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장철현(장진성)에 대한 반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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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12-02 13:22 조회6,40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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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 장철현(장진성)에 대한 반대신문
<아래 내용은 11월 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에서 장진성-변호인-지만원 사이에 이뤄진 질문과 답변 내용이다. 질문지는 사전에 제출됐다. 장진성의 답변은 메모에 의한 것이지 속기사의 기록이 아니다. 워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이 사회에 엄청난 충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송 이유>
1. 피고인들은 시스템클럽과 뉴스타운에 게시돼 있는 아래 사진에서 붉은 점이 표시된 사람들이 현재 북한사람들이고 맨 앞에 노란 점으로 표시된 한 어린이를 당시 9세였던 증인이라고 판독하여 제382광수라고 발표하였는데, 증인은 광수가 아닐 뿐만 위장탈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의혹을 제기한 피고인들의 행위가 증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답: 발기도 안 되는 나이에 무슨 특수군입니까? 그 때 광주에 왔으면 그 때 탈북했을 겁니다
2. 중인은 탈북한지 만 6년만인 2009년 12월 30일, 탈북자동지화 홈페이지 ‘탈북자수기’ 게시판에 56,650자 분량의 “나의 탈북스토리”(증114)를 자세히 썼고, 2011.2.18.에는 이 내용을 보강해 “시를 품고 강을 넘다”라는 제목의 책(증115)을 발간했고, 2011.3.28.에는 아시아방송(RFA)에 초대되어 상당한 시간에 걸쳐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전수일 기자와 인터뷰(증113)를 했고, 2012.5.7.에는 중앙일보의 취재에 응해 이 책에 대한 기사(증112)가 나오게 되었지요?
네
3. 이 내용들 다 국정원 합심조(합동정보심문조)에서 밝힌 것들입니까?
네
<학력-경력에 대한 알리바이>
4. (증115) 증인은 탈북스토리를 자세하게 다룬 책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표지 내면에 증인이 나온 학교를 김일성종합대학으로 기술했지요?
네
5. 증인은 북한에서 군복무를 했습니까?
입대는 안 했고, 통전부에 근무하면서 군복을 1년 반 입고 있었다
6. 입대해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군 복무 이제는 누구나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7.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증인 시대에 김일성 종합대학을 가려면 김일성 로열패밀리가 아닌 이상 모두가 10년에 이르는 군복무를 마쳐야 한다고 하는 데 로열패밀리가 아닌 증인은 무슨 이유로 군복무를 면제받았습니까?
군복무 안 해도 김일성종압대학 다 갈 수 있다
8. 증인을 취재한 언론들의 기사를 보면 증인이 나온 학교는 “평양음악무용대학교’로 소개돼 있고, 증인의 책(증115)에는 김일성 종합대학으로만 기재돼 있는 데 어떤 것이 사실입니까?
통전부가 차출하면 김일성종합대학에 위탁교육을 시키고, 졸업과 동등한 취급을 해준다. 위탁교육은 학교에 안 나가도 되는 제도다.
9. 인터뷰 내용들과 그 외 자료들을 보면 증인은 1971년 3월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출생했고, 1994년 24세로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했고, 평양음대 시절에 썼던 시가 김정일의 눈에 들어 1994년 졸업 즉시 조선중앙방송국 기자로 특채됐고, 1996년부터 노동당 통일전선부 101호 연락소 소속 시인으로 발탁되었고, 거기에서 8년 동안 남한의 민중시인‘김경민’이라는 가명으로 시를 써서 남한운동권에 내려 보내는 일을 하다가 갑자기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에 탈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맞습니까? (증112 1쪽)
네
10. 증인은 언제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이사했으며, 이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1987년
11. 인민소학교, 중고등학교, 평양음악무용대학에 가게 된 과정을 나이 차례로 간략히 말해주겠습니까?
부 답
12. 고등학교에서 곧바로 평양예술대학에 갔습니까? 아니면 고교를 졸업한 후 3년짜리 사리원음악대학과 유사한 지방음악대학을 거쳐 평양음악무용대학을 갔습니까?
콩클에서 2등 해 평영음악무용대학 갔다
13. 증인의 부친 또는 모친은 북한의 핵심계급 증 핵심계급인 것으로 짐작되는 데 부친이나 모친의 약력을 간단히 말해줄 수 있습니까? 탈북을 감행했던 2004년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얼마였습니까?
대답 못한다, 판사: 대답하라, 68세였다
14. 평양음악무용대학에 가려면 먼저 핵심계층에 속해야 하고, 특출한 실기 재능이 있어서,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의 각 단계에서 천재적 특기가 인정된 학생들을 상대로 치르는 특기테스트에 패스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까?
네
15. 평영음악무용대학에 가기 전까지 증인의 어릴 적 실기 특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퉁소를 개량한 악기다.
16.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의 특기분야는 민족기악학과, 양악기악학과, 성악학과, 작곡학과, 지휘학과 등에서 어느 분야였습니까? 혹시 ‘민족기악학과’가 아니었습니까? 무슨 악기를 다루었습니까?
민족기악학과다
17. 증인 시대(1971년생)의 경우, 특기과정을 제외한 북한의 모든 대학은 군복무 10년을 마친 후에 입학할 수 있었지요?
아니다. 특기대학은 물론 일반대학도 꼭 군대부터 먼저가야 하는 것 아니다(주: 탈북자들 말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님)
18. 증인은 1994년에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후 음악특기나 무용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곳에 가지 않고 곧바로 조선중앙방송 기자로 특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 어문학부에서도 시와 소설 쓰기를 배우는 창작과와 기사를 쓰는 신문학과가 따로 있을 정도로 시를 쓰는 것과 기사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분야인데 시 하나를 잘 썼다고 하여 곧바로 그 엄청난 중앙방송국 기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까?
김정일이 인정하면 어디든 간다
19. 조선중앙방송국 기자생활은 얼마동안 하였습니까?
2년이다
23. 기자가 되려면 남한이나 선진국에서처럼 스파르타식 수습기간이 필요했을 터인데 증인은 그런 과정 없이 곧바로 기자증을 받아 기사를 썼습니까?
8개월간의 신원조회 기간이 있었다
24. 만일 그랬다면 그 연유가 무엇입니까?
질문생략
25. 김일성 종합대학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다녔습니까?
1997부터99까지 3년이다. 통전부 101연락소 근무하면서 어떻게 김일성종합대학 다녔는가? 졸업증이 필요해서 적만 걸게 했다.
26. 북한에서는 평양음악무용대학과 김일성종합대학이 쌍벽을 이루는 명문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피고인 지만원이 많은 탈북자들에 알아본 결과 한 사람이 분야가 전혀 다른 이 두 개의 명문대학을 연거푸 나올 수는 없다고 말들 하고, 더구나 음악 또는 무용을 전공한 사람이 ‘학문분야가 전혀 다른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에 다시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들 하는데, 증인이 이러한 관념을 초월했던 이유와 과정을 말해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사례가 증인 말고 또 있습니까?
북한을 몰라서 그러는데 많이 있다
27.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에는 작가를 양성한다는 창작과(시,소설)와 신문학과(신문기사) 등이 있습니까? 증인은 어느 학과를 나왔습니까?
창작과다
<핵심 중 핵심으로 발탁된 과정 알리바이>
28. 증인이 평양음악무용대학을 나왔다면 그 직후의 보직이 음악-무용과 관련된 직책이어야 하지 않는가요? 인터넷을 보니 2001년부터 2004년 1월 초까지 증인은 인민군 해군협주단 배우를 했다고 하던데, 증인이 음악이 아닌 ‘시’를 가지고 북한정권에 충성하였다면 북한정권은 증인의 평양음악대학 수학기간 5-6년은 물론 어려서부터 많은 학교당국들이 길러준 남다른 특기 재능을 사장시킨 것이 아닌가요?
협주단 작가로 근무했다.
29. 증인이 이수한 음악무역대학은 몇 년 제였습니까?
아동 때부터 13년이다
30. 예술대학 5-6년 과정에서 음악-무용공부를 한 사람이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한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시를 썼고, 조선중앙방송국 기자로 특채되었다면 증인은 이미 학문분야의 경계를 넘나들고, 수습과정도 생략한 천재라는 결론인데, 이러한 천재가 단지 시를 쓰기 위해 구태여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또다시 4년 동안 다니면서 귀중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위탁교육 받았다. 실제로 나가진 않아도 한국의 대학원처럼 적을 걸고 3년만에 졸업장을 받았다.(주: 그가 기자들에게 말하고 탈북스토리에 기록한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4년제의 가장 엄격한)은 허위였음이 드러난 것)
31. (증112 2쪽) 증인은 2012.5.7.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영장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는 시를 썼고, 그 시가 1999년 5월 22일 노동신문에 실렸다 했습니다. 이 시에 대해 김정일은 “선군시대의 모범 시”라 극찬했고, 증인에 대해서는 “나의 작가”라 말했다 했는데, 여기에서 ‘영장’이라는 의미는 영도하는 장군 김정일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영장의 총대 위에 인민의 희망과 행복이 있다는 뜻인가요?
네
32. 증인의 증언(증112)에 의하면 선군정치를 찬양한 이 시로 인해 증인은 28세의 나이로 당시 58세였던 김정일을 두 차례 만났는데 그때마다 김정일이 외로움을 탔는지 “자꾸 울더라”고 하였습니다. 북한의 지존 내지 존엄으로 신격화 된 당시 김정일이 28세의 신참 시인을 두 차례씩이나 불러놓고 “자꾸만” 울었다는 것인가요? 그랬다면 이는 세계적인 뉴스 감 일터인데. 증인은 증인을 김정일 이상으로 신격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증인은 이런 이야기해서 다른 탈북자들로부터 비난 받지 않았는가요?
극히 한 두 사람에게만 말했다. 인터넷에 중앙일보에 인터뷰 보도가 떴느데요? 묵묵부답
33. (증112, 2쪽) 증인은 탈북스토리에서 “한국 대학가에 떠돌던 상당수 민중시가 통전부 시인들의 작품이었다”고 말했는데 탈북해 남한에 와서 보니 증인의 시들이 한국 대학가나 운동권에 얼마나 퍼져 있던가요? 있었다면 시의 제목들은 무엇이고 언제 쓴 것들입니까?
나는 그런 시 안 썼다(주: 질문 9, 남한의 민중시인‘김경민’이라는가명으로 시를 써서 남한 운동권에 보냈다는 말은 거짓임)
34.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라는 시도 위‘선군정치 찬양시’를 썼던 1999년에 썼다고 했지요?
네
35. 이 시는 몸이 아픈 어머니가 딸을 시장에 내놓고 100원에 팔아 그 돈으로 빵을 사서 딸에게 먹였다는 북한체제 고발시였는데 만약 이 시가 발각되면 증인의 말 그대로 반동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지요?
네
36. 이 시가 남한에 발표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고 그 후로도 증인은 여러 개의 애국시를 발표해 남한사회 일각에서 “가장 애국적인 시인”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지요?
모른다
37. 결국 증인은 같은 1999년에 김정일에 충성하는 시와 김정일을 고발하는 시 두 개를 썼다는 결론인데, 그렇다면 “영장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는 선군정치 찬양시는 양심을 속이고 쓴 시가 되는 것입니까? 영혼으로 쓴 시가 아니었는데도 그 시가 김정일을 “자꾸만 울렸다”는 것입니까?
속이고 썼다. 김정일이 운 것은 내가 쓴 시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 시 때문이었다
38. 시인이라 하면 전 세계적으로‘양심의 영역’인 것으로 공인돼 있습니다.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 해도 한 사람의 시인이 한 순간에 시 두 개를 써서 하나는 김정일에 바쳐 입신출세를 하고, 다른 하나는 ‘김정일 이 마귀야’하는 시를 썼다는 것은 사상체계를 떠나 시를 ‘영혼 없는 도구’로 활용한 것으로 이는 증인이 써온 ‘애국시’마저 의심받게 하고, 더 나아가 증인의 모든 글들을 정략적인 글들인 것으로 의심받게 하는 대목이 아닙니까?
부답
39. 101연락소에 가서 대남 선전 모략 시와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북한권력층에서 핵심 중 핵심층에 속하는 계급이고, 더구나 증인은 김정일을 두 번씩이나 만났는데 그것도 20분 이상씩 만나 “김정일 접견자”(증115, 72쪽)로 분류돼 영광을 누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이 이상 무엇이 부족해 아버지, 어머니, 부인, 어린 아들, 누나, 매형, 조카 등을 ‘3족을 멸하는 연좌제’라는 지옥으로 내몰고 혼자서 탈북했습니까? 체제에 대한 순수한 염증인가요 아니면 북한에서 범한 범죄 때문인가요?
판사가 질문 제지
40. 남한에서는 대통령이라 해도 법의 살얼음판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는데 반해 북한의 핵심계층은 남한의 대통령도 누리지 못하는 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자유공간도 넓어서 옛날 이조시대의 원님과 같은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고위층 탈북자들의 증언입니다. 증인도 이 책에서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장식된 신분증의 위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런 분위기를 많이 소개했습니다. 맞습니까?
네
41. 증인은 증인의 책(증115) 제 45쪽에서, 증인과 친구가 폐가에 들어가 있었고, 상용아저씨가 자물쇠를 밖에서 채운 아주 추운 방에서 두 사람이 북한에서 겪었던 “지긋지긋한 나날들에 대해 장시간 이야기 했다” 하였는데 북한에서 부러울 것 없이 출세의 가도를 달린 증인이 당했던 그 지긋지긋했던 나날들에 대해 예를 들어 간단히 소개할 수 있습니까?
당 조직이 지긋지긋했다
42. 당시 증인의 본명은 무엇이었습니까? 장철현이 아니라 위철현이 아닌가요? 본인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라 숨길 것이 없을 것 같은 데 왜 위철현이라는 본명을 숨기고 장진성 또는 장철현으로 활동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럴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말 못한다
43. 대동강구역에 문수동이 있습니까? 증인과 연관이 있는 지역입니까?
판사님, 이런 질문 제가 왜 받아야 합니까? 변호사는 왜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이런 사생활을 질문하는 것입니까? 변호사: 문수동과 연관이 있느냐 묻는데 왜 그렇게 흥분합니까? 재판장: 답을 하시오. 장진성: 노코멘트한다
44. 증인은 그 문수동에서 처와 아들(위금성)이랑 결혼생활을 했었습니까?
노코멘트한다
45. 증인의 경력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증인이 밝힌 이해하기 복잡한 경력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에 떠 있는 간단한 경력입니다. 증인이 인터뷰 한 내용들과 직접 쓴 기록들에 의라면 증인은 1994년 평영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중앙방송국 기자를 하다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1996년부터 통전부 산하 101연락소에서 시를 수단으로 대남공작을 하다가 갑자기 탈북할 결심을 내렸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증인은 1994년 평영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양중앙방송국이 아니라 평양방송위원회 TV총국 예술분야 기자를 하다가 2001년부터 2004.1. 탈북 할 때까지 인민군해군협주단 단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국정원에 다 있다. 나는 특별히 황장엽 안가에서 조사 받았다. 내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다면 국정원이 나를 국정원 산하 연구소에 10년씩이나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게 했겠느냐? (주: 국정원이 위장 탈북자를 세탁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101연락소가 탈북 가능한 기관인가에 대하여>
46. 101연락소에는 매일 출퇴근했나요?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은 언제였습니까?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다
47. 101연락소는 숙소까지 영내에 마련돼 있는 북한판 호화시설이고, 바깥 출입이 매우 까다롭다는 것이 알려진 상식인데, 증인은 영외로 자주 나가 친구들을 접촉할 수 있었습니까?
밖에서 출퇴근 한다
48. 101연락소에서는 당시 달러로 환산해 몇 달러의 월급을 받았습니까?
모른다. 그럼 북한 화폐로는 얼마인가? 2,500원이다(주: 25-30달러)
49. (증113의 3쪽) 증인은 2011.3.28. 자유아시아방송에서 탈북당시 미화 몇 천 달러를 가지고 출발했고 그 중 700달러를 중국 국경지역에서 처음 만난 창용-아저씨에게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지참했던 달러는 정확하게 얼마이며, 어떻게 구한 것입니까?
2-3천 달러였다
50. 혹시 3천 달러가 아니었습니까?
질문 생략(제보자가 3천달러라고 했음, 매월 25달러 받는 사람이 북한에서는 장관급 총리급에게도 천문학적 규모의 3천달러를 어떻게 구했는가? 공작의 냄새가 나는 대목임)
51. 북한에는 중앙당, 통전부, 인민무력부, 보위부, 사회안전부, 각종 연락소 등 기라성 같은 기관에서 핵심 일꾼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직책과 계급이 높을수록 그리고 핵심당원일수록 이유 없이 자리를 비우면 곧바로 발각이 되고 수배령이 전국으로 쫙 갈리기 때문에 북한에 사는 고위급은 아무리 탈북을 하고 싶어도 거미줄에 걸려 직접 탈북하지 못하고 외국 루트를 통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하던데 핵심 중 핵심계층에 속하는 증인이 평양에서 버젓이 기차를 타고 두만강에까지 유유히 탈출했던 전례가 또 있습니까?
있다
<함께 탈북한 친구 황영민에 대하여>
52. 증인은 황영민을 언제부터 친구로 사귀었습니까? 얼마나 자주 만났으며, 어디에서 주로 만났습니까? 그 친구는 거주지가 어디였습니까?
노 코멘트다
53. ‘나의 탈북스토리’ 제8쪽입니다. 증인 등이 살인혐의로 수배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한 창용아저씨에게 증인은 “나는 중앙기관에서 근무했고 친구 같은 경우 김정일 가까이서 10년을 근무했다는 점, 체제를 비관하고 남조선으로 갈려고 한다는 것까지 솔직히 말했다” 고 썼습니다. 황영민이 근무한 기관은 무슨 기관이었으며 무엇을 담당하였습니까?
노코멘트다, 왜 말하지 못하느냐? 왕재산 악단이다.(주:왕재산경음악단을 의미, 냄새를 맡아보면 위철현과 황영민은 같은 계열의 악단에서 자주 만나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장진성 역시 김일성 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과를 졸업해야 갈 수 있다는 101연락소에 근무한 것이 아니라 해군협주단에 근무하다 자금 3천 달러를 누군가로부터 받고 동반 탈북한 것으로 추정됨)
54. (증115의 41쪽) 증인은 책에서 황영민의 조부가 김일성 최측근 동지라 북한에서는 물론 중국 교과서에까지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 했는데 그 이름은 무엇입니까?
김중순이다(주 김중순이라면 친구 황영민의 조부일 수 없다. 김중순의 이름으로 검색되는 북한 인물이 없다, 황영민이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55. 증인은 ‘나의 탈북스토리’(증114) 제16쪽에서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사람”이 황영민의 장인이라 했고, 책‘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제70쪽에서는 심화조에 관련해 희생된 사회안전성(경찰청) 참모장 3성장군이 황영민의 아버지라 하였습니다. 사회안전성 참모장을 놓고 2009년에는 ‘친구의 장인’이라 했고, 2011년에는 ‘친구의 아버지’라 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왜 다르게 설명한 것입니까?
같은 이야기다. 장인이 맞습니까 아버지가 맞습니까? 아버지다
56. ‘심화조’는 “간첩을 찾아내는 심층조사 팀”이라는 뜻으로 작명된 숙청작업조였고, 심화조에 의한 숙청작업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2단계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1993년부터 시작돼 1999년까지 지속된 고난의 행군(300만의 아사자 발생)은 김정일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중앙당농업비서이었던 서관히와 그의 애첩 백설희 농업학박사가 간첩질을 하여 주도한 결과라고 뒤집어씌우면서부터 시작됐고, 이어서 김정일의 책임을 남들에 전가하기 위해 장성택, 채문덕, 사회안전부 참모장 등 사회안전성(남한의 경찰청) 간부 15명으로 하여금 주로 김일성 계열인 문성술, 서문석 등 2만5천명을 간첩으로 몰아 2년 동안 숙청케 한 것이 전반부 사업이고, 제2단계 사업은 “김정일에 충성한 모든 간부들이 간첩이라면 그 동안 김정일 정권은 누가 유지시켜주었는가” 라는 비난이 일고, 민심이 들끓자 재빨리 역풍을 일으켜 2만5천명의 숙청을 주도한 채문덕과 사회안전부 참모장 등 15명의 심부름꾼들에 직권남용죄를 씌워 2000년 초에 토사구팽 시켰다는 사건이지요?
네
57. 증인은 탈북 스토리 책(증115) 제70쪽에서 친구 아버지는 심화조에 속했던 인물이 아니라, 심화조의 전횡을 지적한 양심가라고 표현했고 그 양심의 죄로 인하여 숙청당했고, 그 죄로 황영민이 탈북하게 되었다 하였지요?
네
58. 증인은 모든 기록에서 참모장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았지만 당시 심화조 관련 사회안전부 참모장이라면 황윤모가 틀림없고, 역사의 기록들은 황윤모가 ‘심화조’의 핵심 중 한 사람으로 김정일에 이용당하다 토사구팽당한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이는 증인의 설명과는 딴판입니다. 증인은 역사를 왜곡한 것이 아닙니까? 무엇이 사실입니까?
같은 이야기다(얼버무려)
59. 증인은 2008년 월간지 신동아에 게재한 김대중의 분신으로 김대중을 당선시키기 위해 월북한 오익제에 대한 기획기사에서, 오익제가 자진해서 북으로 넘어 간 것이 아니라 통전부 공작에 의해 납북되었다며, 한국 당국의 판단과는 전혀 다른 요지의 글을 썼고, 이에 북한에 가있는 오익제로부터 반격을 받은바 있는데, 북한 통전부가 그를 공작해 데려간 목적과 과정을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까?
책에 다 있다
60. 증인은 2017.4.28. 비봉출판사를 통해 “수령연기자 김정은”이라는 책을 냈고, 그 요지는 “지금의 김정은은 사실상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꼬붕이다. 김정은을 제거한다고 해서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김정은 제거작전을 통해 그를 제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요지로 읽힐 수 있는 책이지요?
그렇다
61. 어찌 됐던 기록에 의하면 황윤모는 2000년에 역적으로 몰려 숙청당했습니다. 그의 아들 황영민은 물론 그 가문은 2,000년에 멸족되었어야 했는데 그 사건이 종결된 이후 탈북할 때까지 무려 4년 동안 그의 아들 황영민은 어떻게 해서 “김정일 가까이”에서 근무하면서 건재했습니까?
조사 중에 죽어서 멸문은 모면했다. 탈북스토리와는 다른 이야기 아닌가? 묵묵부답
<‘국경연선지역’ 통행증 발부에 대한 모순>
62. (증115) 2011.2.에 증인이 쓴 책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제14쪽에서 증인은 통행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일반통행증’, 다른 하나는 ‘특별통행증’이라 했습니다. 일반통행증은 내륙에서의 통행증이고, 특별통행증에는‘평양행’‘국경연선지구행’이 있다 하였고, ‘국경지역 특별통행증에는 빨간 줄 두 개가 가로 질러 있다’고 했지요? 여기에 더해 ‘DMZ지구행’특별통행증도 있습니까?
모르겠다
63. 인터넷과 탈북자들에 확인한 결과, 북중국경선에 접근하는 통행증은 빨간 줄이 아니라 푸른 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뒷밭침하는 언론기사가 있습니다(증116). 증인이 말한 빨간 줄 두 개가 그어진 통행증은 DMZ 방향으로 가는 통행증이라 하는데 어떤가요?
혼돈할 수 있는 내용이다.(주: 빨간 두 줄 통행증, 허구로 지어낸 말이라는 것이 증명됨)
64. 중인은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제15쪽에서 “평양시 보위원에서 백지통행증 2장을 100달러를 주고 불법으로 샀다” 말했습니다. 다른 한 장은 황영민을 위해 산 것으로 짐작이 되는 데, 그 많은 돈을 주고 두 장을 사서 왜 한 장은 사용하지 않았는가요?
부답
65. 통행증에는 ‘통행목적지’와 ‘통행목적’ ‘동행인원’을 쓰는 난이 있고, 증인은 거기에 증인의 필적으로 통행목적은 ‘출장’ ‘동행인원’란에는 ‘외 1명’으로 기재했다 했는데 통행목적지는 무엇으로 기재했습니까? ‘무산시당’으로 썼습니까? 그냥 ‘무산시’로 썼습니까?
무산으로만 썼다(주: 이는 탈북스토리와도 어긋나고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
66. 무산은 ‘무산시’가 아니라 2004년에도 지금에도‘무산군’입니다. ‘무신시’라는 글자가 통행증에 있었다면 증인은 즉각 의심 받았을 것인데 어떤가요?
질문 생략
67.‘출장’은 통행목적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통행목적에는 용무를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기재해야한다고 탈북자들이 말하는데 특별통행증 발급이 “출장” “외 1명” 이렇게만 기재해도 될 정도로 허술한 것입니까?
그렇게만 해도 된다
68. 황영민이 증인처럼 따로 통행증을 마련하지 않고 동행인으로 설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답
69. 통행증을 검문하는 보안원, 보위원 등이 “외1명‘ ”외3명’ 이런 식으로만 쓰인 통행증을 보면 증인 한 사람의 신분만 확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통행증에 이름이 특정돼 기록되지 않았는데도 통과될 수 있습니까?
그렇다
70. 피고인 지만원이 여러 탈북자들로부터 얻은 지식에 의하면 황영민의 경우에는 직장이 다르기 때문에 황영민이 속한 기관에서 중앙당을 통해 ‘동행자 의뢰서’를 발행해야 하고, 거기에는 동행자 명단이 기록되어 통행증에 부착되어야 하는데 그 의뢰서에는 아무나 함부로 위조하지 못하게 중앙당 직인을 찍어주는데, 이는 위조가 불가능하고, 거래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외1명’이면 그 1명의 이름인 황영민이라는 글자가 특별통행증에 기재돼 있어야 하고, 황영민을 증인과 동행하도록 허가한다는 중앙당 의뢰서가 필요할 것이란 것쯤은 남북한 모든 사람들의 상식에 속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증인은 어떻게 해서 의뢰서 없는 통행증을 가지고 그 무섭다는 수많은 검문과정들을 통과하리라 생각했습니까? 가짜 통행증은 만들 수 있다 해도 가짜 ‘동행의뢰서’는 만들 수 없다고들 말하는데 어떤가요?
그런 통행증 없다
<생략된 평양탈출과정과 기차검문>
71. 탈북당시 추위를 이기는 것이 매우 중요했을 텐데 탈북채비 복장, 옷에 보관한 지참물, 배낭에 준비한 물품 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후드 달린 파커나 보온용 운동화를 준비했었습니까?
그런 거 준비 안 했다(이 대목 매우 중요하게 음니해야 할 대상, 두만강을 통해 탈북할 결심을 하는 평양시민이 추위를 이겨낼 준비를 전혀 안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됨,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편히 왔다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72. 친구 황영민이 소지한 지참물과 달러 액수에 대해 말해줄 수 있습니까?
노코멘트다. 탈북스토리를 보면 황영민에는 단 1달러도 없었다고 돼 있는데요. 묵묵부답
73. 나의 탈북스토리 제16쪽을 보면 “나는 그날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친구의 장인에 대해서, 남한 서적들을 친구들에게 몰래 돌린 혐의로 국가보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았던 자신에 대해서 김광선에게 이야기해주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무슨 서적들이였습니까? 그 ‘엄격한 조사’를 받고 탈출을 결심하였는데 그렇게 중한 죄였다면 조사당국에서 조사 직후 증인을 풀어주지 않고 곧바로 구속시켰을 텐데, 북한은 중범죄자에 대해 도주우려를 고려하지 않고 조사만 하고 일단 돌려보내 줍니까?
부답
74. 북한에는 ‘말반동’ ‘라디오반동’ ‘신문반동’ 등 세 가지 반역죄가 있다 하는데 이는 말을 잘못했거나, 몰래 남한 방송을 듣거나, 이번 트럼프 미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한 내용이 뒷받침하듯이 신문에 나 있는 존엄의 초상을 훼손하는 것을 반역죄로 다스리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 증인의 경우는 이 중 어느 반동죄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반체제범이다. 아니 위의 세 가지 범죄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묵묵부답
75. 증인은 증인이 쓴 이 책(증115) 제72쪽에서 보위당국이 증인을 빨리 체포에 나서지 않은 이유를 증인이 김정일과 두 차례 20분 이상씩 만났기 때문에 ‘김정일 접견자’로 분류돼 증인을 체포하려면 김정일의 서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라 했는데, 탈북자들에 물어보니 이는 일반범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반역 반동 배신으로 확인된 범죄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합니다. 더구나 중앙당 핵심층 일꾼이 아무런 허가 없이 결근할 때에는 즉시 전국에 수배령을 발동하고, 가장 먼저 전파되는 곳이 열차, 10호초소, 국경연선지대’ 경비총국이라 합니다. 이 내용 맞는 말입니까?
맞다
76. 증인의 경우에는 설사 김정일 접견자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황영민에게는 그런 대우가 없습니다. 황영민이 속한 기관에서도 비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황영민은 김정일 측근에서 일한 사람이고 집안 성분이 원체 굵기 때문에 결근한 사실이 발견되면 그 즉시 전국 수배령을 내렸을 것이고, 그가 잡히면 증인도 잡히는 것 아니었습니까?
다 감안했다(주: 위철현을 금방 체포할 수 없는 이유 즉 김정일 접견자로 기록된 사람이라 즉각 체포를 할 수 없었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는 것임)
77. 증인은 ‘나의 탈북스토리’(증114) 제3쪽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다시 평양으로 들어갈까? 우리는 두만강이 옆에서 흐르는 둔덕의 레일위에 맥없이 마주 앉았다. 우리가 직장에 출근하지 않은지 벌써 3일이 됐어. 이 시간이면 벌써 평양에선 비상이 걸렸을 거야. 알잖아, 당 규정을! 이젠 돌아설 수 없어”증인은 증인과 황영민에 대한 수배령이 전국단위가 아니라 평양에만 국한해 내려져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북한보다 통제가 허술한 남한에서 일반범죄가 발생했다 해도 즉시 전국 수배령이 내려지는데, 북한에서 중앙당 핵심층 일꾼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졌고, 더구나 증인이 반동범죄에 대한 조사까지 받았다면, 즉시 전국비상수배령이 내려졌을 것이고, 그 수배령은 가장 먼저 열차 검문 조직과 10호초소,‘국경연선지대’경비총국에 “직통경비전화”로 전달돼야 일반상식과 일치하는 것인데, 증인은 두 사람에 대한 수배령이 언제쯤 돼야 열차, 10호초소, 국경연선지대’경비총국에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까?
부답
78. 증인은 증인의 위 저서(증115) 제11쪽에 무산역에 기차가 도착한 시각은 2004년 1월 25일 아침 6시였는데 그 시각은 기차가 3일 연착한 결과였다고 했습니다. 제 시간에 도착했다면 1월 22일, 오후 7시 15분이었을 것이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평양은 언제 몇 시에 출발했습니까?
1월 22일쯤 된다. 기억이 확실치 않다(주: ‘시를 품고 강을 넘다’에서는 무산역 도착 예정시각과 실제도착시간을 분 단위로 정확하게 기록했는데 평양역 도착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탈북스토리가 소설이라는 의미)
79. 탈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뛰는 가슴을 가장 스릴 있고 드라마틱하게 묘사해야 할 순간은 평양역에서 표를 끊을 때의 검문과정과 열차에 갇혀 수십 번도 더 받았어야 할 검문의 순간들이라고 생각되는데 증인과 “외1명”은 동행의뢰서 없는 불완전한 특별통행증을 가지고 이 과정들을 어떻게 다 통과했는지가 가장 궁금한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증인의 탈북스토리에는 이 핵심부분이 몽땅 빠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 데 왜 그랬습니까?
부답
80. 나무위키와 언론기사들을 찾아보면 평양에서 라진까지 가는데 23일이 걸렸다고 하고, 회령에까지 가는 데에는 빨리 가야 열흘이 걸린다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차의 80%가 전기차이고, 전기는 증인이 책에서 말했다시피 평양에도 하루에 4시간 밖에 흐르지 않고, 그나마 전압이 낮아 기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어떤 때는 며칠씩 정차하는 때가 있어서 차안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기도 하고 굶어죽기도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빨리 달리면 노후된 궤도가 휘어지고 나무를 베어 4각으로 다듬지도 못한 채 레일침목에 사용하기도 하고, 철로 자갈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철로가 뱀처럼 꼬불꼬불하여 움직인다 해도 시속 20km 이상의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증인 역시 책의 11쪽에서 “단선레일, 견인차 부족, 고장, 잦은 정전, 낮은 전압”이라는 단어들로 북한 기차의 열악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탈북과정에서 만일 증인이 증언 그대로 기차를 타고 무산역까지 갔다면 기차가 어떻게 달렸는지, 몇 번, 몇 시간씩 레일 위에서 정지해 있었는지, 기차 안에서 어떤 검문들이 있었는지, 기차 안의 온도는 얼마인지, 끼니는 어떻게 때웠는지, 기차를 탄 이웃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백미였을 터인데, 북한 철도노선 중 가장 길다 할 평양-무산 철로에서 겪었던 일들을 탈북스토리에서 생략한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부답
81. 증인이 탄 기차 내에서 검문은 몇 번 정도 있었으며, 검문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고, 두 사람은 각각 어떤 식으로 대처했는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동행의뢰서 없는 황영민에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까?
없었다
82. 기차가 가는 동안 대지에는 눈이 얼마나 쌓여 있었습니까? 눈이 내리고 있는 지역들도 있었습니까? 두만강 지역의 기온은 영하 몇도였습니까? 1월이면 영하 20-35도를 왔다 갔다 한다던데 맞는가요?
기억이 없다
<두만강 연선에서 보인 황당한 미스터리>
83. 증인은 책의 12쪽에서 무산역에서 내리자마자 눈보라가 확 휘몰아쳤고 날씨가 사나웠다 하였습니다. 그 지역에 눈은 얼마나 쌓여 있었습니까? 기온은 영하 몇도나 되었다고 보셨습니까?
모른다. 눈보라가 확 휘몰아쳤다는 것은 기억이 나고 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없다는 말이냐? 눈은 있었다.
84. 그 무산역에 오전 6시에 내렸다면 어두웠을 때인데, 그 사나운 눈보라를 맞으면서 걷기 시작해 하루 종일 100리 정도를 걸었다면, 발지국도 남기게 되고 눈 딛는 소리도 꽤 났을 텐데, 어떠했습니까?
그랬다
85. 무산역에서 백두산 쪽 상류를 향해 걸었습니까, 아니면 동해 쪽 하류를 향해 걸었습니까?
우물쭈물 하나다 ‘아래로’라 답했다
86. 증인은 책의 18쪽에서 신분증의 위세만 믿고 비포장도로를 걸었는데 1km마다 망루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잠복초소들이 있었고, 군인들은 지나가는 차량들과 사람들을 예외 없이 세워 이동경위를 물었다고 했는데 증인은 그 때마다 위압적으로 생긴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통과했고 때로는 말보로 담배 한 갑으로 통과했다 했지요? 국경선 경비가 참 허술하고 목가적이기까지 하다는 생각 들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87. 차량이 다니는 비포장도로라면 강에서 상당한 거리에 이격돼 있을 것이고 그 비포장도로는 국경선을 볼 수 있도록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촌락과 촌락을 잇는 것일 텐데 그런 길을 걸으면서 강폭이 좁은 곳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차도를 걸으면서 강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까? 보이는 곳보다는 안 보이는 부분이 더 많았지 않았습니까?
안 보이는 곳도 있었다
88. 증인은 자동차가 다니는 비포장도로에서 언제 강가로 다가 갔습니까? 낮입니까 밤입니까?
낮 12시다. 증인은 하루 종일 100리를 걸었다 했는데 아침 6시부터 낮 12시까지가 하루종일이라는 말인가? 묵묵부답
89. 증인은 칠흑 같은 밤 10시에 두만강에 발을 짚었다가 풀숲에서 병사가 불쑥 나타났다(증115의 19쪽) 했고, 책의 17쪽에서는 두만강에 와보니 풀 한포기 없는 민둥산이라 망연자실했다고 했는데 증인이 붙잡힌 곳에만 겨울 풀이 우거져 있었고, 그것도 경비병들이 바로 옆에 숨어있는 것을 모를 정도로 짙게 우거져 있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90. 증인을 발견한 경비경이 호각을 불었고, 불자마자 수많은 경비병들이 전등을 들고 증인을 둘러싸서 6중대병실(내무반)까지 연행해 갔다 했는데(증115의 19쪽) 그 거리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중대병실이 강변 가까이 있었습니까?
가까이 있었다. 얼마나 말었는가? 모른다. 몇분쯤 걸렸는가? 15분 정도다
91. 증인은 책의 22쪽에서 “왜 국경에 접근했습니까?”라고 묻는 중대장의 질문에 “우리당 위원회에서 무산시당에 들려 뭘 좀 알아보라고 지시주어 가던 중이었는데, 밤이 너무 깊었고, 춥기도 해서 군인병실이라도 찾아서 하루밤 자고 가려 했을 뿐인데. . ”이렇게 대답했다 했지요?
네
92. 이에 대해 묻겠습니다. 무산군에는 읍이 무산읍 단 하나 뿐입니다. 여러 탈북자들에 알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무산시당(사실은 군당)도 무산역도 다 읍내에 있다 합니다. 첫째, 평양에서 무산시당에 출장을 가려면 먼저 시당 당원이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야 하는 것이 남북한 모두의 상식입니다. 둘째, 증인은 무산역에서 내려 100리 정도를 걸어와 중대본부 막사에 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산시당을 향해 가는 도중이라 둘러대면 6중대막사가 무산시당과 무산역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 황당한 둘러댐을 믿으라고 말할 사람 이 남한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그랬다
93. 북한의 국경연선 경비 구조나 남한의 해안선 경비구조는 개념이 일치합니다. 아래 그림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국경연선 경비구조>
이 도면은 여러 탈북자들로부터 확인한 것입니다. 남한 해안선 경비도 구조가 똑 같습니다. 그림의 좌측으로부터 보겠습니다. 강이 있고, 강변이 있습니다. 그 강변의 내륙 쪽에 장애물 지대가 형성돼 있고, 뒤에 철조망이 있습니다. 장애물지대에는 사정에 따라 대못판이 설치된 지역도 있고, 너비4미터에 깊이 3미터 되는 함정이 패어진 곳도 있고, 목함지뢰가 설치된 곳도 있다 합니다. 그 다음에는 철조망이 있고, 사람이 뛰어넘을 수 없는 넓은 폭의 흔적선 즉 모래강이 이어져 있습니다. 잘 쓸어놓은 모래 위에 난 발자국을 발견하기 위해 모래강을 따라 순찰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순찰 길을 따라 초소들이 있고, 그 초소들을 관장하는 중대본부 막사가 내륙 쪽으로 나 있습니다. 맨 우측 도로는 읍과 읍을 연결하는 비포장도로인데 증인이 하루 종일 걸었다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이런 장애물은 지형과 경우에 따라 1겹 또는 2겹으로 되어 있지만 철조망은 늘 있다 합니다.
구글에서 ‘두만강 철조망’으로 검색해 발췌한 네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1>번 사진은 강변 경비철조망인데 여기에는 “국경표식과 철조망 등 변경시설을 파괴 이동하는 것을 엄격히 타격한다”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습니다. <2>번 사진은 중국 쪽에서 북한 초소를 찍은 것인데 북한병사가 감시경으로 강쪽을 감시하고 있고, 그 앞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습니다. <3>사진은 총을 메고 감시중인 북한 여군을 중국 쪽에서 망원렌즈로 촬영한 것입니다. <4>번 사진은 중국 쪽에도 철조망이 있고, 중국감시병이 순찰을 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몇 장의 사진들만 보아도 철조망은 중국 쪽과 북한 쪽 다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상식입니다. 철조망이 없는 곳에는 흔적선이 있거나 다른 장애물이 설치돼 있다 합니다. 증인은 국경연선에 갖추어진 위 경비 시스템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까?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청조망은 2010부터 처음 생겼다(사실과 전혀 다름)
94. 증인이 차도를 따라 걷다가 강에 발을 터치하려면 수많은 초소의 감시망을 피하고 흔적선이라는 모래강을 넘어야 하고 철조망과 장애지대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증인의 수기에는 마치 이 모든 장애물이 단 한 개도 설치돼 있지 않은 환경, 남한의 여느 강변 정도에서 행동한 것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증인은 1월 25일 밤 10시에 강가에 있었다 했고, 26일 낮에는 내륙방향에 있는 철로에 앉아 있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낮에 강가에 가서 강의 얼음 위를 달렸다 했습니다. 장애지대, 철조망, 모래강을 세 번씩이나 건너지 않으면 증인의 글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정말 이 모든 장애물이 전혀 없었습니까?
장애물 없었다
95. 책의 22쪽에는 1월 25일 밤 10시, 6중대장이 증인의 출장사실을 무산시당에 확인해보라 해서 부하가 전화를 걸었는데 하늘이 도와 마침 전기가 나가서 전화가 불통이었다고 했습니다. 맞지요?
네
96. 그런데 전화와 전기는 무관합니다. 병영공화국인 북한에서는 물론 남한에서도 유선전화와 무전전화는 전기가 아니라 배터리와 자석으로 운용됩니다. 정전이 돼서 전화가 불통된다는 말은 군출신인 피고인 지만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다 전쟁은 언제나 야전에서 밀고 밀리면서 하는 것인데 정전이 됐다 해서 통신이 두절되는 시스템이라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증인은 평양에도 전기는 하루에 4시간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러면 국경변방에는 전기가 하루에 잘해야 두 세 시간 흐르지 않겠습니까? 통신 없는 국경경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 부분 표현은 너무 황당해 보입니다. 정전이 되면 탈북을 막는 국경선 경비통신망이 정말 두절됩니까?
부답
97. 시를 써서 남한 운동권에 보내는 101연락소 직원이 먼 지방 군당에까지 출장을 간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일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서로 다른 기관에서 일하는 당 일꾼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변방 군당에 출장을 나간다는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어 줄 사람, 이 남한에서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증인의 말에 의하면 국경 경비중대장과 소대장, 평양역 및 무산역의 수많은 공안요원들, 기차 속의 공안요원들, 국경연선에서 만난 수많은 경비-공안 요원들이 줄줄이 다 이런 경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무산역에 도달할 때까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검문자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까?
없었다. 있었다 해도 달러로 해결했다(이런 이야기 탈북스토리에 없었다. 단지 말보로 1갑이면 다 해결됐다고 기록했다)
98. 6중대장은 몇 살쯤 되어 보였습니까? 증인보다 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내 나리 또래였다
99. 군인들 중에도 계층상 중앙당 소속 일꾼들도 있지요?
모른다(주: 북한에서는 누구나 다 군대 10년 복무한다)
100. 중앙당기관원 신분이면 다른 신분의 나이 먹은 사람,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반말을 합니까?
그렇다
101. 증인은 책(증115)의 23쪽에서 “그럼 내일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 좀 자게 해줘, 어? 중대장! 우린 피곤해”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 표현이 사실적 표현이었습니까?
중대장에 반말 하지 않았다
102. 탈북스토리’3쪽에서 증인은 “도강하는 방법은 기상천외야, 군인들이 우릴 보는 밤이 아니라 우리가 역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대낮이야, 지금 뛰자!” 이렇게 말했고, 이어서 증인과 황영민은 대낮에 두만강 얼음 위를 달렸고, 바로 그 때 여러 경비병들이 나타나 “저 놈들 봐라! 저 놈들 잡아라.” 소리를 치면서 증인 등을 향해 “격발장치를 당기며 총구를 겨누는 것까지 보고” 달렸는데(증114 4쪽) 경비병들이 총을 쏘지 않은 이유를 창용 아저씨로부터 들어보니 국제법 때문에 중국을 향해서는 총을 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였지요(증115 39쪽)?
네
103. 이어서 증인은 북한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해 탈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하였지요?(증113의 3쪽)
네
104. 그런데 구굴에서 ‘두만강 탈북 총격’을 검색하면 두만강을 건너다 총격을 당해 사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뉴스들이 많이 있던데 증인의 말은 사실과 다른 것 아닙니까? (증116)
쏠 때도 있고 안 쏠 때도 있다(이 말은 코미디)
105. 책(증115)의 제25쪽에는 증인이 경비중대의 병실(내무반)에서 밤을 지나는 동안 “경비병들의 순찰근무 교대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하였고 초소로 나갈 때마다 병사들은 실탄과 심지어는 수류탄으로 무장하곤 했다”고 기록돼 있고, 증인의 말대로라면 그 실탄과 수류탄은 도강하는 탈북자들에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실탄과 수류탄은 어떤 경우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까?
모른다
106. 증인은 북한에서 미화 ‘달러’면 다 통한다고 말하면서 달러만 가지면 수많은 검문과정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 달러가 힘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브로커를 통해야 합니다. 브로커들이 요소요소에 공안요원 한 사람 씩을 매수하여 마피아처럼 네트워크를 형성해 놓고, 마치 007 접선을 하듯이 그 매수된 공안요원이 근무하는 시각을 연결하여 강을 건너게 하고, 중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연결해 준다 합니다. 증인의 설명대로라면 증인처럼 중앙당 신분증과 위조통행증 그리고 뇌물용 양담배를 수십 갑만 준비하면 얼마든지 평양에서 두만강까지 갈 수 있고, 대낮에 건너가도 사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렇게 쉬운 탈북을 왜 그렇게 어렵다고들 말하는가요?
부답
107. 증인이 경비병 막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풀려나 철로에 앉아있던 날은 2004년 7월 26일이었는데 이날 증인은 친구에게 “우리가 출근을 안 한지도 3일이 되었다”(증114, 3쪽) 하였습니다. 연착시간만 3일이고, 여기에 하루 밤만 보태도 4일입니다. 여기에 기차가 실제로 달린 시간을 보태면 가장 이상적으로 달렸다 해도 증인이 사무실에 안 나간 날은 줄잡아도 10일은 될 것입니다. 증인의 탈북수기는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3일이 맞다(주: 자세 많이 흔들림)
108. 증인이 평양을 떠났을 바로 그날이나 혹은 그 다음날에는 전국 수배령이 내려져 있어서, 증인은 적어도 1주일 이상을 타고 갔을 평양-무산을 가던 기차 내에서 곧바로 체포됐어야 하는 것이 많은 탈북자들의 말이고,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인데 이런 상황을 도외시하고 증인은 마치 거칠 것이 없는 사람처럼 ‘당마크가 찍인 신분증’ 한 장 가지고 다 통과했다고 하니 한순간에 상식이 다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증인의 탈북스토리는 현실이 아니라 소설 아닙니까?
부답
<달러 보관의 미스터리>
109. 책 21쪽에서 증인은 품속에서 신분증을 꺼낼 때 절대로 발각돼서는 안될 노트 두 권이 함께 있었다 했는데 그 품속이라 하면 외투의 안주머니였습니까, 아니면 외투 속에 입은 또 다른 옷의 안 주머니였습니까? 노트의 크기와 두께는 얼마나 되는 것들입니까?
안주머니였다(탈북스트리에는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가 외투를 폐가에 남겨두고 도망해, 다 분실했다고 했음)
110. 증인은 탈북스토리 제7쪽에서 중국 쪽 국경지대에서 가장 먼저 만난 창용아저씨가 “가죽 잠바와 바지를 꺼내 던지며 함북 말투로 말했다”고 표현했는데 그 때 그가 내준 가죽잠바와 바지로 옷을 바꿔 입었습니까?
씨니컬한 표정으로 비웃다가 대답: 바꿔 입었다(가죽점퍼는 보온 성 낮음)
111. 이때 달러는 어디에 보관했고, 노트 두 개는 어디에 보관했습니까? 달러와 노트 둘 다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둔 채 그 외투를 배낭에 넣었습니까?
그런 거 왜 묻느냐, 다른 질문 하라
112. 친구는 어째서 달러를 1푼도 보관하지 않았습니까? 친구는 달러 없이 맨손으로 증인과 함께 했습니까?
50달러 준 기업 있다(이는 무일푼이 됐다는 탈북스토리와 배치)
113. 친구와 함께 탈북을 하려면 달러는 두 사람에 각각 분산해 지녀야 했을 터인데 ‘나의탈북스토리’와 책을 보면 증인의 친구는 달러를 전혀 지참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무슨 이유로 달러를 분산해 소유하지 않았습니까? (증114의 11쪽, 증115, 51쪽: "똑똑히 들어, 우린 지금 한 푼도 없어, 빈털터리라고, 그러나 있는 척 해야 돼, 저 사람은 가면 그만이지만 우린 저 사람을 잃으면 끝이야, 내 말 알겠지?")
부답
114. (증114, 9쪽) 증인은 2009년 12월에 기고한 “나의 탈북스토리” 제9쪽에서 창용 아저씨 “장모집 건너편 빈집”에 자물쇠를 밖으로 채우고 “삼일”간 있었는데 마지막 날 밤중에 공안들이 들이닥친 황망한 순간에서도 황영민이 방바닥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어서 증인이 “뭘 해?”하면서 친구의 등을 세차게 때린 후 도망을 했고, 결국 두 사람은 산중턱에서 만났는데 그 때 중인은 돈이 들어 있는 외투와 짐 보따리를 챙기지 못했고, 황영민은 방바닥에서 증인의 노트 두 권을 챙겨왔는데 그 노트에는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라는 시 등이 있었다 하였지요?
네
115. 그 노트 두 개는 방바닥에 개별적으로 놓여 있었나요?
배낭 위에 있었다
116. 그렇다면 황영민은 노트 두 권은 챙겼으면서 수천 달러가 들어 있는 배낭이나 외투를 챙기지 않았고, 증인 역시 달러를 챙기지 않고 도망했다는 것입니까?
부답
117. 무사히 도망을 하여 산 중턱에 도달하고 보니 증인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라 했지요?
네
118. 증인은 영하 20도를 맴돈다는 지역의 폐가에서 신발을 신고 닭털 침낭 속에 들어가 있어도 견디기 힘든 밤에 외투도 벗어놓고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도 벗어놓고 잠을 잤다는 것인가요? 난방도 없는 폐가에서 무엇을 깔고 무엇을 덮고 잤다는 것입니까? 신발을 신고 외투를 입고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 아니었습니까?
작은 난로 같은 것을 준 것 같다(탈북스토리에 없는 말)
119. 부부가 탈북을 함께 해도 달러는 부부 사이에 분산시켜야 하고, 이에 더해 각자는 몸의 이곳저곳에 달러를 분산시켜 몸의 일부로 잘 간수해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증인과 황영민은 노트 두 권은 생명처럼 여겼으면서도 달러는 외투에 넣어두었다가 몽땅 유실하였다 했습니다. 상식에 매우 어긋나 보이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부답
<송아지와 황소 이야기의 황당성>
120. ‘나의 탈북스토리’ 제10쪽, 폐가에서 탈출할 때를 묘사한 글입니다. 매우 중요한 글이라 다시 읽어드립니다. “나는 낮에 내다보군했던 높은 울타리를 어떻게 날아 넘었는지 모른다. 앞에서 달려가는 형체를 쫓아 정신없이 뛰면서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친구인줄로만 알았던 앞의 그림자가 송아지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돌아섰다.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면서도 우리가 숨어있던 빈집 근처를 어지럽게 비치는 12개의 손전등을 빠짐없이 세었다. 저 12개 불빛 중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나의 은밀한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가 처음 뛸 때와 추정방향을 추적해보려 애쓰며 허리를 굽히고 이리저리 헤맸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손전등 불빛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오고 있었다. 허둥거리던 나는 마침 앞에서 서성거리던 황소 뒤로 몸을 숨겼다. 공안과 나와의 거리는 불과 5미터도 안되었다. 황소 배 밑으로 뻗은 내 두 다리를 보지 않을까 숨이 컥컥 막혔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황소는 비실비실 피하다 못해 달렸고 나는 그 뒤에 숨어 어쩔 수 없이 가시나무에 찔리고 뜯기는 채로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찰나의 위험을 넘기는 동안 어느새 날이 푸름푸름 밝아왔고 공안 승합차가 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때야 쑤시다 못해 무감각해진 발이 양말도 안 신은 맨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에 관련해 물어보겠습니다. 암소도 아닌 황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고, 송아지도 뛰고 황소도 뛰었다면 중국에서는 소를 외양간에 키우지 않고 방목하는 것인지, 폐가 옆에 누가 황소와 송아지를 키우는 것인지, 도망을 하는 입장에서 친구가 폐가 근방에 있을 거라 생각해서 멀리 도망쳤다가 다시 폐가를 찾아왔다가 공안을 불과 5미터 앞에 두고 황소와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뛰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쫓기는 입장에서 12개의 불빛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어야 “나의 은밀한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표현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마치 무협지를 읽는 것처럼 황당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해명해 줄 수 있습니까?
12개의 불빛은 세었다.
121. ‘나의 탈북스토리’17쪽과 책의 85쪽에는 “그날 밤 연길에서 멀리 떨어진 용정리 어느 집 소외양간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백 원을 들여다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마도 중국공안의 존재를 하얗게 잊어본 적은 그 밤이 처음인 것 같다”고 되어 있는데, 이 대목을 보면 중국도 소를 방목하지 않고 외양간에서 키우고 있는 것 아닌가요? 책의 86족에서는 “소 울음소리에 깨어났다”고 했는데, 1월이면 영하 20도를 맴돈다는 지역의 한 외양간에서 소도 누워서 잠을 자고 증인 및 친구도 “나란히 누워 잤다”는 것인가요?
부답
122. 증인은 2004년 1월 26일 낮에 강을 건너 중국연선에서 한 여성을 만났고, 그 여성이 손가락질 해주는 대로 창용아저씨 집에 가서 아저씨를 만났고, 만나자 마자 20분 후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연길 시내 창용아저씨의 장모집에 도착했고, 도착 즉시 아저씨는 자기 집 부인에 전화를 걸어 공안이 장모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아가지고 증인 등을 감추어주기 위해 1월 27일 새벽 2시에 장모집 마즌편 폐가로 들어갔다 했습니다. 나의 탈북스토리’제8쪽에는 증인과 황영민이 중국공안에 살인자들로 수배돼 있다는 사실이 담겨있고, 제9쪽에는 중국에서 증인을 맨 처음 만난 여성이 밀고하여 창용아저씨까지 수배대상이 되어 있고, 그래서 공안이 창용아저씨 장모집까지 찾아온다 하여 장용아저씨가 증인 등을 2004년 1월 27일 새벽 2시에 장모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폐가의 방으로 들여보낸 후 문을 밖에서 잠근 후 여러 날 동안 계속 장모집에 머물면서 증인 등을 도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장모집에 계속 머물면서 1월 28일 밤, 29일 밤, 빵을 사다 증인 등에 공급해주었습니다. 1월 30일 새벽 시간대에 증인은 증인 등을 잡으려 들이닥친 공안 12명을 따돌리고 한차례는 송아지와 함께 뛰었고 그 다음엔 황소와 함께 뛰어 산 속으로 도망을 가서 먼저 도착한 황영민을 만났다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맨발로 하루 종일 산속에 있다가 그날 저녁 때 다시 장모집에 왔고, 아저씨는 공안이 증인의 짐보따리를 다 가져 갔다 하면서 옷가지를 내주고 모포 한 개를 주면서 산에 가서 이틀만 더 있으라 했습니다. 산에서 하루를 지냈더니 아저씨가 30대 초반의 신광용씨를 데리고 나타나 증인 등을 인계했다고 했습니다(증114, 12쪽). 맞습니까?
네
123. 이와 관련해 묻겠습니다. 공안요원들은 증인과 황영민이 폐가에서 도망을 쳤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 도움을 준 창용아저씨도 체포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장모집을 향해 달려왔다는 공안이 아저씨를 그냥 방치하면서 아저씨로 하여금 며칠씩 증인 등을 도와주도록 많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틀 동안 빵을 사다 주게 했고, 도망 간 후에도 계속 장모집에서 만나게 했습니다. 한국 같으면 장모집은 잠복근무의 대상이 되어 아저씨가 나타나는 즉시 체포했을 것입니다. 중국공안은 증인 등이 남긴 배낭, 보따리, 외투, 양말, 신발, 수천달러의 현금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양말과 신발까지 버린 채 맨발로 도망갔다는 사실에 착안한 공안은 증인 등이 그 추위에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대대 연대 병력을 풀어 근방 산 속을 수색하고 즉시 창용아저씨를 체포해 추궁했을 텐데 이 세 사람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은 것은 도저히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증인의 스토리에 의하면 중국 공안에는 증인과 황영민이 살인자로 지목돼 있었고, 아저씨는 이 살인자를 은닉한 사람으로 지목돼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공안은 상식을 초월하여 더 이상 살인자와 은닉자를 추적하지 않고 방기했습니다. 그래서 증인 등과 창용아저씨가 거의 공안을 의식하지 않고 여러 차례 잠복근무 대상인 장모집에서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현실상황과 조금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 해명해 줄 수 있습니까?
잘 모르겠다(주:자포자기)
<기억에 일관성이 없는 부분; 사실로 쓴 스토리가 아니라 가공해 썼다는 증거>
124. 김광선이란 사람 증인과 관계있는 사람입니까?
판사가 생략시킴
125. 증인은 2011년에 펴낸 책(증115)의 77쪽에서 “백 위안, 그 돈의 가치”라는 소제목 하에 신광호와 헤어지면서 그로부터 백 위안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009년에 쓴 ‘나의 탈북스토리’제16쪽에는 증인의 탈북동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던 사람도 김광선이었고, 작별하면서 증인에게 백 위안을 준 사람도 김광선이었고, “훗날 한국으로 탈출한 김광선에게 백 위안에 대한 보답을 했고, 어제도 노원구에 사는 김광선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타이핑 에러가 아니라 “기억의 일관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증인의 책(증115)에는 김광선이라는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김광선과 신광호는 같은 사람이다
126. 증인이 쓴 책 44쪽과 45쪽의 내용이 다릅니다. 44쪽에는 폐가에서 3일을 보냈다고 했고, 45쪽에는 이틀을 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의 탈북스토리 제40쪽에서 증인은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듣는 순간을 “남을 살해한 도피자는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 자유의 선택을 살인으로 규정한 김정일 독재가 살해했고. 북한의 악법인 3대멸족이 살해했다. 내 친구는 이렇게 나이 30에 죽었다”, 책(증115)이 173쪽에도 “내 친구 영민은 그렇게 서른 살 나이에 죽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증인은 책(증115) 제12쪽에서 친구와는 동갑이라 하였습니다. 탈북당시 증인은 34세였습니다. 매우 중요한 포인트에서 중요한 날짜가 틀라고 나이가 틀린 것은 기억의 일관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증인은 또‘나의 탈북스토리’(증114) 제16쪽에서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사람”이 황영민의 장인이라 했고, 책‘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제70쪽에서는 그를 황영민의 아버지라 하였습니다. 사회안전성 참모장을 놓고 2009년에는 ‘친구의 장인’이라 했고, 2011년에는 ‘친구의 아버지’라 한 것입니다. 장인과 아버지는 혼돈할 사항이 아닙니다. ‘나의 탈북스토리’(증114) 제16쪽에는 “남한서적들을 친구들에게 몰래 돌린 혐의로 국가보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았다”고 기재돼 있는데 책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74쪽엔 증인의 행위를 놓고, 평양시보위부와 중앙당 통전부 사이에 관할을 놓고 알력이 생긴 가운데 평양시 보위부가 불법적으로 증인을 조사하려는 순간 탈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신광용에게 설명해주었다 하였습니다.‘나의 탈북스토리’(증114)의 제15쪽에는 신광용이 황영민의 친척집에 들어간 지 30분 후에 쫓겨나왔다 기재돼 있고, 책의 제63쪽엔 15분 후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피고인 지만원은 1980년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했습니다. 대공수사관들이 경위서를 여러 차례 쓰게 하는 이유는 쓰는 내용이 진실인가 가공인가를 가려내기 위한 것입니다. 가공으로 쓰면 여러 차례 쓰는 동안 가공사실이 튀어나오게 돼 있습니다. 수사과정에서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증인이 쓴 ‘탈북스토리’와 책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내용에는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중요한 사실이 표현할 때마다 다르고, 중요한 상황들이 현실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증인이 실제로 겪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증인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계를 상상해서 쓴 소설로 밖에는 인식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모순투성이의 탈북스토리가 국정원 등 합심조에서 어떻게 통과되었는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증인이 쓴 탈북스토리는 빈틈이 많고, 비현실적인 것들로 가득합니다. 이는 증인이 직접 경험한 현실이 아니라 상상하고 가공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증인의 탈북스토리는 상상해서 쓴 가공의 스토리가 아닙니까?
판사가 질문 생략시킴
<평양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유>
127. 증인은 ‘나의 탈북스토리’에서 증인의 탈북사실이 알려지면 증인의 가족들은 삼족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탈북자들 중에는 본인의 이름과 얼굴을 극구 공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이유를 보면 북한에 남은 가족 친지 친구들의 안녕 때문이라 답합니다. 이에 반해 증인처럼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고, 거기에 더해 북한체제를 노골적으로 폭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증인이 포함된 후자의 사람들은 왜 북한에 남은 사람들의 안녕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판사가 생략시킴
128. 최근 피고인 지만원이 우연한 기회에 탈북한 22세의 여성과 저녁자리를 같이 했는데 그 여성의 말이 참 놀라웠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탈북했는데 “매일 핸드폰으로 북한 아버지와 통화를 한다, 송금도 한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였습니다. 달러벌이도 탈북의 한 이유가 되고 있습니까?
판사가 생략시킴
129. 자유한국당 조명철 의원도 탈북자입니다. 그 사람의 가족들이 평양에서 건재하다는 말이 탈북자들 코너에 많이 떠다닙니다. 남한 방송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탈북자들 중 북한의 가족 친지들이 이렇게 무사한 경우가 더러 있습니까?
판사가 생략시킴
130. 2014.1.에 탈북해 종편방송 등에서 인기를 많이 얻었던 임지현이라는 여성이 4년 만인 2017. 7. 북한으로 다시 넘어가 한국사회를 비난한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보도들에 의하면 그녀는 보위부 출신 간첩이었다 하는데, 증인은 이 사실 알고 있습니까?
판사가 생략시킴
131. (증18, 311쪽) 1980 광주 현장에서 촬영된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피고인 지만원은 이 사진에 세 개의 붉은 박스를 쳤습니다. 이 중에는 1983년 탈북하여 가정도 꾸미고 국군정보사령부에서 대령까지 진급했다가 2001년 중국으로 도망한 신중철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비록 대위였지만 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와 머리가 좋아서 사단 참모장을 했다고 스스로를 과대하게 포장하였습니다. 피고인 지만원은 신중철과 함께 지낸 시간이 많이 있는데 참으로 말을 청산유수로 잘 하였습니다. 1983년 귀순하면서 제4땅굴 정보를 한국에 바친 대가로 한국에서 최고의 애국자로 행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간첩이었습니다. 증인은 그를 알고 있었습니까?
판사가 생략시킴
132. 아울러 피고인은 같은 사진에서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있었던 남성 두 사람, 여성 두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남성 두 사람은 똑같이 한조가 되어 광주에 왔다가 다시 한 조가 되어 탈북했습니다. 여성 두 사람은 2011 동시 탈북했다가 2014년 동시에 월북하여 대남비방 방송을 하였습니다. 최계순(68)과 박정숙(71)입니다. 증인은 이런 사실과 그 위험성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판사가 생략시킴
133. 증인은 위와 같은 위장탈북들이 계속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를 예방 또는 방지시킬 방법은 무엇입니까?
판사가 생략시킴
134. (증18 302쪽) 아래 사진은 1980.5.23. 전남도청에서 촬영된 한 장면을 두 컷으로 나누어 찍은 것입니다. 노란 점이 찍힌 50여명이 피고인 지만원에 의해 탈북자들인 것으로 판독된 사람들로 이들은 현재 남한에서 애국발언들을 열심히 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찍힌 한 장면의 사진 속 얼굴 50여명이 고스란히 서울에서 현재 국가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과 이들 대부분은 방송을 휘어잡으면서 화려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피고인 지만원은 사회에 공개하였고 동시에 2015.10.30.에 국정원에 신고하였습니다. 한 사진 속 인물 50명이 탈북자 신분으로 서울에 와서 화려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확률의 세계가 아니라 팩트의 세계일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12세의 어린 아이들이 박상학, 정성산, 강철환 등 5명 정도 있습니다. 당시 증인은 9살이었고, “아홉 살 짜리 특수군이 어디 있느냐”며 피고인 지만원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바 있지요? 아홉 살짜리 꿈나무가 없으면 열 두 살짜리 꿈나무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부답
135. (증18, 306-309쪽) 이들 50명 중 증인과 같이 위장광수로 발표한 사람들 중에는 탈북자동지회 초대 회장인 홍순경(전직 외교관), 요덕에서 15년동안 고생했다는 김영순, 국정원 산하연구소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고영환, 김일성 주치의 김소연, 유명한 기자 강철환, 삐라로 애국자 반열에 오른 박상학, 북민주화운동 공동대표 안혁, 수자원공사 김광일, 대왕버섯 회장 김유송,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영화감독 정성산, 국회의원 조명철, TV를 주름잡는 강명도, 황장엽, 김덕홍 등 유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 증인이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이들 중 “저건 아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피고인은 질병 환자다
136. 이들 중, 피고인 지만원에 협박을 하다 만 사람들이 여럿 있고, ‘9살짜리 특수군이 어디 있느냐, 지만원은 또라이다, 그 사람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험담하는 사람들, 생활에 지장이 있으니 저는 좀 빼 달라 솔직히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50명중 아무도 피고인 지만원을 상대로 고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만원의 애국행위에 대해 탈북자가 고소를 하면 역풍을 맞는다는 정서가 작용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사회에서 “애국시인”으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는 증인만 유독 고소를 한 이유가 있습니까?
탈북자 모두가 지만원 피고인을 정신병자라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증언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정신병자를 치료시키려고 나왔다
137. 피고인 손상대는 인터넷신문 뉴스타운 대표로 처음에는 지만원 피고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에 게시된 내용을 전재했다가 증인이 전화를 걸어서 게시물을 내렸습니다. 이는 뉴스타운이 증인을 비방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는데도 구태여 고소한 이유가 있습니까?
뉴스타운은 언론사다. 언론사가 이런 정신병자가 쓴 글을 게시한 것은 엄벌을 받아야 한다.
138. 증인은 2016.4월경 페이스북에(증117) “뉴스타운과 지만원을 영국에서 고소한다. 에이전트에서 연락이 왔다. 지만원의 정신이상한 낙서를 누군가가 영국에 알렸나보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의 랜덤하우스는 세계 최고의 출판사인데 거기에서 내 자서전을 발간했다. 에이전트는 내 인쇄만 관리해주는 게 아니라 나에 대한 모든 법적관리도 관리해주는 국제변호사다. 나를 9살의 남파간첩으로 비방한 것은 나뿐만 아니라 랜덤하우스에 대한 중대한 명예훼손이자 허위날조다. 책 계약금을 포함해 이후 인쇄까지 다 계산하여 고소하겠다 한다. 아마 몇 십억은 나올 것 같다. 최후통첩이다. 4월 20일 오후 5시까지 공개사과하라. 안 하면 영어로 된 법적 고소가 들어갈 것이다.”이런 글을 올렸지요?
그렇다
139. 법률적으로 이치가 맞지 않는 글로 보이는데 위 내용이 사실이었습니까? 아니면 겁을 주려는 것이었습니까?
사실이다
<얼굴 분석>
140. (증18의 189-193쪽 보여주며) 피고인 지만원은 함부로 판독한 것이 아니라 얼굴의 특징, 구조, 기하학적 얼굴지문이라는 정당한 영상분석 기법에 따라 분석하였는데 증인은 증인의 얼굴이 이렇게 분석되어진 것을 책이나 인터넷에서 자세히 보았습니까?
답할 가치 없다
141. (증20) 이마에서부터 미간, 눈썹, 눈, 산근, 코, 인중, 입, 턱으로 이어지는 형상등고선이 30년 전후의 시차가 난다해도 어릴 적 얼굴과 성인이 된 이후의 얼굴에 형상의 변화가 적게 일어나 두 얼굴의 모든 치수와 비율, 각 부위의 대면각, 각 부위의 등고선 등 모든 점과 면에서 #1과 #2는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분석하였는데 증인은 이 부분에서 틀린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까?
답할 가치 없다
142. (증20) 특히 광대점과 귓불 부위의 외형선이 특징적으로 일치하고, 이마의 대면각과 미간에서 산근으로 이어지는 3D입체 형상등고선이 완전하게 일치하고, 양쪽 눈의 폭과 거리, 양쪽 눈과 코와의 위치와 거리 폭과 간격이 일치하고, 명암과 음영의 농담으로 측정한 코의 높이가 일치하고, 이마의 골상각도와 안와상(눈두덩)의 골상각도가 연동되어 완전하게 일치하고, 안와상의 골상 등고선과 산근의 높이와 선형 그리고 면각을 나타내는 형상등고선이 완벽하게 일치하고, 눈썹이 위치한 비율과 눈과의 폭, 눈썹의 두께와 폭, 거리, 눈썹의 방향각과 볼륨, 눈썹과 미간골과 산근골과의 입체적인 3D형상, 그리고 눈썹을 받치고 있는 미릉골의 형상과 등고각을 살펴볼 때 #1과 #2는 일치한다고 판독하였는데 잘못된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까?
답할 가치 없다
143. (증20) 네모선 안에 있는 코와 인중, 법령과 위아래 입술과 턱의 형상이 일치하고, 코의 폭과 코끝의 라운드 각이 일치하고 인중의 폭과 면적, 대면각, 등고선, 등고면이 일치하고, 인중에서 윗입술의 상방향각과 등고면은 붕어빵처럼 똑같이 일치하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면적과 두께, 폭과 입을 벌린 정도 모두 일치한다고 분석하였는데 틀린 점이 있습니까?
부답
144. 증인은 황장엽과 증인의 얼굴을 영상분석기법의 모델케이스로 하여 인터넷과 ‘5.18영상고발’(증18, 89~93))이라는 대형 화보집에 게재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렇다
145. (증20) 지문은 모든 범죄현장의 입증지료로 쓰입니다. 지문인식은 지문의 중요한 부분들을 선으로 연결해놓고 그 도면의 외형이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지문에 도면을 그리는 지문인식을 넘어 얼굴의 중요한 포인트들을 연결하는 기하학적 방법을 얼굴인식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고인 지만원은 증인의 얼굴과 황장엽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얼굴지문을 그렸습니다. 그려보니 #1얼굴과 #2얼굴은 어느 점을 연결하더라고 기하학적으로 일치합니다. 이런 기하학적 분석의 잘못된 점을 지적할 있습니까?
관심없다
146. 김일성종합대 어문학부에는 몇 개 과가 있으며 과 이름은 무엇입니까?
시창작과 희곡창작과 소설창작 이런 것들 있다 (주: 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어문학부에는 5개과가 있다. 조선문학과, 창작과, 신문과, 조선어학과(문법), 한문과, 이것으로 보아도 위철현이 김일성종합대학 나왔다는 것은 허위다)
2017.12.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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