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폭동 10일간의 일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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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09-07 11:31 조회5,4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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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폭동 10일간의 일지 요약
5.18에서 “시민군”이라 불리던 집단은 그리고 5.18기념재단 타임라인에 기록된 “5월 22일 15:08 서울에서 온 학생 500명 환영식 거행”이라 공식 기록된 그 학생집단은 북한특수군이었다. 광주시민들이 공식적으로 5.18난동에 참여한 시점은 5월 25일, 북한군이 버리고 간 도청에 10-20대의 개념 없는 막노동자 80명이 호기심으로 한 사람씩 들어가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면서 5월 26일의 1일 천하를 누리다 27일 새벽 진압됐다.
그 이전에 사망한 광수사람들은 부나비처럼 북한군에 합류했다가 주로 북한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광주시민 사망자는 총 154명, 이 중 33명은 10대 전후의 아이들이었다. 개념 있는 시민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사망자의 80% 이상이 10--20대 하층계급이었다. 154명의 80%인 116명은 총상으로 사망했고, 그 75%인 85명이 북한군이 소지한 카빈총 등에 의해 사망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계엄군 없는 곳에서 사망했다. 아래 5월 21일, 벌어진 작전내용은 북한특수군의 소행이지, 절대로 광주 10-20대 부나비들의 소행일 수 없었다.
북한군은 마치 10.26작전이 성공할 것이라는 예단 하에 1979.10.27. 폭풍5호를 발령했고, 11월초 폭풍작전명령이 특수부대에 떨어졌고, 11월 중순부터 일면 10여명 단위로 잠수함을 이용하고, 다른 일면 태백산-문경-지리산맥 경로를 타고 침투하여, 5.18 수개월 전부터 광주일원과 전남일원 숙박시설을 선점한 후 현지정찰을 기초로 시가전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전남 일정지역(목포)의 해안경비를 무력화시켜 대형선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한 후 북한의 로열패밀리 8명을 비롯한 남녀 노인들과 어린이들까지 잠입-퇴진 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18(일): 북한특수군 주도의 게릴라전 시작
북한특수군 250명이 7공수 제35대대(350명) 집결지인 전남대로 몰려가 돌멩이를 던져 공수대원 7명에 유혈 부상을 입혔다. 그리고 재빠르게 달아나 금남로 충장로 파출소들과 차량에 불을 놓아 연기를 냈다. 연기를 본 시민들이 모여들자 준비된 유언비어들을 살포했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사람 70% 죽이러 왔다”. “여자 젖가슴을 도려냈다”, “벌써 수십 명 죽었다” 등 지역감정 자극하는 유언비어였다. 한쪽으로는 계엄군을 화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을 증오하도록 만든 것이다. 계엄군과 광주시민이 서로 싸우도록 만든 절묘한 계략이었다. 오후 5시부터 공수부대는 많은 시민들을 곤봉으로 진압-체포하여 31시단 헌병대로 보냈다. 곤봉으로 시민을 진압한 날은 5월 18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5월 19일: 북한군 지그재그 차량돌진 공격
4명 1개조 단위로 길목들을 지키고 있던 공수대원들은 5월 19일부터 중과부적으로 인해 매타작을 당했고, 그래서 300명 수준의 대대단위로 집결했다. 그러자 시위대는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계엄군의 목과 눈에 낫과 가위를 갖다 대면서 위협하고 조롱했다. 이는 잠시 동안이었고, 게릴라들은 광주 운전수들을 붙잡아 마약을 먹이고 협박해, 집결해있는 공수부대를 향해 대형차량 및 버스를 지그재그로 돌진케 했다. 공수대원들은 “차온다”는 소리에 노이로제 병에 걸려 있었다.
5월 20일: 계엄군 몰살당할 위기
폭도는 2개 방송국과 세무서를 불태웠다. 연기와 불길을 본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시위규모가 늘어났다. 제3공수 여단 5개 대대는 광주신역에 집결, 제7 및 11공수 5개 대대는 도청에 집결해 있었지만 이들은 진압은커녕 10만여 군중에 완전 포위되어 섬멸될 위기에 몰렸다.
5월 21일: 북한군에 의한 세계 최정상급 특공작전
북한군 600명, 이동 중인 제20사단 차량부대를 습격하여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 지프차를 탈취하여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장갑차 4대. 군용트럭 374대를 일거에 탈취해 전남 17개 시-군에 소재한 44개 무기고로 직행하여 4시간 만에 5,403정 총기를 탈취했고. 8톤 TNT를 노획하여 도청지하실에 2,100발의 폭탄을 조립했다. 오후 5시, 공수부대는 섬멸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철수 도중 북한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광주시민들이 총기 받기를 꺼려하고 싸우기를 거부하자 폭동의 주력을 확보하기 위해 광주교도소를 6차례 공격하다가 430명 이상이 사실됐다. 이 430명이 바로 청주에 가매장됐던 북한유골들로 추정된다.430구 청주유골과 10%가산점에 대해서는 그동안 아마도 각 100만장 이상의 전단지가 배포돼 있을 것이다.
5월 22~24일: 북한군 전남도청에 시민군 본부 운영
5월 22일, 광주유지들이 넥타이 매고 도청에 들어갔다. 시민군 본부로 알려진 북한군의 통제 받으면서 정해진 방에서 시국수습 방안을 놓고 갑론을박하다가 북한군 통제에 따라 5시에 칼 퇴근을 했다. 23일, 북한 정치공작단은 도청을 배경으로 모략용 사진들을 대량으로 촬영했다. 이 현장 사진들을 분석한 결과 561의 북한 엘리트들이 발견될 수 있었다. 교도소를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전투병력 대부분을 잃은 북한은 24일 모두 사라졌다. 아마 목포에 설치한 안전한 교두보를 통해 큰 배들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을 것이다.
5월 25일: 광주의 부나비들 구경 차 도청에 모여들어
개념 없는 10~20대 품팔이들이 한 사람씩 호기심으로 도청에 모여 들어 200명 정도의 군중을 형성했다. 대학생은 강경파 김중배와 온건파 김창길 뿐이었다. 이들은 서로 말싸움 하다가 25일 밤늦게 강경파가 온간파를 몰아내고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기동타격대장은 19세 구두공 윤석루, 그를 포함한 강경파 몇 명이 결사항전을 선언 했기 때문에 계엄군이 재-진입작전에 나선 것이다.
5월 26일: 10-20대 막노동자들의 1일 천하
26일은 80여명에 불과한 10~20대 아이들의 1일 천하였다. 일부는 강도. 강간 등 범죄 행위를 저질렀고 시민들은 불안에 떨면서 계엄 당국에 빨리 진압해 주기를 호소했다.
5월 27일: 계엄군 진압작전 성공, 광주폭도 17명 사살돼
새벽 1~4시 30명 단위 족집게 특공 4개조가 도청, 전일빌딩, YWCA, 광주공원을 점령함으로써 폭동은 모두 진압됐다. 전일빌딩에 나 있다는 탄환흔적은 공수특공조 30명과 기관총으로 부장된 45명의 폭도 사이에 벌어진 교전자국이다. 폭도는 기관총까지 난사하며 격렬하게 저항하다 2명이 사실됐다.
2017.9.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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