: 증인은 책의 제18쪽에서 신분증의 위세만 믿고 비포장도로를 걸었는데 1km마다 망루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잠복초소들이 있었고, 군인들은 지나가는 차량들과 사람들을 예외 없이 세워 이동경위를 물었다고 했는데 증인은 그 때마다 위압적으로 생긴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통과했다 했지요?
답: 예
문: 국경의 경비가 꽤 허술해 보이는데 맞는가요?
답: 예 (동 29하 7행 내지 30쪽 하 2행)
문: 증인은 칠흑 같은 밤 10시에 두만강에 발을 짚었다가 풀숲에서 병사가 불쑥 나타났다했고, 책의 17쪽에서는 두만강에 와보니 풀 한포기 없는 민둥산이라 망연자실했다고 했는데 증인이 붙잡힌 곳에만 겨울 풀이 우거져 있었고, 그 숲은 증인 등 두 사람이 바로 옆에 경비병들이 숨어있는 것을 모를 정도로 짙게 우거져 있었다는 것인가요?
답: 그 때 밤이었습니다.
문: 증인을 발견한 경비경이 호각을 불었고, 불자마자 수많은 경비병들이 전등을 들고 증인을 둘러싸서 6중대병실(내무반)까지 연행했다고 하였지요?
답: 예
문: 그 거리가 얼마나 되었는가요?
답: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문: 대략 시간은 어느 정도 걸렸는가요?
답: 대략 15분 정도 걸렸습니다,
문: 중대병실이 강변 가까이 있었는가요?
답: 그만하면 가까이 있었습니다
문: 증인은 책의 22쪽에서 “왜 국경에 접근했습니까?”라고 묻는 중대장의 질문에 “우리당 위원회에서 무산시당에 들려 뭘 좀 알아보라고 지시주어 가던 중이었는데, 밤이 너무 깊었고, 춥기도 해서 군인병실이라도 찾아서 하루밤 자고 가려 했을 뿐인데. . ”라고 대답했는가요?
답: 예
문: 여러 탈북자들에 알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무산시당(사실은 군당)도 무산역도 다 읍내에 있다고 하는데 평양에서 무산시당에 출장을 가려면 먼저 시당 당원이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답: 그것은 억측입니다
문: 그리고 증인은 무산역에서 내려 100리 정도를 걸어와 중대본부 막사에 와 있는 상황에서 무산시당을 향해 가는 도중이라 둘러대면서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것인가요?
답; 상황이 그랬습니다.
문: 북한의 국경연선 경비 구조나 남한의 해안선 경비구조는 개념이 일치합니다. 이 그림의 좌측으로부터 보자면 강이 있고 강변이 있습니다. 그 강변의 내륙 쪽에 장애물 지대가 형성돼 있고, 뒤에 철조망이 있습니다. 장애물지대에는 사정에 따라 대못판이 설치된 지역도 있고, 너비4미터에 깊이 3미터 되는 함정이 패어진 곳도 있고, 목함지뢰가 설치된 곳도 있다 합니다. 그 다음에는 철조망이 있고, 사람이 뛰어넘을 수 없는 넓은 폭의 흔적선 즉 모래강이 이어져 있습니다. 잘 쓸어놓은 모래 위에 난 발자국을 발견하기 위해 모래강을 따라 순찰길이 이어져 있는데, 순찰 길을 따라 초소들이 있고, 그 초소들을 관장하는 중대본부 막사가 내륙 쪽으로 나 있습니다. 맨 우측 도로는 읍과 읍을 연결하는 비포장도로인데 증인이 하루 종일 걸었다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이런 장애물은 지형과 경우에 따라 1겹 또는 2겹으로 되어 있지만 철조망은 늘 있다 합니다. 구글에서 ‘두만강 철조망’으로 검색해 발췌한 세 장의 철조망 사진이 있습니다. <1>번 사진은 강변 경비철조망인데 여기에는 “국경표식과 철조망 등 변경시설을 파괴 이동하는 것을 엄격히 타격한다”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습니다. <2>번 사진은 중국 쪽에서 북한 초소를 찍은 것인데 북한병사가 감시경으로 강쪽을 감시하고 있고, 그 앞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습니다. 두만강과 북한초소 사이에 철조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3>번 사진은 중국 쪽에도 철조망이 있고, 중국감시병이 순찰을 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철조망은 중국쪽과 북한 쪽 다 설치돼 있습니다. 철조망이 없는 곳에는 흔적선이 있거나 다른 장애물이 설치돼 있다 합니다. 증인은 국경연선에 갖추어진 위 경비 시스템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가요?
답: 철주망은 2010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2004.에는 북중국경 사이에 철조망이 없었습니다.
문: 증인이 차도를 따라 걷다가 강에 발을 터치하려면 수많은 초소의 감시망을 피하고 흔적선이라는 모래강을 넘어야 하고 철조망과 장애지대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증인의 수기에는 마치 이 모든 장애물이 단 한 개도 설치돼 있지 않은 환경, 남한의 여느 강변 정도에서 행동한 것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증인은 1월 25일 밤 10시에 강가에 있었다 했고, 26일 낮에는 내륙방향에 있는 철로에 앉아 있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낮에 강가에 가서 강의 얼음 위를 달렸다 했습니다. 장애지대, 철조망, 모래강을 세 번씩이나 건너지 않으면 증인의 글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정말 장애물이 없었는가요?
답: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러한 장애시설은 2010. 이후에 만들어졌던 것들이고 굉장히 허술하였습니다.
문: 책의 22쪽에는 밤 10시, 6중대장이 증인의 출장사실을 무산시당에 확인해보라 해서 부하가 전화를 걸었는데 하늘이 도와 마침 전기가 나가서 전화가 불통이었다고 했지요?
답: 예
문: 그런데 전화와 전기는 무관한데, 병영공화국인 북한에서는 물론 남한에서도 유선전화와 무전전화는 전기가 아니라 배터리와 자석으로 운용됩니다. 정전이 돼서 전화가 불통된다는 말은 군출신인 피고인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다 전쟁은 언제나 야전에서 밀고 밀리면서 하는 것인데 정전이 됐다 해서 통신이 두절되는 시스템이라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증인은 평양에서도 전기는 하루에 4시간 밖에 오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러면 국경변방에는 전기가 하루에 잘해야 두 세시간 흐르지 않겠습니까? 통신 없는 국경경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정전이 되면 탈북을 막는 국경선 경비통신 전화가 두절되는가요?
답“ 무산군당까지 이러한 전화를 쓸 수도 없고 그것이 사실입니다.
문: 시를 써서 남한 운동권에 보내는 101연락소 직원이 먼 지방 군당에까지 출장을 간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기관에서 일하는 당 일꾼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변방 군당에 출장을 나간다는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가 어려울텐데, 증인의 말에 의하면 국경 경비중대장과 소대장, 평양역 및 무산역의 수많은 공안요원들, 기차 속의 공안요원들, 국경연선에서 만난 수많은 경비-공안 요원들이 줄줄이 다 이런 경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산역에 도달할 때까지 검문을 제대로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가요?
답: 50달러를 주고 탈북을 방조해준 국경군인들이 많습니다. 북한의 실상을 너무 엄하게 보지 마십시오. (주: 장진성은 탈북스토리에서 달러를 주지 않고 말보로 한 값씩만 주면 해결되었다고 강조했음)
문: 6중대장은 몇 살쯤 되어 보였습니까? 증인보다 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답: 그 당시 20대 말인가 30대 초로 보였습니다
문: 증인보다 위라는 생각이 들었는가요?
답: 비슷하거나 아래라고 생각했습니다
문: 군인들 중에도 계층상 중앙당 소속 이군도 있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중앙당기관의 신분이면 다른 신분의 나이 먹은 사람,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가요?
답: 어쨌든 북한은 신분사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됩니다
문: 증인은 책의 23쪽에서 “그럼 내일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 좀 자게 해줘, 어? 중대장! 우린 피곤해” 라고 표현했는데 실제로 이와 같이 말하였는가요?
답: “피곤하니까 같이 잡시다”리고 하였습니다.
문: 초면에 반말을 하지 않았다면 책에 쓴 것과 좀 다르지 않는가요?
답: 저는 그 병사에 한해서 이야기를 하였지 중대장에 한해서 그렇게 했다고는 안 하였습니다(주: 책에는 “일단 좀 자게 해줘, 어? 중대장! 우린 피곤해”이렇게 호기를 부린 것으로 기재했는데 장진성은 그때 그때 지어낸 말로 글을 써놓았기 때문에 기억에 일관성이 없음) (동 31쪽 하 6행 내지 37쪽 끝 행)
문: 탈북스토리’ 제3쪽에서 증인은 “도강하는 방법은 기상천외야, 군인들이 우릴 보는 밤이 아니라 우리가 역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대낮이야, 지금 뛰자!” 이렇게 말했고, 이어서 증인과 황영민은 대낮에 두만강 얼음 위를 달렸고, 바로 그 때 여러 경비병들이 나타나 “저 놈들 봐라! 저 놈들 잡아라.” 소리를 치면서 증인 등을 향해 “격발장치를 당기며 총구를 겨누는 것까지 보고” 달렸는데경비병들이 총을 쏘지 않은 이유를 창용 아저씨로부터 들어보니 국제법 때문에 중국을 향해서는 총을 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지요?
답: 예
문: 이어서 증인은 북한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해 탈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하였지요?
답: 예
문: 그런데 구굴에서 ‘두만강 탈북 총격’을 검색하면 두만강을 건너다 총격을 당해 사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뉴스들이 많이 있던데 증인의 말은 사실과 다른 것 아닌가요?
답: 저렇게 솔 때도 있고 안 쏠 때도 있을 텐데 제가 있을 때는 쏘지 못하였습니다.
문: 중국과의 사이가 총을 쏘거나 안 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
답: 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했는데 북한군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문: 책의 제 25쪽에는 증인이 경비중대의 병실(내무반)에서 밤을 지나는 동안 “경비병들의 순찰근무 교대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하였고 초소로 나갈 때마다 병사들은 실탄과 심지어는 수류탄으로 무장하곤 했다”고 기록돼 있고, 증인의 말대로라면 그 실탄과 수류탄은 도강하는 탈북자들에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실탄과 수류탄은 어떤 경우를 위해 쓸 수 있다는 것인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동 38쪽 4행 내지 39쪽 5행)
문: 증인이 경비병 막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풀려나 철로에 앉아있던 날은 2004년 7월 26일이었는데 이날 증인은 친구에게 “우리가 출근을 안 한지도 3일이 되었다” 하였지요?
답: 3일인가 4일인가 했습니다.
문: 연착시간만 3일이고, 여기에 하루 밤만 보태도 4일입니다. 여기에 기차가 실제로 달린 시간을 보태면 가장 이상적으로 달렸다 해도 증인이 사무실에 안 나간 날은 줄잡아도 10일은 될 텐데 증인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닌가요?
답: 그것이아니고 우리가 출근을 했던 날에 기차를 탔기 때문에 그 당시에 우리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3일이 맞습니다. (주: 시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 보임) (동 39쪽 하8행 내지 40쪽 1행)
달러 보관에 대한 거짓말
문: 증인은 책 21쪽에서 품속에서 신분증을 꺼낼 때 절대로 발각돼서는 안될 노트 두 권이 함께 있었다 했는데 그 품속이라 하면 외투의 안주머니였습니까, 아니면 외투 속에 입은 또 다른 옷의 안 주머니였는가요?
답: 상의의 안주머니였습니다.
문: 노트의 크기와 두께는 얼마나 되는 것들인가요?
답: 중앙일보에 원본사진이 다 나와 있습니다.(주: A4지보다 약간 작은 통상 노트)
문: 증인은 탈북스토리 제7쪽에서 중국 쪽 국경지대에서 가장 먼저 만난 창용아저씨가 “가죽 잠바와 바지를 꺼내 던지며 함북 말투로 말했다”고 표현했는데 그 때 그가 내준 가죽잠바와 바지로 옷을 바꿔 입었는가요?
답: 바꿔 입었습니다.
문: 이때 달러는 어디에 보관했고, 노트 두 개는 어디에 보관했는가요?
답: 주머니 안에 보관하였습니다.
문: 그때 갈아입으면서 주머니에 있던 달러를 잠바나 바지에 넣었는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친구는 어째서 달러를 1푼도 보관하지 않았는가요?
답: 돈은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그와 같이 했습니다.
문: 친구는 달러 없이 맨손으로 움직인 것인가요?
답: 예, 저와 같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문: 친구와 함께 탈북을 하려면 달러는 두 사람에 각각 분산해 지녀야 했을 터인데 탈북스토리와 책을 보면 증인의 친구는 달러를 전혀 지참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돼 있는데 어떤가요?
답: 그 이후에 나누었습니다
문: 어디에서 나누었는가요?
답: 연길시장 쪽에서 나누었습니다. 그 때 한번 공안으로부터 쫓기고 나서 그 이후에 돈을 나누자고 했었는데 그 때 중국 돈으로 50위안이었던 것 같습니다.(주: 공안으로부터 처음 쫓기던 날 달러는 외투에 넣어둔 채 빈집에 두고 나와 공안이 다 가져갔고, 그후 주머니에는 돈이 전혀 없었다고 기록했음)
문: 책의 제16쪽을 보면 증인의 친구는 달러를 전혀 지참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무슨 이유로 달러를 분산해 소유하지 않았습니까? (증113, 51쪽: "똑똑히 들어, 우린 지금 한 푼도 없어, 빈털터리라고, 그러나 있는 척 해야 돼, 저 사람은 가면 그만이지만 우린 저 사람을 잃으면 끝이야, 내 말 알겠지?")
문: 증인은 2009.12.에 기고한 “나의 탈북스토리” 제9쪽에서 창용 아저씨 장모 집 주변 빈집에 자물쇠를 밖으로 채우고 3일간 있었는데 마지막 날 밤중에 공안들이 들이닥쳤는데 황망한 중에서도 황영민이 방바닥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어서 증인이 뭘 해?”하면서 친구의 등을 세차게 때린 후 도망을 했고, 결국 두 사람은 산중턱에서 만났는데 그 때 중인은 돈이 들어 있는 외투와 짐 보따리를 챙기지 못했고, 황영민은 방바닥에서 증인의 노트 두 권을 챙겨왔는데 그 노트에는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라는 시 등이 있었다고 하였요?
답: 예
문: 그 노트 두 개는 방바닥에 개별적으로 있었나요?
답: 짐과 같이 있었습니다,.
문: 그렇다면 황영민은 노트 두 권은 챙겼으면서 수천 달러가 들어 있는 배낭이나 외투를 챙기지 않았고, 증인 역시 달러를 챙기지 않고 노트만 가지고 갔다는 것인가요?
답: 예
문: 무사히 도망을 하여 산 중턱에 도달하고 보니 증인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라 했지요?
답: 예
문: 그 추운 폐가에서 증인은 닭털 침낭으로도 견디기 힘든 밤에 잠을 자면서 외투도 벗어놓고 양말도 벗고 잠을 잔 것인가요?
답: 그 때 창용 아저씨가 무엇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문: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요?
답: 손난로와 옛날에 쓰던 숯불도 가져다주었습니다.(주: 책에 없는 지어낸 말)
(40쪽 2행 내지 42쪽 9행)
허위로 조작한 소설, 중국 공안 이야기
문: 나의탈북스토리 제10쪽, 폐가에서 탈출할 때를 묘사한 글인데, “나는 낮에 내다보군했던 높은 울타리를 어떻게 날아 넘었는지 모른다. 앞에서 달려가는 형체를 쫓아 정신없이 뛰면서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친구인줄로만 알았던 앞의 그림자가 송아지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돌아섰다.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면서도 우리가 숨어있던 빈집 근처를 어지럽게 비치는 12개의 손전등을 빠짐없이 세었다. 저 12개 불빛 중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나의 은밀한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가 처음 뛸 때와 추정방향을 추적해보려 애쓰며 허리를 굽히고 이리저리 헤맸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손전등 불빛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오고 있었다. 허둥거리던 나는 마침 앞에서 서성거리던 황소 뒤로 몸을 숨겼다. 공안과 나와의 거리는 불과 5미터도 안되었다. 황소 배 밑으로 뻗은 내 두 다리를 보지 않을까 숨이 컥컥 막혔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황소는 비실비실 피하다 못해 달렸고 나는 그 뒤에 숨어 어쩔 수 없이 가시나무에 찔리고 뜯기는 채로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찰나의 위험을 넘기는 동안 어느새 날이 푸름푸름 밝아왔고 공안 승합차가 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때야 쑤시다 못해 무감각해진 발이 양말도 안 신은 맨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암소도 아닌 황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모르겠는가요?
답: 그것은 소의 사정입니다.
문: 송아지와 황소를 키웠다면 중국에서는 소를 외양간에 키우지 않고 방목한다는 이야기인가요?
답: 외양간에 있는데 나와서 다니곤 합니다.
문: 폐가 옆에 누가 황소와 송아지를 키우는 것인지, 도망을 하는 입장에서 친구가 폐가 근방에 있을 거라 생각해서 멀리 도망쳤다가 다시 폐가를 찾아왔다가 공안을 불과 5미터 앞에 두고 황소와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뛰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요?
답: 예
문: 쫓기는 입장에서 12개의 불빛을 세었는가요?
답: 예
문: “나의 은밀한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라는 표현도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닌가요?
답: 아닙니다.
문: 나의 탈북스토리 17쪽과 책의 85쪽에는 “그날 밤 연길에서 멀리 떨어진 용정리 어느 집 소외양간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백 원을 들여다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대목을 보면 중국도 소를 방목하지 않고 외양간에서 키우고 있는 것이 맞지요?
답: 예
문: 책의 86족에서는 “소 울음소리에 깨어났다”고 했는데 한 외양간에서 소도 누워서 잠을 자고 증인 및 친구도 “나란히 누워 잤다”는 것인가요? 답: 저도 지금 가을날씨에도 산에서 이틀을 자라고 하면 제가 어떻게 그때 이틀을 잤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지에 몰려보았으면 이와 같이 쉽게 질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 증인은 2004년 1월 26일 낮에 강을 건너 중국연선에서 한 여성을 만났고, 그 여성이 손가락질 해주는 대로 창용아저씨 집에 가서 아저씨를 만났고, 만나자 마자 20분 후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연길 시내 창용아저씨의 장모집에 도착했고, 도착 즉시 아저씨는 자기 집 부인에 전화를 걸어 공안이 장모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아가지고 증인 등을 감추어주기 위해 1월 27일 새벽 2시에 장모집 마즌편 폐가로 들어갔다 했는데, 나의 탈북스토리 제8쪽에는 증인과 황영민이 중국공안에 살인자로 수배되었다는 사실이 담겨 있고, 9쪽에서는 중국에서 증인을 맨 처음 만난 여성이 밀고하여 창용아저씨까지 수배대상이 되어 있고, 그래서 공안이 창용아저씨 장모집까지 찾아온다 하여 장용아저씨가 증인 등을 2004년 1월 27일 새벽 2시에 장모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폐가의 방으로 들여보낸 후 문을 밖에서 잠근 후 여러 날 동안 계속 장모집에 머물면서 증인 등을 도운 것으로 되어 있지요?
답: 예
문: 그리고 아저씨는 장모집에 계속 머물면서 1월 28일 밤, 29일 밤, 빵을 사다 증인 등에 공급해주었습니다. 1월 30일 새벽 시간대에 증인은 증인 등을 잡으려 들이닥친 공안 12명을 따돌리고 한차례는 송아지와 함께 뛰었고 그 다음엔 황소와 함께 뛰어 산 속으로 도망을 가서 먼저 도착한 황영민을 만났다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맨발로 하루 종일 산속에 있다가 그날 저녁 때 다시 장모집에 왔고, 아저씨는 공안이 증인의 짐보따리를 다 가져 갔다 하면서 옷가지를 내주고 모포 한 개를 주면서 산에 가서 이틀만 더 있으라 했다고 하였지요? 답: 예
문: 산에서 하루를 지냈더니 아저씨가 30대 초반의 신광호씨를 데리고 나타나 증인 등을 인계했는데, 맞는가요?
답: 예
문: 공안요원들은 증인과 황영민이 폐가에서 도망을 쳤다는 사실을 알았고,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 도움을 준 창용아저씨도 체포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장모집을 향해 달려왔다는 공안이 아저씨를 그냥 방치하면서 아저씨로 하여금 며칠씩 증인 등을 도와주도록 많은 기회를 주었지요?
답: 예
문: 이틀 동안 빵을 사다 주게 했고, 도망 간 후에도 계속 장모집에서 만나게 했습니다. 한국 같으면 장모집은 잠복근무의 대상이 되어 아저씨가 나타나는 즉시 체포했을 것 아닙니까? 북한은 중국은 이곳과 좀 다른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중국공안은 증인 등이 남긴 배낭, 보따리, 외투, 양말, 신발, 수천달러의 현금을 모두 가져갔는데, 양말과 신발까지 버린 채 맨발로 도망갔다는 사실에 착안한 공안은 증인 등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대대 연대 병력을 풀어 근방 산 속을 수색하고 즉시 창용아저씨를 체포해 추궁했을 텐데 이 세 사람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떤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동 42쪽 15행 내지 45쪽 끝행)
중국에서 은인으로 만났다는 두 사람도 실체 애매
문: 증인은 2011년에 펴낸 책의 77쪽에서 “백 위안, 그 돈의 가치”라는 소제목 하에 신광호와 헤어지면서 그로부터 백 위안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009년에 쓴 ‘나의 탈북스토리’제16쪽에는 증인의 탈북동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던 사람도 김광선이었고, 작별하면서 증인에게 백 위안을 준 사람도 김광선이었고, “훗날 한국으로 탈출한 김광선에게 백 위안에 대한 보답을 했고, 어제도 노원구에 사는 김광선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되어 있는데 왜 이야기가 다른가요?
답: 본인이 그와 같이 요구하였습니다. 그분이 신광용인데 이름도 김광선으로 해달라 하였고, 이분이 중국에 계속 출국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공안을 의식하여 웬만한 것을 빼달라 혹은 바꿔달라고 요구를 하였습니다 (100위안을 준 사람에 대해 2009에는 김광선이라 했고, 2011에는 신광호라 했음. 신광호를 김광선이라는 가명으로 사용해달라 부탁했다는 장진성의 답변은 거꾸로 된 답변임, 갑자기 둘러대는 것이었기에 기억에 없는 답을 하였음, 신광호와 김광선이 중국에서 장진성에 베풀어주었다는 역할은 그 성격이 매우 달라 한 사람의 역할로 대치될 수 없음)
2018.1.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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