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둔갑된 근원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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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8-01-21 21:24 조회4,9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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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둔갑된 근원 이해하기
5.18민주화운동은 5정치꾼들의 흥정과 거래의 확실한 산물
노태우는 198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1988년4월 26일의 제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을 맞게 되었다. 야당은 민주화 세력을 등에 업고, 노태우 정권을 코너로 밀어 묻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태우 정권은 기상천외한 3당합당에 대한 물밑작업을 벌였다. 3당합당의 전제조건은 내각제 채택과 정호용 및 이원조의 용퇴였다. 정호용은 광주학살을 주도한 총사령관이었고, 이원조는 권력비리의 핵심이라는 이유에서였다.
3당합당에 임하는 김종필과 김영삼에게는 야심이 있었다. 김종필은 내각제를 통해 권력을 잡아보려 했고, 김영삼은 일단 들어가서 여당의 힘을 업고 대통령이 되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두 사람에게 공통적인 적은 정호용이었다. 정호용이 민자당에 있는 한, 차기 정권은 정호용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표면적인 명분은 광주학살의 수괴인 정호용과는 당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호용 축출에 대한 이유는 또 있었다. 3당합당은 노태우에게 절체절명의 명제였다. 노태우는 정호용이 12.12에도 관련되어 있지 않고, 5.18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안다. 그러나 여론은 이미 정호용을 광주학살의 수괴인 것으로 확고하게 형성돼 있었다. 만일 정호용을 당에 둔 채로 3당합당을 하게 되면 김종필, 김영삼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입지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노태우에게도 이를 뒤집을 힘이 없었다.
결국 정호용은 “한번만 봐 달라”는 노태우의 끈질긴 설득으로 1990년1월8일에 의원직을 사퇴했고, 2주 후인 1월22일에는 합당이 선언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정호용의 부인은 자살을 기도했다. 이후 정호용은 4월3일 대구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안기부의 밀착감시와 방해로 중도에 사퇴했다. 이렇듯 정호용은 민주화세력에 의해 광주학살의 수괴로 몰려있었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역시 이러한 여론을 뒤집지 못하고 여론 그대로 판결문에 반영했다.그야말로 마녀사냥이었던 것이다.
2018.1.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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